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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사의 꿈은 깨지고 착하게 살았어도 신문. TV에 나쁜 사람으로 보도가 되어서, 진실을 밝히고 지나온 삶을 글로 써야 하였다.
2024.10.29일 이경용 씀.
지난날의 ①큰 불행(홍검사의 고문 및 범죄조작 사건)을 이겨내고 ②노모를 100세까지 모시면서 ③부동산 사업을 성공시키고 ④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⑤베푸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이경용에게 응원과 위로는커녕, 글 삭제를 요청하는 매정한 친구도 있었다.
★허위 보도한 신문, TV 때문에 상계동 길거리에서 옛날 이웃으로부터 모욕을 당하였기에 더욱 진실을 밝히는 ☀글을 써야 하였으며,
특수부 홍검사의 ”반인륜 고문범죄“에 대하여 진실을 밝히고 명예회복을 위하여 이경용이가 올린 글에 대하여
①글 삭제를 요청하더니 ②최근에는 재심청구서의 글도 전부 싹 없애라는 현대건설을 다녔던 김모 친구 때문에 ☀이글을 쓴다.
이경용이가 한창 고통에 빠졌을 때, 위로는커녕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이경용에 대한 평판이 안좋다는 현대건설 직원들의 이야기”를 하였던 김모 친구였다.
★과거에 “현대건설로부터 공사 수주 피해를 당했다는 진정민원 처리”시에 있었던 내용을 알려줘야 만이 이경용에 대한 나쁜 평판(김모친구)이 없어질 것이다.
①어린 날의 밑바닥 생활 ②공직생활, ③사회생활의 인생이력 중에서
이경용의 인간됨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세청 공무원 20년을 다닌 후에는 세무사가 되어, 연금을 받으면서 편안한 인생을 살고자 하였다.
영화계 비리로 1996.10.17.일자로 구속 중인 곽씨의 압수된 회사장부에 “5억600만원의 세금환급”을 발견한 검찰은, 이런 고액의 세금환급에는 반드시 “청탁뇌물”이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고서
①회사 직원 정봉운을 끌고 가서 허위 자백을 받아낸 뒤에 ②공무원 이경용과 노과장에게 무자비한 변기통 고문 등을 가하였다. 죄도 없이 끌려가서 강제자백의 물고문을 당한 2일 뒤(1996.11.7.일)에 한겨레신문 등에
①”세무공무원 영화비리에 개입“ ②뇌물을 받고 세금을 환급해주었다는 보도가 신문과 TV 저녁 뉴스에 크게 나와 버렸다.
교도소에서 93일을 보내는 동안, 지나온 과거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 이런 고통과 불행을 줍니까?하고 통곡도 하였다.
어린 14살부터 식당에서 4년간 일하면서 음식배달, 설거지, 연탄 갈기, 수돗물이 없어서 식당 밖에서 물을 길러 나르기 등을 하였으나
작은 주막 식당으로는 ①대가족(외할머니, 부모님, 동생 3명)을 먹여 살릴 수가 없었고, ②사채 빚이 늘어갔으며, ③명문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셋째형의 하숙비 등을 도와줄 수가 없어서
18살(만16세)부터 새벽에 일어나 3년 동안 짐자전거 막걸리 배달을 하였고, 어린 날에 모질게 고생을 하였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면서 고통이 더 가중되어 93일 동안, 수없는 날들을 눈물로 지새웠다.
검찰에 불려가서 허위 강제자백을 당한 회사 직원 정봉운씨가 피하라고 전화로 미리 알려주었어도 피하지를 않았다. 아무런 죄를 지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서울지방국세청에서 정밀 특별세무조사를 실시한 지시공문에 의해서 “세금환급5억600만원과 세금부과 8억5150만원”을 동시에 업무를 집행하여
세금 3억을 더 추징한 이경용에게는 죄가 될 수 없음에도 무죄를 유죄로 만들어버린 특수부 홍**검사에 의하여 ”세금환급에만 청탁범죄의 누명“을 써야 하였다.
변기통의 물고문을 가한 뒤에 허위 강제자백(적어준 대로 베껴씀)을 당하였다.
대한민국의 특수부 홍검사는 ”무죄를 유죄로 만든 수사실적“을 올린 뒤에 초고속 승진(평검사→검사장)을 하였다. 검찰공화국이었다.
재수에 옴이 붙었는지? 상급자의 간곡한 부탁에 의하여 업무가 미숙한 다른 직원의 업무를 아무런 대가없이 ①무료로 도와준 일이 ②형벌의 고통에다가 20년 근무했던 ③공직에서 파면까지 당해야 했다.
법정에서 회사 직원 정봉운(검찰에 허위 진술했으니, 빨리 피하라고 전화해줬음)은 돈(뇌물)을 준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으로 법정 허위 증언까지 하였다.
특수부 홍검사의 악랄하고 잔인하고 흉악한 ”유죄 만들기의 수사기법“이었다. 인간쓰레기이며 사기꾼인 홍검사였다.
강제자백을 당한 허위 진술서 2장(이경용. 정봉운)에 의하여 1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았고, 상소해봐야 승소의 실익이 없다는 변호사의 말을 듣고 상소를 포기했다.
