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주민운동교육원 제10차 주민운동포럼』
사회복지와 노동인권
하 종 강 / 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
1.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사회안전망
2. 교육 문제와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3. 노동인권을 바라보는 시각
4.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
5. 노동자·노동조합에 대한 바른 이해
----------------------------------------------------------------
1. 사회적 약자의 권리와 사회안전망
사회문제에 대한 관점
역사와 사회를 보는 올바른 관점은 반드시 지식과 교양이나 인격의 수준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개인의 덕성이나 지식의 수준과 무관하게 사회적 약자들의 요구가 옳은 경우가 많은 이유는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가 그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나 노인 또는 장애인들처럼 죄 없이 고통을 당하는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는 중요한 방식은 우리 사회를 조금씩 평등한 구조로 바꿔가는 것이다.
“불굴의 노력으로 성공하라”는 충고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가장 익숙하게 훈련받아온 미덕이고,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고 가르치지만 열심히 노력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소년 소녀 가장이 명문대에 합격했다거나, 장애인이 피눈물 나는 노력 끝에 세계적 음악가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들은 충분히 감동적이지만, 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그러한 개인의 성실한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폄하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성공담을 읽으면서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결국 나의 게으름과 무능과 불성실 때문”이라는 열등감을 느끼며 패배자처럼 살아가는 것을 옳지 않다는 것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교훈은 사람들로 하여금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할 우려가 있다. 소수의 초인적 성공담들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면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가 개인의 불성실로 은폐되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자연의 이치를 거슬러 키가 지나치게 큰 나무는 키 작은 나무에게 햇볕을 가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키 작은 나무가 햇볕을 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키를 키우거나 키 큰 나무의 햇볕을 가리는 가지를 걷어내는 수밖에 없다. 키 작은 나무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숲의 구조가 더욱 평등해지는 방향으로 노력할 수밖에 없는데, 현대 산업사회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사회운동을 강제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예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회운동이란 노동자 개인의 성실한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사회 구조(법과 제도)를 개선함으로써 해결하는 것이다.
기부문화조차 정착되지 못한 한국 사회
기부금 통계는 집계 방식과 지표가 매우 다양해 일률적으로 비교하기는 어렵다. 개인 기부금, 기업 기부금, 정치 후원금, 종교 헌금 등을 포함하느냐 마느냐에 따라 기부금액 통계 역시 큰 폭의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미국 사람들은 1년에 한 사람이 120만원의 기부금을 내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9천원밖에 내지 않는다는 통계도 있고, 또 다른 통계에 따르면 미국은 1인당 연간 기부금이 200만 원 가량 되는데, 우리나라는 10만원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 두 배쯤 되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 사람들만큼 자기 수입에서 일정 비율의 기부금을 낸다면 한 사람이 1년에 100만 원쯤 내면 된다. 4인 가족이라면 그 가정에서 1년에 400만 원쯤 기부금을 내면 미국 사람만큼 하는 셈이다.
미국 사람들은 89%가 기부 활동에 참여하고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50%는 1년 동안 단 한 푼의 기부금도 내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어떤 통계수치에 의하든 우리나라 기부문화가 부끄러운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엄연한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기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는 법과 제도
미국식 기부문화는 사회 구조를 바꾸지는 못한다. 가난한 이웃을 도와주기는 하지만 그들의 몫을 빼앗아 가는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자선 사업가들이 부패한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북유럽 나라들은 기부문화를 제도화함으로써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세계 최대의 휴대폰 회사 ‘노키아’의 부회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법규를 단 한번 위반하고 1억3천만 원의 범칙금을 냈다. 재산과 수입에 따라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볼보’의 회장은 1년 수입의 85%를 세금으로 낸다. 그래도 여전히 최고의 부자이고 기업 경영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한 제도가 도입되면 오히려 기업 경영을 투명하게 만들어 기업경쟁력을 높이고 국가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북유럽 나라들에 그러한 제도가 확립된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해 준다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ㆍ서민들의 권리가 확대되는 것이 사회 전체의 발전에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화 <대단한 유혹>과 사회안전망
<대단한 유혹>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캐나다 외딴 작은 섬에서 120명쯤 되는 주민이 모두 실직자가 된 뒤, 복지수표를 받으면서 근근이 살아간다. 마을 사람들은 이 외딴 작은 섬에 공장을 유치해, 떳떳한 노동자로 살아가고 싶어 한다. 공장을 유치하려면 그 마을에 반드시 의사가 거주해야만 한다는 것이 그 사회의 제도이다. 노동자들의 건강관리가 불가능한 지역에는 공장을 지을 수 없다는 뜻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 섬에서 한 달 동안 봉사활동을 한 뒤, 섬을 떠나려고 하는 의사에게 그 마을의 ‘이장’쯤 되는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8년 동안 복지수표나 바라며 줄을 서 왔어. 자네는 한번이라도 복지수표를 받기 위해 줄 서 본 적이 있나? 자네는 돈도 벌어야겠지만 부끄러움도 벌어봐야 돼. ‘의사가 없으면 마을도 아니다.’ 그게 진실이야. 우리가 의사 한 사람 구해보자고 이러는 게 아니네. 마을 사람 120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이러는 거라구.”
