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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학생운동을 탐색하다
(류등)
1. 글을 시작하며
2. 80년대 초반(80-84) 학생운동
3. 80년대 후반(85-87) 학생운동
4. 학생운동의 갈등과 퇴조(88년에서 91까지)
5. 80년대 학생운동의 의의와 한계
6. 나가는 글
1. 글을 시작하며
80년대의 ‘학생운동’은 거대한 폭풍이자 격류와 같은 흐름이었다. 시대의 아픔과 고통에 눈감지 않고 뜨거운 열정과 용기를 담아 변화를 꿈꿨던 강렬한 움직임이었다. 유신독재에 항거하던 70년대의 소시민적 저항에서 벗어나 단순한 정치권력 교체를 넘어 정치와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시도했던 혁명의 실험시기였다. 낭만적인 분노를 뛰어넘어 실천적인 변화를 이끌기 위한 과학적 이론과 방법의 실험장이었고,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한 현장이었다. 그러한 시도는 결국 노동운동과 연대하였고 1987년 중간계층의 협력을 이끌어냈으며 불완전하나마 민주화를 향한 진전을 이끌었다. 80년대 학생운동은 바로 시대의 변화를 이끈 결정적인 주체였던 것이다.
80년대 사회운동 및 학생운동은 1980년 봄의 정치적 좌절과 광주민중항쟁의 비극적 사태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79년 유신체제 독재자의 죽음 이후 한껏 달아올랐던 민주화의 열망은 박정희가 길러냈던 친위 군부세력에 의해 무너졌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쿠테타를 통하여 권력을 장악했고 기존의 군부 권력을 지속하려는 계획을 수립했지만 이에 맞서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계획은 부족했고 혼란스러웠으며 어떤 체계적인 힘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정치적 권리의 회복을 기대했던 ‘80년 서울의 봄’은 무참하게 붕괴된 것이다. 한 정치학자는 이러한 실패의 원인을 군부가 가졌던 힘의 자원이 다른 세력들에 비해 월등히 우세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신군부의 권력 장악은 정치세력에 대한 압박을 넘어 계엄령을 통해 전 국민을 통제하였고 결국 ‘광주’시민에 대한 학살을 통해 완성되었다.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군대가 자국민을 잔혹하게 살육하고 공격했다는 사실은 정부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되었지만 진실은 감출 수 없었다. 국가에 대한 배신과 분노, 학살을 묵인했고 신군부 세력을 승인한 미국에 대한 증오는 80년대 학생운동을 지속시킨 강렬한 에너지였다. 지금도 여전히 불리우고 있는 광주의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의 “산 자여 따르라”라는 문구처럼 신념과 실천의 결합으로 나타난 학생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글은 권력의 탄압과 공포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국가의 정당성 그리고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열정으로 뜨거웠던 80년대의 젊은이들의 투쟁을 정리한다. 열정과 용기는 변화를 이끌었고 민주화의 진척을 가져왔다. 하지만 과도한 관념을 바탕으로 시도된 수많은 정치적 실험은 어느 순간 일반 대중과의 괴리를 가져왔고 결국은 학생운동의 급격한 퇴조를 가져왔으며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렇게 한 시대를 장악했던 혁명적인 사회적 흐름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퇴락한 것이다.
2023년 한국 사회는 많은 부분에서 민주화되었고 선진화되었지만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시민들을 억압하려는 세력은 끊임없이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의 시작과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통한 교훈을 넘어 언제나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변혁의 중요성과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위협하는 세력과의 투쟁의 필요성을 자각시킨다. 그것이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뜨거웠던 그 시대를 복기하는 이유일 것이다.