①노모, 처자식, 동생을 부양해야하고 ②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자식 2명을 학교에 잘 다니게끔 뒷바라지 하려면 소송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외국영화사로부터 약15억원의 소득을 올린 곽씨는 개인 소득을 숨기기 위하여 15억원의 개인 소득을 법인 앞의 소득으로 허위 신고하였기에 법인세를 환급해주고 소득세를 추징하라는 상급기관의 지시공문이었다.
검찰 특수부가 너무 무서워서 ①세금3억을 더 추징한 문서와 ②서울지방국세청의 지시공문에 대한 정보공개를 거부한 종로세무서와 서울지방국세청이었다.
담당 공무원은 정보공개를 해준다고 했었는데 상부의 압력이었는지, 검찰의 압력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정보공개를 해 줄 수가 없단다.
하위직 공무원은 정보공개를 해주려다가 못해 준 것에 대하여 괴로움과 고통을 당했을 것은 뻔하다. 공개정보를 못해준다는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난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수많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힘들었으며 밤에는 술에 취해야 하였다.
어느 법무부 여직원은 홍검사를 지칭하면서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지난날 20년간 근무했던 직장을 원망만 할 수도 없었다. 검찰에 밉보이면 아무런 죄도 없는 이경용처럼 고문수사를 당하여 범죄의 누명을 쓰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검찰공화국이었다.
고문수사, 범죄조작 등에 대하여 대통령, 국회의장, 법무부장관, 검찰총장 등에게 진정 민원을 보내고, 변호사(3500분), 대학교수(5500분), 국회의원(250분)앞으로 메일을 보내기도 하였다.
엄청난 고생과 노력도 헛수고였다. 대한민국은 특수부 검사(이경용한테 온갖 쌍욕, 폭행, 고문과 거짓말을 일삼음)가 저지른 천인공노할 반인륜 범죄를 눈 감아 주고,
그 범죄자 홍검사를 승승장구 진급(평검사→검사장)시켜주었고, 변호사로 개업하여 수백억의 수입을 올리면서 수많은 범죄를 저질러 2년의 감방을 살뿐이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착하게 베풀면서 살아온 실제의 이야기로
①어린 날의 밑바닥 생활 ②공직생활, ③사회생활의 인생이력 중에서
이경용의 인간됨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헌신하듯이 살아온 이경용에게 피눈물을 쏟게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세상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베풀면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이경용이다.
☆. 14살부터 21살까지 7년 동안, 너무나 큰 시련과 고통을 당하며 살아야 하였다.
1. 시골 읍내에서 정미소 사업을 하다가 망한 뒤에 갑자기 무일푼의 거지같은 생활이 시작되었다. 1969년도에 서울 상계동에서 어머님과 14살의 넷째 아들, 둘이서 작은 주막식당을 운영하여 셋째 아들만 명문중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2. 쌀값이 없어서 수없이 쌀값을 외상으로 해달라고 사정을 하는 어머님을 보면 눈물이 났다. 이웃 쌀집에서 식은 쌀밥을 갖다 주면 고맙게 받아먹었다.
3. 시골의 빚쟁이가 찾아와서 빚 독촉을 하면 이웃집을 찾아다니면서 돈을 빌려달라고 사정을 하거나 비싼 고리 일수 빚을 얻어야 했으며 밤마다 잠자리에서 몰래 눈물을 흘리는 어머님을 보면 어린 10대의 경용이도 잠자리에서 울어야 하였다.
4. 작은 식당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고 빚이 늘어나서 식당 일을 하다가도 이경용은 기와공장에 다니기도 하였다. 기와 공장에서 노동(기술자 밑의 데모드. 기와 지붕일)일당을 벌어서 갖다 주면 어머님과 아버님이 너무 좋아하셨다.
5. 빚만 늘어나고, 셋째형의 하숙비도 줄 수가 없어서 막걸리 자전거 배달에 나섰다. 만16세의 어린 이경용은 명절(설, 추석)전날에 아침부터 컴컴한 밤까지 무거운 막걸리(1개당 20킬로)통을 나르다 보니 명절부터 3일 동안, 온몸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6. 감기에 걸리거나 배가 아픈 날이면 막걸리 배달이 ①너무 힘들어서 남몰래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아픈 몸으로 당고개의 비탈길을 짐자전거에 내려서 끌고 가면 ②온몸은 쑤시고 아파왔으나 ③병원에 갈 수도 없었고 약도 거의 사먹지를 않았고 돈을 절약하며 살아야 하였다. 이런 과거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7. 술 취한 오토바이 충돌 사고를 당하여 20만원(1973년도 집 값: 70만원)의 큰돈을 받아서 빚을 갚는데 전부 써버렸다. 거액의 보상비가 없었으면 많은 빚 때문에 셋째는 전남 광주의 명문 학교를 못 다녔을 것이다.
8. 아버님의 병원비와 집을 장만하기 위하여 시골 과수원 재산(땅+배나무+주택)을 105만원에 팔았으나, 큰아들이 전부 탕진해버렸고, 병실에서 간호를 하던 외할머님을 모시고 상계동으로 돌아왔다.
9. 병든 아버님은 1973년 가을경에 대학병원에서 쫓겨났고, 집안은 슬픔과 고통에 빠져버렸다. 어머님은 눈물로 수많은 밤을 지새우셨고 이경용이도 고통의 세월을 보냈으며 큰 형을 죽이는 악몽에 시달려야 하였다.
훗날, 큰형에게 아파트를 사준 이경용이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10.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하는 ②아버님께 치료 약을 사드리고 ③노동일당과 월급을 갖다 준 자식은 넷째 아들 경용이뿐이었다.