캐나다 작은 섬의 주민 120명이 8년 동안 아무런 직업도 없이 단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도 한 엄마가 아이들 셋을 아파트 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자신도 함께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독감에 걸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들을 병원에 데리고 갈 돈이 없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엄마가 세 아이를 데리고 남의 동네 고층 아파트까지 찾아가는 동안 마음이 오죽했을까?
영화 <대단한 유혹>에 나오는 사회에서는, 돈을 내지 못해 전기가 끊긴 집에서 촛불을 켠 채 잠들었던 할머니가 불에 타 죽지도 않았고, 돌봐줄 어른이 없는 가난한 어린 아이가 개한테 물려 죽지도 않았고, ‘긴급생계급여 대상 빈곤층’에 해당하는 가정의 장롱 안에서 네 살배기 아이가 굶주려 숨지고 두 살짜리 동생은 영양실조로 목숨이 위험한 상태로 발견되지도 않았고, 맞벌이 부부가 직장을 구하러 나가면서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갔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아이들이 타 죽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실직한 사람들이 다시 당당하게 노동자가 될 때까지 기업의 금고와 부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으로 마련된 돈으로 8년 동안 먹고 살 수 있었다.
최소한 이렇게 돼야 한다. 스웨덴 사민당이 65년이나 집권을 했다가 12년만에 총선에서 패배하자 우리나라 보수 세력들은 “복지국가의 사망”이라고 진단하고 “스웨덴 국민들도 결국 복지보다 성장을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웨덴 복지 모델의 뼈대를 그대로 유지하는 스웨덴 집권 우파연합의 정책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의 시각으로는 ‘극좌파’에 가깝다. 스웨덴 우파연합은 그 정책들을 상당 부분 왼쪽으로 옮기는 변신을 함으로써 표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중산층들이 가장 많이 이민 가고 싶어 한다는 뉴질랜드, 호주, 캐나다 등도 이미 무상의료가 실현됐다. 같은 나라의 국민이라면 질병에 걸렸을 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같은 치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권리가 많은 나라들에서 이미 제도화됐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의 ‘복지병’을 걱정하는 것은 마치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에게 다이어트를 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옳지 않은 생각이다.
2. 교육 문제와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
노동인권과 교육의 관계
네덜란드 중학생에게 장래 희망이 뭐냐고 물었을 때 ‘벽돌공’이라고 답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벽돌공 일하는 곳에 가 봤는데, 하루 종일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일할 수 있더라.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벽돌 기술자가 돼 평생 음악을 들으며 행복하게 살겠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학에 가지 않고 벽돌공이 되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그 중학생의 꿈이 충분히 실현 가능한 이유는 벽돌공의 수입이 대기업 정규직이나 대학교수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노동기본권이 보장돼 저임금이 해소되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도 인생의 낙오자가 되지 않으려면 스포츠 스타나 아이돌 가수들처럼 그 분야에서 일인자가 돼야 한다. 그러나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경쟁에서 승리해 일인자가 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지역 주민들에게 운동을 가르치며 사는 마을 체육관 운동 코치의 수입이 대학교수와 큰 차이가 없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직종 간 임금 차별이 해소되면 학문에 뜻이 없으면서도 단지 취업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는 일이 사라진다. 핀란드 같은 나라들에서는 대학원 학비까지 정부가 지원한다. 그런데 대학 진학률은 우리나라의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들만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이다. 남달리 공부를 좋아하는 학생들이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대학 진학을 선택해야 바람직한 사회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나라들도 많다.
