일본의 전쟁범죄와 한국의 고통
1. 일제의 팽창야욕은 끝없이 확장되었다. 동남아시아로까지 이어진 침략 전쟁은 결국 미국 내 일본인 재산 동결,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와 같은 미국의 제제에 직면하게 된다. 일본에서도 파시즘적 전쟁에 대한 우려 여론이 등장하자 이것을 뒤엎는 군부의 강경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어 버린다. 1941.12월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전쟁 초기 일본은 압도적인 군사적 승리를 쟁취한다. 이 과정에서 싱가폴을 비롯한 동남 아시아 많은 지역을 점령하게 된다.
2. 일본의 군부 세력은 자신들의 침략 전쟁을 미화하였다. ‘대동아 전쟁’이라고 부르며 서양에 대한 동양의 저항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아시아의 협력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서양에 대한 공격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잔혹하고 끔찍한 일본의 행위를 보게 되자 더 큰 재앙에 직면했음을 알게 된다. 일본의 허위적인 전쟁관은 1943년 ‘대동아 공동선언’에서 살펴볼 수 있다. “미국과 영국은 자국의 번녕을 위해 타민족을 억압하고 대동아에 대해서는 침략, 착취를 자행하여 대동아를 예속화하고 안정을 해치려고 했다. 이것이 대동아 전쟁의 원인이다. (....) 대동아를 미국과 영국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공존공영, 자주독립, 인종적 차별이 없는 공영권을 건설함으로써 세계 평화의 확립에 이바지하고자 한다.”
3. 일본의 승전보는 1942,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종결된다. 이 이후의 전쟁은 미국의 반격이었고 계속되는 일본의 후퇴였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은 광기의 전쟁기계와 인간성을 상실한 악마적 소행을 자행했다. 포로들에게 물을 주지 않아 몇 만의 사람들을 죽게 하였는가 하면, 포로들을 통제한다는 명분으로 잔혹하게 목을 잘라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렇지만 광기의 행동이 전쟁의 승리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곳곳의 전투에서 일본은 패배하였다. 전투에서의 패배는 포로가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그들은 포로가 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고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면 모두가 ‘교쿠사이’라 불리는 옥쇄, 즉 집단적 자결을 선택했다. 이러한 일본인의 독기는 서양인들을 당혹하게 했다. 일본의 광기는 전쟁 말기로 가자 더욱 극심해졌다.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전함을 향해 돌격하는 일명 ‘가미카제’ 공격을 실행하였던 것이다. 처음에 이런 공격은 미국에게 위협을 주었지만 곧바로 방어책이 개발되었고 이후 큰 효과를 볼 수 없었다. 다만 수많은 가미카제 조종사들의 죽음만이 늘어날 뿐이었다.
4. 전쟁 중 벌어진 끔찍한 사건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일본의 패망 직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벌어졌다. 1945,4월부터 약 두 달간 벌어진 미국의 오키나와 침공은 일본의 격렬한 저항 때문에 많은 피해를 낳고 종결되었다. 미군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지만 미군보다 압도적인 수의 일본군이 사망하였다. 하지만 ‘오카나와’ 전투의 최대의 비극은 미군과 일본군의 전투가 아닌 민간인에게서 발생하였다. 전투의 패배가 결정되자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집단자결을 강요했고 그 결과 수많은 주민들이 자결하였던 것이다. 생존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군인들이 나눠준 수류탄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주민들은 가족끼리 서로를 향해 돌과 막대를 가지고 폭력을 감행하면서 죽어갔던 것이다. 남은 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이 끔찍한 광경은 과거 로마 침략 때 유대인들이 벌였던 ‘마사다 언덕’의 집단자결을 떠오르게 하는 비극적인 장면이었다. 그것은 “오키나와인들에게 ‘천황제’와 ‘집단자결’이라는 허구적 이데올로기로 죽음을 강요”한 국가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5. 일본의 광기적 전쟁야욕은 결국 한국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30년대부터 행해졌던 물품 착취와 징용은 40년대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더욱 폭력적인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강요되었던 것이다. 내선일체라는 정책적 목표 속에 창씨개명이 실시되었고, 물자와 노동력이 착취되었다. 조선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쌀을 공출하면서 신문을 통해 “음식은 하루에 한 번씩만 섭취할 필요가 있다. 자주 먹는 것은 건강에 해롭기 때문이다.”와 같은 허위 정보를 발포하면서 한국인을 기만하였다. 쌀 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모든 금속을 ‘금속류 회수령’을 통해 강제로 끌어 모았다. ‘강제징용’이 실시되었고 곳곳의 전쟁터와 군사물자 생산지로 한국인들은 동원되었다. ‘징병제’에 대해 소극적이던 정책은 전쟁말기 ‘강제징병’ 및 ‘학도병’ 징병을 통해 확대되었다. 하지만 한국의 친일 지식인들은 이러한 죽음을 강요하는 징병제에 대해 감사와 찬사를 남발하였다. 윤치호는 “조선인을 위한 중대한 결정이다. 우리들은 제국 정부가 영광스런 일본 해군의 자랑스런 대열에 조선 젊은이의 참가를 허가해 준 것을 감사해야만 한다.”고 발언하였다.
