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빨래터는 여인들의 가사노동 현장이었지만 동시에 집 밖으로의 외출이 자유롭지 않던 시절에 합법적으로 탈출이 가능했던 해방구로서 여럿이 모여 수다떨기 딱좋은 장소로 층층시하 고단한 일상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안성맞춤 장소였다.
그래서 조선 제일의 화가 단원과 혜원은 이 빨래터에 숨겨진 인간 욕망을 재치 있게 그려낸 걸작을 남긴 것이었다.
지난 10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 동안 진행된 코스모스 축제(홍천군 서석면)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며 4년 만에 개최된 올해 코스모스 축제의 먹거리 장터 한쪽 구석에서는 예전 빨래터의 추억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었다.
여기는 축제의 꽃인 먹거리 장터 한가운데 자리를 잡은 '서석성당' 부스의 설거지 현장이다.
흐르는 물을 앞에 두고 삼삼오오 모여서 무언가를 씻는 것은 빨래터랑 꼭 닮았다. 다만 씻는 대상이 다를 뿐이다.
손님들 입을 즐겁게하라는 임무를 완수한 기름기 투성이 순대 접시며 돼지국밥 그릇, 고추장과 고춧가루 범벅인 떡볶이와 도토리묵무침 접시, 그리고 잔치국수와 육개장칼국수 대접에 막걸리 잔과 주전자,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쉴 새 없이 걷어져 나온다.
이렇게 존재의 이유가 다른 두 삶의 터전에서 추억을 공유하게 되는 까닭 중에 하나는 두 장소가 모두 이제는 아예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그나마 시골에서라도 빨래터를 볼 수 있었던 건 드라마 <전원일기>가 방영되기 시작하던 1980년대 초반이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한다. 어언 40여 년 전 일이다.
마을이나 공동체 단위의 잔치나 겨울 김장이 끝나고 하는 단체 설거지도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풍경이 되어가는 듯해서 아쉬운 느낌이다.
빨래터와 설거지터가 비록 씻는 대상은 다를지언정 풍기는 분위기에서 동질감을 느끼는 건 모처럼 마련된 해방구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오가는 대화 때문 아닐까 싶다.
이제는 사라진 예전의 빨래터에서 여인네들은 약간의 경계심은 있었겠지만 못 할 말이 없었던 듯하다. 지아비와 시어미 흉은 물론이거니와 그 시대 여인들에게 금기어였던 性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내뱉음으로써 해방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했을 것이다.
축제 첫 날이 1일은 성당 주일 미사가 있는 날. 그래서 일부 축제 봉사자들은 전날 토요 미사를 참례하고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사정상 부득이(?) 주일 미사를 참례하고 12시가 다 되어서 나타난 봉사자들. '왜 이리 늦느냐'는 푸념 어린 질책에 '신부님이 공지사항을 40분이나 하는 바람에 늦어졌다'며 발뺌에 바쁘다. 그 말 떨어지기 무섭게 먼저 온 봉사자 왈 '니네 본당 신부님은 왜 그 모냥이니?'라며 사둔 남 말 하듯 한다. 분명 그도 우리 본당 신자인데 혹시 자신에게 불어닥칠 뒷담화 압수 수색에 대비해서 다른 본당 신자처럼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으려는 계산인 듯하다.^^
빨래터나 설거지터에서나 어디서든지 뒷담화는 일단 그 달콤한 유혹의 힘에서 위력적이다. 그래서 오죽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라고 하셨을까.
이번 설거지 현장은 2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섞여서 일하다보니 언어 소통에 약간의 이질감도 엿보였다.
음식이나 설거지 거리를 담아 내오는 저 물건을 '오봉'이라는 세대와 '쟁반'이라는 세대가 함께 어우러졌었다.
떡볶이를 조리하던 큰 냄비와 돼지국밥을 끓이던 솥이 설거지로 나오자 이제 '시마이'라며 전문 용어(?)를 남발하는 꼰대 세대에게 연휴를 맞아 모처럼 부모님 뵈러 왔다가 설거지까지 함께한 아들딸들은 속으로 떨떠름하지 않았을까?
설거지 현장에서는 가끔씩 수고한다며 막걸리와 소주 잔을 들고 오는 봉사자들이 있는데 설거지 하느라 고무장갑을 낀 손을 벗기가 번거로우니 안주를 젓가락에 집어서 입에 직접 넣어주곤 한다. 그래서 성당에서 신부님이 주시는 성체 말고 외간 남자가 주는 안주 받아 먹기는 생전 처음이라며 쑥스러워하는 자매님도 있었다.
음식을 조리하고 물품을 판매하던 봉사자가 설거지 현장에서 잠깐 일하시고는 여기가 다른 데보다 가장 활기 있고 재미 있다며 좋아하기도 했다.
어쨌든 모두가 함께여서 뜻 깊었던 축제였다.
올해는 특히 교회의 '찬미받으소서' 지침에 따라 가급적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사용을 자제함으로써 설거지 현장에서는 숫가락과 젓가락, 각종 컵과 그릇 설거지 양이 많이 늘었는데 조금 힘들긴 했지만 잘한 결정이라는 생각이다.
'코스모스'와 '오봉'과 '시마이'는 모두 우리말이 아니다. 그중에서 '코스모스'는 외국에서 들어온 말이지만 우리말로 동화되어 우리말처럼 쓰이는 외래어지만 '오봉'과 '시마이'는 일제의 찌꺼기이므로 '쟁반'과 '마무리'라는 우리말로 순화해서 써야겠다.
이틀 동안 치열했던 먹거리장터를 갈무리하느라 다들 손발이 분주한데 본부석 앰프에서는 저물어가는 축제가 아쉬운 듯 흥겨운 가락이 단말마처럼 흘러나온다.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 사랑이야."
#코스모스 #축제 #홍천 #빨래터 #설거지 #찬미받으소서
2023. 10. 3 개천절(추석연휴 마지막 날)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모두들 너무 수고하신 덕택에 힘들었지만 풍성한 축제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서석성당 파이팅! ^^-
댓글 감사드립니다.
신부님도 애 많이 쓰셨습니다.
뒷담화는 하지 말아야겠죠?^^
베드로 고생했어 내년에도 부탁해요~~~~
멋진 댓글을 주셨으니 멋진 글로 답합니다.^^
"교회는 함께 걸어가는 데에서, 회중의 모임을 통해서, 그리고 모든 구성원이 복음화 사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에서 자신이 '친교(코이노니아)'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실현한다 "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6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