한국은 OECD 가입국들 중에서 저임금과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고임금과 저임금의 차별이 없어지고 사회 양극화가 해소되고 노동자 권리가 존중돼야 교육 문제도 해결된다.
독일에 살던 한국 상사 주재원의 아이가 취학통지서를 받았는데 “귀댁의 자녀가 입학 전에 글자를 깨우치면 교육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주의사항이 표기돼있더라는 것이다. 그 부모는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 채 학교에 가게 할 수는 없어서 간단한 산수와 알파벳만 가르쳐서 보냈더니, 며칠 뒤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해서 “왜 그렇게 비겁한 일을 하셨느냐?”고 주의를 주더라는 것이다.
영국에서도 “선행학습은 커닝보다 부도덕하다”고 가르치고, 프랑스에서는 취학 전 아이들에게 유치원에서 알파벳이나 구구단을 가르치면 벌과금을 부과하거나 허가를 취소하는 등 강력하게 규제하는 규정이 있다.
학교 교육의 노동인권교육
시민 권리의식을 함양하고 노동인권을 이해하는 데 많은 비중을 할애하는 다른 많은 나라들의 교육과 달리 우리나라 제도권 교육에서는 노동인권교육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선진국 제도권 교육에서는 일찍이 보편화돼 있는 노동법, 노동운동, 노동조합 등에 관한 교육을 도외시해 교육을 통한 노동자 권리 이해 기회가 매우 부족할 뿐 아니라 청소년, 학생, 청년, 시민 등 사회 구성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언론의 왜곡된 정보 전달 등 간접적 경험을 통해 오히려 노동운동은 뭔가 대단히 불순하거나 불온한 활동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청소년이나 학생들은 장차 대부분 노동자가 될 것임에도 ‘노동’에 대한 아무런 개념 정리도 없이 직업 전선에 투입된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장차 노동자가 되거나 최소한 노동자 가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도 노동문제를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독일의 학교 노동인권 교육
독일에서는 초등학교에서 모의단체교섭이 일상화된 특별활동으로 자리 잡혀 있어, 학생들이 1년 동안 여섯 차례에 걸쳐 모의노사교섭을 진행한다. 초등학생 때부터 경영자 역할도 맡아보고 노동조합 간부 역할도 맡아 보면서 미래 사회에 대비한다. 모의 교섭을 할 때에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노동조합 실제 규약에 근거해 교섭위원을 선출할 정도로 철저히 진행한다. 기업 경영에 관한 각종 자료들이 주어지면 학생들이 스스로 경영자 대표들을 뽑고 노동조합 대표들을 뽑아 임금협상을 하고 단체협약을 체결해보기도 한다. 적정한 임금인상률에 대한 고민과 그 단체협약이 노동자의 삶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판단을 초등학교에서부터 경험하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이 모의노사교섭을 벌이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340쪽의 분량 중에 93쪽을 노동교육에 할애하고 있는 중등 사회과 교과서도 있고 청년 실업에 관한 내용을 29쪽에 걸쳐 설명한 교과서도 있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내용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사실들”을 토론 주제로 다룬다. 독일 금속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체결한 임금협약, 금융노조와 사용자단체가 체결한 기본협약 등과 함께 노동조합이 발표한 성명서, 노동문제에 대한 신문기사 등이 교과서에 수록된다. 교과서에서는 “노사관계란 가족관계를 제외하고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관계이며 민주주의와 공동결정의 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 말이 백번 맞는다. 실제로 가정에서보다 회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하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학생들 대부분이 장차 노동자가 되는 사회에서는 학교의 정규 수업 과정에서부터 노동문제를 중요한 비중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
프랑스의 학교 노동인권 교육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 과정의 사회 과목에서 ‘단체교섭의 전략과 전술’에 관한 내용을 전체 교과서의 3분의 1 정도의 비중으로 가르치기도 한다. 노동자 편향적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기업단원’도 ‘노동단원’과 같은 분량이다. 기업 민영화 사례도 나와 있다. ‘시장의 한계’도 다루지만 ‘공권력 개입의 전제 조건’도 다룬다. 카를 마르크스, 존 메이넌드 케인스, 칼 폴라니와 함께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 슘페터 같은 자유주의 학자들의 경제사회 관점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왜 그런 내용을 몇 달 동안 가르쳐야 하는지 의문을 품을 사람도 많겠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그러한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사회 발전에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라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노동자와 그 가족인 사회에서 일찍이 제도권 교육에서부터 노동조건이 노동자의 삶과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해 알아보고, 노동조건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공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 노동자가 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이러한 교육을 받고 경영자가 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이러한 교육을 받고 정치인이 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이러한 교육을 받고 대학교수가 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 이러한 교육을 받고 언론인이 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에서 노동문제를 이해하는 수준은 같을 수가 없다. 거의 산 것과 죽은 것만큼의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독일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마찬가지이다. 궁금한 분들은 한국노동교육원이 발행한 400쪽이 넘는 보고서 “선진 5개국 학교노동교육실태”를 참고하기를 권한다.
