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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바다, 2024년 봄호 계간평)
몰아(沒我), 다시 경로를 탐색하다
박 성 현
1
아직 밤이 가시지 않은 정동진이다. 우리는 각자 편한 자세로 모래사장에 앉아 있다. 이제 곧 떠오를 태양은, 그 장엄한 풍경을 던지기 직전이다. 바다는 검은 납처럼 발가벗겨진 채 비어 있으며, 우리는 그 풍경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집중과 몰입은 틈과 균열과 차이를 허락해야 한다. 흰자위가 차츰 붉어질수록 눈꺼풀을 덮었던 비늘이 하나둘 떨어진다. 태양이 떠오른다. 망막을 가렸던 온갖 선입견과 자신을 향한 욕망이 잠깐이나마 사라진다. 빛이 움켜쥔 사물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시차(視差)는 무화된다. 이때 ‘봄’(vision)은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주체와 타자의 구별을 지우고 한 몸으로서 돌출하는 것이다. 어쩌면 태양이 솟아오르는 정동진의, 그 화엄과도 같은 풍경은, 이미 붉은 눈에 새겨졌던 미래일지 모른다.
우리가 정동진의 일출에 그토록 숙연해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무한에 가깝도록 시간이 지속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새롭게 도래하는 까마득한 상징을 직접 체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태양이 떠오르는 이 시간만큼은 각자 마음에 쌓인 ‘높이’를 허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확고한 의지 속에서 (혹은 찰라에 불과하지만 완전히 비워진 마음을 통해서) 스스로를 열어버린 대상을 마주했던 것이다. 마음의 높이를 낮출수록 우리에게 확보되는 ‘봄’(vision)은 최대치를 가질 수 있으며 여기서 가시(可視)와 비가시의 구분은 무화된다. 아울러 관점을 달리하면 ‘나’의 시선으로 대상이 이끌려 들어올 수 있는 진폭 또한 그만큼 크고 넓고 깊어진다.
분명 마음에도 높이가 있다. 그 높이에 따라 세계는 좀 더 멀리 들어오기도 하고, 그만큼 비좁아지기도 한다. 마음의 높이는,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그 시차라 해도 무방하다. 대상이 스스로를 열어도 내 마음의 높이가 이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당연하지만 우리는 대상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모르고 지나칠 수도, 혹은 왜곡할 수도 있다. 높이는 세계를 향하고 세계가 흘러들어오는 일종의 둑이다. 둑이 무너지면 경계의 무수한 고리들이 풀리며 안과 밖의 흐름은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2
그러므로, 이동순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대상이 “무슨 나무인가는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의 높이를 허무는 것은 단지 ‘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대상’과의 직접적이고 맹렬한 작용 속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사실, 정동진의 일출을 맞닥뜨리기 전부터 ‘나’는 그 풍경의 광휘를 맞이할 결심을 했다. 납덩어리와 같은 지평선을 박차고 솟아오르며 ‘내’게로 향하는 붉은 빛의 단호한 시선을 느끼면서 ‘나’와 ‘태양’의 높이를 무너뜨렸다. 이른바, 구별의 고리들을 끊어버린 것이다.
만일 우리가 마음의 높이를 고집한다면, 그 자체로써 이미 주체와 타자는 상호 인정의 변증법이라는 무한 투쟁으로 진입한 것이며(헤겔), 여기서 파생되는 ‘차이’는 ‘다름’ 아닌, 선입견과 편견, 배타적 편 가르기의 원인이 된다. 물론 마음의 높이를 지운다면 ‘차이’는 착종(錯綜)으로서 뒤섞여지며 ‘나’와 ‘대상’은 자유로운 관계로 재정립될 수 있다. 요컨대, 스며듦 혹은 뒤섞임을 통한 순수한 차이를 통해 ‘나’와 ‘대상’은 이전과는 다른 사태로 진입한다.
