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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갈 2:11-21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I. 여는 말
1. 갈라디아서의 역동성이 긴장감을 준다. 에베소서는 웅장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 안에 긴장과 갈등이 없는 책이라 그런지 밋밋하게 읽었다. 반면, 갈라디아서는 격렬한 논쟁과 대립이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한다.
2. 그러나 파면 팔수록 오리무중이다. <좀 더 설명할 것>
II. 문맥과 복습
1. 자전적 스토리의 결론부이자, 교리 혹은 신학을 설명하는 도입부이고, 핵심 주장을 진술하는 곳이다.
2. 앞 본문에서 친교의 악수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니까 친교의 악수를 깨뜨리는 행위에 대한 비판과 어떻게 하면 친교의 악수를 유지, 지속시킬까, 그 교리적 토대를 마련하는 중이다.
III. 2장 11-14절
# 11절
1. 베드로가 왜 안디옥에 왔는지는 본문에서 찾을 수 없다. 사도행전에 나오듯이 박해를 피해 예루살렘을 떠났는데, 그때 온 것인지, 아니면 순회 사역을 하던 때라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이니까 방문한 것인지, 우리는 이 텍스트 내에서 방문 목적을 특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일도 안 중요하다.
2. 안디옥은 1세기 당시 로마제국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인구가 25만이고, 유대인은 그 중 10분의 1 정도이었다고 한다.
3.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일단 11절까지 읽은 바로는 ‘잘못한 일’(새번역), ‘책망받을 일’(개정)이 있었다. * 단어 설명을 조금 할 것.
4. 바울의 이중적 노림수. 한편으로 자신의 사도적 권위와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독자성을 변호하는데 아주 적절한 사례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를 통해 갈라디아 교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어떤 것 - 지금은 어떤 것이라고 하자 - 에 관해 말하는 바와 연결시키려는 것이다.
5. 여기서 우리는 ‘항의’하는 개신교 스피릿의 원형을 본다.
1) 종교개혁 당시의 항의하는 사람
2) 내가 울 교회 학생부 아이들에게 하는 말.
왜 내가 너희들에게 요약하고 질문하고 자기 생각을 말하라고 훈련시키는지 아니?
하나님의 말씀에도 이의를 제기하고, 의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고, 그것은 너희들에게 부당한 명령을 하는 사람에게, 아니오, 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 줄 아는 사람이 상사의 나쁜 지시에 고분고분 순종하면 안 된다. 더 나쁜 인간이다!
# 12-13절
1. 우리는 지금 지뢰밭을 통과해야 한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운 것이 너무 많다. 크게 두 가지다. 야고보에게서 온 몇몇 사람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인 베드로가 무엇을, 왜 두려워하였을까, 이다. 아,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바나바’까지 물들었을까, 인데, 이것은 베드로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과 연동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일단 결론부터 말하고, 갈라디아서 공부를 위해 학자들의 생각을 보충하려 한다.
그것은 바울의 시각이다. 13절에서는 ‘위선’ 14절에서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지 않음’이라고 일련의 행동 - 학자들은 안디옥 사건‘이라고 한다. -을 평가하는 바울의 언어이다. 베드로의 모습은 위선이다. 그리고 진리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지만, 그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은 것이다. 진리대로 행동하지 않았다는 말의 뜻은 14절의 맨 마지막 문장에 담겨 있다.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3. 이것은 앞에서 문맥을 다룰 때에도 말했지만, 바울과 베드로 사이의 ‘친교의 악수’(9절), 곧 바울의 사도직과 바울의 복음을 인정해 주었던 것에 위배되는 행동을 베드로가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은 바로 위에서 말한 대로, 이방인을 억지로 유대인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4. 자, 이방인과의 음식 먹는 이야기가 왜 이리 문제가 되는지, 살펴보자. 아예 결론을 던져 놓고 시작하자. 스캇 맥나이트가 아주 재미난 말을 한다. 지금 바울이 베드로 더러, 족발 먹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있지는 않다! ㅎㅎㅎㅎ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와 고넬료와의 만남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곳에도 오늘 본문처럼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건의 주역은 바울에게 톡톡히 혼이 나는 베드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예수님에게서 식사 문제를 볼까 한다.