3. 노동인권을 바라보는 시각
유럽 사회의 노동인권에 대한 시각
프랑스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면 초고속 열차 ‘떼제베(TGV)’에 시민들이 콩나물시루처럼 갇힌 채, 열 몇 시간이나 거북이 운행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데, 숨 막힐 듯 갇혀 있는 시민들이 거의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혹시 어떤 사람이 불평을 하면 더 많은 시민들이 그 사람을 타이르고 충고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비난하면, 지금 노동자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는 우리 시민들의 권리까지 빼앗게 되는 것을 왜 모릅니까? 노동자 권리부터 지켜져야 시민들의 권리도 지켜진다는 것을 왜 모릅니까?”
그렇게 따지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프랑스는 시민혁명의 종주국이고 국민들의 철학 수준이 세계에게 가장 높은 나라여서 특별히 그런 정서를 갖고 있을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어떤 이가 라디오방송을 들으며 퇴근하고 있었는데, 여러 나라에 거주하는 통신원들로부터 각 나라의 화제를 전해 듣는 프로그램에서 이탈리아의 통신원이 버스 파업에 관한 소식을 전하더란다. 이탈리아 어느 지방 도시의 버스 회사 노동자들이 3년 동안 500번이나 파업을 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의 노동자 파업에 관한 시민들의 연대의식은 귀가 닳도록 들었던 터라, 관광의 나라, 축구의 나라, 좀도둑과 소매치기가 많은 나라 정도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의 경우가 궁금했는데, 그 통신원의 말을 옮기자면 대략 이러했다는 것이다.
그 도시의 시민들에게 “버스 회사 노동자들이 3년 동안 500번이나 파업을 해서 도시교통이 수시로 마비가 됐는데,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우리나라 언론인들은 질문도 꼭 이런 식으로 한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답변이 나오더란다.
“그들도 파업을 할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기 때문에 불편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불편하다고 불만이나 늘어놓으면 나중에 내가 파업할 때 누가 나의 권리를 이해해 주겠습니까?”
이탈리아에서도 노동문제에 대한 그러한 시각이 대중의 정서인데, 우리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인 것이다.