무슨 나무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씨앗이 바람에 날려
혹은 빗물에 떠내려가다가
어느 배수구 홀에 걸쳐졌을 것이다
그 상태로 싹이 트고
목마른 뿌리를 갈라진 시멘트 틈으로
조금씩 들이밀었을 것이다
처음엔 잠시 머물다 떠날 생각도 했으리라
그게 달과 해가 바뀌고
그대로 마음 내려 살게 되었으리라
사람의 거처도 이런 경우가 많다
— 이동순, 「나무의 거처」 전문(문예바다 2023년 겨울호)
어느 날 시인은 따뜻한 햇살을 외투처럼 걸친 채로 산책에 나선다. 산책은 막연한 걷기에 가까울 정도로 목적과 방향에서 거리가 멀다. 문득문득 마주치는 장면들이 다소 빗장을 걸고 있더라도 그는 다만 서서 고요히 바라보며 때로는 가까이 다가가 오래도록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이 ‘막연한 걷기’는 이미 그의 마음을 처음부터 낮추고 있는 것이다. 걸으면서 ‘앞’보다는 ‘옆’을 살필 때가 많다. ‘아래’보다는 ‘위’를, 표정보다는 인상과 그 주름을 읽는다. 길의 구석과 모퉁이에 한 자리를 차지한 그늘의, 아주 미세하게 펼쳐진 색의 스펙트럼을 가늠할 때도 있다. 낯선 냄새를 좇아 짖어대는 개나 허공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까마귀 떼조차도 그는 자신의 산책 속으로 ‘막연하게’ 풀어놓는다.
길이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는 시멘트 길과 공터가 겹치는 장소의 한 곳에 놓인 배수구를 눈여겨보기 시작한다. 생활에서 버려진 오수(汚水)가 잠시 모이고, 어디 있을지 모르는 정화시설로 흘러가는 통로가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배수구 홀에 식물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지나쳐도 될 사소한 장면이지만 도무지 그 재주가 믿기지 않아 가까이 가기로 한다. 나무다. 흔한 잡목인데 그것은 어떻게 여기까지 왔고 무슨 힘으로 시멘트 틈에 뿌리를 내렸으며 햇빛도 드문 공간에서 아파리를 틔워냈을까.
시인은 걸으면서 옆과 옆을 거듭 살펴보았으며, 햇살이 듬뿍 묻은 담장과 구름과 바람을 보다가 배수구 홀에 비죽 튀어나온 잡목 한 그루를 본 것이다. 산정(山頂)의 혹독한 바위 틈에서 자라는 소나무는 많이 봐왔어도, 오수나 거두는 배수구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나무는 과연 얼마나 될까. 그는 기특하고 갸륵해서 나무의 내력을 꼼꼼히 읽는다. 씨앗이 바람에 날려 왔고 아스팔트 구석에 밀려났다가 바람이나 빗물에 쓸려 이 ‘홀’에 걸쳐졌을 것이다. 그 상태로 싹이 트고, 시멘트의 갈라진 틈을 찾아내면서 ‘목마른 뿌리’를 조금씩 들이밀었을 것이다.
하나의 씨앗이 ‘목숨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이 처절하고 집요한 순간을 보면서 그는 그 삶에 얼마나 많은 시련과 고통, 후회와 망설임이 내재해 있을까 생각한다. 나무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너무도 각박해서 잠시 머물다 떠나겠다고 마음을 높게 둘러쳤겠지만 달과 해가 바뀌고 그렇게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마음을 내린 것이 아닐까. 사정이 이와 같으므로, 배수구 홀에 비죽 솟아난 잡목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간주하듯, 산정의 소나무와 대비되는 어리석고 누추하며 비루한 생(生)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때문에 시인은 “무슨 나무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분명히 쓴다. 이 문장은 특정한 종만이 이 같은 특수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무가 그러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씨앗이든 그러한 상황에 처하면 온 힘을 다해 자생(自生)한다는 것이다. 그가 본 것은 잡목의 숭고한 코나투스(conatus, 스피노자), 곧 삶을 향한 의지다. 그는 ‘나무’에서 집단표상이라 할 수 있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지운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 ‘사람의 거처’를 옮겨 적는다.