5. 고넬료의 회심은 지난 주에 말하였는데, 이제와 보니, 오늘 언급했어야 했다. 복습을 위해, 오늘 본문 이해를 위해 사건 개요를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다.
베드로가 기도하는데 레위기에서 엄히 금지한, 유대인 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차마 먹지 못하는 음식들이 보자기에서 한 가득 담겨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눈앞에 떡하니 멈춘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먹어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고 하면, 그것은 그냥 하늘, 공중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 그 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화들짝 놀라 반항한다. ‘못 먹어요. 레위기에서 먹지 말라고 한 것들인데 어찌 먹습니까?’ 그러자 하늘의 소리도 얼마간의 노기 띤 목소리로 명령한다. ‘야, 하나님인 내가 먹으라고 하는데, 뭔 소리하는 거냐. 그냥 닥치고 먹어라.’
이런 실랑이가 비몽사몽간에 총 3번 있는데, 밖에서 베드로를 화급히 찾는 소리가 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다. 이상하다, 무슨 뜻이지를 곱씹으면서 따라 간 고넬료의 집에서 입을 뗀 그의 첫 마디가 이렇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사람을 속되다거나 부정하다거나 하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행 10장 28절)
이 말을 타이핑하는데, 뭐랄까, 감동스럽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이다.
베드로를 초청한 이유를 고넬료에게서 들은 다음의 말도 갈라디아서 이해와 직결된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라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행 10장 34-35절)
6. 아무튼, 이쯤 되면 갈라디아서에서의 안디옥 사건의 배경과 바울의 시각(위선과 복음의 진리, 억지로 유대인으로 만들려는 수작이다 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베드로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그렇게 안 해서 그렇지. 두려워해서 그렇지. 그런 그를 공개적으로 탄핵하는 바울이 야속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예수님을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익히 아는 복음서에서 음식 문제 혹은 식사 문제를 가져 올 수 밖에 없다. 그런 연후에 이방인과의 식사 문제의 의미를 짚어 보자.
7.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 설명할 것.
8.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 그리고 예수님의 식사 논쟁에서 보듯이,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식사를 꺼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부정한 행위,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로 생각하였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그리고 학자들의 주석을 참조해서 말하면, 이방인과의 식사는 유대인이라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행동이었다. 달리 말하면,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과 구별해 주는 표지가 다름 아닌 이방인과의 교제 거부, 식사 거부이었던 것이다.
“안디옥에서 쟁점이 되었던 것은, 아주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은 문제였다: 메시야를 믿는 유대인 신자들은 메시야를 믿는 비유대인 신자들과 동일한 상에 앉아도 되는가?”(<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下>, 373)
“식탁을 따로 한다는 사실 자체는 핵심 집단과 주변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었다.”(<바울과 하나님의 신실하심 下>, 375)
네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 곧 바울이 사용하게 될 단어인,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증거를 내놔라, 라고 말하면, 유대인들은 나는 저 부정한 이방인과 밥을 같이 먹지 않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9. 지금까지 나는 유대인이라고만 했는데, 갈라디아서에서 유대인이 누구인지에 관해서 논란이 많다.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이냐, 는 것이다.
사실, 신약과 구약을 오가면, 그리고 갈라디아서가 말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으면, 일개 목사와 평범한 평신도들의 갈라디아서 독서에 그리 장애나 방해 요소가 아니다. 즉, 그냥 그런 말을 하는가 보다, 하고 넘어가도 무방하다고 본다. 이방인과의 식사 문제가 담고 있는 폭발성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말이다.
10. 그러니 이 대목은 그냥 넘어가도 좋을 듯 싶다. 그래도 궁금한 분들을 위해 몇 자 쓴다.
