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5년 11월 16일 제주도 남제주군 대정면 상모리 전일본군 오무라 병사에서는
장창국(長 昌國) 부위에 의하여 조선국방경비대 제 9연대가 창설되었다.
이 연대는 미군정청의 Bamboo계획에 따라 경찰보조역할의 임무를 띠고 남한 9개 도 중 맨 마지막에 편성되었다.
그 당시 이미 2월 15일에 광주에서 창설된 제 4연대에서 차출된 54명의 기간요원으로 제주에 들어와 제 1기생부터 제 5기생까지 도내에서 신병을 모집하여 병력을 충원 하였다.
1930년 서귀면 보목리에서 태어난 한성택은 서귀중학교 재학 중
1947년 6월 30일 제 9연대본부에 제3기생으로 입영하여 제 3중대 보급 반에 배치되었다.
1948년 4.3사건이 일어나면서 사태가 안정되지 않게 되자
미군정청은 4월 17일 제 9연대(연대장 김익렬)에 진압명령을 내렸다.
5월 6일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되고
후임으로 수원 주둔하던 제11연대장 박진경(朴珍景)중령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제9연대 본부 5월 15일 제주읍 삼도리소재 제주농업학교로 이전함에 따라 한성택 이등중사도 연대본부 보급 반에 소속되어 제주농업학교로 왔다.
□ 박진경(朴珍景)암살시 같은 연대본부에
1948년 6월 18일 새벽 3시15분경 박진경(朴珍景 28세 6월 1일 대령승진))연대장이 암살당했다.
문상길 중위, 손선호하사, 신상우하사, 배경용하사, 양회천이등상사, 강승규하사, 황주복하사, 김정도하사 등이 범인으로 체포되었다.
그 당시 제9연대에서 제주도 출신이라면 미운 오리알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는데 범인이 제주인이 아니어서 제주도 출신 병사들은 의심에서 벗어나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박진경연대장 후임으로 6월 21일 최경록(崔慶祿)중령과 부연대장에 송요찬(宋堯讚)소령이 임명되었다. 7월 15일 제 11연대에 배속되었던 제9연대를 독립시켜 재편성하였고 송요찬 소령이 연대장이 되었다.
7월 24일 제11연대는 수원으로 복귀하였다.
□ 제9연대 대전으로 이동
12월 29일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500여 병력은 4.3사건을 진압하는 과정 많은 주민들을 희생시킨 참상을 도처에 남긴 채 제주를 떠나게 되었다.
제9연대 다음으로 제주에 토벌군으로 온 부대는 대전에서 내려온 제2연대(연대장 咸炳善)였다. 제9연대는 제2연대가 주둔했던 대전교외에 도착했다.
이 대전에 6개월여 체재하면서 병력보강과 군사훈련에 집중하였다.
송요찬 연대장은 원래 충남 청양출신이라 대대적으로 모병활동을 전개하였고,
제 6기에서 8기생까지 이곳 청양, 보령지방에서 신병을 모집하였다.
500여 충청남도 출신들이 입대하면서 1,000여명에 이르렀다.
1949년 7월 제 9연대는 대전에서 열차를 타고 이동하여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에 도착하였다.
□ 최전방 38경비대로
서빙고에서 년말 까지 6개월을 보내고 1950년 초 제9연대(연대장 중령 尹春根 육사 2기)는 제 1연대와 더불어 38선을 지키는 보병 제7사단(사단장 준장 劉載興)소속으로 편성되었다.
이에 따라 제9연대는 포천 군 창수면 가양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동쪽에 위치한 영중면 양문 리 까지가 제9연대가 방어할 전술구역 38선이었다.
한성택 하사는 이등상사로 승진했고 제9연대 제1대대 제2중대 제1소대 선임하사관이었다.
당시 제9연대본부는 포천후방 금호동에,
제1대대본부는 포천면에,
제2중대는 영중면에 자리를 잡고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한성택 이등상사가 속한
제2중대 제1소대는 38선에서 산병호를 다시 수축하고 교통호와 여타진지들도 보수하여 유사시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이때서야 M1과 Carbin소송이 각개병사에게 공급되어 새로운 병기조작과 더불어 사격술 훈련을 전 장병이 받게 되었다.