미국 사회의 노동인권에 대한 시각
프랑스 배우 줄리 델피가 출연하고 감독도 맡은 영화 <뉴욕에서 온 남자, 파리에서 온 여자(2 Days In Paris)>에는 다음과 같은 장면이 나온다. 집에 좀 늦게 들어온 딸에게 엄마가 이유를 묻자, 딸이 답한다. “데모 때문에 차 막히고 난리 났어요.”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딸에게 이렇게 타이른다. “불쌍한 간호사들이 파업도 못하니? 여기는 미국이 아니야.”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천박한 자본주의’ 미국에서나 하는 교양 없는 짓이라는 은근한 비난이 그 짧은 대사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에서도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시각이 우리나라처럼 편협하지는 않다. 2008년 초, 미국에서 골든글로브 영화제 시상식 행사가 열렸을 때, 배우는 한 명도 없이 사회자만 참석해 수상자를 발표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미국 작가노조의 파업에 배우들이 동조해 영화제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방송사의 작가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을 벌였는데 탤런트와 배우 등 유명 연예인들이 그 파업에 동조하면서 한 명도 출연하지 않더라…. 그런 일을 우리는 상상하기조차 어렵지만 미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철저한 시장경제주의자인 미국 노사관계 전문가조차 한국 정부가 주최한 세미나에 참석해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것은 운동선수의 팔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파렴치한 일인데,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이 아무런 부끄러움도 없이 ‘무노조 경영’을 자신들의 경영 철학이라고 말하고 국민들이 그 말에 분노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의 노동인권에 대한 시각
우리나라처럼 노동자들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노동조합 활동 - 임금 인상 투쟁 등을 마치 사회적 범죄행위처럼 취급하는 정서를 가진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류 경제학에서조차 경계하는 재벌 기업이나 경영자의 특수 이익이 우리 사회에서는 마치 보편 이익인양 교육되고 홍보된다. 보수 언론만이 아니라 기업의 광고비로 운영되는 경제신문들은 노동자 권익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다양한 내용으로 전파하고 재벌의 족벌 경영을 합리화하는 주장까지 펴고 있지만, 자신을 교양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그러한 언론 보도에 별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는 노동자의 권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정서가 역사 속에서 제대로 자리 잡아 본 적 없이 노동운동에 대한 그릇된 혐오감을 수십 년 세월 동안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해온 사회이다.
쌍용차 사건은 회사가 2600여명의 노동자들을 강제로 정리해고하면서 시작됐다. 그 뒤 3년여 동안 노동자와 가족 24명이 사망했고, 그중 13명은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 파업 도중 공장을 나와 끝까지 남아있지 못했다고 자책하며 동료들의 연락조차 마다하는 조합원들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훨씬 많아질 것이다. 가족에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몇 자 남겼을 뿐, 제대로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유서조차 쓸 수 없을 만큼 생에 대한 기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나와 참혹한 진압 장면을 지켜봐야 했던 아이들은 상담심리치료를 받았다. 엄마들이 몇 달 뒤에야 말한다.
“우리가 놓친 아이들이 있었어요. 아빠가 파업할 때 학교에 다녔던 청소년들이에요. 중학교에서 사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묻더래요. ‘아빠가 쌍용차에 다니는 사람 손 들어봐.’ 그 반에 분명히 몇 명 있었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대요. 그러자 선생님이 ‘이 반에는 빨갱이 자식이 없어 다행이다. 지금 공장 안에서 파업하는 사람들은 다 빨갱이들이다’ 그랬다는 거예요. 우리가 그 아이들이 받은 상처를 몰랐어요.”
이야기하는 엄마들은 목이 메고 눈물이 맺힌다. 이러한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불행하다. 문제는 그렇게 말한 선생님은 그것을 중립적이고 공정한 태도라고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4. 비정규직 노동자의 인권
비정규직 노동의 실태
도대체 비정규직 일자리들이 왜 그렇게 많아진 것일까? 비정규직 노동자를 만나 얼굴을 마주 대하고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면서 20년 동안 일했어요.”
“어제가 아버님 제삿날인데 가 뵙지 못했어요. 휴가 하루라도 신청하면 내년에 재계약이 안 될까봐요...”
“파견직에게는 경조휴가비도 50%만 지급됐어요. 휴가를 내도 해고되고, 아파서 조퇴를 신청하면 ‘집에 가서 영원히 쉬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비정규직 고용계약은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회사에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쉽게 봉쇄함으로써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노동조건을 강요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리 기업들이 그 인사노무관리에 익숙해져 비정규직 고용계약을 늘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의 고용계약 원칙은 어디까지나 ‘직접 고용’ 그리고 ‘정규직’이다. 현행 근로기준법에도 “제6조(균등한 처우)”, “제9조(중간착취의 배재)” 조항들이 바로 그러한 원칙들을 담고 있다. 13년 전, 노동자 파견법이 처음 제정될 무렵에도 노동법 학자들로부터 “파견법은 근로기준법의 고용계약 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근로기준법상으로는 엄연히 불법인 비정규직 고용계약을 합법화하기 위해 우리가 요즘 ‘비정규직법’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여러 법 개정 작업들이 추진된 것이다.