베드로로 상징되는, 대표되는 사람들에게서 확인하듯이, 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그들에게는 구약의 정결법이나 제사법 등이 소중하다. 소중한 정도가 아니다. 물과 공기와 같은 것이다. 그것 없으면 살지 못하는, 생존이 원초적으로 불가능한, 그래서 그것을 어기면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런 그들이 구약이 원래부터 말하던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말미암아/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고 믿게 되었다. 이것은 16절을 앞당겨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는 것과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 사이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 그게 뭐가 다른데?
11. 그렇지만, 이방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에게는 문제가 생긴다. 그들은 지금껏 잘 먹어 오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파 그리스도인의 주장 대로라면, 부정한 이방인인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을뿐더러,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유대인 출신에 비하면 하나님 나라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등국민, 열등한 신자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그런 곳인가? 교회는 어떤 곳인가?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말했듯이, 바울이 2장 6절에서 말했듯이,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 곧 그의 출생의 조건으로 차별하시는가? 우리는 결연히 외친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2. 자, 다시 11-14절로 돌아오자. 베드로의 행동은 조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첫째로 고넬료와의 만남과 그의 회심으로 인해 이방인과 식사가 거리끼거나 켕기는 것은 아니었고, 둘째는 12절에서 ‘음식을 먹다’라는 단어의 시제가 ‘현재“(?)이다. 그것은 그가 딱 한 번 이방인과 식사한 것이 아니라 자주, 일상적으로 한 식탁에 앉았다는 것을 말한다.
13. 그런데 그는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났다고 했을 때의 ‘물러나다’의 시제가 이상야릇하다. ‘미완료 과거시제이다. 즉, 한 번에, 단 번에 이방인과의 식사를 안 한 것이 아니라, 점차, 차츰 차츰, 서서히 그만 두었다는 말이다. 외부의 가중되는 압력에 그도 조금씩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14. 그리고 위선(새번역), 외식(개정)이라는 단어는 ‘연기를 하다’는 헬라어이다. 그러니까 베드로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그렇게 함으로써 문제를 돌파한다, 더 정확하게는 문제를 피하려고 했던 것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아무 집 처마 밑으로 뛰어들가는 것이 상책이지, 이것저것 가릴 게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15. 그리고 그 행동은 바울에게는 둘도 없는 동역자요 동지인 바나바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바나바도 마지못해 베드로의 위선에 ‘끌려들어간 것이다.’
13절의 ‘마침내’(새번역) 혹은 ‘바나바까지’(개정)라는 단어는 바울이 받은 충격을 짐작하게 해 준다. 어찌 보면 바울 입장에서는 베드로의 외식 보다, 바나바의 행동이 더 아팠을 것이다.
16. 자, 12절의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베드로가 두려워하였을까? 짐짓 연기를 하려 했을까? 그리고 바나바까지 동조했을까? 강론을 할 때는 말하지 않을 참이다. 참조하라는 것이다. 학자들의 견해는 이렇다.
예루살렘 내에 열성적인 유대인들이 교회를 향한 압력이 있었다.
<설명할 것>
17. 잠정적 결론
# 14절
1. 위에서 말한 것으로 14절 이해가 어느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지난 강론에서 할례를 억지로 강요하는 것에 관해 말하였다. 14절에서도 그 단어가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이번에 알게 된 것인데, 내가 좋아하는 스캇 맥나이트의 주석을 읽다가 발견하고 너무 기뻤다. 그에 따르면, “억지로 강요한다는 이 단어는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이다.”(<갈라디아서: NIV 적용주석>, 153)
대개 이것은 도덕적인 강제로 해석하는 것과 달리 스캇은 나와 똑 같이 물리적 의미로 이해한다. 다시 한 번 더 그의 말을 인용한다. “바울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 용어는, 강력한 용어이다. ‘억지로’(헬라어 anankazo)라는 용어는 한 사람의 의지에 반(反)하는 ‘물리적 강제’를 의미한다.” 이것은 앞에서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강요했을 때(2:3), 뒤에서 바울의 적대자들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했다(6:12)고 할 때 나타난다.