11. 죽을 날만 기다리던 병든 아버님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자식 3명이 불쌍하다고 넷째 아들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셨다. 경용이는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12. 막 노동일로 살 수가 없어서, 자전거 배달을 중단하고 독서실에서 1달 공부하여 국세청 시험(1976.10월)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되었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니 어머님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셨다.
13. 장하다 우리 넷째 아들! 하셨다. 1달 전만 해도 짐자전거 노동일을 하였고,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은 사람이 국세청 공무원이 된 것에 대하여 상계 시장 안팎의 이웃들께서 크게 놀라고 칭찬을 많이 해주셨다.
☆. 국세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①가난한 납세자는 도와주고 ②탐욕하게 크게 탈세한 사람들은 세금을 많이 추징하였다.
1. 체납자의 집을 찾아가니 초라하고 작은 방에서 나이 어린 10대의 자매 2명을 보고 난 뒤에 너무 측은하고 가여워서 삼양라면 1박스를 사주었다.
2. 이경용의 나이 25살 때인 1980년도의 일이다. 수중에 돈도 없고 가난한 이경용이지만 라면1박스를 사주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고 훗날, 두고두고 불현 듯 생각이 난다.
3. 수유리 북부 시장 안의 작은 쌀가게 주인이 세금 약320만원을 납부하지 않아서 쌀가게 임차 보증금 300만원을 압류하였더니, 세무서 사무실을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시며 봐 달라는 것이었다.
4. 회사(시장)에서는 당장에 쫓아낸다고 하였다. 쌀가게를 찾아가니 80대의 노모, 처,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2명이 쌀가게 안의 작은 방에서 살고 있었다.
5. 상계동에서 세를 살고 있던 이경용은 쌀가게의 참상(돈 한푼 없이 쫓겨날 처지)을 보고나서 슬프고 괴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6. 친구가 병역을 기피하여 ”비니루 수지 공장의 명의를 뒤집어 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모든 서류를 만들어 주었고 직장 상급자들을 설득하여 세금 전액을 취소해주었다.
7. 쌀가게 아저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경용에게 너무나 고맙다고 1천원짜리 50장을 넣은 봉투를 주어서, 아니 어떻게 천원짜리(낡고 더러움)50장을 가지고 왔냐 하니, 주변의 야채 가게 등에서 빌려서 가져 왔다 한다.
8. 벼룩의 간을 빼먹지 이런 돈을 가져오시면 안되요 하였다. 땅에 닿도록 큰절을 하시더니 크게 웃으시며 가셨는데, 마음이 너무 기쁘고 좋았다.
9. 쌀가게 앞을 피하여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데 뒤에서 쌀가게 아저씨가 이경용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하더니, 날씨도 더운데 구멍가게에서 시원한 맥주한 잔을 권하였으나, 공무원이 대 낮에 술을 먹으면 안 된다고 사양하였다.
10. 시원한 사이다 한잔을 권하여 사양하였더니 너무나 서운하다면서 화를 크게 내어서 사이다를 먹어야 하였다. 그후, 지금까지 쌀가게 아저씨를 본적이 없지만 그 얼굴만이 이경용의 뇌리에 살아남아 있으며 이경용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일이다.
11. 청량리 세무서 부가세과에 근무하던 1992년도에 사행성 오락업체(빠찡코)에 세무조사를 나가서 세금 1억1천만원을 추징하였다.
12. 결재 과정에서 이렇게 큰 금액을 추징해도 되냐?고 할 정도로 세금을 크게 안낸 사람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고액을 추징하였다.
13. 세금 약800만원(1992년도)을 체납하였는데, 재산이 없는 사람 앞으로 명의 위장하여 개업한 후에 폐업한 사례로, 당장에 체납 세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정밀 조사를 하여 추징한다고 하니 전액 납부하였다.
14. 인사치례(봉투)를 할테니 봐달라고 했으나 거절하였다. 재산이 없으면 결손처분하면 그냥 끝날 일이었지만 이런 일은 봐주면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뒷돈을 받고서 봐주면 양심을 팔아버리는 행위이기에 절대로 용납이 안 되었다.
15. 세무 조사를 나가보니 연립주택의 지하(장안동 경남 호텔 뒤)에서 백화점 등에 그릇 등을 납품하는 사업자였으며, 여직원이 말하길 ”사장님은 중곡동 반지하에서 세를 살며 사업이 너무 어려운데“ 조사를 나왔다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16. 사무실로 돌아와서 자료를 정밀 분석해보니, 그릇 등을 건영백화점 등에 납품을 많이 하였고, 영업 매출은 많지만 탈세 혐의가 많지 않음을 파악하고서
17. 세무 조사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사유와, 이경용의 담당 구역에서 세무 조사 대상으로 선정하는 사유 등을 기재하여 서울지방국세청의 승인까지 받아서 형편이 어려운 사업자를 배려해주었다.
18. 이경용은 담당 구역에서 신세를 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세무조사 대상을 공정하게 엄정하게 선정하는데 있어서 별 애로 사항이 없었다.
19. 특별세무 조사 대상(서울지방 국세청에 조사실적 보고)에서 제외시켜 준 것에 대하여 너무 고맙다고, 키가 아주 작은 사무장(양모 세무사)이 사례(봉투)를 하겠다고 찾아 왔으나,
”반 지하에서 살고, 사무실도 반 지하에서 어렵게 사업을 하는데 벼룩의 간을 빼먹지?“하고 돌려보냈지만, 어려운 사업자를 도와준 것이 마음이 기쁘고 위안이 되었다.