중대에는 화기소대가 있어 60밀리 박격포,
0.3인치 경기관총,
57밀리 대 전차포 등 빈약한 장비로 무장되어있었다.
제1소대 선임하사관을 맡은 중 차규헌 소대장은 대원들에게 교육훈련을 열심히 가르쳤는데 그 교안작성을 한성택 이등상사가 했다.
육군본부에서 나온 육군교범을 참조하여 각개약진, 분대·소대전투, 진중근무, 사격술등을 공부하며 교안을 체계 있게 작성하는 일을 전담하였다. 그럴 무렵 연대 내에서 일등상사 승진시험에 응시하여 일등상사가 되었다.
□ 6.25새벽 38선에서
6월 25일 일요일 오전 3시 30분경 제1소대 초병들이 무슨 기계 움직이는 굉음이 들려온다는 제1소대 초병들의 보고가 한성택 하사관과 차규헌 소대장에게 들어왔다.
소대장은 야전전화기를 돌려 중대장에게 보고하였고 전 소대원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04시 북한군의 야포공격이 시작되었다.
전차를 앞세우고 북한군 보병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57밀리 대전차포로 적전차를 재공격하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이곳저곳에서 전사상자가 발생하면서 6월 25일 오후 2시경 방어선이 적에게 돌파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아군이 철수를 계속하는 중 미군은 7월 12일 적 전차의 장갑을 뚫고 폭파할 수 있는 3.5인치 로켓포를 한국군 각 부대에 보급하기 시작하였다.
적의 전차는 촌각을 지체하지 않고 캐터필러를 구르며 내려왔고 그 뒤를 따르던 북한군도 아식보총을 쏘아대니 아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분산되기 시작하였다.
적의 포화에 아군희생자가 발생했다.
북한군 제 3사단은 이미 포천면 신읍리에 육박하고 있었다.
□ 야산의 능선을 타고 후퇴 길에
연대장은 광릉(남양주시 진접읍)을 경유하여 퇴계원에 집결토록 하는 철수명령을 하달하였다.
6월 27일 퇴계원에 이르니 육사생도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상이나 낙오되어 한성택 선임하사관이 속한 제 1대대 제2중대 제1소대도 돌아오지 않은 병사가 1/3나 되었다.
□ 광주를 거쳐 노량진으로
제9연대 가 다시 행군하여 망우리 경에 이르니 28일 새벽이 되었다.
이날 새벽 2시 20분 한강인도교(제1한항교)와
광진교는 북한군의 남침을 지연시키기 위해 아군이 폭파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은 포천방면에서 아군 제7사단 제9연대를 밀어내고 계속 남하하였다.
북한군 제3사단 제9연대는 전차를 앞세우고 새벽 2시에 이미 미아리고개를 넘어섰다.
제9연대는 무너져버린 광진교부근에서 헤엄을 못 치는 장병은 나룻배를 타서 건넜고 헤엄을 칠 수 있는 병사들은 헤엄을 쳐서 한강을 건너 노량진 집결지에 도착했다.
6월 28일부터 남하하는 국군들을 집결시켜 한강방어를 위한 시흥 지구 전투사령부(사령관 김홍일)를 급히 창설하였다.
제9연대는 노량진부근에 배치되었다.
북한군전차들이 강 북안 모래판에 그 몸체를 절반정도 감추고 있었고
한강인도교부근 모래사장에는 북한군의 강력한 포대가 전차 10대를 일렬로 세워놓고
아군을 향해 전차포를 쏘아대고 있었다.
남한에는 전차가 없었는데 북한군은 T34형 중형전차 242대를 한국전에 투입하였다.
보통의 차량으로 통과할 수 없는 지형을 고속으로 개전 3일 만에 한강까지 내려왔다.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한다는 보고에 맥아더원수는 그날 도쿄에서 급히 비행기를 타고 수원비행장으로 착륙하여 서울영등포구 양화동의 한국군 진지에 이르렀다.
맥아더는 한강 둑을 지키고 있는 당시 21세 신동수 일등병에게 물었다.
“자네는 언제까지 이호 속에 있을 것인가?”
“직속상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입니다.”
“명령이 없을 때엔 어떻게 할 것인가?”
“죽는 순간까지 여기를 지킬 것입니다.”
“지금 소원이 무엇인가?”