2. 80년대 초반(80-84) 학생운동
80년대 초반 변혁운동의 실천을 지배한 사상은 사회주의였다. 특히 초반에는 정치경제학 및 물질적 기초에 대한 중요성을 자각하고 계급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흐름이 지배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에 의한 강력한 통제로 대중적인 활동은 불가능했다. 80년 쿠테타와 계엄령을 통해 국가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대학을 휴교시켰고 모든 정치적 사회적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런 억압의 시대. 학생운동은 철저하게 지하서클을 중심으로 비공개적인 방식으로 은밀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논쟁을 촉발시킨 사건은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 집단에서 시작된다. 이때 일명 <무학논쟁>이 벌어졌다. 권력의 탄압이 철저하게 압제적일 때 학생운동의 ‘시위’방식은 적절한가에 대한 논쟁이다. 기존의 학생운동 집단이 주축이 된 <무림>은 좀 더 혁명에 대한 전략과 힘이 농축될 때까지를 기다리자는 입장이었고, 반면 좀 더 혁신적인 운동권이었던 <학림>은 학생운동의 역할은 혁명의 단초를 이끄는 선구자이어야 한다는 논리를 통해 적극적인 시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학생운동은 가능한 방식으로 운동의 역량을 준비하고 있었다. 80년 말 휴교가 끝나자 운동권 학생들은 ‘학도호국단 활용, 축제의 민주화, 과학회 결성, 과단위 농촌활동, 심포지움, 대중적 집회를 통한 노동운동에 대한 선전, 공장활동과 야학, 사회성격 규명 작업’과 같은 활동을 통해 사회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대학의 환경을 적극 이용하였다. 하지만 대학 내에는 사복경찰이 상주하고 학생들의 동향을 감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규모의 시위도 초기 단계에서 제지당했다.
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의 특징적인 사건은 ‘반미’를 외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었다. 70년대까지 미국은 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한국의 동맹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광주항쟁’은 이러한 사고를 급격하게 전환시켰다. 미국은 제국주의의 논리를 한국에 적용시키며 한국을 지배하는 세력이라는 인식적 전환과 함께 광주시민들의 죽음에 미국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곳곳에서 반미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강원대 성조기 화형식을 시작으로 다양한 형태의 반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반미운동과 함께 노동자에 대한 지원을 넘어 민중과의 연대를 강조하거나 실질적인 ‘노학연대’의 움직임이 확대되었다.
학생운동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외부적 요인이었다. 84년부터 시작된 정치인 및 언론인 해금 및 석방과 같은 정치사회적 유화 정책은 대학에서도 ‘학원자율화’가 시행되었고 대학에 상주하던 경찰들도 철수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유화정책은 저항운동이 통제되고 있다는 정부의 자신감과 85년 시행될 총선에서의 승리를 위한 전략 그리고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위한 사전 준비의 성격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변화된 환경을 이용하여 학생운동은 더욱 적극적인 방향으로 전개된다. ‘학생회 부활’이 요구되었고 대학 간의 연합집회가 시도되었으며 다양하고 활발한 학생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이때 학생운동의 중요한 논쟁이 일어난다. 일명 <MC-MT 논쟁>으로 주류 학생운동 집단이었던 MC에서는 학생운동의 변혁적 역량 강화와 대중적인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었지만, 좀 더 급진적인 MT그룹에서는 <깃발>이라는 기관지를 통해 ‘목적의식적 변혁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의 전환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85 총선을 앞두고도 다른 전략을 제기하였는데. 선거 자체가 권력의 음모라는 생각으로 ‘선거보이콧’과 ‘선주체투쟁론’을 주장한 MC과 달리 MT는 ‘제휴투쟁론’을 통해 선거를 활용한 선전·선동적 활용의 효과성을 강조하면서 선거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MT가 제기한 ‘목적의식적 변혁 활동’은 점차 학생운동의 핵심 전략으로 채택되었고 학생운동은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이론과 방법을 활용하여 발전하게 되었다. MT의 문제제기(목적의식적 변혁활동)는 우리나라 변혁 운동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 즉 ‘권력과 변혁주체, 과제해결에서 계층·계급의 지위 등을 나름대로 밝히려는 노력과 함께 조직의 문제, 투쟁에서 배합의 문제 등 본격적인 사상형성의 기초를 닦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초반의 학생운동은 과학회의 활성화가 시작되었고 대자보 양식이 개발되었으며, 소규모적으로 제기되던 학생운동이 대중적, 공개적으로 제기되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 간의 연합활동이 활발하게 모색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본격적인 학생운동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당시 운동을 주도하던 <깃발>이라는 조직에서는 학생운동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①선명한 정치투쟁의 수행 ②민중지원연대의 투쟁 ③전위배출의 주요한 보급로”