20. 부가세과에 처음으로 발령받아서 한군데 사업장의 영업 실태(규모 및 직원 현황 등)를 파악하기 위해 방문하였더니,
사장님이 여직원에게 ”봉투에 5만원을 넣어라“하는 말을 듣고나서 어떻게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그러시냐? 고 하니 다 그런 것 아닙니까?하였다.
21. 훗날 세무사를 하려면 수많은 사업자와 친하게 지내야 함에도, 공무상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일체의 사업장 방문을 하지 않았다.
22. 사업자와의 만남이 많을 수밖에 없는 부가세과를 6개월 만에 중도에 그만두고 한직을 원하여, 서울지방국세청의 승인까지 받아서 부서를 옮기었다.
23 부가세과에서는 세무조사(고액 추징)를 잘 하고, 기타의 업무 등을 잘한다는 이유로 부서 옮기는 것을 적극 반대하였으나, 이경용의 강경한 주장을 받아주어 고마웠다.
24. 청량리 세무서 부가세과에 근무하던 1992년도에는 공무원 월급이 박봉이어 생활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안산에서 큰돈(1990년~1992년)을 많이 벌어서, 청백하게 살기 위하여 ①개인 사업자와의 일체의 만남을 피하였고, ②사례비의 봉투(그릇 납품업체 조사 대상 제외시켜줌)등을 거절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25. 청량리 세무서를 떠나 1993년경에 국세청 본청으로 발령이 났고, 전국 세무상담을 하였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퇴근 때까지 상담을 하다 보니 입 안이 쓰고 머리도 아프기까지 하였다.
26. 장래를 생각하여 세무상담과 더불어 세무사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머리 아픈 증상과 다리 마비의 병까지 와서 세무사 공부를 중단해야 하였고 서울대 병원, 한의원을 다니며 치료해야 하였다.
27. 국세청의 전국 세무상담관을 마치면, 본인이 원하는 세무서와 부서로 보내준다. 이경용은 종로에 있는 세무사 학원을 다니기 위하여 종로세무서 법인세과를 자원하여 발령이 났다.
28. 다른 직원들 같으면 절대로 종로세무서 법인세과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에서 범죄 날벼락을 맞아 버렸다.
29. 상급자의 부탁으로 다른 직원의 일을 도와주었으며, 지방국세청의 조사 공문대로 3억을 더 추징하였음에도 범죄 날벼락을 맞았으니, 운명인가? 싶었다.
30. 업무를 잘한다고 전직원 150여명 앞에서 기관장(종로세무서 이상훈 서장)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31. 청백리는 아니지만, 청백한 삶을 살자고 노력하였던 이경용이었다. 인사청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고 이권부서에 지원하지도 않는 이경용의 공직 철학이었다.
32. 업무를 너무 잘하는 것이 죄가 되려고, 남의 업무를 도와준 일로, 범죄 날벼락을 맞아버려서 큰 불행을 겪어야 하였다.
33. 자식을 낳아 순사(경찰)와 세리(세무공무원)를 시키면 안된다는 살아생전의 아버님 말씀이 떠올라 영어의 몸일 때, 교도소 안에서 눈물을 쏟아야 하였다.
아버님은 아들 경용이가 세무공무원을 하면, 겪을 불행을 예언하셨나? 싶었다.
34. 현재, 직장동료 7명의 성북회 모임에서 과장(1명), 서장(2명)으로 정년퇴직하여 세무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였다. 각자의 운명대로 살아야....
☆. 운이 좋아, 안산에서 부동산으로 1990년~1992년도에 많은 돈을 벌었다.
1. 을지로 세무서 법인세과에 근무할 때인 1985년경에, 법인 소득에 대한 방위세를 너무 많이 자진 납부한 조흥은행 본점 계좌로 5400만원을 즉시 환급해주었다.
2. 법인세 신고서를 서면 검토해보니 방위세를 25%만 납부하면 되는데 37.5%를 납부하였기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직권으로 환급조치를 해주었다.
3. 조흥은행 본점 직원이 이경용을 찾아왔다. 은행에는 대형 회계법인과 공인회계사들이 있고, 경리 회계부서에도 많은 직원들이 있음에도 이렇게 고액의 세금 환급이 발생한 것에 대하여 은행 내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4. 은행에서는 선생님(이경용 지칭)한테는 사례비는 줄 수가 없고, 대신에 은행 대출을 권하여 2천만원을 대출을 받아서 안산 땅을 취득하는 데에 사용했고 큰돈을 버는 계기가 되었다.
5. 안산 땅의 주택지 분양가격은 1986년 초에 평당 16만원대(1필지 80평 가격: 1200만원)였으며, 4년 뒤(전철 상계역 개통)의 1990년도에는 평당 100만원이 넘어서 약 6~7배로 가격이 뛰었는데 이런 것을 전부 예측하여 큰 수익을 올렸다.
6. 장인 어른의 단독주택을 담보로 잡아서 대출을 받아, 안산에 상가를 짓기도 하였고, 주택1필지에서 1억이 넘은 거금을 벌기도 하였다.
