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억불숭유의 암흑기를 지난 한국불교는 외세가 한반도를 침략하는 격변기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며 근대를 맞이했다. 이 시기에 정법의 당간(幢竿)을 다시 세우며 법석을 연 선지식이 있었으니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 스님이다. 불기 2567(2022)년 임인년 새해는 한국불교의 홍복(弘福)인 경허스님이 열반에든지 110주기를 맞이하는 해이다. 근현대 한국불교의 법등(法燈)을 밝힌 경허스님의 시문(詩文)을 모아 발간한 <경허집>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
만공(滿空) 스님은 경허 선사가 북쪽으로 향하기 직전 새 담뱃대와 쌈지를 선물한다. 이 선물을 받고 경허 스님은 어린애처럼 좋아 했다고 한다. 경허 선사가 열반하기 직전 상해 임시정부 요직을 지냈던 재가 제자 김탁(金鐸)에게 만공 스님이 선물한 담뱃대를 함께 묻어 달라고 하자 ‘뭐 이런 것을 묻어 다라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경허 선사가 이 담뱃대를 선물한 주인이 나를 찾아 올 거야 했는데 이 담뱃대와 쌈지가 경험 스님 무덤을 확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 한다.
만공 스님은 또 영주 사미 살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허 스승을 조금이나마 의심했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하며 밥도 먹지 않고 사흘 밤낮을 울며 북쪽을 향하여 절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만공스님은 스승에 대한 참회로 <경허집>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즉이 된다.)
경허 선사는 1912년 4월 병든 몸을 이끌고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등정하고 돌아온다. 조국이 일제에 강제 합병된 것을 한탄하며 백두산에 올라 망국의 한을 달래고 돌아온 바로 그 달 1912년 4월 25일 갑산의 웅이방(熊耳坊) 도하동(道下洞) 춥고 외로운 땅에서 입적을 했다.
경허 선사 입적소식을 수월스님으로부터 충청도 정혜사에 있던 만공스님이 알게 된 것은 1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만공 등 북녘으로 달려간 제자들은 김탁 등의 도움을 받아 낙선산에 안장되어있던 봉분을 파헤치고 함께 묻혀 있던 만공 스님의 선물 담뱃대와 쌈지로 시신을 확인하고 뒤늦게 다비식(茶毘式)을 거행했다. 그리고 분골(粉骨)된 재는 시와 술로 객지에서 외로움을 달래며 경허가 자주 다녔던 차가운 갑산의 강과 산, 들녘에 골고루 뿌렸다. 그때가 1913년 7월이었다.
이후 만공은 경허의 행적을 따라 각처에 흩어져 있던 경허의 유고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삼수갑산에서 경허의 행적은 김탁 등에 의해 수덕사에 전해졌다. 김탁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발족을 위한 국민회의 국민대표 250인중 한명에 포함 될 정도로 평생을 조국광복에 헌신한 인물이다. 만공스님은 마침내 1935년에 수집한 유고를 만해 한용운에게 넘기며 혹 글자의 누락이나 그릇된 점을 고쳐 교열하여 주기를 부탁한다. 그러나 문도가 좀 더 완벽을 기하기 위해 경허 만년의 원고까지 포함하기로 하여 인쇄를 미루다가, 1942년 봄에 갑산, 강계 및 만주 등지에까지 가서 유고를 수집한 뒤 1942년 여름에 간행하였다.
《경허집»의 표제는 남전한규가 제자하였으며, 속표지를 뒤이어 <열반송>, <경허선사초상>, <경허선사필적>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한용운의 <서序>와 <약보> 및 <목록>, 본문 순으로 이어진다. <목록>은 목차를 뜻한다. <목록>을 살펴보면 옛 글의 체제를 따라 법어, 서문, 기문記文, 서간, 행장, 영찬, 시詩, 가歌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만해스님이 <경허집> 발간을 주도한 것은 경허스님의 법맥을 이은 만공스님의 요청에 의해서다. 만공스님이 만해스님에게 전한 육성이다. “이것은 우리 스님 경허화상이 남기신 저술인데 장차 인쇄에 부치고자 하오. 이 원고가 각 처에 흩어져 있는 것을 수집하였지만 잘못된 글자와 빠진 글자가 있을 터이니 잘 교열해 주고 또한 서문을 부탁하오.”