3. 80년대 후반(85-87) 학생운동
학생운동이 본격적으로 수행된 시기는 85년 총선 이후 특히 86년부터이다. 구로동맹파업이나 건국대 사태와 같은 사회적 이슈를 통해 이론적으로 좀 더 체계적인 변혁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사회의 민주적 변혁에 대한 일명 ‘C-N-P'논쟁이다. 이들은 운동의 성격, 운동의 주체, 운동의 전략 및 전술 방향에 대한 중점을 달리했다. CDR(시민민주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노선에 가깝고 모순을 해소하는 과정을 반퍄쇼투쟁에서 반외세투쟁의 2단계로 설정했으며 반파쇼단계에서는 중간층이 그 이후 단계에서는 기층민중이 주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NDR(민족민주혁명)은 반외세와 반파쇼의 과제가 통일적으로 해결되는 민족민주운동을 주장했으며 특히 민족적 모순에 중점을 두었다. 기층민중이 주력이며 중간층은 보조역량이어야 하고 우선은 선진적 학생 및 청년이 운동을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PDR(민중민주혁명)은 계급적 모순을 중시했고 ’반자본민중해방‘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기층민중이 주요 세력이며 중간층은 동요세력이므로 신뢰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기본적으로 이들 조직은 운동이 반합법적 공개 대중투쟁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였다. 이들 간에 논쟁에서 CDR은 변혁성격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일찍 운동권에서 제외되었고 NDR과 PDR이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변혁운동의 주체에 대한 논쟁을 통해 ‘민족’과 ‘민중’의 중요성을 확인한 운동세력은 분명한 사상적 분화를 통해 전개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NL(민족자주)와 CA(제헌의회) 그룹이었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 대한 성격을 보는 시각과 혁명적 주체에 대한 인식 그리고 변혁의 목표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85년 총선 이후 정치사회적으로 가장 뜨거운 이슈는 ‘개헌문제’였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사회적 변혁을 위해서는 어떤 ‘헌법’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특히 논쟁의 핵심은 ‘직선제 개헌’에 대한 생각이었다. CA그룹은 현재의 기만적인 정치상황에서 ‘직선제 개헌’은 제국주의와 파쇼정권의 권력을 강화하는 음모로 귀인된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파쇼헌법철폐’와 ‘삼민(민족민주민중)통일헌법쟁취’를 목표로 한 ‘제헌의회’ 소집을 내세웠다. 즉 근본적인 한국 사회의 성격을 변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NL그룹은 대중의 정치적 역량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선은 직선제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정치를 통해 변화를 진행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헌법 개정과 맞물려 CA는 ‘혁명정부론’을, NL은 ‘과도정부론’을 주장한 것이다. CA진영은 NL진영의 과도정부론이 미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대리통치’ 세력을 기만적인 ‘민간정부’로 교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민중의 힘과 지배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민주세력만의 정부’는 존재할 수 없는 허상으로 보았다. 반면 NL진영은 CA의 ‘혁명정부론’을 교조주의 좌익맹동주의로 비판하면서 대중들의 관심이 선거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력에 의한 혁명적 방법은 적절하지 않다고 보았다. 임시혁명정부 수립 투쟁론은 객관적 현실을 외면한 조급하고 관념적 주장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들의 정치적 전략은 기본적인 한국 사회의 성격에 대한 인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NL이 보는 한국사회의 성격은 다음과 같았다. “계급적 지배는 곧 미제국주의와 일부 매판세력을 제외한 식민지 전체에 대한 민족적 지배이며 결국 민족적, 계급적 청산은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과제로 내세울 것은 민족적 과제의 해결을 위한 전민족의 총단결이다.” 반면 CA(제헌의회) 세력은 “(한국사회를)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파쇼 정권의 주도하에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룬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본다. NL진영의 꼭두각시 정권론을 비판하면서 CA진영은 국내독점 자본을 독자적인 물적 토대를 하고 있는 파쇼정권이라는 상대적 자율성론을 펼친다.”라고 보았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NL은 미제국주의의 음모를 분쇄하기 위한 반제투쟁에 중점을 두었고, CA는 ‘권리주체 의식으로의 대중에 대한 정치교육’과 새로운 ‘제헌의회’ 소집을 운동의 목표로 삼았다.