비정규직법은 처음 출발할 때부터 비정상적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제도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비정규직 고용계약 기간이 2년을 초과할 수 없다거나, 2년이 지난 뒤에는 계약 만료를 이유로 해고할 수 없다는(이른바 ‘영구 비정규직’ 또는 ‘무기 계약직’) 내용이 법에 규정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비정규직은 비정상적 고용 형태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존속하게 되면 사회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이미 비정규직법에서 그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질병·출산·휴가 등 결원이 생겼을 때에만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한다. 따라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오히려 고임금을 받는 경우가 많다. 불리하게 단기적으로 고용되는 것이니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정규직법 입법 과정에서 쟁점이 됐던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이란 개념은 이런 취지를 살리자는 것인데, 기업에서는 인건비가 늘어나니 여러 가지 논리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비정규직 고용과 기업 경쟁력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 정부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를 줄이라”는 요구를 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2004년, 국제통화기금은 <한국 경제 주요 현안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 노동시장이 과도하게 비정규직화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신규 고용의 70%가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지적하면서 “이 같은 노동시장의 이중적 구조가 한국 경제의 저해 요소가 됐고, 향후 발전도 제약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자유주의의 원조”라는 말을 듣는 국제금융자본이 한국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그와 같은 인도주의적 차원의 요구를 했을 리는 없다. 자신들이 투자한 자본이 정상적인 이윤을 창출하는 데에 방해가 될 정도로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비정규직화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양극화 현상이 심해지고 사회불안이 급증하는 것이 경제 발전에 결코 유익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OECD 가입 국가들 중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이 가장 높고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한국 사회에 들어와 진보적 요구를 해야 하는 코미디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은 한마디로 한국 자본의 경영 방식이 지나치게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다. 재벌 산하 경제연구원조차 “양극화 현상이 경기 회복이나 경제 성장의 성과를 무위로 돌리고 있으며, 경기회복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소득격차가 개선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보고서를 내는 상황이다.
기업이 단기적으로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선호하는 것을 사회가 계속 용인하면 경영효율을 높이기 위한 다른 방안들을 도외시한 채 노동비용을 줄이는 전근대적인 방식으로 경쟁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고 결국 국가경제에 유익한 결과를 미치지 못한다. 직원들에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면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경쟁력을 키우는 기업이 나라 경제에 유익한 선진기업이다. 북유럽 국가들이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기할 수 있는 이유들 중에는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한계 기업들을 시장에서 빨리 퇴출시켰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대기업 부설 연구소의 분석 자료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들이다. 특별히 진보적인 시각이 아니라 철저한 시장경제주의의 입장으로 볼 때 오히려 더 그렇다는 얘기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그들의 삶이 지나치게 고통스럽다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해롭기 때문에 해소돼야 한다. 기업의 단기적 이익이 언제나 사회 전체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5. 노동자·노동조합에 대한 바른 이해
‘근로자’와 ‘노동자’에 대한 바른 이해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근로자’에 대해서는 “근로에 의한 소득으로 생활을 하는 사람” 등 설명이 짧고 간단한 편이다. 반면 ‘노동자’에 대해서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법 형식상으로는 자본가와 대등한 입장에서 노동 계약을 맺으며, 경제적으로는 생산 수단을 일절 가지는 일 없이 자기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삼는다.” 등 설명이 조금 더 길고 자세한 편이다.
어감은 ‘근로자’가 한결 부드럽다. ‘근면하게 일하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어 경영자나 관리자들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반면 ‘노동자’는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계급적 느낌이 들어 좀 거북하게 느껴진다.
