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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1절-4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말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현재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옛날 고대문명 발생지라 그러면 갈대아 우르지요. 바벨론. 그렇지요? 바벨론 문명이 상당히 발달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성경에는 그 때 그 지역적으로 갈대아 우르라도 갈대아 우르 사람들이 가지고 살고 있는 그 삶의 목적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이 세상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목적들입니다. 그리고 그 갈대아 우르 안에는 다신종교지요? 이방종교. 기독교 외에는 전부 다 다신종교고 이방종교입니다. 이방종교와 기독교와 똑같은 어떤 레벨의식을 하고 보면 아주 잘못되는 겁니다. 불신자들은 몰라서 그런 거지만 기독교는 이방종교하고는 다른 겁니다. 질적으로 다른 겁니다.
다신종교가 왜 생겼느냐? 이방종교가 왜 생겼느냐? 사람의 종교성이 그렇지 않아요? 자기보다 어떤 힘센 세력을 만나면 그것을 의지하고 숭상하고 싶고, 말하자면 자기의 어떤 생명의 위협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자기가 안 죽고 오래 살고 건강하고. 자기 생애 전체가 거기 다 들어있지요? 사상적으로 보면.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바로 모르니까 바다의 용왕신 나무의 목신 바다의 석신 딸 잘 낳게 하는 삼시랑 할머니 추위를 주관하는 용공 할망군가? 뭐 그런 거 있지요? 그건 왜 생겼느냐 그 말이요.
그리고 이방신들을 보면,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가만 보면 각 신들마다의 어떤 전문적인 특허가 있어요. 물론 우리 기독교 입장에서는 그건 다 신들이 아니에요. 그건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한 거고 그런 건데 참 신을 못 찾으니까 아무 거나 붙잡고 ‘신이다’ 하고 사는 거거든. 그들 입장에서 말하는 신 그 말이요.
그렇게 전제를 보면서 기독교 우리 입장에서 보면 그 전문적인 특허가 다 있지요? 안 죽고 잘 살려면, 오래 오래 살려면 누구에게 잘 보여야지요? 그래, 염라대왕. 염라대왕이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고 그러지. 테레비로도 나오지. 새까만 두루마기 옷을 입고 죽음의 사자를 보내서 데리고 가고. 데리고 가는데 가다가 동명이인 삼인이 있었던 모양이지? 그러니까 아무 고을에 아무개를 데리러 가서 딴 고을의 똑같은 이름을 데려가 놓으니 참 신도 되게 정신이 없어. 그런 게 많다.
그래, 이제 자식 낳는데 전문특허 맡은 신이 있고, 목숨 맡은 특허신이 있고. 그러니까 부자 되게 하는 특허신이 있고. 구약성경에 보면 바알신이 있지요? 바알신 이거는 남성신이고 아세라 목상이 여성신인가? 그래, 그 신 섬기면 평화를 바라고 뭐 이런 식으로 돼 있거든. 말하자면 특허식으로 그렇게 붙인 거지. 그게 이제 갈대아 우르 사람들의 신앙이다.
그래, 이제 결국 해신 별신 달신 하고 섬기고, 그래서 이제 바벨론에 별박사들이 많았다 그 말이요. 그래, 이제 마태복음에 동방박사 별박사들은 우리에게 신앙의 영적 계시를 말해주기 위함인데, 사실 또 보면 갈대아 우르에는 별을 연구하는데, 그래서 바벨론을 보면 천문학이 발달했다고 그랬나? 그래, 그것이 이제 갈대아 우르 사람들의 신앙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공통성을 보면 전부 다 이 세상에 국한된 이 지구 땅덩어리를 벗어날 수 없는 그 안에 다 포함된 거다. 그러니까 소원 목적이 잘 살고 하는 거, 물질 전부 다 그게 사상이 그렇게 돼 있지요.