2. 이제 14절에서 언뜻 이해 가지 않는 한 대목을 설명하려 한다. 바로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이다.
이것은 “네가 유대인이라면,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혈통적 정체성이 그렇게 중요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마저 규정하는 것으로 높인다면, 애초에, 처음부터 이방인과 식사를 하지 말았어야 했고, 고넬료에게도 가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너는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가 성령으로 거듭나는데 매개자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역하는 안디옥에 와서도 아주 편하게 이방인들과 어울리지 않았느냐. 그것은 네가 이방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식탁에서 떠나다니. 그냥 유대인으로 죽 살던가, 아니면 이방인과 계속 어울리던가. 이도 저도 아닌 베드로 당신이 참 한심하군요”라고 말할 수 있겠다.
3. 그러나 뭐라고 말하든 간에, 베드로의 행동은 이방인을 억지로 유대인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 바울이 비판하는 핵심 요지라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4. 이 말의 속뜻은 이렇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는, 구원받기 위해서는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유대인이 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선언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자기 민족과 국가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앞으로 주된 논쟁인 ‘할례’의 이면에 깔린 무시무시한 진실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저주한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명백하게 암시하는 바가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바울은 베드로의 행동을 독해했다는 것이다.
5. 나는 여기서 복음과 민족, 복음과 국가를 하나인 양, 생각하는 소위 국가주의, 민족주의를 경계한다. 내가 살고 있는 특정한 국가, 많고 많은 나라 중 한 나라에 불과한 내 나라의 이익과 관점이 마치 성경의 것인 양 혼동하고, 알았든 몰랐든 간에 마구 뒤섞는 것은 ‘다른 복음’이고 바울의 엄중한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역사적으로는 ‘콘스탄틴주의’이고 신학적으로는 ‘혼합주의’가 지금도 한국교회를 병들게 한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기지 마라.”
예수님의 어법으로 말하면, 베드로는,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 대한민국을 겸하여 섬기려는 것이다.
6.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다루어 보자. 문맥을 보자.
‘친교의 악수’ ‘디도에게 할례를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 ‘이방인을 유대인이 되라고 강요하지 마라’는 일련의 자구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기독교인이 되는 것, 교인이 되는 것과 관련된 말이기도 하지만, 유대인과 이방인을 출생의 조건으로 가르지 말라, 분리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 혹은 교회의 일치성(ecumenical)을 조금 설명해 보려 한다. 보편성이라는 단어는 가톨릭을 떠올리게 하고, 일치성, 곧 에큐메니칼은 WCC를 연상하게 된다. 그런 그림을 지우고, 그 자체를 주시하면 좋겠다.
교회는 보편적이다, 는 말은 무슨 말일까? 많은 신학자들은 교회의 교회됨을 규정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 ‘보편성’이다. 저 단어, 보편성은 어디에서나, 또는 우주적이라는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내가 또는 우리 교회가, 혹은 한국 교회가 믿고 있는 바와 가까이 일본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은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유대교 출신의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받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 이방인과는 식사를 금지해야 한다는 명제를 주장하면, 그것이 지구 곳곳의 교회들, 우주에 있는 모든 교회들, 시간적으로는 적어도 예수 당시와 베드로와 바울 당시의 교회로부터 지금까지의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 존재했던 신자들의 신앙과 상충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명제를 어디에 있든지 간에, 언제 존재했든지 간에 그들 모두에게도 보편타당한 신앙으로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전 세계적으로 논란이 되는 전쟁 문제를 보자. 내가 우리 국가가 일으키는 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지지한다면, 상대방 국가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그리하여 본회퍼는 2차 대전을, 독일의 전쟁이 패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바로 교회의 보편성 때문이다.
또 하나, 예를 들어 보자. 한국교회가 ‘독도는 우리 땅이다’는 캠페인을 벌인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교회의 보편성에 부합한 걸까? 그것은 신앙의 본질인가? 아니면 신앙이 아닌 국가적인 것, 민족적인 것을 신앙으로 빠다칠한 것이 아닐까?
