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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강의 : <기도(祈禱)에 관하여>
2023-06-08. (목요일)
1. ‘견진성사를 받기 위한 교리’라고 정한 이 시간에 여러분이 와서 듣는 일이 힘드시죠?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데, 한편으로는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해도 아무런 소리를 말하지 못할 신앙에서, 앞에 나선 사람이 하는 소리가 세상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내용을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앙에 관한 것을 왜 나에게 해서 억지로 강요할까 하고 말씀하실 분이 있으실까요? 이 시간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세상의 일을 먹고 사는 일과 연결하여 중요하다고 말하는 일과 같이, 저도 이 시간에 제가 하는 이 일이 중요한 것이고, 또 중요한 것이고,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 제가 말하는 내용이 들을 만하십니까? 물론 상황을 다르게 생각하여 듣고 싶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일을 대신할 사람이 지금 이 자리에는 없기에, 맘에 들지는 않는다고 해도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묻는 소리가 그렇다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논리에 맞춰서 말하고 행동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그 중요성을 똑같이 받아들이지 않거나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안타깝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저와 같은 위치에 있으면, 신앙에 관한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이 순간에 그 상상을 말할 수는 없으니, 처지를 바꿔서 생각하면 이런 질문은 별로 영양가가 없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하지 않은 얘기로 하고, 접겠습니다.
3.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판단한다는 전제에서 좋다고 할 일’입니다. 사람이 저마다 자기의 생각이 옳다고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상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올해 초에 어느 회사의 홈페이지에 떠돌기 시작한 내용이라고 소개된 글을 봤습니다. 어느 커다란 회사에 새로 들어온 신입사원이 <열대어가 자랄 물은 따뜻한 곳이어야 한다는 아주 기특한(!) 생각을 했답니다. 그 신입사원 친구가 커피포트로 물을 끓여서, 열대가 살던 어항에 부었답니다. 열대어는 따뜻한 물이 필요할 거라는 아주 기특한 생각으로 한 행동이겠지요? 그러자 그 어항에 살던 10마리의 열대어에서, 5마리의 열대어는 뜨거운 물에 맞아 죽었고, 나머지 5마리도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모두 죽었답니다. 당연히 누군가가 무어라고 했겠지요? 그러자, ‘나는 열대어가 더운물을 좋아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 열대어를 돕겠다는 생각으로 그런 것이라고 말하더랍니다. 물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그 신입사원은 사람들의 눈총으로 그 회사를 관두었다고 했지만........> **** 지난 3월부터 어떤 사이트에서 회자됐다는 얘기!!
4. 사람이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는 일은,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여기기에 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생각하기를, 자기만 옳다고 여긴다면, 다른 사람은 판단이 달라도 무시하고 내 맘대로 해도 괜찮을까요?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거나 대하는 기준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질 일입니다.
5. 한 주일에 한 번씩 성당에 오고, 미사에 참여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데, 내가 신앙인으로 산다고는 했지만,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 뭘 그렇게 오라는 일이 많은지, 내 사정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교회라는 공동체를 보면 ‘신경질이 나서 죽겠어!’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너는 그렇지 않아.......하면서 내 주변의 다른 사람을 향해서 내 생각이 옳다고 말할 사람은 이 자리에 없을까요? 혹시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런 분에게 제가 아주 쉽고도 편하게 살 방법(?)을 알려드린다면 들으실까? *** 혹시 이 자리에 그 방법을 알고 싶은 분이 있을까요? *** ‘이것을 해도 힘들고, 저것을 하라고 해도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할 세상에서 무엇을 하려고 오래 살겠다고 하겠습니까? 무엇을 하려고 힘들다고 말하면서, 자연적으로 죽을 때까지 살려고 하겠습니까?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 당장 무덤으로 쓸 곳을 파고 그 안에 들어가서 편하게 누우면 되는 일인데’ 말입니다. 어때요? 지금 당장 그렇게 가장 편한 방법이겠지요? 그런데 이 자리에는 제가 말하는 대로 행동할 사람이 있을까요?
