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쭉은 없어도 푸른 숲 만으로도 충분했던 지리산 서북능선
1. 일자: 2024. 5. 11 (토)
2. 산: 고리봉, 만복대, 세걸산, 바래봉
3. 행로와 시간
[성삼재(02:37) ~ 작은고리봉(03:25) ~ (묘봉치) ~ 만복대(05:15) ~ 정령치(06:20~07:00) ~ (큰고리봉) ~ 세걸산(09:14) ~ 팔랑치(11:25) ~ 바래봉갈림(11:50) / 용산마을(12:50) / 21.68km]
< 지리산 서북능선 산행을 준비하며 >
금요일 오후, 퇴근해 배낭을 챙긴다. 꼭 필요한 것만 넣었는데도 무쭐하다. 정령치에서는 불을 피울 수 없다는 공단 직원과의 통화로 새로 산 일체형 스토브를 못 가져가는 게 아쉽다. 저녁에 잠깐 눈을 붙이고 사당으로 향한다. 밤 11시쯤 출발해도 3시 무렵 성삼재에 도착할 텐데, 왜 이리 일찍 버스가 출발할까 하는 불만을 안고 집을 나선다. 사당에서 무석형을 만나 버스에 오르고, 양재에서 성종형도 합류하여 완전체를 이룬다. 꿈 꾸던 산행이 시작된다. 버스에 불이 꺼지고 사위는 어둠에 잠긴다. 차창으로 빠르게 지나는 차갑고 어두운 산야는 떠나온 집의 따스함과 대비된다. 또 무박산행에 나서는구나 하는 감상에 빠져든다.
< 성삼재 ~ 만복대 >
02:10 편의점 불빛만이 반짝이는 성삼재에 도착했다. 이제는 익숙하지만 늘 싸늘한 새벽 공기가 설램과 불안으로 공존하는 장소다. 만복대에서 일출일 볼 생각이라 서두를 필요가 없어, 휴게소 매점에서 요기도 하고 행장을 정비하고 길을 나선다.
02:37, 만복대까지 5.3km거리를 알리는 들머리에 선다. 어둠이 짙게 깔린 서북능선에 올라 탔다. 날씨는 적당히 싸늘하고 간간이 거센 바람이 분다. 렌턴의 희미한 불빛에도 느껴질 만큼 한창인 봄 숲의 푸르름이 어두운 등로에 벗이 되어 준다.
마음 맞는 이들과 함께 하는 산행만큼 행복한 일도 많지 않다. 동문 모임의 인원이 많아지며 산행에 임하는 마음과 경험 상태가 각기 다른 만큼,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등산을 준비하는 게 부담스러워진다. 그래서 오늘 산행은 마음을 다잡는 일이라 여겨진다. 긴 대화는 없어도 이심전심, 서로를 배려하는 이들과의 함께 걷는 건 그 자체가 행복이다.
작은고리봉에 올라선다. 예상보다 시간은 좀 더 걸렸지만 첫 오름 150m를 거뜬히 올라섰다. 오랜 만에 장거리 무박 산행이라 걱정했는데 다들 몸 상태가 좋아 보인다. 묘봉치는 어딘지도 모르게 지나고 다시 긴 오름에 선다. 새벽 어둠에 익숙해져 간다. 만복대로 향한다. 이번 비고는 350m 정도로 만만치 않다. 오를수록 걸음은 늦어지는데 5시 무렵부터 동녁에 붉은 기운이 완연하다. 멀리 어스름 뒤로 만복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산에서 보이면 금방 갈 수 있는 법이다. 힘을 내고 서로를 토닥이며 만복대 정상에 선다.
05:15, 바람이 몹시 분다. 정상에 서성이는 사람들 틈에 끼어 나도 동녁을 바라본다. 검푸른 숲 뒤로 겹겹이 층을 이루며 흐르는 산맥 넘어 구름이 지평선을 긋고, 그 뒤로 농담을 달리하는 붉은 기운이 유유히 용트림을 하고 있다. 검은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한다. 이 순간의 풍경 하나 만으도도 오늘 산행은 충분히 값지다.
사진은 바람을 잡지 못한다. 이 신새벽, 1450미터 고지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일출의 감동은 언제나 현재형이디. 같음이 있을 수 없다. 오늘은 거센 바람 속에서 형들과 함께 했다는 사실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추억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뜻 깊다.
