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야구가 있어야 한국야구가 있다’. 프로야구 10구단 시대를 맞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구호다. 침체된 고교야구를 이대로 방치해서는 야구 열기를 이어가기 어렵다는 자성도 나온다. 사실이다. 프로야구가 고속 성장을 거듭한 지난 수십년 간, 고교야구는 천덕꾸러기 버려진 아이 취급을 면치 못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화려한 프로 무대에 집중됐고, 고교 경기는 학부모들만 남은 텅 빈 관중석에서 조용하게 진행됐다. 국제대회와 신인 드래프트 때를 제외하고는 화제에 오르는 일도 드물다. 모교 야구부에 감독과 코치가 누구인지, 어떤 선수가 뛰고 있는지도 어지간한 열정이 없이는 파악하기 힘든 실정이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대구지역 야구의 신흥 강호, 대구고 야구부를 소개한다.
대구고등학교는 오랫동안 대구·경북 야구의 ‘넘버 3’였다. 전통의 명문 경북고와 상원고(대구상고)의 틈에서 좀처럼 기를 펴지 못했다. 일단 양키스와 레드삭스에 비해 훨씬 늦게 후발 주자로 창단했다. 경북고가 1920년에, 상원고가 1924년에 창단해 100년을 바라보는 반면 1958년에 개교한 대구고는 1976년이 되어서야 야구부가 생겼다.
공교롭게도 대구고 야구부가 생긴 1970년대는, 경북고와 상원고 야구의 최고 전성기와 겹쳤다. 통산 20차례 전국대회 우승을 거머쥔 경북고는 1971년 4개 대회 우승으로 시작해 1972년 대통령배 3연패, 1974~75년에는 2개 대회 우승을 차지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상원고 역시 1973년 3개 대회 석권, 1974년 봉황대기 3연패 등으로 정상을 달렸다. “그 당시 대구에서 야구 좀 한다는 친구들은 경고 아니면 상고를 가지, 새로 생긴 학교에는 가려고 안 했습니다.” 대구고 출신 야구인의 얘기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창단 초기 지역 유망주들을 적극적으로 스카우트한 대구고는 1979년 창단 4년만에 봉황대기 4강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둔다. 보통 신생 야구부가 3~4년 내에 전국대회 상위에 들면 상당한 성공으로 친다. 대구고는 내친김에 1981년 강기웅(삼성 코치)을 앞세워 대통령배 4강에 들었고, 1983년에는 창단 처음으로 황금사자기 결승까지 진출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메이저대회는 아니지만 대붕기 대회에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3년 연속 우승하며 처음으로 정상에 서는 기쁨도 맛봤다.
하지만 대구고의 돌풍은 거기까지. 이후로는 전국대회 1회전 탈락은 일상이고, 지역 예선에서도 번번이 떨어지는 암흑기가 찾아왔다. 한번 찾아온 암흑기는 불경기처럼 길고 지독했다. 한번 패배에 길들여진 선수들은 야구가 얼마나 재미있는 운동인지를 잊어버렸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구타와 기합이 야구부의 그릇된 문화로 뿌리내렸다. 대구고에 가면 맞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야구 유망주들은 대구고 진학을 더욱 기피했고, 일단 진학한 선수 중에도 구타와 체벌을 못 이겨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나왔다. 악순환이었다.
대구고 야구부의 전성시대
끝 모를 침체의 늪에 빠져있던 대구고 야구부가 변화의 날갯짓을 시작한 건 1999년. 롯데와 삼성에서 선수로 활약한 박태호 감독(현 영남대)이 새로 부임하면서다. 현재 사령탑인 권영진 감독도 쌍방울과 롯데에서 선수로 뛰다 은퇴한 뒤, 모교 야구부 살리기를 위해 투수코치로 합류했다. “그때부터 학교와 동창회에서 야구부를 의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당시 여러 여건으로 명문대학교 진학률이 낮아졌을 때인데, 학교 동문들 차원에서 ‘이대로는 대구고가 침체를 면하기 어렵다. 야구부를 적극 지원해서 야구부가 대내외적으로 학교 이름을 알리게 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받았다.” 권영진 감독의 얘기다. 실제 대구고는 1999년 12월에 낙후된 야구부 합숙소를 개축하고 2000년에는 실내 야구연습장을 준공하며 활발하게 진루타를 날려 보냈다.
교내외의 지원에 힘입어 대구고는 조금씩 과거의 그늘을 벗고 짜임새있는 전력을 구축했다. 특히 대구고의 성공을 이끈 가장 큰 힘은 막강한 마운드. 입학 당시만 해도 유격수였던 손승락(2000년 당시 3학년)과 윤길현(2학년)을 투수로 전향시킨 결정이 ‘신의 한 수’로 작용했다. 권 감독은 “당시 대구고에 고만고만한 언더핸드 투수 외에는 내세울 만한 투수가 없었다”고 했다. “우선 날카로운 슬라이더를 던지는 윤길현을 투수로 돌렸다. 여기에 만일을 대비해서 어깨가 좋은 손승락도 꾸준히 피칭 연습을 시켜뒀다. 승낙이에게는 ‘투구폼이고 뭐고 아무 말 안할테니 매일 30개 씩만 던져봐라’고 주문했다.” 권영진 감독의 말이다.