정부도 중요한 곳에는 ‘노동’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전두환 제5공화국 정부도 정부 조직을 개편하면서 그 명칭을 ‘노동부’라고 했지 ‘근로부’라고 붙이지는 않았다. 정부 산하기관 이름들도 ‘한국노동연구원’, ‘한국노동교육원’, ‘중앙노동위원회’, ‘노동청’, ‘노동지방사무소’ 등 정식 명칭에는 모두 집요하게 ‘노동’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근로’라는 단어는 삼국사기에도 나오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198회나 언급된다. ‘근로자’라는 단어 역시 조선왕조실록에 23회 등장한다. 곧 중세 농경 사회의 노예·노비·농노 등은 모두 ‘근로자’였다. 근대 산업사회 이후 기업과 고용계약을 체결한 피고용자 직장인(임금 생활자) 계층이 형성된 이후 모든 한자권 나라에서 이들을 ‘노동자’로 표현하는 경향이 강했다.
‘노동자’ 개념에 대한 오해
한국을 방문했던 핀란드 교장협의회 피터 존슨 회장은 교사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핀란드에서는 대부분의 교장들이 교원노조에 가입해 있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 지도층이 그토록 좋아하는 이른바 선진국들에서는 교장도 교사노조에 가입한다. 영국에는 교사노조(NUT)와 교장노조(NAHT)가 따로 있다. 교장이 자신의 계급 정체성을 ‘노동자’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다니엘 르 가르가송 부대사가 TV 프로그램의 인터뷰에서 한 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가 원한다면 노조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노조에 직급의 제한은 없습니다.” 선진국에서는 부대사뿐만 아니라 장관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다.
독일 역대 노동부장관의 상당수는 노동조합원이다. 독일에서는 비교적 보수 정치인에 속하는 메르켈 총리조차 총리 취임 인터뷰에서 “할 수만 있다면 총리가 된 뒤에도 노동조합원 자격을 유지하면서 조합비를 계속 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노조, 소방관노조, 변호사노조, 판사노조가 설립돼 있는 선진국들도 많다. 경찰, 판사, 장관들도 국가권력과 마주하는 대립구도 속에서는 ‘피고용자’, ‘노동자’라고 인식한다는 뜻이다.
프랑스의 판사들은 가치 있는 생존의 숨구멍을 트고 싶었던 것이며, 그것이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법이 보장한 노조의 깃발 아래 단결한 것이다. ‘법복의 권위’와 ‘빛나는 지성’과 ‘판결의 엄숙성’과 같은 가치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가치들을 좀 더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노동조합이라는 언덕에 의지했다.
스웨덴, 덴마크,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같은 선진국은 물론 남아프리카나 슬로베니아 같은 개발도상국에도 군인노조가 활동하고 있다.
독일 군인노조는 아프가니스탄에 독일 병력을 증강하는 것에 반대하기도 했고, 네덜란드 군인노조는 비리 혐의가 있는 사령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잡는 3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계속됐다. 다양한 종류의 노동자들이 다양한 종류의 노동조합 깃발 아래 모이는 현상이 끊이지 않았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결국 자신도 노동자라고 깨닫고 새로운 노동조합을 설립하는 일이 3백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계속 진행되었다.
현대 산업사회의 노동조합
우리 사회에는 이런 현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장차 이렇게 변해가는 엄연한 현실을 막을 수는 없다. 다른 선진국에서 일찍이 발생한 현상을 우리 사회가 수십 년 뒤늦게 따라가고 있는 것뿐이다.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나라도 어쩔 수 없이 비슷한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합원 대부분이 석·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노동조합이 한국 사회에 벌써 수십 개나 된다. 연구기관 노동조합의 행사에 참석하면 조합원들이 서로 부르는 호칭이 대부분 ‘박사’일 때가 많다. 장차 석·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원으로 일하게 될 사람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우리나라 대학원생들 중에서 그것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방송사나 신문사에 취업해 기자, PD, 아나운서로 일하게 될 사람들은 대부분 언론노조에 가입하게 될 것이고, 공무원이 되는 사람은 공무원노조에 가입하게 될 것이고, 교사가 되는 사람은 전교조에 가입하게 될 것이다.
전문직 노동자, 두뇌 노동자, 지식 노동자, 골드 칼라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은 그들도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 살아가는 ‘노동자’라는 것이다. ‘지식기반사회’라는 말은 지식인이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미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라는 것이고 앞으로 사회가 발전할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찰이나 판사들이 노동조합 깃발 아래 모이는 행위를 ‘불법’이라고 막을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도 언젠가 형성될 그러한 조직들이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유익한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 미리 고민하고 준비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