모자가 날아갈 듯 거세지는 바람 속에서 도팔산이 이곳을 다녀갔음을 알리는 사진 한 장을 찍는다. 거센 바람에도 표정은 웃고 있다.
< 만복대 ~ 세걸산 >
조금 더 기다리면 온전한 원형으로 떠 오를 해를 맞을 수 있겠지만, 바람이 예사가 아니다. 걸음을 이어간다. 내려서며 바라보는 하늘은 점점 더 짙은 오렌지빛으로 변해가더니 마침내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비록 나무가지 사이로 보는 태양이지만 장엄하기 그지없다. 아침 햇살을 받아 산은 본연의 색을 드러낸다. 곱고 연한 기운이 산에 가득차다. 노랗고 연한 붉은 기운이 지리의 서북능선을 지배한다. 이른바 산의 황금시간이다. 그 황홀한 기운을 마음에 담으며 연신 감동하며 정령치로 향한다. 전망바위에 서고, 봉우리에 선 이들의 실루엣을 사진에 담고 한껏 여유를 부린다. 이보다 더 값진 아침은 최근 없었다.
06:20 정령치 휴게소 위 평원에 선다. 삼각대를 세우고 사진찍기 놀이를 한다. 표정에 새벽을 달려온 이들의 성취감이 묻어난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눈도 행복하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휴게소 벤치에 앉아 아침을 먹는다. 김밥, 컵라면 그리고 술 한모금... 바람 부는 노지에서 먹는 식은 음식이 초라해 보이지 않는 건, 사선을 넘어선 동지애와 이것도 감지덕지 하는 착해진 마음 때문일 게다. 유쾌한 지난 일들과 건강에 대한 걱정 그리고 소소한 일상의 일들이 대화의 주제가 되어 30여분이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다시 길 위에 선다. 큰고리봉으로 향하는 초입에 '백두산 1363km'라는 글귀가 보인다. 이곳은 백두대간, 산의 맥이 멀리 백두산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잊고 지냈던 대간 종주의 추억이 순간 되살아난다. 큰 고리봉으로 오른다. 먹고 나서 걷는 긴 오름길, 아니 힘들 리 없다. 걸음이 늦어진다. 그래도 바래봉까지 9.5km는 대세 내림길이라 11시쯤에는 철죽동산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면서도, 마음 한 귀퉁이에는 작은 오르내림이 꽤 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큰고리봉을 지난다. 그새 하늘이 더 높아진 것 같다. 여전히 바람은 거세고 대기는 맑다. 녹음이 짙어지는 숲을 걷는 기분이 참 좋다. 등로가 좁아지고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특별한 이벤트 없이 비슷한 풍경이 반복된다. 서서히 힘겨운과 지겨움이 찾아든다. 속도도 나지 않는다. 대화도 잦아든다. 길가에 한떨기 붉게 핀 철쭉이 요염하게 눈길을 끈다. 이제 그 유명한 서북능선 철쭉의 향연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설램으로 길을 나아간다. 09:14 세걸산에 도착했다. 시간당 약 2km를 걸었다. 시간 여유가 그리 많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전엔 없었던 세걸산 데크 전망대에 앉아 잠시 쉬어 간다. 멀리 산 넘어 지리산 주능선이 아스라하게 보인다. 지리는 참 큰 산임을 새삼 확인한다.
< 세걸산 ~ 용산마을 >
잠시의 쉼이 준 여유와 힘으로 한동안 힘차게 나아간다. 세동치는 어딘지도 모르게 지나고 부운치 표지목을 만난다. 이곳부턴 길이 순해지고 철쭉 군락이 있었다는 기억이 되살아 나지만, 등로의 현실은 여전히 돌투성이 험로와 꽃의 흔적은 느낄 수 없다. 이상한 건 그나마 보이는 철쭉의 꽃잎이 시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순간 깨닫는다. 며칠 전 큰 비와 태풍급 바람이 철쭉을 다 지게 만든 게 아닌가? 우려는 대개 현실이 된다더니 사실이다. 분명 오기 전 사진에서는 해발 1000미터 지대에는 철쭉이 만발해 있었는데 비바람의 꽃잔치를 망가트렸다. 지나온 만복대와 고리봉 일대의 고지의 꽃들은 아직 피지도 못했다는 아쉬움도 든다. 근데 더 안타가운 건 선배들의 몸상태가 좋지 않는데 바래봉으로 향하는 거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괜시리 죄 지은 기분이 들었다. 경험해 보았다는 건, 걸어 보았나는 게 다시 찾은 길에서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길 상황이 나아지고 꽃도 보일거야 하는 희망고문의 강도가 세 진다는 것도 두려웠다.