위안부의 문제는 정의와 도덕, 인권이라는 보편적 차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후원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여기에 지역주의를 보탤 수 있다.
몇 년 전에 대구의 모교회의 청년부 헌신 예배 설교를 하러 간 적이 있다. 담임목사님과 장로님들과 잠시 차를 마시며 한담을 했다. 그날 대화의 주제는 신공항이었다. 대구냐, 부산이냐.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하도 부산의 방송과 언론이 ‘부산이 최적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그분들은 대구가 최적지라고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아, 그렇구나. 이런 사안을 신앙으로 떡칠해서 합리화하면 안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7. 잠정적 결론 혹은 이야기해 볼 사안
내 안의 이방인 식사 거부는 무엇인가?
등등의 질문
IV. 2장 15-21절
1. 이 대목은, 나로서는 지뢰밭은 통과하기라는 미션이 아니라, 숫제 지뢰를 밟고 서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2. 나의 곤혹스러움과 무지를 토로하는 것보다 본문을 설명하는 것, 그리고 본문 이해를 위해 맥락을 짚는 것이 시간 절약, 지면 절약이리라.
3. 이 단락은 이중적이다. 앞의 안디옥 사건과 관련하면 그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다. 뒤의 내용과 연관해서 본다면, 바울의 복음을 논증하는 부분이다.
4. 그러므로
5.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얼마 전에 톰 라이트의 책을 읽다고 보게 된 것이 있다. 의롭게 되는 것, 칭의라는 단어가 갈라디아서에서 최초로 등장한 맥락은 이방인 식사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칭의를 일차적으로 식사 거부와 연결해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6. 그런데, 이 본문을 한참 들여다 보고, 뒤이어 나오는 율법에 관한 바울의 가르침을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적거리며 갖게 된 생각은, 바울은 식사와 할례 논쟁을 통해서 의롭게 됨,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설명하지만, 구약 혹은 율법에 대한 근본적인 지점까지 파고들어간다는 것이다.
7. 이 때문에 구약과의 관계, 또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할 거냐, 바울이 말한 율법이 뭐냐라는 참으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사안을 살펴 보기 전에, 우리의 표준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렸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
그 다음 구절도 마저 인용하는 것이 좋겠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5:18)
8. 산상수훈의 저 구절을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완성한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된다. 율법이 완성된 것이라면, 예수님이 완성하러 왔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굳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실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그 죽음은 불필요하고, 시쳇말로 개죽음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율법에는 뭔가 완성되어야 할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폐하지 않는다, 완성한다는 말에서 주님은 율법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용하신다. 만약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율법과 전혀 다른 것이라면,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메시야일 수 없다. 율법, 곧 구약에서 예언한 바, 오시리라고 한 구원자가 바로 예수, 십자가의 그리스도일진대, 율법을 부정하면, 예수 자신을 부정한 것과 진배 없다. 둘째, 신약은 구약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우리는 구약이 없는 신약성경만 들고 다니면 된다. 셋째,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이유가 전혀 없다. 베드로가 옳다.
9. 자, 그렇다면,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하든 간에, 바울이 말하는 율법과 예수님이 말한 율법이 같으냐, 다르냐, 틀리냐, 를 논하는 것과 상관 없이, 바울은 율법을 부정하면 안 된다. 어떤 식으로든 율법을 폐하는 논리를 펼치면 안 된다. 이들을 신학에서는 율법 폐기론자들이라고 한다. 자유 방종주의자이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자유와 종 노릇하기!
그렇다고 율법이 완전하다면, 예수도 불필요하고, 이방인에게 온갖 핍박과 오해를 무릅쓰고 전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박해를 받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거리낌은 없어졌을 것입니다.”(갈 5:11)
10. 이 점을 기억하고 본문에 천착해 보자.
# 15-16절
1. 자, 내가 참으로 겁먹었던 본문을 읽을 차례이다. 긴 호흡을 가다듬고, 그러나 좌고우면하지 말고 곧 바로 이 본문의 진실과 바울의 진심에 가 닿도록 힘껏 달려가보자.