그러니까 어떤 종교를 믿던 간, 심지어 기독교를 믿어도 자기가 그 신의 조력을 얻어가지고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잘 먹는 이것. 행복하게 잘 산다고 하는 그런 목적을 가졌다면 그것은 지구를 벗어나지 못한 것. 사상성이 그렇단 말이다. 그 신앙의 사상성이 성분이 지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성적 신앙이다. 그렇게. 그건 인격적인 게 아니라 그 말이요. 전부 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 안에 어떤 신앙이 있는가 하니 갈대아 우르적 신앙이 있다. 아까는 불신자들이 갖는 갈대아 우르 사람들의 그 신앙. 여러 가지 다종교적 그런 신앙을 얘기했는데 기독교 안에서 현재적으로 보면 갈대아 우르적 신앙을 갖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기독교 안에 그러니까 자기가 예수 믿기 전의 불신자적 그 사상성, 종교적 그 사상성을 그대로 기독교 안으로 갖고 들어와 가지고, 그러니까 불신자로 있으면 특허 맡은 신이 있기 때문에 이 신에게 찾아가서 잘 보여야 되고, 그 신에게 잘 보이려고 공을 들이니까 저 쪽 신이 시기를 하거든. 그러니까 저 쪽 신이 나를 두들겨 패. 그러면 또 돌아가서 ‘잘 해 드리겠습니다’ 하고 이렇게 북 치고 장구 치고 춤도 추고 해야지. 맨 그 판이다.
그런데 이제 기독교인이 돼가지고 예수 믿고 보니 참 편해. 왜 그런가 하니 각자 신을 찾아갈 필요가 없어. 예수 신이면 오케이다 그 말이요. 옥황상제나 염라대왕이나 삼신할망구가 필요 없이 만능의 능력자 예수 신이면 오케이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예수 신에게 자기가 소원 목적하는 거는 다 달라고 하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지. 이 세상 모두는 하나님 거지. 그러니까 달라고 하기 이전에 또 예수 신에게 잘 보여야지. 그러니까 충성봉사도 많이 하고 공을 들이고 그러는 거지요?
그런데 엊그제 할렐루야 축구단입니까? 있지요? 공 차가지고 졌다고 하지요? 방송에 나오데? 난 그런 거 아주 진절머리가 나오. 속에서 저주가 나와요. 생각을 해봐요. 아니, 예수님이 무슨 할 일이 없어가지고 축구구경이나 하고 그거 이기라고 도와주는? 참 정신머리가 빠졌어. 그거 한 골 차 넣었다면 무릎 꿇고 앉아 기도. 아주 그냥. 옆에서 마귀가 보고 있다가 웃으면서 얼른 와서 안수해줄 거야. 틀림이 없어.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 또는 복음성가 ‘예수 이겠네, 예수 이겠네’ 하는 그런 것도 있지. 운동시합 때 그거 응원가로 잘 쓰지. 그러니까 아나운서가 따라다니면서 적어가지고 와서 하는 거 있지. 기자들인가? 아, 그 축구장에 부흥회가 열렸다고. 그게 다 누구예요? 기독교인들이지.
참 그것 보면 아, 생각을 해봐요. 그래, 축구장에서 기독교인들이 예수 믿으면서 기도를 얼마나 했겠어. ‘하나님, 축구경기 나가면 우리 편이 돼서 꼭 이기게 해 주십시오’ 안 그렇겠어? 난 안 들어봤어도 한 두 사람이 아닐 거야. 그런데 왜 졌어? 예수님이 잠시 화장실 가셨나? 아니면 낮잠을 잤거나.
성경에 있지요? ‘끌어내리지 말라’ 그거 있습니까? 끌어내리지 말라. 그게 뭐냐 하면 예수님을 말하자면 하나님을 인간 자기 차원으로 끄집어 내린다 그 말이요. 자기 같을까? 사람의 마음처럼 끌어내려.
또 이번에 대학생 시험 칠 때 분명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이 대학교 좀 붙게 시험 잘 치게 해달라’ 그랬을 거야. 자, 안 믿는 사람도 자기만 열심히 했다면 붙기 마련입니까? 자기는 열심히 안 해놓고는 하나님께 붙게 해 달라? 그건 그렇다면 부정의 하나님이야. 그렇지 않아요? 공정하신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그러니까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갖다가 불공정한 하나님으로 누가 만들어요? 불신자들이 만들어요, 기독교인들이 만들어요? 기독교인들이 만들고 있어. 아, 축구시합도 자기만 열심히 했다면 기도 하고 말고가 뭐가 있어. 제 실력대로 만족하는 게 정직한 거지.
그러니까 어찌하든지 하나님을 끌어당겨서 그걸 이뤄달라고 하는 이것이 기독교인이면서 갈대아 우르적 신앙이라 그 말이요. 그것이 명칭 호칭 이름은 기독교인이라 하지만 기독교인 속에 들어있는 그 종교성 사상은 이방인들이 탐구하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알겠어요? 그건 성령의 감화된 기도가 아니고 옛사람이 주격이 되어있고 세상이 자기 속에서 주격이 되어있고. 여러분들 영어 잘하니까 주격 소유격 알지요? 그래, 그 기독교인 속에는 마귀가 좋아하는 그 사상이 주격이 되어가지고 예수이름을 이용하면서 그 짓이 나오는 거요. 그런 건 다 이방적 종교적 사상이다. 옛날에 갈대아 우르의 사람들이 가진 그 신앙사상하고 같다 그 말이요.