6. 견진성사를 위한 교리를 한다면서, 말도 되지 않는 얘기(?)로 이 시간을 시작했습니다만, 많은 사람이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겠지만, 가진 생각은 이런 일과 별로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견진성사를 받는다는 것은 좋은지 모르지만, 교리에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 것도 부담스럽고, 내가 전혀 모르거나 새로운 소리를 듣는 것도 아닌데 마치도 그런 것처럼 말을 하고, 내 몸의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나는 별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신앙에 관한 얘기인데 해도 참 너무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습니다.
7. 사람이 세상에서 만나는 어떤 일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만, 내가 내 삶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내 삶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진 자세로 대하고 사랑으로 나를 대하겠습니까? 내가 신앙의 대상으로 선택했거나, 나를 선택하신 하느님에 관해서 내가 배우지 않거나 그에 대한 배움의 시간을 지금이 아니라 뒤로 미룬다면, 그 시간이 언제까지 나를 위해서 기다리고 참겠다고 하겠습니까? 그 대답을 줄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문제나 답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게 친절하지 않기 때문이고, 스스로 자기의 삶에 대해서 올바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세상은 올바르게 응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이라는 딱딱한 이야기를 제가 말하면서, 신앙생활이 이렇게 힘들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신중함에서 이루어진다’는 변명할 것입니다. 힘들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렵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다르게 말하면, 신앙의 길과 일이 이렇게 힘들어서 싫다고 한다면, 그러면 세상의 일은 얼마나 쉽습니까? 하는 소리로 되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배우고, 그 뜻을 실천할 방법을 배우는 ‘기도’에 관한 말씀을 드릴 시간입니다.
8. 기도란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 개념>
가장 먼저 시작할 설명은 ‘기도’라는 ‘낱말의 뜻’입니다. 우리는 신앙모임에서 기도(祈禱)라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오늘도 시작기도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뜻이 무엇입니까?’하고 묻는다면 ‘아..... 뭐 그런 거 있죠...라든가, 그걸 몰라서 제게 묻는 것인가요? 아직도 몰라요 그 쉬운 것을...? 하든지 아니 나보다 더 잘 알면서 왜 나에게 물어요? 창피하게 시리.... 내가 틀리는 대답을 하기를 바라십니까’하는 정도로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질문에 관하여 정확하게 대답해야 하지만, 그 대답을 잘하는 일 대신에 내가 말할 본질을 비키려고 애쓰기도 하는 것이 사람이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기도의 뜻을 정확하게 알 수도 있지만 입에서만 맴도는 말을 표현하지 못해서 우물거리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이 여러분에게 물으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그 대답하겠습니까?***** 답을 듣는다 *****
9. 1517년, 마르틴루터의 종교분열 이후, 열렸던 트리덴티노 공의회에서 정리한 신앙의 신조인 교리서<트린덴티노 공의회의 천주교 요리문답(=320조목)>에는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들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우리 안에 마음이라는 대상이 우리 몸의 어느 곳에 따로 자리를 잡고 있어서, 내가 그 대상을 들거나 내려놓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마음을 들어 올린다’고 했으니, 하느님이 계시는 곳도 우리가 사는 땅과는 차원이 다른 곳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그 마음을 들어올릴 수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10. 마음을 들어올린다는 표현은 현실의 감정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으니, 좀 더 다른 표현으로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들어올린다는 표현을 설명했던 ‘기도’라는 낱말을 요즘에는 ‘인간과 하느님의 대화’라고 다른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대화(對話)란 ‘보이는 상대끼리 오고 가는, 말이나 눈빛을 통하여 내가 갖거나 드러내고 싶은 뜻을 전달하고 다른 대상의 뜻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을 가졌지만, 그 생활에서 자신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개신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개신교 사람들은 기도를 잘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마치 기도를 못하는 일이 ‘자랑이라도 되는 듯’이 스스로 ‘기도를 못 한다(!)’고 인정하기도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 참 문제이지요?