2. 15절은 유대인, 곧 율법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 혹은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되는 조건과 자격이 민낯 그대로 보여준다. 두 가지다. 하나는 유대인이어야 한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이방 죄인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의 것은 혈통적 정의이다. 유대인이라는 민족, 아브라함의 혈연에 의한 후손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두 번째의 것에서 주목할 단어는 ‘죄인’이다. 오늘 우리야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도덕적 혹은 사법적 차원에서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 당시, 1세기 당시에서 죄인은 종교적 차원이다. 다시 말해 율법 없는 사람을 말한다.
당신은 복음서에서 세리, 창기와 더불어 예수님이 자주 어울렸고, 그래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던 한 부류를 기억할 것이다. 바로 죄인이다. 그들은 깡패들이 아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복음서를 보면,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대놓고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야 어느 시대나 있겠지만, 이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당신의 종교적 사회라는 배경 속에서 당시 현실에 부합된 해석일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이방 죄인이라고 한 것은 이방인인데, 율법이 없고,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뜻으로 당시의 유대인들이 관용적/통상적으로 말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로마서 2장과 3장의 이방인과 달리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갖는 특권이 나열되어 있는 것을 보면 된다.
3. 자, 여기서 우리는 할례도 그렇지만, 음식 규례와 이방인과의 식사 규정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배제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유대인이 되지 않고서는, 할례를 받지 않고서는 한 식탁에 앉을 수 없다는 것은 특정인들의 우월성을 부각시키고, 다른 누군가를 열등한 사람으로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5절의 유대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정의에도 그 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선천적으로는 나의 의지와 의사와 무관하게, 후천적으로는 누군가의 폭력적인 열정으로 차별과 배제하는 것이 바로 다른 복음이고, 갈라디아 교회 내부의 선동자들인 것이다.
4. 이 지점이 나를 그토록 긴장하게 만든 16절을 푸는 하나의 열쇠가 될 것이다. 여기에는 우라늄 1그램과 같다. 이 안에 농축된 것을 풀어내자면, 핵발전소 하나 건설하듯이 길고 긴, 많고 많은 말을 해야 한다.
5. 길게 말하지 않고 곧 바로 말한다면, 그리고 맥락 속에서 이 본문을 읽는다면, 바울은 여기서 어떻게 하면 구원받는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큰 그림을 잡고 이 농축 엑기스를 하나하나 풀어내보자.
이 맥락에서 칭의, 의롭다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고, 그것은 율법을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 안 되고, 주객도식으로 말하면, 객관적으로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이고, 주관적으로는 그분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 말고는 없다.
그렇게 본다면, 의롭게 된다는 것도 해결이 된다. 위에서 말한 그대로 구원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 관한 말이다.
율법의 행위는 일차적으로 이방인과의 식사를 거부하는 것, 할례를 말한다.
6. 이제부터는 꼬인 실타래인 칭의 개념을 보자. 칭의는 이렇게 정리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이라고 말이다. 헬라어로 디카, 디카오스<<???>>>
그런데 이것을 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 해석을 한다. 하나는 법정적이고, 다른 하나는 관계적이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종말론적이다.
법정적이라는 말은 재판정에서 재판장이 당신 무죄요, 라고 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의롭다는 것은 무죄선언을 받았다는 뜻이다. 백성됨과 연결해서 말한다면, 국적 취득이라고 보면 된다.
관계적이라는 말은 타인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을 말한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죄선언이 곧 국적 취득이라면, 그 즉시 나는 그 나라 시민이 된다. 마찬가지로 의롭다 함을 받는 순간, 나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 개념은, 참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또는 진정으로 의로움이 완성되는 시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는 그 종말의 날에 완성된다는 말이다.
7. ‘칭의’에 관해서는 이 정도 하고, 율법을 행하는 행위를 따져보자. 위의 칭의에 대한 세 가지 해석 중 어느 쪽이냐를 두고 학자들의 줄서기 혹은 진영이 확 갈라진다. 율법의 행위가 뭐냐를 두고도 동일한 현상이 벌어진다.