그리고 기독교 안에 또 달란다고 해서 다 주는 게 아니고 특유의 신을 받아야 하는데, 방언하는 성령을 받아야 되고 통역하는 성령을 받아야 되고 예언 은사 입신하는 그런 성령을 따로 따로 받아야 돼요. 그게 이제 이방종교적 사상하고 똑같은 겁니다.
성령님이시면 성령님이 그 때 그 때마다 성령이 하고자 할 때에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가 있는 거요. ‘내가 성령 받았다. 받았다’ 하는 건 수상한 겁니다. 사역적으로 본다면 성령님께서 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하고. 사역적으로 들어있어요. 그런데 ‘받았다’ 하는 건 이건 뭐요? ‘내꺼다’ 그 말이다. 전매특허로 받았다 그 말이요. 이건 특허다. 그러니까 방언만 하면 계속 방언이고 예언이면 계속 예언이고 그래요. 그러니까 전문적으로 하려면 그 면에 대한 특허를 받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 갈대아 우르적 신앙이다.
사도바울에게 성령님께서 같이 하시게 되면 그 때마다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달라요. 알겠어요? 이적도 일어날 수 있는 거고 또 예언도 할 수 있는 거고 방언도 할 수 있는 거고. 항시 되는 게 아니고.
자, 모세가 성령을 받았습니까, 성령에게 붙들렸습니까? 어느 거요? 붙잡혔다고 하니 이상하게 들립니까? 모세가 성령을 받은 거요, 성령에게 붙잡힌 거요?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되겠는데,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받았으면 제 것이 돼놓으니까 그 다음날 와가지고 지팡이 들고 ‘어이, 심심하다. 어디 홍해나 한 번 갈라볼까’ 하며 홍해를 탁 치면 갈라질까요?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그러데. 그게 진짜 홍해요? 진짜 사우디아라비아와 애굽 사이의 홍해에 가가지고 영화배우가 모세처럼 꾸며서 탁 치니까 진짜 홍해가 갈라진 거요? 안 그러면 양동이 물을 양쪽에서 갖다가 들어부은 거요?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모세 키가 아마 나처럼 조그마했을 것 같아. 그런데 영화배우는 키가 크데. 그런데 어쨌든 구약시대 그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이 시키신 대로 하니까, 그렇게 순종을 하니까 됐어요. 그러면 그 물을 누가 갈라 트린 거지요? 모세가 갈라 트린 거요, 하나님이 갈라 트린 거요? 하나님이 했다고 딴 성경에도 있잖아요. ‘내가 길을 건너게 했다’는 그거. 모세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바가 된 것뿐이요. 딴 사람이 볼 때는 ‘와, 모세 능력 있다’ 그렇게 보이는 거지.
그런데 오늘날 특허 신을 받은 사람들이 ‘내가 뭘 받았다. 내가 뭘 받았다’ 그런 거 잘 하거든요. 그게 이제 특허 식으로 생각을 하는 거지. 그래, 받았으면 성령님이 그대로 있는 겁니까, 나가는 겁니까? ‘받았다. 뭘 받았다’ 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 말이요.