11. 기도란 ‘말로 된 폭탄을 터트리는 일’처럼, 하느님을 향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붓는 것은 아닙니다. 말을 한꺼번에 쏟아부으면 그 내용이 전달되지 않습니다. 물론 내가 말을 많이 해서 하느님이 그 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하려는 일은 아닙니다. 말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일은 기도가 아니라, 인간의 한풀이이고 푸념입니다. 인간의 한풀이를 가리켜서 올바른 의미의 기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끼리의 이야기나 대화에서도 그럴 것입니다. 이야기하자(!)거나, 대화하자(!)고 하면서, ‘너는 내가 하는 말만 들어야 해(!)’하고 우긴다면, 다른 한쪽의 말은 듣지 않는다거나 그가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는 것일 텐데, 이렇게 하면 올바른 대화가 될까요? 한쪽 편의 소리를 일방적으로 들어야 한다면, 그 사람이 하는 소리가 끝난 다음에 우리는 귀를 씻어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세뇌(洗腦:상대자로 하여금 일종의 정신마비상태에 함입시켜 어떤 사상․주의를 주입하는 일)시키는 일을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하느님을 향하여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는 기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일을 기도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사람이 기도라는 표현을 잘못되게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12. 대화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대화는 그런 방법으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듣고, 내가 가졌다는 좋은(!) 뜻을 다른 사람이 무조건 따라야 한다면, 그가 세상에 사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속된 말로 ‘나의 아바타(Avatar/‘분신’·‘화신(化神)’을 뜻하는 말. 인터넷에서 사용자가 자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존재로 활용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필요한 것일까요? 다른 사람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의 생각은 전혀 없는 허깨비가 필요하다는 뜻일까요?’ 대화는 오고 가는/가고 오는 관계입니다. 내 것을 쏟아부었으면, 그다음에는 상대방의 소리도 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우리가 하려는 말이나 푸념처럼, 시끄럽게 내 삶에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서, 그 소리를 들으려면 주의를 기울이고, 조용하게 머물러야 하는 일이지만, 또한 사람마다 그 기다리시는 시간과 모습이나 모양에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는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입니다.
13. 기도라는 낱말의 뜻을 말씀드렸으니, 두 번째로는 기도의 목적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밥을 먹는 일은 음식에서 힘을 얻어서 우리의 육신이 살게 하자는 것이고, 물을 먹는 것은 우리 몸이 느끼는 갈증을 해소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강조하는 일도 목적이 있는 행동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일에는 저마다 목적이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일들입니다.
14.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기도’라고 말씀드렸으니, 이 기도에는 어떤 목적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신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기도의 목적’을 네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기, /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 하느님께 바라는 것을 말씀드리기의 네 가지입니다. 즉 흠숭, 감사, 용서를 구함, 청원이라고 한자를 써서 간단하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짧게 줄여서 말하는 것이 알아듣기에 좀 더 편할까요?
15. 흠숭(欽공경할흠 崇높을숭)이란,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이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첫 번째이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감사드리는 일은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셔서 지금까지 있게 하심과 나에게 필요한 여러 가지 은혜를 베푸셨음에 대하여 사람이 드러내야 하는 마땅한 표현을 가리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잘못한 일인 <=죄>에 대해 뉘우치며 새로운 다짐을 바치는 일이고, 청원은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여기는 일을 베푸시기를 말씀드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반적으로 네 번째 목적으로 생각하는, 청원만을 잔뜩 늘어놓은 다음에 ‘나는 기도를 다했다’거나 혹은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보면서, 그 사람은 기도를 정말 잘한다......’고 칭찬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시고, 하느님이 정말로 기쁘게 여기실만한 행동을 내가 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왕이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기도하는 일의 목적과 순서를 바꾸어 기억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는 소리와 그 내용을 하느님이 모르신다고 생각해서 큰 소리로 말해야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그 명령을 어떻게 기억하겠습니까? <흠숭/감사/용서/청원>
마태오 6,5-8 : 올바른 기도 5 “너희는 기도할 때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의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6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으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으실 것이다. 7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의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줄로 생각한다. 8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
16. 다음으로 우리가 아는 기도의 종류에 관하여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기도의 종류는 드러나는 모습에 따라, 두 가지로 구별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와 ‘염경기도’입니다. 말이 없는 기도가 묵상기도이고, 우리가 입으로 소리를 내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기도가 염경기도입니다. 이 염경기도는 여러분에게 있을 기도서의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17. 이러한 목적을 말하고 이러한 종류로 설명하는 ‘기도를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가?’ 질문은 어려운 것이지만, 대답은 간단합니다. “열심히 하면 됩니다(!)” “우리의 마음을 들어 (어디에나 계시기는 하느님이시지만) 하느님의 앞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을 실천할 테니, 힘을 달라고 우리의 시간을 바치면 됩니다.” 그것 말고는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건강하게 살려면, 먹을 것을 잘 먹고, 마실 것을 잘 마시고, 뒤로 내보낼 것은 잘 내보내는 일과 같습니다.