결국 학생운동을 대표하는 두 그룹은 현실적인 정치 상황에서 대립적인 구도로 충돌하게 된다. 87년 박종철 사망과 정의구현사제단의 진실 발표 이후 일어난 6월 항쟁과 이에 굴복한(?) 6.29선언에 이르기까지 급격하게 전개된 혁명적 분위기는 1980년 봄과 같은 정치적 희망을 다시금 분출시켰다. 이때 운동권에서는 군부 세력의 후보에 이기기 위한 전략을 갖고 다시 분열되었다. NL그룹에서는 김대중을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론’과 사실상 김영삼을 지지하는 ‘단일 후보론’이 나타났고, CA그룹에서는 ‘독자(민중)후보론’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NL그룹의 적극적인 선거 참여의 배경에는 NL그룹 산하 애학투(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의 급진적인 구호와 86년 건대사태에 대한 전략적인 반성이 담겨있다. 86년 건대사태에서는 급진적인 좌익적 슬로건이 넘쳐났다. ‘반공이데올로기 분쇄와 조국통일추진’과 같은 주장은 일반 대중들에게 외면당했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도발성, 무모한 모험주의, 대중의 자주성 무시’ 등을 이유로 비판받았으며 이후 대중의식화와 조직화에 반성을 통해 운동 전략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특히 조직적인 변화는 기존의 서클 중심의 운동권 조직에서 학생회 및 대중조직을 통한 운동권의 집결이라는 변화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엘리트 그룹의 권한이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일률적이고 집단적인 학생회 중심의 학생운동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진보적 서클 해체에 대한 평가는 다소 부정적인 것이 많다. “이전의 서클이 담당하던 의식화를 통한 학생운동의 계승 작업은 해체되고 대신에 일률적인 교육체계 속에 맡겨지는데 이로 인하여 (결정적으로) 자주적인 의지에서 출발한 책임성을 띤 재생산이 되지 못하였고 투쟁에 지지거나 비생산적인 정치토론과 분파 유지에 급급하는 것, 아니면 수배로 인하여 여러 부분에서 활동정지를 맞이하였다.” 서클 해체는 대중과의 결합이 단선화되거나 형식화되고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연대를 약화시켜던 것이다.
4. 학생운동의 갈등과 퇴조(88년에서 91까지)
87년 대선을 통한 변혁운동의 추진력을 얻으려는 시도는 노태우의 당선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대선을 둘러싼 분석과 책임 공방을 통해 운동권 세력은 다시 이합집산하게 된다. CA세력은 NL과 PD로 분열되었고 이후 운동권은 계급적 모순보다는 민족적 모순을 중시하면서 ‘북한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 NL 세력과 계급적 모순의 해결에 방점을 두면서 노동자 및 기층민중과의 연대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려는 PD세력으로 양분된다. 전국적인 운동조직도 대선전 운동권을 이끌었던 ‘민통련(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과 ‘국본(국민운동본부)’이 해체되고 ‘전민련’이 수립된다. 운동권의 분열과 정치 사회의 정세에 대한 분석에 실패했다는 반성에 기초하여 ‘분열을 통한 통합’을 제기하며 시도한 운동조직은 ‘전민련’으로 재조직된 것이다.
87대선은 사회운동이 추구했던 민주세력의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지만, 운동에 대한 억압이 축소되고 운동세력의 확장을 가져오면서 운동권의 역량은 80년대 말 일시적으로 팽창하였다. 80년대 말 NL 운동의 중심은 ‘민족-통일’운동이었다. 89년에는 문익환과 임수경의 북한 방문도 이루어진다. 운동의 주체세력도 변모하였다. 80년대 중반까지 운동을 주도하였던 서울대, 연대, 고대 중심의 명문대에서 일반대 및 지방대로 확산되었다. 특히 89년 전대협 의장에 한양대 임종석이 선출되면서 한양대가 학생운동의 중심으로 부각되었다. 당시 대학학생회와 과학생회의 대표는 대부분 NL계열이 선출되었고 PD는 상대적으로 소수였다. 이러한 운동권 구조는 이후 진보운동의 성격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당시 PD세력은 민주자주를 앞세우며 ‘통일운동’에 전념하는 NL계열을 공격하였다. ‘이철규 의문사’ 사건이 났음에도 ‘반파쇼민주화’ 투쟁에 적극적으로 전개되지 않은 것에 대해 ‘통일투쟁에의 매몰, 무원칙한 통일 투쟁의 전개’라고 비판한 것이다.