파도는 웃음을 접었다. 말과 말 사이를 오가며 춤출 것이란 비말, 바닷가에 사람들이 만발하였으니 대화를 탐낼 것이란 말, 그런 희망은 귓바퀴에 닿지 않았다. 그만 오늘의 힘겨운 단절을 몰아 막말의 수렁에 드러누웠다. 경청이란 글자를 모래사장에 써서 짠물에 적셨다. 그때야 햇살 따라 사시 좌선하는 침묵의 등이 반짝였다. 저렇게 여리고 아름다운 등짝을 가진 자는 삶을 사는 게 아니다. 그것은 면벽 이전의 침묵, 일생을 등만 보이며 말을 타는 그는 말을 버린 적도 탐한 적도 없다. 최초의 대화인 그의 그림자에선 갯내가 났다. 지나치게 지나치지 않는 그에게서 풍기는 오래된 세계의 향기. 찢어진 파도를 깁는 비말에게 넌 누구의 상처냐, 물으니 그가 말했다. 나는 조난당한 말의 파편이자 파도들이 꾸는 품위의 망울. 가무스레한 그 숨결을 더듬다가 노을의 황혼처럼 절여지는 대화였다.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눈 밖에서 바람이 분다 바다가 해독되지 않은 파도를 격하게 게워 낸다. 입술의 감정으로 웃음을 받아 안는다.
— 정미, 「침묵」 전문(문예바다 2023년 겨울호)
특이하게 정미 시인은 마음의 높이를 ‘침묵’과 대칭한다. 요컨대 시인에게 침묵은 마음이고, 그 밀도가 강렬할수록 높이는 낮아진다. 그는 자신의 마음 가운데 점점 더 단호해지는 침묵을 살피면서 해변을 걷는다. 바다에 가까이 다가선다. 맨발에 밟히는 모래 알갱이의 가볍고 치명적인 붕괴—공기로 가득했던 에드벌룬이 미세한 균열에도 둥글고 팽팽했던 형체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는 공중누각 그 쓸쓸한 자세를 닮았다. 빠져나가는 알갱이들의 불가항력적인 소실은, 침묵이라는 완강한 고집으로 이어지는 게 아닐까.
문득 그는 기억해낸다. 막스 피카르트가 말했듯, 본래 자명하게 존재하는 침묵이란 “이미 모든 것들보다 앞서 존재했고, 이것들 모두 속에 들어 있다”고. 침묵은 인간을 둘러싼 가장 원초적인 사태로 우리의 모든 행위와 태도를 신비롭게 만든다. 침묵은, 이를테면 에포케라는 멈춤 혹은 즉각적 단절이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마음에 도사린 선입견을 멈춰 세운다.
시인은 파도를 주시한다. 바닷가에 만발한 사람들과는 별개로 가볍게 날아오르는 비말조차도 웃음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말과 말 사이를 오가고 있지만 파도에는 소금기 가득한 표정만 남아 있다. 갑자기 그는 낯설어진다. 무언가 단절된 채 혹은 가로막힌 채 귓바퀴에 닿지 않는 소리들이 저 파도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리들은 닿을 수 없는 묵언이어서 귀를 활짝 열고 온 힘을 다해 집중하는 경청만이 이 막연한 실타래를 풀 수 있다. 그 확실한 방법은 침묵이다. 파도와 시인의 고요한 응시를 이어주는 교각은 오로지 침묵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때 침묵은 단호하지만 텅 비어 있는 육체-이미지로서 우리를 마중한다.
한 가지 더. 웃음을 접어버린 ‘파도’는 어쩌면 말과 말 사이를 오가며 춤을 추어야 하는 비말이다. 그 형식적이고 표면적인 말들은 이미 죽어버린 비(非)-존재들이다. 쓸모와 의지를 잃고 겉돌기만 하는 말은 ‘막말의 수렁’이다. 파도에 몰입하면 할수록 그는 자꾸만 “면벽 이전의 침묵”이라는 낯설지만 평온하고 불안하지만 안온한 세계를 떠올린다. 상식적으로 침묵은 면벽과 함께 오는 것인데, 그는 왜 ‘이전’이라는 단어에 부가된 ‘모순’을 짊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침묵이란 가장 원초적인 사태이며, 인간에 의해 오염되기 전의 순수한 말의 원시를 간직하기 때문이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갯내’와도 같은, 마음에 쌓인 모든 높이를 지운 후에야 도래하는 화엄인 것.