18.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모범을 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참조하여 읽습니다.
19. 아브람의 기도: 하느님께서 아브람에게 후손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하시자, 아브람이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한 아브라함의 푸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창세기 15,1-8 : 1.“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 2 그러자 아브람이 아뢰었다 “주 하느님,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는 자식 없이 살아가는 몸, 제 집안의 상속자는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제르가 될 것입니다.” 3 아브람이 다시 아뢰었다. “저를 보십시오. 당신께서 자식을 주지 않으셔서, 제집의 종이 저를 상속하게 되었습니다.” 4 그러자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내렸다. “그가 너를 상속하지 못할 것이다. 네 몸에서 나온 아이가 너를 상속할 것이다.” 5. 그러고는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6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7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낸 이다. 8 아브람이 “주 하느님, 제가 그것을 차지하리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하고 물었다, |
20. 하느님께서 고모라를 멸망시키고자 할 때, 아브라함(<=아브람)에게 먼저 상의하신 일(창세 18,16-33)은 정말로 아름다운 기도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보이는 기도의 모습을 이룰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언감생심(=감히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없음《부사적으로도 씀》)하게도 질문한다면, 우리나 내가 어떤 자세로 살면 하느님과 이야기의 상대자가 되겠습니까? 감히 사람의 처지에서 하느님과 상대자가 되어, 내 생각을 하느님께 말씀드리겠다고 하겠습니까? 사실 이런 일의 주도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좀 더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 내용을 기록하는 창세기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창세기 18,16- :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청원 16 (아브라함과 대화를 마친) 그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17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의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하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
21. 사람이 얼마나 선하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아니 질문을 바꾸어서 사람이 선하게 살고, 하느님의 앞에서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어, 하느님의 뜻을 알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성서학자들이 말하는 소돔과 고모라라는 도시의 크기는 지금부터 2800년 전쯤에 대략 12,000명의 사람이 사는 크기였다는 소리를 했습니다. 현실의 사해(死海)의 크기를 뒤집어서 환산하면 그렇다는 뜻이겠지요? 물론 확실한 것은 저도 모릅니다. 내가 어떤 자세와 어떤 태도로 살면 감히 그러한 축복을 바라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22. 히브리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여, 가나안땅으로 이끌었던 모세가 하느님께 대화하는 기도를 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집트인들에게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의 미래에 관한 계획을 당신이 예언자로 선택한 모세에게 밝히셨지만, 실제로 그 일을 드러나게 이루신 다음, 히브리백성이 엇나가자 다시 그들의 미래를 수정한 계획을 번복하시지만, 그래도 다시 그 모세의 말을 들으신 분이기도 하셨습니다. 먼저 읽을 부분은 탈출기 32장, 십계명을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다음의 일입니다.
