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望月동 제3묘역. 묘지 번호 1백35번. 80년 5월 남편을 마중나갔다 全南大 앞 평화시장 입구에서 계엄군의 총격으로 숨진 崔美愛씨(당시 24세)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崔씨는 사망 당시 임신 8개월의 만삭이었 음에도 불구, 계엄군들은 무참하게 총부리를 겨누었고 崔씨는 결국 뱃속에 생명을 안은채 이곳에 묻혔다.
崔씨의 어머니 김현녀씨가 지난 89년 국회 光州청문회에서 딸의 끔찍한 죽음과 딸의 죽음이 가져온 고통의 나날을 절규했던 내용과 증언을 통해 당시를 재구성해 본다.
崔씨는 당시 어머니와 함께 평화시장 근처에서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숙을 치고 있었다. 崔씨는 간호전문대를 졸업하고 光州 모고교에서 영어교사로 있는 사람과 결혼, 어머니의 하숙일을 돕고 있었다. 崔씨 는 이때 8개월된 아이가 하나 있었고 뱃속에 8개월된 태아를 잉태하고 있었다.
21일 아침. 光州시내 모든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 있었지만 崔씨의 남편은 이날도 학교에 볼일이 있다며 12시까지 들어오겠다는 말을 남기 고 밖으로 나갔다.
崔씨의 어머니 金씨는 全南大 쪽에서 탱크가 굴러가는 소리를 듣고 안되겠다 싶어 18일 부터 다락방에 숨어있던 하숙생들에게 밥을 차려 먹게한 뒤 이들에게 차비를 쥐어주며 '사태'가 끝날 때까지 고향에서 머물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조금지나 마을 주민들이 찾아왔다. 우리 도 시위대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金씨 하숙 생들이 먹고 남은 밥에 식초를 치고 김가루를 뿌려 주먹밥을 만들어 밖으로 가지고 나갔다 마침 지나가던 차량에 전해 주고 다시 집에 돌 아와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잠을 깨보니 이웃에 사는 연 탄집 아저씨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뛰어들어 무슨일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맨발로 뛰쳐 나갔다. 청천 벽력이었다. 崔씨가 공수부대원의 총에 맞았다는 것이었다.
金씨가 잠든 사이 12시 까지 돌아오다던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 딸이 밖에 나갔다 총을 맞은 모양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을 밀어붙이 고 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니 남색에 붉은색 무늬가 있는 崔 씨의 임부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신없이 다가가 상체를 붙잡고 일으켜 세워보니 머리 뒷부분이 사라지고 없었다. 총탄이 머리를 관통 했던 것이었다.
도무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없었다. 멍한 상태로 넋을 잃고 있던 金씨에게 대학생들이 이렇게 있다간 사체마저 빼앗길지 모른다고 외쳐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崔씨의 시신에 달려들 어 팔과 다리를 붙잡고 집안으로 옮겼다.
崔씨의 총격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崔씨가 평화시 장 골목길 맨홀 뚜껑위에 서서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부근 전봇대 뒤에 있던 공수부대원이 총을 겨누었고 곧바로 총소리가 났다 고 했다.
崔씨는 일단 거실에 안치됐다. 이때 崔씨의 배가 불룩거렸다. 어머니의 죽음을 모른 태아가 뱃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 지켜 본 金씨는 "아이라도 살려야 한다" 며 연락이 가능한 병원에 모두 전화 를 했다.
하지만 어쩔수 없다는 것이었다. 12시에 온다던 사위가 1시를 넘겨 집에 돌아왔다. 金씨는 말문을 열지 못하다 자네 마누라가 죽었네라는 한마디를 내뱉고 울음을 터뜨렸다.
이날 외곽으로 철수하는 공수부대의 무차별 발포 과정에서 빚어진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임신부에 가해진 총격이었다. 전남대 앞 평화시 장 입구 골목에 서있던 최미애는 정조준된 총격에 머리를 맞고 그자리 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시내에서 全南大로 철수했다가 다시 광주교도 소 쪽으로 이동하던 제3여단 공수부대원들이 쏜 총알이었다. 이미 숨 을 거둔 최미애씨의 뱃속에는 8개월된 태아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출 생을 두달 남겨둔 태아는 뱃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죽은 임신부의 배가 거세게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있던 동네 사람들은 그만 고개를 돌려버릴 수 밖에 없었다. 총알 한방에 두 생명이 동시에 숨을 거둔 비극이었다"< X창작시대사 刊 실록5.18광주민중항쟁〉
23일 장례를 치렀다. 관은 어떻게 해서 구했으나 공동묘지까지 시신 을 싣고 갈 차량을 구할 길이 없었다. 마을에서 사용하던 리어카를 이 용하기로 했다.
마을 주민과 崔씨 아버지 친구들이 리어카를 앞세우고 매장지를 찾아 무작정 집을 나섰다. 동일실고 앞 길을 지나는데 계엄 군이 총을 겨누고 있어 사람들에게 건(巾)을 나눠주며 머리에 두르라 고 했다.
건을 쓰고 있으면 그래도 총질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 문이다. 함께가던 마을 주민 한사람이 교도소 앞 변전소 위쪽에 공동 묘지가 있으니 그곳에 일단 매장하자고 제의, 방향을 돌렸다.
崔씨를 매장한지 18일이 지나자 光州지검에서 검시를 해야한다며 매 장지를 파헤치라는 연락이 왔다. 자식을 두번 죽일 수 없다며 반대하는 金씨에게 검찰은 임신부가 죽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를 확인해야 한다. 끝까지 반대하면 유언비어 날포죄로 처리하겠다고 협박, 무덤을 파 崔씨의 시신을 朝鮮大병원으로 옮겼고 검시가 끝나자 望月동에 묻으라고 했다.
5월23일 최미애씨는 뱃속에 든 아이와 함께 리어카에 실려 교도소 건너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장례식은 꽃상여 대신 리어카가 이 용되었다.
그로부터 10여일 후에 광주지검에서 사체를 검시한다며 다시 최씨를 파내라고 했다. 조선대병원에서 검시를 마친 그녀는 6월7일 망월동에 안장되었다< X도서출판 南風 刊 광주민중항쟁비망록〉
미애를 望月동에 묻은지 얼마 있다 내 손으로 중매를 해 사위를 재혼시켰습니다. 8개월 된 손자가 엄마를 찾을 때면 늙은 내 젖을 물려 주곤 했습니다
金씨는 5.18이 끝난뒤 崔씨가 생각나면 20리길을 걸어 望月동을 찾았 다. 묘라도 바라보고 어루만져야 자식 생각이 덜했기 때문이다. 望月동 에 다녀온 뒤는 심한 몸살을 앓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서슬퍼런 군사독재의 충견들이 望月동에 가는 것을 막고 감시해 그들의 눈을 피할 수만 있으면 족했다. 金씨는 이처럼 기막힌 사연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당시 공무 원이던 崔씨의 아버지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될까봐서였다.
그러다 지난 89년 국회 光州청문회에 증인으로 선정돼 오랜 망설임 끝에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마음으로 처음 입을 열었다. 사랑스럽기만 하던 딸과 세상 구경도 못하고 저세상으로 간 손자를 가슴에 묻은 채.
첫댓글 죽일놈들 찢어 죽일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