문득 시인은 파도를 멈춰 세우고 싶은 욕망이 인다. 영겁의 세월을 반복해서 진동하는 파도의, 보이지 않는 곳까지 파고든 내밀한 상처들을 깁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을 것이다, “너는 누구의 상처냐”고. 물론 그 질문이 향한 곳은 바로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비말은 대답한다, “나는 조난당한 말의 파편이자 파도들이 꾸는 품위의 망울”이라고. 하지만 그 말은 원시 문자처럼 해독되기를 거부한다. 다만, “가무스레한 그 숨결을 더듬다가 노을의 황혼처럼 절여지는 대화”에서 그들은 서로를 향한 ‘안’이고 ‘바깥’이다.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는 눈 밖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바다가 해독되지 않은 파도를 격하게 게워” 내는 순간, 마음의 높이는 무너지면서 “입술의 감정으로 웃음‘이 새롭게 피어나는 것이다.
3
1940년, 에드워드 호퍼는 <가스Gas>를 완성한다. 그의 시선은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의 한 주유소에 멈춰 있다. 저녁이 찾아오기 직전 마지막 빛은 우측 상단에 어렴풋한 자세로 열려 있다. 우리가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부르는, 사물이 색깔 뒤로 물러나 식별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사무공간으로 보이는 흰색 건물이 있고, 그 안에서 조명이 짙게 쏟아지고 있다. 대각선 방향으로 한적한 도로가 대지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붉은색으로 칠해진 세 대의 주유기가 밝게 빛나고 있다. 바로 그곳에서 한 중년의 사내가 주유기를 진지하게 점검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 숲은 마치 그의 그림자인 양 어둡게 펼쳐져 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묘하게도 호퍼의 시선이 어느 순간 뒤틀려 있거나 멈춰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가 표현하는 형상은 그 색깔과 무관하게 이미 침묵-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호퍼는 자신의 회화가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외로움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는 그것을 ‘외로움’이 아닌 무엇으로 바꿔놓는다. 슬픔에서 기쁨을 이끌어내고, 불안에서 안식을 찾아내는 이 기묘한 대칭은 그의 회화를 현대미술의 한 정점으로 올려놓았다. 우리는 그의 회화에서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호퍼와 같이 사물이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반복에 의한 치명적인 몰입은 생활을 비정상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하며, 우리의 정체성의 바탕이 되는 표상 체계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요컨대, 마음의 높이가 극단적으로 치솟아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 집요하게 주시하게끔 강요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의 흐름을 막아버리거나 지워버릴 수 있다. 이는 종종 우리 삶에 등장하는 징후들인데, 이를테면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자리를 반복해서 맴도는 ‘링반데룽’(ringwanderung)이 그것이다.
이 사태는 알레고리 형식으로 이미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집에서 사무실로 학교로 쳇바퀴를 도는 사람들, 혹은 아케이드를 따라 느슨하게 걷는 사람들, 사이버 공간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내면이 그러하다. 그들은 태엽 장치처럼 현실이라는 쳇바퀴에 구속되어서는 밤낮없이 맴돈다. 김다온 시인은 이 사태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는 직접적으로 ‘링반데룽’이란 단어를 쓰면서 편집증에 시달리는 인간 군상의 간유리처럼 위태하며 에드벌룬처럼 팽팽한 내면을 시로 옮겨 적는다.