그래, 병 고치는 성령 받은 그 사람이 병자보고 ‘봉투 속에 돈 얼마 넣어 오너라. 내가 병 고쳐주마.’ 딴 병자도 고친 것도 있고 그렇단 말이요. 그래서 믿고 오니까 ‘돈 얼마 갖고 오면 병 낫게 해 주겠다. 하나님 앞에 오면서 예물도 안 갖고 오느냐’ 하는 식으로. 자, 그게 성령입니까, 악령입니까? 성령님이 하는 일을 못하니까 구별을 못하지. 성령님이 그런 장난 안 해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게 하는 그것밖에 없습니다. 목적이 그거요. 목적. 병은 주기도 하고 가져가기도 하고 그래요. 병은 전부 다 마귀가 주는 겁니까? 낫게 하는 거는 하나님이 하고? 그렇습니까? 병은 마귀가 주고? 아니요. 하나님이 그것 다 해요. 욥기에서도 보면 물론 마귀를 통해서 병도 주기도 하지. 여러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거 갈대아 우르적 신앙입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모세가 홍해를 갈라 트린 그 다음 날 와서 또 홍해를 탁 쳤다. 갈라지지를 않아요. 모세의 심심한 그 놀이에 성령님이 이용당하는 그런 게 아니란 말이요. 그래, 그 지팡이 가지고 바위를 치니까 물이 나오지요. 하라니까 하라는 대로 하니까 되더라 그 말이요. 모세가 ‘내가 하고 싶다. 여기 물 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탁 치니까 난 거요? 그게 아니지요. 하나님이 ‘지팡이를 들어라. 개구리가 올라올 것이다. 하수가 피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대로 순종만 하니까 된단 말이요. 그 명령이 오기 전에는 안 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시골에 가면 호박성령도 있고 참외성령도 있고 돼지성령도 있는 모양이요. 돼지새끼 낳는데 가서 안수해달라고. 그게 다 갈대아 우르적 신앙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에 보면 갈대아 우르적 신앙이 그렇게 많아요. 굉장히 많아요. 그게 모두 다 세상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이방종교가 그렇단 말이요.
생각을 해봐요. 소원하고 욕망하고 추구하고 하는 그것이 천국입니까, 세상입니까? 세상 것 달라는 거요, 천국 것 달라는 거요? 세상 것이지. 천국 게 아니란 말이요. 그러니까 이 타락된 기독교를 보면 인간의 기존적인 소원 목적에다 신의 조력을 갖다 붙인다.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이는 거. 예수이름을 갖다 붙이는 거. 이용하는 거.
여러분들, 남묘호랑계교가 뭐지요? 소원성취 하는 신앙이요. 자기들 말대로. 그러니까 소원성취도 큰 건 안 되고 작은 것만 된다고 하는 것. 참. 신의 조력이 의해서 그게 다 되느냐 하면 그것도 다 되는 게 아니요.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그러면 예수 믿는 것도 그런 게 아니냐 그 말이요. 안 믿는다고 해서 안 되는 겁니까? 예수 믿으면 부자 됩니까, 예수 안 믿어도 부자 됩니까? 예수 안 믿어도 부자 된 사람 많아요. 예수 안 믿으니 전부 다 가난뱅이고 거지들입니까? 이치를 알아야지. 이치를 모르니까 그냥 교회에서 사기 다 당하지. 참 이거 왜 이렇게 볼 줄을 모르는지 모르겠어. 감정을 일으키고 흥분을 하면 그게 성령 받은 겁니까?
갈대아 우르적 신앙은 죽음 이편의 것 임시적인 것 육의 것을 간구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정도의 것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른 겁니까? 그 이상의 것, 신령하고 영원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렀다. 그렇게 보니 인간의 욕망과 하나님의 욕망이 똑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아요, 달라요? 다르지. 달라야 되는 것이고 다른 거지.
마태복음 6장에 뭐라고 그랬지요?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는 것은,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은 누가 구하는 것이라?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러면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랬단 말이요. 그게 세상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의 것.
따라합시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자, 여러분들, 내가 하나님을 찾아갈 때는, 말하자면 교회 나올 때는 죽음 이편을 것을 구하려고 교회 가는 겁니까, 죽음 저 편의 것을 구하려고 교회 가는 겁니까? 죽음 저 편의 것은 영원하고 신령한 것. 하나님을 닮는 인격이 이 세상의 것입니까, 죽음 저 편의 것 하나님의 것입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축복 받아 부자로 살아야지. 돈 많아 부자로 살아야지’ 하는 이것은 죽음 이편이요, 죽음 저 편이요? 죽음 저 편이요?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하는 그것은 죽음 저 편이 아니고 죽음 이편의 것을 구한다는 것. 그거는 임시적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사업성공 부요나 건강 얻으려고 하나님 앞에 찾아가는 것이냐? 네가 이것을 원하고 해서 예수 믿는 거냐 그 말이요. 내가 그걸 구하는 거. 세상사람들이 그걸 구하는 거.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나에게 주려고 하는 거냐 그 말이요. 아브라함을 부를 때에는 아브라함은 그 고향 집에서 잘 살고 농토도 많고 일가친척도 많아요. 그 아브라함을 ‘본토 일간 친척 집을 떠나라’ 하는 것은 생각을 해봐요. 그거 도로 주려고 떠나라 그런 거요, 그거 아닌 더 좋은 것을 주려고 떠나라 하는 거요?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거와 내가 현재 이 세상에서 물질세계 것을 얻으려고 하는 그거랑 대조해보란 말이요. 뭐가 기독교냐 그 말이요. 뭐가 기독교본질이냐 그 말이요. 돈 한 트럭을 주는 것이 그게 복입니까, 나를 하나님처럼 만들어놓는 그것이 복입니까? 어느 게 참 복이요?