7. 이런 큰돈이 들어오면 큰형, 둘째형 등에게 아낌없이 주어버렸다. 아내와 상의해서 준일로 도와줄 때마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서 줄 수 있었다.
8. 어머님을 괴롭히던 시골 읍내의 과거 빚도 이자를 붙여서 전부 갚아드렸다.
☆이경용의 평판(현대건설 직원들)이 안 좋다고 이야기 하던 김모 친구 때문에 여기에 장문의 글을 쓴다.
1. 종로세무서 법인세과에 발령이 났을 때는 김영삼 정부 시절로, 정주영 회장과 관련이 있었던 현대건설은 관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한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였으며 현대건설 직원들을 보게 되면 관을 좋지 않게 본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2. 이경용은 현대건설의 지역 담당자도 아니었고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어느 날 현대건설 앞의 진정서가 들어왔는데, 현대건설의 공사를 맡아서
3. 몇 억원의 적자(그 당시 큰돈임)를 봐서 부도 위기이며, 자재비 등의 공사견적, 공사계약서 등을 많이 첨부하였던 진정 민원은 이경용한테 배정이 되었다.
4. 적자인줄 알면서도 공사비를 너무 깎아서 발주하였고, 다음번에는 손해가 안 나게 잘 해주겠다고 하면서 계속 적자를 보게끔 공사를 발주했으니 철저히 조사를 해달라는 요지의 민원 진정이었다.
5. 현대건설과 사인 업체 간의 공사계약으로, 이경용이 적극 나설 일은 아니었지만 현대건설 경리부서 간부, 임원과 대화를 나누면서 ”적자가 많이 안나게끔 배려를 해주지“라고 하였더니, 현대건설은 잘못이 없으며 아주 기분 나빠하였다.
6. 대기업(현대 건설 등)은 영세한 거래처를 먹고 살게끔 해주어야지, 죽든지 말든지 오로지 대기업의 이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이경용이다.
7. 진정 처리를 함에 있어 현대건설의 책임을 지울 수 없다는 조사보고서로 끝냈던 일이다. 그 당시 현대건설 직원들은 이경용을 안 좋게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8. 이경용의 친구 김모씨는 술자리(재광, 평원, 김모친구, 이경용)에서 이경용에 대한 평판(현대건설의 직원들임)이 안 좋다는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경용 앞에서 둘이서 조용히 이야기를 하던지, 개인적인 판단을 가지고 함부로 이야기를 하였다.
9. 김모 친구 때문에 술에 만취해서, 창동의 아파트 부근의 어두운 밤의 길거리에서 슬피 운적이 있었다.
10.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범죄 날벼락을 맞아서 괴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이경용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하다니...
11. 이경용은 누구한테 욕을 먹을 처신으로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었는데 친구들과의 술자리 모임에서 ”이경용에 대한 평판이 안 좋다는 현대건설 직원들의 이야기“를 해버린다.
12. 현대건설과 어떤 관계도 없는 이경용이며, 상기와 같이 정직하게 청렴하게 공직생활을 해온 사람이다.
13. 서평원같은 친구는 ①신문에 나온 기사와 ②친구들이 이경용을 나쁘게 이야기를 하면 ”이경용은 절대로 그런 나쁜 행위를 할 사람이 아니다“고 강변해준다.
14. 이경용은 2008년도에 상가를 완공한 뒤에 건축업자 김수원씨에게 계약서 금액 외에 2천만원을 더 주었다. 계약 금액 외에 금액을 더 준 사람은 본적이 없었다면서 절대로 안 받으려고 했으나 여러 가지 고마운 점을 들어서 받게 만들었다.
15. 이경용은 건축 공사 업체가 손해를 보지 않도록 이익이 남게끔, 공사계약을 해준다. 공사비를 함부로 깎지 않았으며 공사비도 빨리 준다.
16. 건축비 문제로 1991년경에 ①서평원 친구는 건축비를 더 안받으려 하고, ②이경용은 건축비를 더 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이런 것이 진정한 친구인 것이다.
17. 이경용을 배신한 친구들과 이경용에 대한 평판이 안 좋다고 이야기 하는 친구는 이경용이 작성한 명예회복의 글에 ①댓글 하나 쓰지 않았고 ②김모 친구는 글 삭제까지 요청하였다.
18. 검사가 활개(검사 범죄는 수사를 거의 안함)치는 나라인 검찰공화국에서 재심변호사를 구할 수가 없었다. 검사 독재가 없어지는 날에, 변호사를 구할 것이다.
19. 그런데 김모친구는 이런 재심 청구서의 글(널리 알려서 변호사를 구하려 함: 목 메게 집착하지 않음)을 싹 없애라 한다. 말끝에 모든 검사가 나쁘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20. 이경용이 직접 작성한 재심 청구서를 읽어보고서 곧바로 서모 세무사는 전화로, 응원과 지원을 해주었는데 너무 고마웠다. 김모 친구와 너무 달랐다.
21. 광화문 거리에서 태극기를 몸에 휘두르고 다니는 열성은 있으면서 이경용에 대한 진실된 우정과 애정은 거의 없는 친구이다.
22. 고위공직에 있었던 친구와 서평원, 김용규, 박재광, 박경섭, 강진규 등의 진실한 친구들은 홍검사에 대하여 나쁘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23. 공직에 있었던 친구들도 이경용을 위하여 응원 댓글(권오선, 박상규)을 써주었고, 기타 많은 친구들이 댓글을 많이 써주었다.