첫째, 맥락을 두고 본다면, 여기서 율법의 행위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앞의 사건을 가리키지 다른 무엇일 수 없다. 즉, 할례, 더 직접적으로는 이방인과의 식탁교제를 차별하는 행위이지 무엇이겠는가. 그런 것으로 자신이 선민이라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표지를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요점이다. 나는 이것이 일차적 의미라고 본다.
둘째, WBC 주석자인 롱에네커의 구분법에 따르면, 모세의 종교를 말한다. 체제와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 말이다. 이것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그토록 많이 싸우고 또 싸웠던 것이 그들의 위선, 종교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람을 그 속으로 짜 넣으려는 행위들, 숨이 턱턱 막히도록 꽉 짜인 틀 속에 집어 넣으려는 종교 행위로는 구원 받을 수도, 구원 받았다는 징표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언서들에서 너무 자주 볼 수 있다. 이사야는 너희들이 바치는 제물을 하나님은 역겨워하신다고 말한다. 예레미야는 이 성전은 그저 돌무더기. 거룩하기는 뭐가 거룩하냐고 성전 이데올로기를 박살냈다. 호세아, 아모스, 미가 선지서를 한 두 페이지를 넘겨보라. 그곳에 윤리와 실천, 순종, 사랑이 없는 종교적 행위에 대한 비판이 철철 넘쳐흐른다.
셋째, 율법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16절에는 바울이 두 개를 날카롭게 대조한다. 바로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믿음이다. 그러니까 율법 vs. 예수가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고 있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고, 예수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8. 나는 이 지점에 대한 반신반의한다. 톰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규정을 하고 있다. 앞에서 내가 15절은 유대인에 대한 규정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을 율법과의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재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내 생각을 말한다면, 위의 세 가지 모두를 동의한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할례와 식사 규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리타분한, 아니 사람이 치사하게 말이지, 개도 안 건드린다는 식사에 관해서, 사람이 밥 먹는 것을 갖고 뭐 이리 복잡한가, 싶을 텐데 말이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밥 먹는 것으로, 밥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성서의 정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9. 나의 독특한 해석이 드러나는 지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개정),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새번역)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문법적인 설명은 약하려고 하는데, 이 어구는 다른 두 가지로 번역할 수 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대상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예수가 목적격이 되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말이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주어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그 뜻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으로 우리는 의롭게 된다는 말이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1)이 우리가 주어가 되어서 예수를 목적으로 삼고 믿는 것이라면, 2)는 예수가 주어가 되고, 우리는 그분을 동사로 본받는 것이다.
10. 나는 전문 학자가 아니고, 보수적인 최갑종과 중도적이랄 수 있는 롱에네커, 진보적이랄 수 있는 톰 라이트의 주석을 살필 바, 이 세 사람은 저 헬라어를 ‘예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예수의 신실함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라는 두 측면 모두를 지지한다.
나도 그게 맞다고 본다. 아니 좋다고 본다. 객관적으로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우리 자신이 창작해 낸, 전통적인 언어로 말하면, 우리는 우상을 창조하고, 우리가 만든 신을 참 신으로 섬기는, 성서가 가장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우상숭배자가 되고 만다.
반면, 주관적으로 예수의 믿음, 곧 신실함에 대한 우리의 인간적인 반응이 없다면, 기독교라는 종교는, 아니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할 때, 그리고 인간을 빚으실 때, 지금과 같은 인간을 만들 이유가 전혀 없다. 인형이면 족하다. 꼭두각시면 그만이다. 요즘말로 프로그래밍화된 기계같은, 앵무새 같은 인간을 만들면 땡이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이라도 싫다. 아니, 재미없다.