NL진영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요인은 그들이 갖고 있던 혁명의 전략과 전술의 선명성이나 분석적 능력에 있기 보다는 민족에 대한 정서적 중요성과 대중노선의 강조에 있었다. “NL계 학생운동은 민족의 고통과 저항의 집단적 기억을 통해 집합적 정체성을 강화한다. 민족의 슬픔에 자신을 대입함으로써 폭력에 저항하고 결국 민족의 대의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또한 주체사상의 ‘품성론’에 기초한 혁명가의 자세에 대한 감정적 영향도 컸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학생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혁명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뜨거운 열정과 포기하지 않는 신념에 대한 강조에 강한 동조를 느꼈다고 한다. 당시 ‘강철서신’에는 품성론에 대한 이러한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있다. “선한 노동자의 발굴과 선정에서 1차적 기준이 되어야 하는 것은 품성이다. 솔직, 소박, 겸손, 성실, 용감한 품성을 갖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 품성은 사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한 사람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NL진영은 <전대협> 행사의 일사분란한 성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집단주의적이고 위계적이며 목표지향적 성격이었다. NL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적 가치규범인 권위주의, 집단주의, 연고주의가 강하게 작동하였다. 구성원의 의리를 강조하였고 선후배의 서열을 중시했다. 공적인 정치적 조직에서도 원칙과 규칙보다는 인간적인 정서를 중시하였다. 이런 점이 운동권 학생들의 정서에 더 강하게 작용하였고 더 많은 관심을 끌어들였는지 모른다. 반면 PD계열은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고 개인주의적 민주주의, 연령이나 성별의 차이보다는 평등, 다문화 등 후기산업사회의 가치를 더 중시했다. 이런 문화적 차이는 다양한 논쟁과 결정에서 심각한 분열을 이끌었다.
운동권의 분열과 논쟁은 더욱 극력하게 진행되었고 결국 1990년대 초 운동권 몰락이라는 비극적 결과로 끝이 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전대협과 같은 운동 조직을 통한 운동권의 주장은 민주적 절차가 도입된 상황에서 점점 대중들과의 괴리를 확대시켰고 특히 1991년 명지대 강경대 사망 이후 벌어진 수많은 분신은 대중들의 지지보다는 회의와 불신 그리고 운동권 전체에 대한 도덕성의 문제를 확대시켰다. 형식적이나마 수립된 민주적 절차와 제도는 더 이상 80년대의 혁명적인 운동 방식이 작동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 정치학자는 한국 사회의 보수적 성격을 지적하면서 민중적이고 급진적인 운동이 지속되기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간 계급과 대체로 이를 대변한 야당 정치인들은 원래 보수적 이념의 사람들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안정을 원하였고 이 둘이 충돌할 때는 민주주의보다는 안정을 선택했다. 노태우 체제에서 집행된 자유민주주의 절차에 만족한 이들은 더 급진적인 민중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세력에게 등을 돌렸다.”
5. 80년대 학생운동의 의의와 한계
80년대 학생운동은 80년대 초반 독재 세력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출발하였다. 신군부의 탄압 속에서 대중적이고 변혁적인 사회운동의 공간은 불가능했으며 정치인들은 구금되고 모든 언론은 정상적인 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유일하게 공개적인 활동이 가능했던 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한동안 한국 사회의 변혁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80년의 광주항쟁의 비극은 점진적이고 개량적인 개혁의 가능성을 배제했다. 잔혹한 총칼을 통해 자국민을 살해한 군부에 대한 저항은 철저하게 혁명적이고 체제변혁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많은 학생들은 민족의 고통과 저항의 집단적 기억을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시켰고 민족의 슬픔에 자신을 대입하는 감성적 연대를 통해 폭력에 저항하고 민족의 대의와 새로운 국가 건설에 자신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극히 순수하고 열정적인 결정이자 용기였다.