24. 이경용에 대한 나쁜 평판(현대건설 직원들)의 이미지가 김모 친구한테 박혀있어서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글 삭제를 요청하는 친구이다. 정말 실망스러웠다.
25. 고 박경섭 친구의 백혈병 항암 치료가 너무 잘 되어, 거의 완치되어 가고 있으니, 외부에서의 만남을 절대로 피하자 하였고, 2달 뒤의 5월(2024년)에는 함께 식사하자고 약속까지 하였다.
26. 그런데 갑자기 폐렴 병(항암치료 중에서는 면역력이 약해서 2달 동안, 전염병을 매우 조심해야 했는데, 외부에 있는 사진을 보고 경악을 해버림.)에 걸려서 사경을 헤멘다고 하더니 며칠 뒤인 4.29일에 사망하였다.
27.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이경용 부부는 장례식장과 장지까지 3일을 다니면서 박경섭 친구의 영혼을 달래야 하였다. 진실한 친구를 떠나보내는 아픈 마음이다.
☆악인 홍검사, 이경용을 배신한 친구 5명을 잊고 현실과 앞만 바라보며 행복하게 즐겁게 살 것이다
1. 이경용을 큰 불행에 빠뜨렸던 악인 홍검사,
2. 사기를 치듯이 수없이 거짓말하고 거액을 떼먹은 목장업 김모 친구
3. 부자 되게 만들어 줬더니 이경용한테 부동산 사기를 처먹은 장모 친구
4. 집 마련 및 잘 살게 도와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은①교직원 서모 친구 ② 금세공 박모 친구 ③ 인쇄물 배모 친구
5. 과거의 일로 그들의 죄업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이경용의 저서에 남아 길이 전해질 것이다.
6. 악인과 배신자들을 탓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이경용의 건강만 해칠 뿐이다. 현실과 앞만 보며 행복하게 즐겁게 살 것이다.
7. 이런 글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방해(삭제 요구)하는 친구1명이 있으니, 너무 실망이고 끝까지 실망을 준다. 이경용의 인생관을 그렇게 모른가? 싶다.
8. 인생을 살다보면, 불행. 슬픔. 행복. 기쁨 등을 겪게 된다. ①세종대왕 같은 성군의 시대도 있지만 ②몽골과 일본에게 침탈을 당한 불행의 시대도 있었다.
9. 개인이든 국가이든 간에 불행했던 내용이 있으면 무조건 삭제하고 읽지 말란 말인가? 가난을 참혹하게 겪어봐서 크게 깨우쳐야 이경용처럼 가난한 약자(형제, 친구, 세입자, 지인 등)를 도와주는 것이다.
☆. 사회에서 상대적 약자 등을 도와준 실제 사례들이다.
과거(1996.11.7.일)에 신문과 tv에 영화비리에 개입하여, 뇌물을 받고 세금을 환급해주었다는 기사 때문에 상계동 길거리에서 이웃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당하였다.
이경용의 공직 생활과 실제 이야기를 실어서 나쁜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임을 밝히는 것이다. 글을 읽은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1. 충무로에서 식당을 매도하면서 계약금 400만원을 받은 후에, 매수자가 계약금 일부만이라도 돌려주기를 사정을 하였으나, 400만원의 전액을 줘버렸다.
2. 1987년도에 400만원이면 큰돈이다. 없는 사람들한테 위약금을 받고 나면, 기분이 좋을 수 없었으며 위약금 400만원을 계좌송금해주고 난 뒤에는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3. 묵동의 단독주택을 매도하면서 계약금 400만원을 받았으나 너무 싸게 팔아서 계약을 취소하다보니 계약금 400만원과 위약금 400만원, 합계 800만원을 1988년도에 매수자한테 지급했던 이경용이다.
4. 위약금을 단 한 푼도 깎아주지 않는 매정한 사회현실이지만 이경용은 이런 사회현실과 다르게 본인은 위약금을 물면서도, 거래 상대방에게는 사정이 어려우면 위약금을 받지 않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
아내도 이런 남편을 적극 협조해준다. 고마울 뿐이다.
5. 남양주 상가에서 커튼 매장 60평을 하던 임차인에게 미납된 월세 2500만원을 2017년도에 탕감해준 이경용부부였으며, 월세 260만원을 140만원으로 깎아주고서 잘 살기를 바랐다. 이렇게 많이 도와준 임대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6. 상가 임차인 3명(신도리코 판매, 미용실, 피부 관리)이 20년 동안, 있다가 퇴실하였는데 임대료를 전혀 올리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어서 그저 잘살기를 바라는 이경용부부이다.
7. 아파트 세입자(하남 미사, 리버뷰자이)가 월세를 올려준다고 해도, 월세를 올리지 않는 이경용이었다.
계약 만기 후에, 아들 2명을 결혼시키기 위하여 계약을 2번이나 연기해주었다. 월세도 안올리고 결혼하게끔 도와주셔서 너무 고마워하던 세입자의 말을 들으면 그것으로 만족이고 큰 기쁨이었다.
8. 현재의 임차인(수학교습소)의 2칸의 보증금은 200만원, 월세는 67만원인데 새로 임대차 계약(2024.12.31.입주)할 기준으로는 보증금은 1,000만원, 월세는 130만원을 받아야 하지만, 퇴실할때까지 임대료를 올리지 않는다는 이경용부부이다.