탈출기 32,7-14 7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어서 내려가거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8 저들은 내가 명령한 길에서 빨리도 벗어나, 자기들을 위하여 수송아지 상을 부어 만들어 놓고서는,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 하고 말한다.” 9 주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10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그들을 삼키게 하겠다. 그리고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 11 그러자 모세가 주 그의 하느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끄신 다음,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12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려고 이끄시고, 산에서 죽여 땅에 하나도 남지 않게 했구나.’ 하고 말하게 하시렵니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주십시오. 13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에게 주어, 상속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게 하겠다.’ 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주십시오.” 14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
23. 하느님이 엉터리 계획을 세우신 것일까요? 히브리백성들이 어떻게 살 것이라고 하느님께서 미처 모르셨을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밝히기만 하시면, 인간은 잘못된 일을 선택하지 않고 무조건 하느님의 뜻에 순종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을까요? 그렇게 생각해서 하느님은 히브리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고, 이제 이들이 나의 백성이 되었겠구나(!)하고 생각하여, 일을 시작하셨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서 보니,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뜻을 존중하여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었다고 하느님이 새삼스레 깨달으신 것일까요? 하느님도 사람들처럼 모르는 것이 있었다는 뜻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4. 탈출기의 말씀을 들으신 대로, 하느님은 모세의 간곡한 요청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서십니다. 이집트에서 이끄신 히브리인들을 없애지도 않으셨고, 모세의 후손을 일으켜 당신의 약속을 실현하고 축복을 베푼 히브리인들의 무리로 만들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이 헛된 소리를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바꾸겠다는 모세의 간청이 컸던 것일까요? 모세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백성을 실제로 사람들이 느끼게끔 구원한 분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을 반대하고 하느님께 덤볐는데도, 목숨을 잃지 않은 것을 보면 그가 하느님의 뜻에서 많이 벗어나지는 않은 듯합니다.
25. 하느님은 모세를 통하여 히브리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구하셨으니, 그들이 어떻게 살든지 그들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할 책임을 스스로 만드신 것일까요? 백성들의 행동을 보면서 우리는 다른 얘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아무런 벌도 내리지도 못하시는 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내 맘대로 하느님을 대해도 좋다고 할까요?
26. 먹는 일과 관련한 내용입니다. 백성들이 자기들의 지도자에게 반발하자, 하느님께서 백성들에게 하신 일은 화풀이일까요?
민수기 11,1--- 1 백성이 주님의 귀에 거슬리는 불평을 하였다. 주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진노하셨다. 그러자 주님의 불이 그들을 거슬러 타올라 진영 언저리를 삼켰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었다. 그리하여 모세가 주님께 기도하자 불이 꺼졌다. 3 그래서 그곳의 이름을 타브에라라고 하였다. 주님의 불이 그들을 거슬러 타올랐기 때문이다. 4 그들 가운데에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이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 자손들까지 다시 울며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게 해줄까? 5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6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7 만나는 고수 씨앗과 비슷하고 그 빛깔은 브델리움 같았다. 8 백성은 돌아다니며 그것을 거두어서, 맷돌에 갈거나 절구에 빻아 냄비에다 구워 과자를 만들었다. 그 맛은 기름과자 맛과 같았다. 9 밤에 이슬이 진영 위로 내리면, 만나도 함께 내리곤 하였다. 10 모세는 백성이 씨족끼리 저마다 제 천막 어귀에 앉아 우는 소리를 들었다. 주님께서 대단히 진노하셨다. 모세에게도 그것이 언짢았다. 11 그래서 모세가 주님께 여쭈었다. “어찌하여 당신의 이 종을 괴롭히십니까? 어찌하여 제가 당신의 눈 밖에 나서, 이 온 백성을 저에게 짐으로 지우십니까? 12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께서는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유모가 젖먹이를 안고 가듯, 그들을 제 품에 안고 가라고 하십니까? 13 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14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15 저에게 이렇게 하셔야겠다면, 제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눈에 든다면, 제가 이 불행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 16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백성의 원로이며 관리라고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원로들 가운데에서 나를 위해 일흔 명을 불러 모아라. 그들을 데리고 만남의 천막으로 와서 함께 서 있어라. 17 내가 내려가 그곳에서 너와 말하겠다. 그리고 너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내어 그들에게 나누어주겠다. 그러면 그들이 이 백성을 너와 함께 짊어져서, 네가 혼자 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18 너는 또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내일을 위하여 너희 자신을 성결하게 하여라. 