11.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저기 믿음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피스티스’(pistis)이다. 저 단어의 구약 히브리어는 ‘에무나’이다. 구약학자들이 말한 것을, 내가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에서 정리한 바에 의하면, 하박국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을 때의 그 믿음은, 인내와 신실함이다. 참고 견디는 것이고, 어떤 상황에 내동댕쳐처든지간에, 그 유명한 복음성가로 기억되는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을 끝까지 믿겠다고 했을 때의 신실함을 말한다.
사실, 앞의 많은 내용은 공부를 위해, 본문 이해를 위한 참조 내용이라면, 저 신실함을 십자가로 해석하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십자가 = 신실함이다.
존 하워드 요더에 의하면, 내가 번역한 <근원적 혁명>에서 십자가를 이렇게 정의한다. (혹은 <예수의 정치학>을 사용할 수도 있겠다.)
인용할 것
즉, 십자가는 비폭력적 사랑이다. 그리고 차별 없는 사랑이다.
* 이 부분은 좀 더 숙고할 대목이다. 보완해야 한다.
# 17-19절
1. 17절이다.
17절을 통해 우리가 미루어 짐작하는 바는, 바울이 받았던 질문 또는 도전은 이랬을 것이다. 예수 믿는 너희들은 율법이 없고 도덕이 없으니 죄인이 아니고 뭐냐? 율법을 부정하면 그런 결론에 이르지 않느냐 말이다.
2.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3. 18절이다. 만약에 예수가 아니라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결과가 생길까?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우는 일을 한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에베소서로 건너가 보자. 2장 14절부터 읽으면,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셨다. 둘을 갈라놓았던 담은 다름 아닌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율법이다. 예수님이 원수되었던 사이, 곧 하나님과 인간, 사람과 사람(유대인과 이방인), 자기와 자신이라는 일체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기 위하여 하신 일은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이다.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 2:16)
그러므로 그 담을 다시 세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무효로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둘로 분열시키는 것이다.
4.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았다고 말하는 19절을 보자.
여기서 죽었다는 말은 관계의 단절을 말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삼중구조,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자기 자신과의 관계(여기에 사람과 자연을 넣어서 사중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째에 넣어도 무방하고, 독자적으로 만들어도 좋다.)를 올바로 만드는 것, 곧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이다.
# 20-21절
1. 아마 교회를 좀 오래 다닌 사람은 다들 암송하는 구절일 것이다. 20절. 그래서 해석하기가 더 어렵다.
2. 일단,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1장 4절을 기억하면 좋겠다.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자기 아들의 몸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그 구절 말이다.
“바울은 1:4에서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여기 2:20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적 자기를 내어주심에 대한 강조와 함께 복음의 본질에 대한 자신의 진술을 끝낸다.”(WBC, 320)
3. 또 하나는 십자가는 신실함이라고 했던 것도 기억하자.
4. 그러면 20절은 이렇게 풀어진다.
나도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을 살겠습니다.
이상 끝!!!
5. 밥 먹는 것 이야기하다가 칭의니 율법의 행위니 하다가 다시 몸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으로 2장은 결말에 다다랐다.
나는 예수님의 신실하심처럼 신실하게 살아갈 것이다.
남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폭력적 열심히 아니라
남을 구원하는 신실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살겠다는 말이다.
정말 감동이 밀려온다.
나의 신앙을 타인에게 신의 이름으로 폭력적으로/물리적으로 강제하지 않고, 그 폭력을 신실하게 견뎌내면서 그렇게 희생을 감내하는 바로 그것으로 도리어 남을 구속하는 계기로 삼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모습이었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모습이다.
6. 21절
이것은 17, 18절과 유사하다. 배경 상황도, 그리고 바울의 주장과 결론도. 율법으로라면, 굳이 예수가 죽을 필요가 무엇인가. 그러니 율법으로 인한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을 원천 무효화시키는 것이다.
V. 닫는 말
1. 16절과 20절은 좀 더 연구와 묵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핵심 요지는 흔들리지 않을 듯 싶다.
2. 내가 학생회 아이들에게 하는 말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3. 나는 특히 20절에서 나의 이중적 모습을 본다.
나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지만,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다.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지만, 지금도 남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열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