9. ①월세를 10년 넘게 안올리고, ②미납 월세 2500만원을 탕감시켜주고 ③월세를 깎아주는 이경용 부부의 마음 자세는 세입자에 대한 깊은 배려(베풂)때문이다.
10. 서울 송파 구청 앞 횡단보도에서 이경용의 소렌토 승용차가 정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차 후면을 크게 들이 받쳐서 차 밖을 나가보니, 외제차 승용차의 전면이 크게 손상이 되어 있었고,
11. 깜박 졸다가 차를 심하게 들이 받아서 너무 죄송하다고 하였다. 소렌토의 뒷 밤바를 확인해보니 작은 상처의 기스만 있을 뿐이었고 상대 가해 차량은 심하게 부서져 있었다.
12. 소렌토 중고차를 수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앞으로 조심해서 운전하시고 제가 봐주었듯이 베풀면서 살라는 한마디만 해주었던 2016년도의 일이다.
13. 다른 피해 차량 같으면 목 등을 다쳐서 입원하고 피해 보상비를 많이 뜯어내려고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이경용은 그런 탐욕한 행위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봐줘버렸다.
14. 소송을 당하여 너무 괴로워하던 이웃(하남 미사리 남원골 추어탕)을 위하여, 눈에 실핏줄이 터지고 잠도 못자고서 온갖 정성(판례 등 찾음)을 들여 소송 글을 써주어 이기게 해주었다.
너무나 고마워해서, 그저 기쁠 뿐이었다. 그런데 승소금 약5천만원이 생기자, 10년 넘게 친하게 지내던 인연을 끊고 고의적으로 잠적(2017.3월)해버렸다.
양의 탈을 쓴 늑대 인간이었다. 돈 때문에 배신하는 인간들이 가장 추악하다.
15. 탐욕한 인간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 형제 등에게 베풀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비양심을 저지르면서 많은 재물을 쌓아서 ①자식들에게만 집을 사주고 ②재산을 물려준다.
16. 지난날의 살아온 행적을 돌이켜보고 선행은 멀리하고 악행을 많이 저지른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죽을 때까지 베풀며 살아야 죽은 후에 영혼이 축복을 받는다.
☆과거(1996.11.7.일)에 신문과 tv에 나온 잘못된 보도를 바로 잡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친척. 친구. 지인. 과거 직장 동료 등)에게
①진실을 밝히고 ②이경용이 실제 살아온 행적(악행과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님을 증명함)을 알려줄 내용을 글로 쓰는 것이다.
1. 대한민국은 특수부 검사가 한번, 범죄 올가미(유죄 만들기)를 씌우면 벗어날 수가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2. 수많은 사람(대통령, 검찰총장, 변호사, 대학교수, 국회의원 등)들에게 글을 보내도 누구하나 ☀답장도 없었고 ☀도와주지를 않았다.
3. 특수부 검사가 무서워서 쥐 죽은 듯이 조용하였고, 10년 넘게 이경용의 글만 홀로 외로이 소리칠 뿐이었다.
매정한 세상! 그 누구를 탓하겠는가? 운명으로 알고 살아야! 하늘과 神만이 깊이 알고서 굽어 살펴 줄 것이다!
4. 검사 범죄를 눈감아주는 부조리한 대한민국! 부도덕한 대한민국의 민낯을 보았고 집착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경용의 글만 책으로 영원히 남아서 전해질 것이다.
5. 영화비리에 개입하여, 뇌물을 받고 세금을 환급해주었다는 기사 때문에 ①상계동 길거리에서 모욕을 당하였고 ②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경용을 나쁘게 생각할 것에 대하여 시정하기 위하여 글을 써서 진실을 밝히며
6. 이경용이가 살아온 실제 이야기를 실어서 이경용이가 나쁜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을 사람임을 밝히는 것이다.
7. 14살부터 69세의 현재까지 55년 동안을 살아오면서 인생의 오점을 남길 일을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싶다.
8. 범죄 날벼락을 당하지 않았으면, 55년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범죄 날벼락을 당하여 연금을 박탈당하였고, 5년간 시험 제한이 있어서 세무사의 직업을 포기하고 다른 인생 길(부동산 사업)을 걸어야 하였다.
9. 이경용은 ①큰 부자인 친구와 ②고위공직에 있던 친구에게는 일부러 가까이 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친구들에 비해서 축부조금도 많이 하지 않는다. 차별 아닌 차별을 한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할 뿐이며, 많은 이해를 구한다.
10. 상대적으로 가난한 친구들과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외가집 친척(어머님의 계 모임)분들이 고 이길순 어머님의 장례부조금(2024.3.18.~3.19일)으로 30만원, 50만원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 빛 좋은 개살구, 양두구육 같은 겉만 화려한 인생을 살면 안된다.
1. 고위 공직까지 출세하여 결혼 주례 신청도 들어오고 사회에서 큰 대우를 받고 살지만, 탐욕하여 ①90대의 늙으신 노모에게 큰 불효를 저질러, ③눈물을 흘리시던 노모를 지켜보던 이경용은 너무 힘들고 괴로울 뿐이었다.