너희가 고기를 먹게 될 것이다. 너희는 주님의 귀에다 대고,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에서는 참 좋았는데!′ 하면서 울었다. 이제 주님이 너희에게 고기를 줄 터이니 너희가 먹게 될 것이다. 19 너희가 하루만 먹는 것이 아니다. 이틀도 아니고 닷새도 아니며, 열흘도 아니고 스무날도 아니다. 20 한 달 내내, 너희 콧구멍에서 그것이 나와 구역질이 날 때까지다. 너희 가운데에 있는 주님을 너희가 배척하고, 그 앞에서 ′우리가 어쩌자고 이집트를 떠났던가?′ 하면서 울었기 때문이다.’” 21 그러자 모세가 말하였다. “저를 둘러싼 백성은 걸어서 행진하는 사람만 육십만 명입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그들에게 고기를 주어 한 달 내내 먹게 하겠다.’ 하시지만, 22 양 떼와 소 떼를 다 잡는다 한들 그들에게 넉넉하겠습니까? 바다의 고기를 모조리 모아들인다고 한들 그들에게 넉넉하겠습니까?” 23 주님께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주님의 손이 너무 짧기라도 하단 말이냐? 이제 너는 내 말이 들어맞는지, 맞지 않는지 보게 될 것이다.” |
27. 히브리백성이 징그러워 할 만큼 고기를 먹게 된 것은 축복일까요, 징벌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자세에 따라 다르기는 하겠지만, 하느님께 덤비고, 하느님께 항의해도 사람에게는 탈이 생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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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왕정시대의 인물, 솔로몬이 보인 행동으로 얘기의 시간을 건너뛰겠습니다. 솔로몬이 바친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윗의 아들로 태어난 솔로몬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했습니다. 솔로몬은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버지 다윗이 나은 장자, 즉 첫째 아들로 세상을 맞이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렵사리 우여곡절(迂餘曲折)의 끝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고 나서 하느님께 제물을 많이 바치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삶에 일어난 일을 깨닫고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로 한 행동이었을까요? 아니면, 임금이 된 사람이 할 수 있는 폭력의 모습이었을까요? 그가 어느 날 기브온의 산당에서 천 마리나 되는 번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그날 밤, 솔로몬은 하느님의 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이에 대한 솔로몬의 응답은 한편의 기도입니다.
1열왕기 3, 4-9 : 4 임금은 제사를 드리러 기브온에 갔다. 그곳이 큰 산당이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 제단에서 번제물을 천 마리씩 바치곤 하였다. 5 이 기브온에서 주님께서는 한밤중 꿈에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느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물으셨다. 6 솔로몬이 대답하였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인 제 아버지 다윗에게 큰 자애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당신 앞에서 진실하고 의롭고 올곧은 마음으로 걸었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그에게 그토록 큰 자애를 내리시어, 오늘 이렇게 그의 왕좌에 앉을 아들까지 주셨습니다. 7 그런데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8 당신의 종은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 그 수가 너무 많아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백성의 가운데에 있습니다. 9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 |
29. 하느님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진 모습이 솔로몬의 기도에 나옵니다. 하느님을 먼저 찬미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가 성심을 다하여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라고 청합니다. 여러 가지 표현이 가능하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기도입니다.
1열왕기 3,10~~~ 10 솔로몬이 이렇게 청한 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11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것을 청하였으니, 곧 자기를 위해 장수를 청하지도 않고, 자기를 위해 부를 청하지도 않고, 네 원수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그 대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12 자, 내가 네 말대로 하겠다. 이제 너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준다. 너 같은 사람은 네 앞에도 없었고, 너 같은 사람은 네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을 것이다. 13 또한 나는 네가 청하지 않은 것, 곧 부와 명예도 너에게 준다. 네 일생에 임금들 가운데 너 같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1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걸었듯이 내 길을 걸으며, 내 규정과 내 계명을 지키면 네 수명도 늘려주겠다.” 15 솔로몬이 깨어보니 꿈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주님의 계약의 궤 앞에 서서 번제물과 친교 제물을 바치고, 모든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
30. 솔로몬은 하느님과 주거니 받거니 말을 나눴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까 하고 놀라운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의 삶에도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을까 하면서 솔로몬에게 일어난 일이 부럽기도 한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을까요? 혹시 아무에게도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깊은 의미의 기도를 하시는 분이 이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왕이면 그렇게 하는 좋고 훌륭한 일이 자주, 그리고 많은 사람에게 전파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소리입니다.