국가의 통제와 억압 속에서도 꾸준하게 이어진 학생운동의 동력은 결국 1987년 중간계층을 포함한 시민운동의 열기를 이끌어냈으며 6.29 선언을 통해 신군부의 전략적 후퇴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러한 변화가 군부 세력의 장기집권을 위한 전략적 시도에 농락되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분명 한국사회의 민주화 단계는 진전하였다. “1987년 6월 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분수령이었으며 대중의 민주화 열망이 극명하게 표출된 정치 변동이라 할 수 있다.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립했고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성공을 통해 대중의 힘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켰으며, 최초의 전국적 대중조직인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결성을 통해 이후 사회 각 부문과 지역 간 연대운동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한 운동권 인사는 80년대 학생운동의 사상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86년 이후 학생운동의 사상이론 투쟁의 의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민족과 민중의 온갖 고통, 구속과 예속의 뿌리를 확고하게 인식하였다는 데 있다. 즉 외세와 사대매판세력이야말로 우리가 겪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한국변혁운동 및 조국통일의 대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과학적 이론과 방법의 출발점이며 애국민주운동의 비약적 발전을 보장하는 기초적 문제에 대한 해결이다.”
하지만 87년 6월 항쟁 이후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거리의 정치는 일단 제도권으로 진입하였고 민주화를 향한 투쟁은 거리가 아닌 제도권 안에서의 경쟁, 즉 선거경쟁으로 전환되었다. 혁명적 운동세력은 좀 더 근본적인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민중민주주의와 민족자주에 입각한 통일정책을 주장했지만 야당과 중간계급은 군정종식과 자유민주적인 민주화를 달성하는 것에 만족함으로써 운동권의 급진적인 주장에 대해 거리를 두게 되었다. 실제로 87년 대선에서 운동권은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으며 선거의 결과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도 못하였다. 오히려 야당 정치인들의 분열에 운동권 또한 종속적으로 작용했을 뿐이다.
시민들의 지지를 상실한 운동권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기 위한 시도 대신에 그들만의 목표와 활동에 집착하였고 과격한 방식에 의존하게 되었다. 특히 민주화의 과정 속에서 확대된 NL 중심의 운동권 세력은 급진적인 반미와 민족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89년의 전대협의 <평양세계청년 학생축전>에 대표를 보낸 사건은 같은 운동권 내에서도 비판을 받았다.
한국사회의 지배구조는 80년대 중반까지 국가독점세력과 반독점세력과의 이분적인 대립구조였으나 87대선 이후 국가독점세력, 야당세력, 민중세력 이라는 3개의 축으로 분할되었고 국가와 야당 정치세력은 ‘보수연합’의 방식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제한적 민주화와 의사 개량화 정책을 통해 민중운동의 동력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경제적인 호황과 국제적인 정세 또한 공격적이고 전면적인 변혁 운동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으며 민중운동은 점점 고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국의 야당세력과 중간계급은 자유민주주의와 사회경제적 안정을 원했던 것이다.