1
적도의 중심에서 벗어난 직진
경로를 다시 검색하는 순간
도로 간판이 쏟아졌다
급제동으로 뒤틀리는 지평선
경계가 흐릿해진 길은 재촉할수록
멀어지는 목적지
선택을 되돌리기 위해서는
거리의 중심 좌표를 이동시켜야 한다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한 것은
안개를 몰고 온 졸음과
순식간에 뛰어든 착각
망설임으로 놓친 오후가
익숙한 습관으로 속도를 불렀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따라가다
방향이 풀어진 땅
직진이 의심되는 순간
지도 속의 길이 열렸다
2
가시거리를 벗어난 신호는
방향을 따라 이동하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돌아가려는 사람을 붙잡고
높은 빌딩 사이에서
맴을 돈다
핸들에 앉아 멈춘 풍경들
어디쯤에서 직관이 풀렸는지
정적 속으로 쏟아지는 빗소리
다시, 경로를 탐색한다
— 김다온, 「링반데룽」 전문(시인수첩 2023년 겨울호)
시인은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기분에 빠져든다. 아까부터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멈춰서서 호흡을 가다듬고 경로를 다시 입력한다. 곧이어 내비게이션이 작동하고 그는 안내에 따라 핸들을 돌린다. 그런데 도로의 간판이 반토막나며 길 위로 쏟아지는 것이다.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지만, 지평선은 뒤틀리고 무너지며 융기한다. 제어되지 않는 환시(幻視)다. 지진이 난 듯 속수무책일 뿐인 사태가 비현실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그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눈을 뜬다. 길은 있으나 낯설고 모호하며, 때로는 이방인을 적대한다는 기묘하고 섬뜩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이것은 징후를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높이와 방향이 일정한 도로를 몇 시간이고 달리다 보면 갑자기 온몸의 감각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통증이 찾아올 때가 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은 아니고 순전히 마음의 어긋남 때문일 것이지만 기도가 막혔을 때와 같은, 숨이 끊어지는 듯한 거대한 공포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는 팽팽하게 긴장하는 심장의 어딘가를 느슨하게 만들며 그 흐름이 무해하도록 생각을 멀리—적도 부근까지 놓아버린다. 경계가 흐릿해진 길은 재촉할수록 점점 더 목적지에서 멀어지는 법이다. 방향도 이완시켜야 한다. 애초에 그는 도로 위에 없었으며, ‘나’는 ‘내’가 만질 수 없는 몸인 것: 이것이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중심 좌표의 이동’이다. 도로를 달리는 그가 사태를 해소할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여전히 목적지와 방향은 오리무중이다. 사태는 “안개를 몰고 온 졸음”처럼 느슨하다가도 순식간에 전환된다. 다시 차오르는 가쁜 숨, 에드워드 호퍼의 극단적 외로움과 같은 선명한 각인이 비늘처럼 여기저기 돋아나고 있다. 차라리 망각-속-이라면 그나마 위안이 되겠지만, 이것은 결핍과 상실이다. ‘나’라는 실존이 ‘나’라는 육체 속에서 한없이 무기력해지는 이물의 세계다. 이 물음 속에서 과연 ‘나’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따라서 그는 그가 갈 수 있는 모든 방향을 의심해야 한다. 마지막에는 이 의심하는 ‘나’조차도 버려야 한다. 어쩌면 그 너머에 목적지와 방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높이가 점점 더 막연해지고 조금씩 사그라지면서 ‘지도 속의 길’이 열리게 될지도.
이제 그 공포를 벗어났다고 느꼈을 때 그는 도로 위의 점멸하는 신호등을 본다. 아직 가시거리 밖이어서 그 지시를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신호등은 묵묵히 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 사물은 길이 아닌 곳에서 막연히 서 있을 뿐이지만, 흐름을 멈추게 하거나 길을 터준다. 횡단보도가 있으니 주의하라는 당부도 한다. 말하자면 신호등은 ‘길’이 아닌 채로 이미 ‘길’이다. 우리가 과거를 인식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것이 미래를 구성하기 때문인 것처럼, 길은 길이 아닌 것으로써 우리에게 열린다.
여기서 시인은 한 가지 기발한 착상을 하는데, 그는 ‘과거’를 “돌아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미래’는 “돌아가려는 사람”으로 알레고리화 한다. 길과 길이 아닌 것이 섞이듯, 미래는 과거-속-에서 녹아내리며 새롭게 주조된다. 사건은 항시 사후적이고, 추억 가운데 깃들며 그러한 되돌아봄을 통해서 진실로 확장된다. 쳇바퀴를 벗어나는 것은 마음의 높이를 얼마만큼 낮추느냐에 달려있다. 그는 이를 정확히 안다. 이마에 내려앉는 서늘한 바람을 만끽하면서 “다시, 경로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지구는 한 방향으로 외눈이다 외눈의 시야는 편협에 가까워서 겹겹이 베껴 쓴 사막의 모래층, 해독이 난해한 달필의 메모지 같다 태양이 해바라기의 길벗인 것도 손등과 손금의 고독한 연대일 뿐 항상 제자리에 나선형의 경로를 표절한 시간적 궤적을 추적해 보지만 모로 누운 섬의 정원은 점점 황폐해져 간다
시차를 달리하는 다변적 달과는 달리 녹슨 흙비에 젖은 외눈의 가시거리 안팎, 빛의 농도는 근시안적 착시로 가파른 해안선 모서리 말리듯 사막을 횡단하는 오아시스의 민낯 같아서 황급히 늙어 가는 목주름처럼 수분이 말라 버린 미라의 전설일 뿐
테이블 위에 놓인 탄소중립
불가능을 먹고 사는 인공지는 긴급 처방에도
굴뚝의 원성은 지혈을 멈출 재간이 없다
문득 어렵사리 홍해를 가로지른
히브리 백성들, 어디에 불을 댕겨야 할지
가나안은 부재중인데
— 송병호, 「외눈 밖의 섬」 전문(문예바다 2023년 겨울호)
송병호 시인은 인류의 기원인 ‘지구’를 “한 방향으로 외눈”으로 비유한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종종 등장하는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와 묘하게도 닮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관점에서 지구는 “편협에 가까워서 겹겹이 베껴 쓴 사막의 모래충, 해독이 난해한 달필의 메모지”와 같다. 태양이 해바라기와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길벗’이라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은 결코 대칭되지 않는 “손등과 손금의 고독한 연대”이다. 시간의 궤적을 추적하는 것도 무의미에 가깝다. 외눈의 지구는 이미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46억 년을 한 방향으로 맴돌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이 폭발하지 않는 한 유한자에게 그 시간은 영겁이고 무한이다.