31. 신약성경, 필리피서간에 나오는 바오로의 기도 (2,6-11)
이 부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인간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이렇게 이 부분을 ‘찬미’라고 구별하면, 기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찬미는 흠숭이고, 흠숭은 앞서 말씀드린 기도의 첫 번째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는 일은 아름답다는 것을 기억할 일입니다. 필리피 서간은 바오로 사도가 ‘필리피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필리피 2,6-11 : 바오로사도가 이해한 예수님의 삶에 관한 기록.> 6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
32. 필리피서간에 나오는 기도는 바오로사도의 찬양입니다. 실제로 바오로사도는 살아생전에, 자기의 의지로 예수님을 만나서 그 뜻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약속한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오로사도가 이해하는 예수님에 관한 내용은 실제로 예수님의 삶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도, 우리가 신앙인으로 본받고 살 때, 드러내야 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 기도의 본보기로 다루었으면 좋았을 내용....
** 유딧의 기도, 엘리사벳과 성모님이 바치는 찬미기도
33.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누구라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그 가치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하는 일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내용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시어, 당신을 죽음에 내어놓기까지 순종하셨다는 것이고, 그 모습을 통하여 모든 이가 예수님을 존경하고 찬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우리가 어떤 방법을 통해서 그 목표를 이루느냐에 따라서 선악(善惡)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34. 주님의 기도 (마태오 6,9-13)
우리가 자주 하는 기도, 가장 아름다운 기도로 ‘주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구별에 따르면, 이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때, 가르치신 부분에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 역시 앞서 말씀드렸던 기도의 목적에 관한 4가지 내용이 적절하게 어울려 등장합니다. 하느님을 흠숭하거나 찬미하는 기도, 우리의 청원기도, 죄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적절하게 잘 조화되어 나옵니다. 이 주님의 기도를 흔히 일곱 가지 요소로 구별합니다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알려주셨던 가장 완벽한 기도라는 것을 한 번 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3가지 찬미와 흠숭의 기도가 함께 나오고, 다음으로 4가지 우리 사람의 삶에 필요한 내용이 나옵니다. 자, 함께 주님의 기도를 한 번만 하겠습니다.
35. 실제로 가장 완전한 기도는 미사
지금까지 기도의 본보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는 정리할 순서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기도의 목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교회에서 말하는 가장 완전한 기도는 미사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 미사는 성체성사를 이루는 예절이고, 여러분이 주일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시는 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주일미사는 신앙인이 신앙인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36. 언제 기도할 것인가?
성경에는 이 질문에 응답하는 곳이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에페6,18)’. ‘늘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그대로 따라 살기 힘든 일이지요? 사람이 언제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태 26,41)는 말씀은 실천할 수 있습니다. 항상, 24시간을 온통 다 기도의 시간으로 지내기는 힘들다고 말할 수 있어도, 삶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들을 재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 기도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를 죄로 유인하는 유혹을 느낄 때, 죄에서 탈피하고자 사랑의 실천이 필요할 때, 특별한 은총을 구하고 싶을 때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7. 예수님도 당신의 사명을 실천하는 일이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기도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 40일 동안 무엇을 하셨을까요?(마태오복음 4,1~~) 가끔 먼동이 트긴 전에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하시기도 하셨다는(마르 1,35)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또한 기적을 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마태 14,19; 14,23; 15,36). 최후만찬의 순간에도 빵을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변화하는 예절을 거행할 때도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26,27) 또한 인간의 처지라면 피하고만 싶었을 수난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마태 26,42 -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38. 기도는 예수님의 생활과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우리가 둘 사이를 따로 떼어서 바라볼 수는 없는 본질적인 일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을 완전한 기도는 예수님이 직접 알려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마침기도는 주님의 기도를 두 번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 * 2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