하나님은 만능의 능력자요. 무엇이든 다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왜 안 주지요? 왜 안 줄까요? 아버지가 나에게 용돈을 좀 10만 원씩이나 펑펑 주면 될 터인데 왜 안 줄까요? 나쁜데 쓸까봐. 왜 나쁜데 쓰느냐? 사람이 안 됐다 그 말이요. 사람이 안 됐어.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신령하고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임시적인 것을 내가 원하는 대로 주지를 않습니다. 알겠어요?
임시의 것을 목적해서 금식기도하고 단식투쟁하는 사람을 안 믿는 사람들은 믿음 좋다고 그렇게 보지만, 금요 철야기도 잘하지 금식기도 잘하지. 왜 그렇게 기도하느냐? ‘아이고, 내가 이런 소원이 있는데 하나님에게 내가 꼭 얻어야 말겠다.’ 그러니까 그런 강한 의지성을 볼 때에 안 믿는 사람들은 ‘아, 믿음 좋다’ 그런단 말이요. 그런데 하나님은 이걸 어떻게 보느냐 하면 믿음 좋다고 보는 게 아니라 ‘저 놈은 깡패다. 저 놈은 패역이 아주 강한 놈이다’ 그렇게 보는 거요. 알겠어요?
우리가 일반적 이치적으로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지요. 아버지는 이걸 주려고 그러는데 자식은 아버지가 주려고 하는 그걸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제 좋아하는 그걸 달라는 것. 그 떼를 쓴단 말이요. 그게 뭐요? 그게 패역이지. 얻어 안 맞으면 다행이요. 제 마음대로 제가 목표를 딱 정해놓고 그걸 달라고 밤낮 주야로 기도하고. 그거 패역이야. 알겠어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좋은 것을 우리에게 골라서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 아닙니까? 내가 달라고 안 해도 아버지 요량대로 주는 거지요. 알아서 주는 거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기독교 교인들 목사고 집사고 평신도고 장로고 전도사고 어떤 집회하는 거 가만 들어봐 봐요. 들어보면 그 기도의 내용의 정신이 말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말 그 자체는. 그런데 말하고 소원하는 것은 세상 것을 잔뜩 구하는 거지요? 세상 것 물질 것 임시적인 것을 잔뜩 구하면서 그 다음에 뒤에 하는 말이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 말은 무슨 말이지요? 그 무슨 말이요? 평소에 들어있는 그 사상을 죽 대면 그 말이 바꾸어져요. 그 내용이 바꾸어지는 게 ‘아버지의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하옵소서.’ 사상이 그렇게 딱 나는 겁니다. 이해가요?
우리는 예수 믿는 거 그 정신적인 면을 잘 봐야 돼요. ‘그 정신이 어떻게 흐르고 있느냐’ 이걸 봐야 돼요. 사상이 어떻게 흐르고 있느냐? 말 액면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 말이 지금 어디서 나오느냐? 어디다 뿌리를 박고 그 말이 솟아나오고 있느냐 하는 그 뿌리로 내려가서 보란 말이요. 기독교는 성경은 그걸 보는 거란 말이요. 예수 믿는 거를 머리를 어디다 써요?