투수력 보강의 성과는 금세 나타났다. 지역 라이벌 경북고와의 경기. 선발로 나선 윤길현이 그날따라 흔들리며 1회부터 무사만루 위기를 맞았다. 윤길현이 자꾸 벤치를 쳐다보는 점이 마음에 걸린 권 감독(당시 투수코치)은 박태호 감독에게 손승락을 투입해볼 것을 권했고, 박 감독이 승낙하며 손승락과 윤길현이 포지션을 맞바꿨다. 여기서 경북고의 선택은 허를 찌르는 스퀴즈. 그러나 놀랍게도 마운드의 손승락은 번트 타구를 재빠르게 노바운드로 잡아낸 뒤, 3루로 송구해 2아웃을 잡아냈다. 내야수 출신 투수의 강점이 발휘된 순간이다. 이어 직구 3개로 삼진을 잡아내며 이닝 종료. 결국 그날 경기는 대구고가 승리했다.
그해 손승락은 투수와 유격수를 겸하며 15경기 40.1이닝 동안 3승 1패 평균자책 2.48을 기록했다. 윤길현은 무려 22경기에 나서 11승 3패에 평균자책 2.97로 에이스 역할을 했다. 특히 대구고가 우승을 차지한 제81회 전국체전에서는 4경기에 등판해 4승 무패 평균자책 1.13으로 완벽에 가까운 호투를 펼쳤다. 마운드의 원투펀치를 앞세운 대구고는 ‘확’ 달라진 경기력을 선보이며 경북고와 대구상고 등 강호들을 잇달아 잡아내고, 전국체전 우승까지 따내는 파란을 일으켰다. ‘대구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던 이들이 대구고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전국체전 우승은 시작에 불과했다. 박석민(삼성)과 이명환(NC)이 활약한 2003년, 대통령배 결승까지 치고 올라간 대구고는 경주고를 꺾고 창단 첫 메이저대회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2005년 청룡기에서는 동산고 괴물에 막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2008년 다시 정인욱(현 상무), 이재학(NC)의 높은 마운드를 앞세워 청룡기 패권을 잡았다. 여기에 봉황대기 우승까지 거머쥐며 사상 첫 2관왕도 달성했다. 2010년에는 2학년 좌완 박종윤(넥센)의 투타 맹활약에 힘입어 두 번째 봉황대기 우승을 차지했다.
권영진 감독은 “박 감독님과 대구고에 온 뒤 전국대회만 4차례 우승, 지방대회까지 하면 도합 7번의 우승을 경험했다”고 했다. 우승뿐만 아니라 매년 꾸준히 2~3명의 프로 선수를 배출하며 프로야구의 화수분 역할도 하고 있다. 이범호, 박석민, 윤길현, 손승락, 이재학 등 대구고 출신 선수들은 프로 구단에서 스타 플레이어로 활약하는 중이다. 2011년에도 박종윤, 구자욱(삼성), 전호영, 김호은(연세대 진학) 등이 대거 프로 구단의 지명을 받았다. 늘 고교야구의 변방에 있던 대구고는 어느덧 경북고, 상원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구 야구의 신흥 강팀으로 자리를 잡았다.
제 2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승승장구하던 대구고 야구부는 지난해 잠시 숨을 고르는 기간을 가졌다. 2011년 주전으로 활약한 3학년 멤버들(박종윤, 방형철, 구자욱, 전호영, 문순찬, 김호은)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팀 전력에 공백이 생겼다. 여기에 오랜 기간 팀을 이끈 박태호 감독도 영남대 사령탑으로 자리를 옮겼다. 투수코치에서 감독을 맡게 된 권영진 감독으로서는,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면서 팀 전력까지 끌어올려야 하는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다. 결국 지난해 대구고는 전기 주말리그에서 2승 4패로 경상권 B조 5위에 그쳐 왕중왕전 진출에 실패했다.
사령탑이 바뀐 대구고가 전반기에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자, 야구계 일각에선 “대구고가 다시 강팀으로 올라서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신임 권 감독은 예상보다 빠르게 팀을 추슬렀다. 광역권 팀들과 벌인 후기 주말리그에서 대구고는 4승 3패로 선전하며 경상 B조 3위에 올랐고, 청룡기 고교야구대회 겸 왕중왕전에도 진출했다. 또한 토너먼트 형태로 펼쳐진 대통령배 대회에서도 3회전까지 오르는 등 비교적 선전했다.
대구고가 선전을 펼친 비결은 역시 투수력이었다. 전국체전 중학야구 MVP 출신인 2학년 서동민이 후기 주말리그에서 12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했고, 여기에 3학년 좌완 채형수도 13이닝 평균자책 3.46으로 든든하게 뒤를 받쳤다. 또 2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한 안방마님 권시훈(한화 입단)이 공수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구심점 역할을 해냈다. 방망이보다는 투수력과 수비력을 중시하는 대구고 특유의 팀 컬러는 여전했다.