세걸산에서부터 변변히 쉬지도 못하고 내쳐 걸어 팔랑치에 도착한다. 2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다. 팔랑치부터는 평지 수준의 등로와 확 트인 풍경이 지친 나그네들을 반긴다. 여전히 꽃은 없다. 그래도 한결 나아진 길 사정에 기운이 나고 걸음이 빨라진다. 지나온 서북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공터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분홍 꽃은 없지만 신록이 꽃을 대신한다. 충분히 감동적이다.
바래봉은 가지 않기로 한다. 삼거리까지도 꽤 멀었다. 내려다 보는 풍경에 용산마을이 보인다. 숲 그늘도 걷고 너른 개활지도 지나 바래봉 삼거리에 도착했다. 11:45, 남은 4.2km 거리를 생각하면 용산마을에서 뒤풀이는 포기하는 게 맞다. 그런데, 이러려고 온 게 아니지 않는가 하는 오기가 들었다. 체력은 아직 남아 있다. 걱정했던 무릎 상황도 괜찮다. 형들에게 먼저 내려가 음식점에서 주문해 놓고 있겠다 말하곤, 빠른 속도로 하산한다. 다행히 돌로 포장된 길과 임도가 반복해 이어진다. 한껏 속도를 낸다. 20년 산꾼의 능력, 이럴 때 써 먹지 않으면 어디다 쓸 것인가. 다행히 한 시간 만에 하산을 끝낸다. 파전과 막걸리, 비빔밥을 주문하고 곧 내려온 형들을 기다린다. 안도감이 든다.
예상보다 길고 만만치 않은 산행이었다. 사람들은 지리산 서북능선은 재야의 유생 같은 산이라 한다. 그 의미가 묵묵하다는 겐지, 꼬장꼬장하다는 겐지 하여간 만만치 않았다. 아주 오래 지리산 서북능선을 찾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에필로그 >
형들이 음식점에 도착하고 허겁지겁 식사를 하고 버스에 오른다.
새벽에, 시간이 너무 많아 남으리라 허세를 부렸던 게 무색할 만큼, 빡빡한 산행이었다. 특별히 험한 곳은 없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작은 오르내림에 서서히 지쳐갔다. 모처럼 무박산행에 동행한 선배들에게 미안했다. 다행인 긴 산행이 뜸했던 무석형이 베테랑의 면모를 보여준 것과 탈장에 고생한 성종형이 별 탈 없이 완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아쉬운 게 많은 산행이고, 힘겨웠지만 함께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기억될 가치가 있다고 자평한다.
모처럼 푹 자고 맞는 아침, 커피 한 잔 내려 노트북 앞에 앉는다. 평소보다 빠르게 산행기를 써 내려간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표정과 푸른 지리산의 풍경에는 길을 걷는 동안의 힘겨움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 고단함까지 담는다면 내 사진이 좀 더 가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 힘겨움은 길에 놓아두고, 행복한 기분만을 남겨야 또 다음 산행에 나설 힘을 얻지 않나 하는 자기합리화도 해 본다. 분명한 건 자고 나니 평범한 일상이 더 값지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선배들과 함께 하는 다음 산행에는 기영이도 있을 것이고, 대피소에서 하루 밤을 보내는 지리산 종주 산행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산에서 만큼은 욕심 많은 후배가 리딩하는 긴 산길을 묵묵히 함께 해 준 선배들에게 감사한다.
첫댓글 주말 쉬면서 언제 산행후기 올라오나 기다렸었어. 믿고보는 김대장표 산행후기 아끼면서 잘 보고가. 혼자 보긴 항상 아까운데 책을 하나 내 보든가 블로그를 해 보시든가 하면 좋겠는데…….. 그때 감동과 피로가 다시 새롭게 느껴지네 ㅋㅋㅋ 난 아무리 뒤돌아봐도 단편적인 기억밖에 안나던데….ㅎㅎ
블로그 그런 거 생각 안 했는데, Daum 이용율이 3% 밖에 안된다 하니 없어질까 살짝 걱정되네요.
근데, 애당초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기록한 게 아니니 괜찮다는 생각도 드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다음에는 좀 더 편하고 경치 좋은 산행지로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