기독교 안에 다신종교, 갈대아 우르적 신앙을 우리가 오늘날 심사를 할 줄 알아야 된다. 신앙사상을 심사를 해야 돼. 마귀가 숨어있으니까, 거짓 종들 거짓 선지자들 숨어있으니까. 눈으로 보이는 단순한 그것 가지고는 안 돼요. 못 찾아요. 마귀 악령 받은 사람들은 사람을 이치적으로 깨닫게 하고 인격적으로 성장되는 그 면에는 못 해요. 어디까지 할 수 있느냐? 마귀가 악령이 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냐? 제 아무리 올라가봐야 사상과 목적과 그 개념이 사람을 일반적 도덕성적 사회 도덕성적 그 죄에 기준을 맞추어놓고 그 다음에 예수이름가지고 운동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보면 누구처럼 만들려고 그러는데? 하나님처럼 성품이 인격이 목적이 하나님처럼 성품을 만들려고 그러는데 그게 성령님인데 그게 기독교인데 그게 하나님의 종인데 타락된 기독교는 나를 어디다 맞추는가 하니 불신세계 인간의 도덕적인 그 면에 나를 딱 끼워 맞춰 넣고 나를 그렇게 만들려고 그래요. 그러니까 가르치는 건 ‘너는 기독교인이다. 거짓말하지 말아라.’ 그래, 그 거짓말이 무슨 거짓말이지? ‘여기 가서 이 말하고 저기 가서 저 말하지 마라’ 그런 차원의 거짓말. 하나님이 말씀하는 거짓말은 이것은 신령한 거고 하나님의 마음이고 영적 이치인데 이것이 아니고 성경을 봐가지고 자기 속에서 세상기준을 가지고 ‘너 거짓말하지 말아라.’ 성경도 그 말해요.
성경을 보고 그 말을 하는 그 사람의 기준적 도덕성은 일반세상적 타락적 도덕성이 기준 된 그 사상가지고 ‘이놈아, 너 거짓말하지 말아라’ 그 말하고 있단 말이요. 이해갑니까? 그걸 볼 줄 알아야 돼.
여러분들, 마지막으로 기독교가 사회에서 거짓말하지 않고 청렴결백하고 도덕성적으로 그렇게 잘 살게 하는 그 운동입니까, 인간 나를 하나님의 신적 도덕성의 차원으로 만들어나가는 게 기독교입니까? 일반도덕성 차원에서 그 운동을 기독교에서 하는 겁니까, 하나님의 신령한 도덕성의 그 차원에 놓고 사람을 그렇게 길러가는 그것이 기독교입니까? 어느 거요? 그 말이나 저 말이나 똑같아요?
일반도덕성에 맞춰놓으면 제 아무리 올라가봐야 일반 도덕성적인 사람밖에 안 돼요. 그러나 주님의 기준, 주님처럼 만들어지려고 하는 거기에는 일반도덕성적인 인간을 훨씬 능가하고 자라가게 돼요. 알겠어요? 그걸 알아야 돼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 각자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을 심사해 볼 때에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물질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지혜지식적으로나 일반적인 측면에서 비교를 해보아도 자랑스러울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오나 그런 못난 저희들은 우리 주님께서 불러주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은 예수님으로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전부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그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까지 저희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생각 소원 목적하는 그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어져 나가지 않고 일반불신자들처럼 그런 차원에서 예수 믿고 나가니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사건 환경을 들어 일으켜서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만들어 보려고 여러 가지 사건 환경을 줄 때에 우리는 미련하고 둔탁해서 그 사건 환경을 왜 주는지 그걸 모를 때에는 그 사건 환경과 붙잡고 싸우고 대립을 일으키고 마찰과 충돌을 일으키고 나 잘못된 것을 전부 남 탓으로 돌리고 남 원망하고 세상원망하고 좁디좁은 너무나도 저질적인 그런 인간으로 산 것을 우리는 각자가 마음속으로 느낄 수 있겠습니다.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처럼 마음이 닮지 못하고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 때에 남이 나를 볼 때에 무슨 전도가 되겠으며 어떻게 믿는 자녀로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겠으며 어떻게 또 그 사랑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생각하면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저희들이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배우고 잘 깨닫고 우리의 못된 마음과 성격과 성질들이 예수님처럼 하나님처럼 모든 면에서 닮아간다면 정말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곳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듯이 역시 믿는 저희들이 가는 곳곳마다 사람이 바로 만들어진 그 차원에서 예수님이 같이 하신다면 우리들이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고 예수님의 향기가 날려질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불러서 예수 믿게 하신 것이 일 크게 많이 부려먹으려고 저희들을 부른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정말 천상천하의 최고의 고상한 모든 천군천사들도 돋볼 수밖에 없는 우리 주님 그 인격 그 성품으로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그렇게 만들어 주시고자 하는 것이 분명하오니 저희들이 세상 사는 동안에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인즉 인격적 취미적 소원적으로 목적적으로 추구적으로 하나님처럼 주님처럼 닮아지는 이 일에 늘 힘을 쓰고 깨닫고 섬길 수 있도록 저희들을 강력하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무궁하고 극진한 사랑과 성령님의 감동감화 충만하심이 당신의 자녀들 머리 위에 영원히 같이할지어다. 아멘.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