반면, 항상 외통에 몰리는 지구와는 달리 달은 시차를 달리하면서 끊임없이 모양을 바꾼다. 스스로 이미지를 생성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달이 그 자체로 신비한 이유는 다변의 표정 때문이다. 대낮에도 나타나고 어느 날은 팽팽하게 부풀었다가 또 어느 날은 갈고리처럼 기울어진 채 허공을 꿰맬 때도 있다. 샛노란 구체는 수많은 주름을 가지고 있으며 순간순간 다양한 의미들을 포획한다. 이른바 달은 의미의 다양체다.
시인은 잠시 외눈을 향한 마음의 높이를 지우기로 한다. 지구의 입장으로 세계를 본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에포케’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쉽지 않다. 이것은 신의 눈을 가진다는 것과 동일하다. 그래서인지 그는 매번 해무에 갇힌 등대처럼 “흙비에 젖은 외눈의 가시거리”에 맞닥뜨린다. 시계 제로에 가까운 눈이다. 여기서 ‘빛의 농도’는 무기력해지는바, 차라리 “수분이 말라 버린 미라의 전설”을 읽는 듯한 이 ‘근시안적 착시’가 외눈의 절대적 실존임을, 그래서 지구는 자신을 제외한 체내의 그 어떤 사물도 영원으로써 정립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입장-의-전환’에도 불구하고 외눈박이 지구는 불편한 운행을 멈추지 않는다. 아니다. 다시 말하자. 인간은 오로지 인간의 포지션에서 지구를 포획하고 있을 뿐인바, 어쩌면 지구는 인간에 대해 지나칠 만큼 무관심한 것일지 모른다. 자기 외에는 도무지 시야에 두지 않는데, 그것은 마치 바다가 하나의 모래 알갱이가 들고나는 데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과 같다.
물론 그 모래가 바다를 오염시킬 수도 있다. 탄소중립은 절실하고 빙하는 복구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뚝의 원성은 지혈을 멈출 재간”은 없어보인다. 인간의 이기(利己)와 탐욕이 오히려 외곬이다. 외눈이고 편협이다. 때문에 인간이 한 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증발한다 해도 지구는 애도하지 않을 것이며 그 영겁의 운행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구의 시선은 항상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먼 우주로 향한다. 그것이 지구의 마음이다. 인간과는 다른 마음 그 자체의 순수함이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시인은 스스로에게 엄중히 경고한다. “어렵사리 홍해를 가로지른 / 히브리 백성들”은 “어디에 불을 댕겨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나안’으로 명명한 지구는 허상으로써 상시 부재중이기 때문이다. (*)
박성현 ‖ 1970년 서울 출생, 2009년 <중앙일보> 등단.
시집으로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2020) 외 1권
• 박성현
• 시인, 2009년 <중앙일보> 등단,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2013), 세종도서 교양부분 선정(2018),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선정(2020), 문학나눔 선정(2021),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발표지원, 2023), 시집으로 [내가 먼저 빙하가 되겠습니다](2020),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2018). 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