만공스님의 요청을 수락한 만해스님은 김영운(金靈雲), 윤등암(尹燈岩) 스님에게 실무를 맡겨 한반도 북부의 갑산, 강계는 물론 만주까지 방문해 자료를 수집해 <경허집>을 발간했다. <경허집> 머리말에 해당하는 ‘서(序)’에서 만해스님은 경허스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회를 피력했다. “텅 빈 산에서 붓을 잡아도 세간을 벗어난 것만도 아니어서 종횡으로 힘차고 생소하거나 숙달되었거나 걸림 없이 문장마다 선이요 구절마다 법이어서 그 법칙이 어떠한 것을 논할 것도 없이 실로 일대의 기이한 글이오, 시구이다.”
또한 만해스님은 “세상에 계실 때 한 번 뵙고 한 잔 먹고 삼세제불을 통쾌하게 꾸짖어 자빠트리려고 마음먹었더니 어쩌다 세상일이 마음과 같지 않아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서 그럴 수 없게 되었다”면서 “어어간 화상께서 입적하신지 수십 년 뒤에 그 글을 보니 뜬세상 슬픈 것이 실로 이러하도라.”라고 경허스님의 원적을 애통해 했다.
<경허집>을 발간한 임오년(壬午年)은 1942년으로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다. 1941년 12월 소위 대동아전쟁(大東亜戦争)을 선포한 일제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소련, 중화민국 등 연합국과 격전을 벌이면서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를 한층 강화했다. 이른바 황국식민화(皇國臣民化)와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며 한민족의 역사와 얼을 뺏으려는 정책을 노골적으로 진행했다. 이런 엄혹한 상황에서 불교의 친일화에 맞선 스님 45명이 조선불교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경허스님을 선양하기 위해 <경허집>을 발간한 사실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경허집> 발간에 참여한 스님들은 “우리 조선불교계에 대하여 선종부흥(禪宗復興)과 현풍선양(玄風宣揚)에 막대한 공로가 있을 뿐 아니라 종취(宗趣)의 깊고 현묘한 것과 문채(文彩)의 명려(明麗)한 것은 세상에서 다 아는 바”라고 경허스님을 높이 받들었다. 또한 “우리 조선 수좌로서 선사의 가르침에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라면서 “유고를 모집하여 출판해서 동지 제위에게 분포고자 하는 바 ‘우리 공로자의 표창은 우리 손으로’라는 표어 아래 취지를 실행하는 것”이라고 <경허집> 발간의 의미를 강조했다.
<경허집> 발간은 일제강점기 왜색불교 침탈에 맞서 조선불교 정통성을 회복하고 교단을 수호하기 위한 중심에 경허스님을 의지 처로 삼았음을 증명한다. 이와 더불어 간화선을 중심으로 수행체계를 확립하고, 나아가 중생의 삶 속에 직접 들어가 자비를 실천한 경허스님의 입전수수(入廛垂手) 가르침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도 들어있다.
<경허집>은 경허스님이 순력(巡歷)한 사찰을 확인 할 수 있는 주요 근거이다. 한반도 구석구석을 만행하면서 수좌들을 인도하고 민초들에게 희망을 전했던 실질적인 흔적이다.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양산 통도사(백련암, 백운암), 동래 범어사(금강암), 합천 해인사, 의왕 청계사, 계룡산 동학사, 동래 마하사, 남원 천은사, 덕유산 송계암, 불명산 윤필암, 지리산 영원사, 순천 송광사, 금산 보석사, 공주 마곡사, 서산 천장암(사), 서산 개심사, 서산 부석사, 공주 신원사, 안변 석왕사, 희천 두첩사, 무흘사, 청암사(수도암), 곡성 관음사, 구례 화엄사, 만첩산 공림사, 덕숭산 정혜사, 상원암, 강계 오남사, 강계 자북사.
한편 경허스님의 친필 원고에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光武)가 수차례 등장하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외세의 침탈을 받고 있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민족자주(民族自主) 의식을 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1942년 만해스님을 비롯한 45명의 스님들이 <경허집>을 발간할 때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광무 연호가 삭제됐다.
경허스님이 원적에 든지 110(2022년)주년이 지난 지금 간화선 수행 전통을 회복하고 납자들을 인도한 뒤에는 마을로 들어가 만행두타(萬行頭陀)하며 삶을 회향한 경허스님의 자취와 가르침은 영원히 유효하다. 경허 선사의 제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한국 불교를 지켜낸 대들보 역활을 하였다.
경허 연구소장 홍현지 박사는 “한국 종교뿐 아니라 세계 종교사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로 경허 선사(1849~1912)를 빼놓을 수 없고 중국의 그 어떤 조사보다 위대한 인물이다.”고 말한다. 〈경허집〉은 왜색불교 침탈 속에서 조선불교 정통성을 회복하고 수호한 불세출의 인물 경허 선사의 진면목을 후세에 전해주는 보물 같은 역사 자료이다.
출처 : 불교신문, 경허 연구소 자료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