진보적인 민중운동이나 학생운동의 역사를 볼 때, 대중과의 협력을 상실한 운동은 성공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86년 건국대 사태에서도 당시 운동을 주도한 집단은 ‘미제축출, 북한과의 교류’와 같은 급진적 주장을 내새웠지만, 대중들의 호응이 적자 운동의 방향을 수정하여 ‘직선제 개헌’이나 ‘민주화’에 초점을 맞췄고 이는 87년 6월 항쟁에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운동이 ‘대중성’을 상실하고 자신들만의 논쟁에 빠지게 되었을 때, 진보적 운동은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혁명의 시대에서 개량의 시대’로 바뀐 시대적 변화를 인식하고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모색해야만 진보운동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학생운동의 성장과 몰락을 통해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90년 초반 쇠락한 학생운동의 동력을 되살리기 위해 남아있던 운동권 세력은 전대협을 해체하고 ‘한총련’을 결성한 이후 1996년 8월 광복절을 기해 <연세대 점거 사태>라는 대규모 저항운동을 전개했지만 시민들의 압도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저놈들 자기들끼리 아직도 1980년대에 살고 있음?’ 라는 싸늘한 국민 반응을 이끌었고, 8월 18일 MBC 여론조사 결과 72.5%의 국민들이 단호한 대처를 지지했고 80%의 국민들이 시위가 정당하지 않다고 의견을 표했다. 특히 나중에 알려진 한총련 지도부의 기만적인 행태는 그나마 남아 있던 지지자들마저도 싸그리 정리하면서 한총련과 학생운동이 몰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인터넷 기사처럼 학생운동은 출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6. 나가는 글
학생운동이 몰락한 후, 사회운동의 주류는 시민운동이 되었다. 시민운동은 기존의 변혁운동이 비현실적이고 사회문제와 모순의 다양성과 중층성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하면서 주택. 공해, 소비, 젠더, 환경 등의 특정 사안을 중심으로 대중들의 실제적인 생활상의 이해와 개선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현대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했음에도 계급적 사고에 몰입하는 경직성을 극복하고 중산층의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춘 시민사회의 정립을 주장한다. 시민운동의 전략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집단 이해의 법적 관점과 갈등의 제도화를 통한 해결을 목적으로 한다. 결국 시민운동의 초점은 노동자 계급이나 빈민 계층이 아닌 중산층을 중심으로 자율적인 사회집단의 정치적 결집에 따라 생활세계의 민주화와 정치적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영역을 확장하는 전략에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민주주의 형식적 실현은 혁명적인 민중운동의 실현에 한계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러한 개량주의적인 시민운동이 사회운동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에는 일종의 의문이 제기된다. 시민운동의 방향이나 전략이 실질적인 민주주의와 사회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사회정의는 단지 경제적 자원을 배분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사회의 부정의는 실제적으로 사회적 이해를 둘러싼 계급 간의 갈등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계급이나 계층 간의 갈등을 협소한 법치의 개념이나 대의적 민주주의에서 개선할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졌다. 권력을 장악한 집단은 교묘한 방식으로 소외된 집단의 권리를 빼앗고 압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력감의 원인 중의 하나가 지나치게 세분화되고 소수의 집단적 이해와 관련된 주장과 관련된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즉 어떤 운동이나 주장이 전체적 사회의 개선이나 변혁적인 가치에 토대를 두지 않은 채, 각자의 이익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주장된다면 이익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무관심만이 나타날 것이다. 근본적인 가치의 지향과 시민과 사회적 약자의 연대에서 시작되는 전체적인 비전과 행동의 목표가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거시적인 전략과 그것에 기초한 각 집단별 전술이 수립되어야 한다. 최근 시민운동에서는 거시적 목표의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던 80년대 학생운동의 전략과 전술 활용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거시적 목표와 전략을 토대로 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계획과 개별적 집단의 효율적인 목표가 수립되어야만 사회운동의 동력을 되살릴 수 있다. 현재 각각의 단체에서 목소릴 높이고 있지만 시민 전체의 관심과 연대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은 그러한 개별성이 더 나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공동체적 관심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은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인 목표와 계획에 집착함으로써 실패했지만, 그들이 지향했던 총체적인 목표와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인 접근방식은 현 시점에서 다시금 고려할 필요가 있는 사회운동의 전략일지 모른다. 궁극적인 활동의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개별적인 것들의 조화가 필요하다. 현재는 너무도 개별적인 것들의 집중되어 있어 전체와 총체성을 잃어버렸다. 개별적인 것들의 변화를 통해 전체를 바꾸는 것일지라도, 최소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성격과 우리가 포기하지 않아야 할 가치, 우리가 반드시 거부해야 할 위험에 대한 보편적인 합의를 향한 필요성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살펴보면서 얻은 교훈일지 모른다.
첫댓글 - 글을 읽다가,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민주주의여."
* 왜 하필 이 시인의 이 시가 떠오르며 민주주의라는 단어로 바뀌어지는지.......
- 80년대 학생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하여 지속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의미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