6. 일제의 한국인들 동원은 남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여성들에게도 강제적인 노동이 강요되었다. 여성들은 남성 못지않게 아니 남성보다도 더 큰 고통에 직면해야만 했다. 1944년 ‘여자정신대 근무령’이 실시되었고 젊은 여성들을 징발하여 노동현장에 동원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정신대’의 핵심은 일본군 위안부 즉 ‘성노예’로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군은 군인들의 성적인 문제가 커지자 위안부 설치를 확대하였고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한국과 중국 등에서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였던 것이다. 약 20만 이상의 한국 여성들이 위안부로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 위안부는 여성을 성노리개로 활용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자존감을 무너뜨린 운영방식을 통해 인간 존엄에 대한 커다란 문제를 발생시켰다. 일본군은 손님의 수에 따라 위안부의 등급을 나누는 방식으로 위안부를 경쟁시켰고 위안부의 인권을 파괴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위안부 연구자의 말처럼 “일본이 우리에게 행한 잘못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이같은 민족간의 분열, 질시를 만든 것이고 자존심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7. 일본은 세계 어떤 나라보다도 더 잔인하고 악랄한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하였고 적군에게 피해를 입혔으며 전쟁포로에 대한 최소한의 대우도 방기한 채 인간성을 말살하였다. 또한 ‘천황’과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은 종교적 광기 그 이상이었다. 전쟁이 끝난 1972년과 1974년 괌과 필리핀 정글에서 숨어있던 일본군을 발견하는데, 그들은 여전히 국가에 대한 강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 이런 무모할 정도의 국가에 대한 충성과 거기에 동반되는 광기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일본의 이러한 특징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과제가 되기도 했다. ‘노예근성론’이나 ‘극단주의’로 해석한 학자들도 있는 반면,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학자인 마루야마 마사오는 이것을 ‘억압이양의 원리’로 분석하였다. “군대생활에서 압박을 이양해야 할 곳을 갖지 못한 대중들이 일단 우월적 지위에 서게 될 때, 자신에게 가해지고 있던 모든 중압으로부터 일거에 해방되려고 하는 폭발적인 충동에 쫓기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의 만행은 그런 난무의 슬픈 기념비가 아니었을까?”
8. 일본의 전쟁범죄는 흔히 ‘나치의 전쟁범죄’와 비교된다. 그들의 행위는 누가 더 악랄한 것인가에 대한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똑같이 참혹한 행위로 점철되었다. 하지만 나치는 유대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라는 이유로 더 주목되었고 상대적으로 일본의 범죄는 축소되었다. 더구나 ‘731부대 생체실험’과 같은 인간임을 포기한 행위에 대해서조차 면죄부가 주어졌던 것이다. 독일의 전쟁관계자 대부분이 처형되거나 책임을 졌지만, 일본의 경우에는 전쟁 책임자들이 전쟁 이후 여전히 관계, 재개, 의학계에서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고 권력을 유지계승하였다. 일본의 범죄행위는 일본에 떨어진 ‘원폭’의 피해자라는 또다른 프레임을 통해 축소되었고 은폐되었던 것이다. 이런 전후 처리의 혼돈과 불명확성 때문에 일본의 군국주의적 감성은 그대로 존속되었다. 현재 일본의 우익 바람은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냉정한 반성이 결여된 결과에서 파생한다. 우리는 항상 사건이 끝나면 사건의 고통과 희생자를 잊는다. ‘고통’의 크기와 ‘희생자’의 아픔을 제대로 측정하고 그것에 대해 정의를 회복하지 않는 한, 비극은 반복될 것이며 악을 실행하는 인간들은 자신들을 정당화할 것이다.
첫댓글 - 전쟁의 광기가 가능한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