외부에서 볼 때 대구고는 ‘투수를 잘 길러내는 학교’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실제로 자질있는 중학 투수 중에 대구고 진학을 선택하는 예가 적지 않다. 대구 지역 세 학교가 벌이는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에서 대구고가 경쟁력을 갖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권 감독은 “정인욱의 활약 덕분인 것 같다”며 웃었다. “처음 인욱이가 대구고에 입학할 때만 해도 주목받는 선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입학한 뒤 무럭무럭 자라더니 2008년에 팀이 2관왕 할 때는 두 번 모두 MVP를 수상하는 투수로 성장했다.” 권 감독은 지금도 투수를 키워내는 데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지난해 한국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 투수코치로 발탁된 것도 투수 육성 능력을 인정받은 덕분이다. “정상급 야수는 진짜 재능이 타고난 선수가 아니면 키워내기 어렵다. 야수 하나 만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하지만 피처는 길러낼 수 있다. 뒤에서 나오는 팔 스윙만 괜찮으면, 계속 던지고 경험 쌓다 보면 좋은 투수로 성장한다고 본다.” 권 감독의 말이다.
권영진 감독은 투수들이 대구고를 찾는 또 다른 이유로 ‘회비 부담이 덜하다’는 점을 들었다. “학교에서 야구부 학부형들의 부담을 많이 덜어줬다. 한달에 100만원 가까이 들어갈 돈을 우리는 그 절반 정도만 내면 된다. 장거리 원정을 갈 때도 먹고 자는 비용을 학교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중학교 학부형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대개 학부형들이 교대로 담당하는 야구부 식사도 대구고는 학교 급식으로 해결한다. 야구선수 자녀를 키우기 위해 등이 휘고 허리가 굴절되는 국내 현실에서, 학부형 부담을 최대한 덜기 위한 대구고의 지원은 높게 평가할 대목이다.
권영진 감독의 급여도 학부모들이 아닌 학교에서 나온다. 계약도 학교와 직접 한다. 학부모들의 주머니에서 월급을 받는 상당수의 지도자들과는 차이가 크다. 권 감독이 학부모들의 입김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가운데 소신껏 지도 철학을 펼 수 있는 비결이다. “아직 대구고가 경북고나 상원고처럼 전력에 여유가 있는 편이 아니다. 그래서 3학년이라고 무조건 경기에 내보내는 식의 운영을 하기는 어렵다.” 권 감독의 생각이다. “물론 비슷한 실력이면 3학년에 우선권을 준다. 연습할 때도 3학년에게 더 신경을 쓰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편이다. 하지만 경기에서는 실력 위주로 기용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 뿐만이 아니라 전임 박 감독님 때부터 지켜온 원칙이다.”
권영진 감독은 고교야구계에서 온화하면서도 꼼꼼한 면모를 지닌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질책보다는 칭찬을,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로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한다. “실수를 하고 싶어서 하는 선수는 없다. 실책이나 실수에 대해서는 질책하지 않는다. 대신 정말로 야구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실수, ‘살아있지 않은 생각’ 속에 나오는 실수에 대해서는 따끔하게 지적한다.” 한때 대구고에 뿌리내렸던 폭력과 기합 문화는 2000년 이후 자취를 감췄다. 대신 감독과 코치들이 일주일에 한 차례 이상 선수들과 면담을 하고, 학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또 야구선수답지 않은 행동과 몸가짐에 대해서도 분명한 원칙을 세웠다. “교칙으로 금지된 일은 절대 하지 않기로 모든 선수와 학부모들의 약속을 받는다. 그런 기본적인 원칙을 지키지 않는 선수와는 함께 야구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번 원칙이 깨지면 팀 전체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대신 학생 선수로서 기본을 갖추고 야구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는 선수라면, 운동장에서 밤을 새워서라도 같이 훈련하고 열과 성을 다해 야구를 가르쳐줄 생각이다.”
권 감독은 대구고 야구의 팀컬러로 투수력이나 수비력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조직력’을 언급했다. 이는 야구장에서 더블플레이를 완성하고 콜 플레이를 할 때 말하는 조직력이 아니다. 그보다는 감독과 코치, 선수가 각자의 위치에서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며 서로 협력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야구장에서만 펄펄 뛴다고 해서 야구가 잘 되는 건 아닙니다. 야구부라는 조직을 지탱하는 토대가 부실하면, 당장은 성적이 좋아도 언젠가는 무너지게 되니까요.” 권 감독의 얘기다. 야구부 구성원이 각자 역할에 충실하고 서로에 대해 굳건한 신뢰를 갖게 되면, 훈련이나 야구 경기에서도 자연히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탄탄한 조직력의 힘일까. 올 시즌 고교 무대에서 대구고는 예상을 뛰어넘는 성공을 구가하는 중이다. 당초 주말리그 개막 전만 해도 대구고의 전망은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전문가들은 “경상권 B조는 경북고와 상원고가 2강을 이루고 대구고는 중위권에 머물 것”으로 평가했다. 권영진 감독도 “당장 올해는 상위권 진입은 힘들겠지만, 2014년부터는 전국 상위권도 가능하다”며 올해 이후를 기대하는 자세를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