2. 지금도 그 엄청난 불효가 이경용의 뇌리에 잊혀 지지 않고 불현 듯 스쳐지나간다. 명문 중고등학교를 다니게끔 뒷바라지 해준 동생 이경용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듯이 막말을 해버리고,
3.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었던 고위 공직자 출신의 인생은 겉만 화려한 빛 좋은 개살구, 양두구육 소릴 들으며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4. 죽는 날에 가서야 후회할 것이다. 참으로 미련하며 인생철학이 없어도 너무 없이 탐욕만을 채우고 살아가는 것에 혀를 찰 뿐이었다.
☆. 사회적 약자들이 폭행을 당하거나, 피해를 당하면 수수방관하지 않고 적극 나서서 도와주었던 이경용의 삶이었다.
1. 이경용의 젊은 날에
①친구를 무참히 폭행했던 동네 건달을 직접 잡아서 경찰서에 넘겼고,
②졸병을 괴롭히던 병장을 사정없이 패서 영창(군대 감방)을 갈 뻔했고,
③길거리에서 여자의 배에 올라타서 폭행하던 청년의 뒷덜미를 잡아서 내 던져버렸던
정의감을 발휘했던 옛일들은 소설 속의 옛 이야기인양, 이제(69세)는 사그라져 가지만 불현 듯 스쳐 지나갈 때면 기분이 좋아지는 옛 추억이 되어 버렸다.
2. 사회적 약자(무주택 서민 조합원 등)를 위하여 진정, 민원, 내용증명, 고소장, 소송 글을 수없이 써주었다. 억울한 피해와 고통을 없애주기 위하여 아무 대가없이 무료 봉사 해준 일이었다.
3. 등산 때, 정상에 오르고 나면 기분이 좋듯이 어려운 사람을 위해 정성을 다하여 글을 완성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성취감도 있어서 힘들지만 써주었던 것이다.
☆. 공직에서 남의 업무를 무료로 도와주다가 겪은 큰 불행을 빼 놓고는 지금까지 인생을 참 잘 살아온 것 같다.
1. 악인 홍검사를 만나서 엄청난 불행(고문, 범죄조작 등)을 겪었으면 보통, 폐인이 되거나 공황장애 등에 시달릴 것이며 가족생활도 엉망이 될 것이다.
2. 이경용은 강한 정신력으로 ①가족(노모, 처자식)을 잘 부양하면서 ②부동산 사업을 성공시키고 ③자식 교육을 잘 시킬 수 있었다.
3. 혹독한 가난과 큰 불행을 겪으면서도 수많은 사람들(부모 형제, 친구, 지인, 사회적 약자 등)에게 도움을 주었던 수많은 일들이 있었다. 과거의 일들이지만 불현 듯 생각이 나도 마음이 즐거워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추억이 되어버렸다.
4. 어려서 풍이 걸려서 공부가 꼴등인 친누나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동생이 도와주어서 자식 4명(딸3명, 아들1명)을 학교에 보내고 살 수 있었다고, 명절 때에 만나면 수없이 고마움을 표시한 친누나였다.
5. 외사촌 누나에게 “누님 빚 없이 살아요”하면서 아파트를 취득하면서 생긴 빚을 전부 갚아주었다. 형, 동생들에게 집 마련 등의 큰돈을 수없이 주었다.
6. 부동산 사업으로 벌어들인 큰돈을 주지 않고 투자를 했다면, 강남에 빌딩이 있을 것이라고 카페에서 아내와 웃으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7. 100세까지 모셨던 어머님으로부터 찬사(잘 모셔주어 고맙다. 조선 팔도에 우리 넷째 아들처럼 형제를 많이 도와준 사람은 없을 것)를 들었다.
8. 대학교에서 국비 유학을 보내준다는데 이경용은 딸에게 유학(박사 과정)보다는 시집을 권하였고 딸은 시집을 가서 소중한 인연의 손주 2명(아들, 딸)이 생겼다.
외국의 유명대학교 박사보다는 단란한 가정이 우선이었다.
9. 아빠 생일날에, 딸이 자기 인생에서 아빠를 만난 것이 최고의 행운이라 한다. 자식으로부터 이런 찬사를 들으니 너무 기분이 좋았고 행복했다.
10. 아들이 시켜준 여행에서 아들과 둘이서 즐겁게 보내기도 하였고, 아빠와 둘이서 술을 먹기 좋아하고 아빠를 존경한다고, 사랑한다고 하는 아들이다.
11. 아들은 결혼할 때 부모님의 도움을 전혀 안 받는다고 할 정도로 부모를 생각하는 아들이 있어서 큰 축복으로 여긴다.
12. 장모님께서 사위 이경용을 처갓집에서도 대들보(집안의 기둥)라고 말씀하신다. 너무 과찬을 하셨지만 기분이 좋았다.
13. 아내가 시집을 올 때, 외할머님. 어머님. 동생들 3명과 같이 살아주었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 아들이 있었건만 고아원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자고 하였다가 아내에게 쓴 충고를 들어야 하였다.
14. 대가족의 명절, 제사를 지내주고 시어머님을 모시면서 너무나 힘든 아내에게 철없이 고아원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자고 했으니, 크게 잘못을 하였으며 아내에게 사과하였다.
15. 외환은행을 다니던 아내와 함께 맞벌이도 하였고, 상기와 같은 수많은 일들은 아내의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아내를 참으로 존경하며 너무 사랑합니다.
16. 공직에서 남의 업무를 무료로 도와주다가 겪었던 큰 불행을 빼 놓고는 지금까지 인생을 참 잘 살아온 것 같다.
2024. 10. 29일 이경용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