“놈들의 전차와 대포를 부술 수 있도록 무기와 탄약을 주십시오”
맥아더는 전선을 지키겠다는 기백에 감동하여 연막탄 2개와 대공표지판을 건네주면서 곧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신동수는 이곳 방어 시 부상하여 한쪽 다리를 절단, 의족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충주시 앙성면에 살고 있다.)
한강에 배치되어 4일째 7월 1일 오전 10시경 적전 차의 포탄이 날아왔다.
10여 분간 의 공격에 병사 몇 명이 전사 상을 당하였다.
7월 3일 여명에 적은 아직 파괴되지 않은 철도가 가설된 한강 철교위에서 전차를 인력으로 천천히 밀었다.
엔진을 가동하면 소리가 들려 발각될 것이므로
그들은 인력으로 우선 1대를 도강시키려하였다.
새벽에 전차 1대가 노량진방면으로 넘어와 아군을 향해 맹공을 가했다.
아군진영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사이 적전차는 한강을 넘어왔다.
아군은 후퇴하게 되었고 보병 제 7사단은 충북 충주 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 끝없는 후퇴길 남으로 남으로
제9연대는 과천, 광주, 이천을 거쳐 7일 걸어 충주에 이르러
어느 학교에 집결지를 정하였다.
그 동안 많은 병력이 손실되어 새로 보병 수도사단(사단장 준장 宋堯讚 )을 편성,
그 산하에 제1연대와 기갑연대 그리고 제18연대를 두었다.
제1연대 제1대대는 과거 제1연대출신으로 구성하였다.
제2대대는 1948년 제주도에 무장대토벌을 위하여 제9연대에 배속되었던 제5연대(부산)출신 1개 대대와
제6연대(대구)출신 1개 대대가 있었다.
이들은 제9연대가 제주도에서 이동시 함께 행동하였는데
그 2개 대대가
제1연대, 제2대대가 되었다.
제3대대는 과거 제9연대 출신으로 전부 편성하였다.
한성택 일등상사는 이제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 제9중대 제1소대 선임하사관이 되었다.
수도사단 제1연대는 충북보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있던 제3사단 김석원장군이 인솔자를 불러 저 고지 위에서 북한군이 남침하는 것을 저지하라 명하자 제 1소대는 길 동쪽 야산 고지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하룻밤을 지냈다.
그 뒷날 아침 북한군 선두 부대가 보이자 제1소대장인 김일기 소위는 후퇴하기로 했다.
상주~의성~안동에 이르르니 적이 전차 3대를 앞세우고 이미 들어와 있었다.
여기서도 전차포의 위력에 견디다 못한
제3대대 제9중대 제1소대는 안동 강을 건너 다시 의성으로 후퇴했다.
이곳에도 이미 인민군이 이미 들어와 있었으나 전차는 없어
대병력인 것처럼 위장하여 크게 함성을 지르며 내달렸다.
불시에 기습을 받은 북한군은 세가 불리하였는지 거의가 분산 도주하였다.
제1소대는 기관총 1정을 노획하였고 실탄까지 남아 있어 화력이 보강되었다.
의성에서 제1소대는 적군이 들어오면 밀어내기를 반복하며 3일간 버텼다.
중대와 연락이 닿아 청송으로 이동 2일 동안 전투 없이 지내고 경주군 안강면으로 들어갔다.
□ 일등상사에서 육군소위로 임관
이 때 한신(韓信 육사2기) 소령이 중령으로 승진하며 수도사단 제1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동안의 전투에서 많은 초급장교와 병사들을 잃어
소대를 지휘할 간부가 절대 필요하여 현지임관을 시킬 때
한성택일등상사도 소위로 승진되며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 제9중대 제1소대장으로 임명받았다.
한신 연대장의 “여기서 밀리면 나라도 망하고 우리도 죽는다.
후퇴할 바엔 차라리 여기서 죽어라”
비장한 명령을 받고 한 소위는 제1소대 30명의 대원을 이끌고
형산강북쪽능선에 배치되어 10여 일 동안 격전을 치렀다.
지형이 적전차가 올라올 수 없는 지형이라 해볼 만한 전투였고
사즉필생의 각오로 싸워 물리쳤다.
10여 일 동안 매일 적군이 새벽 2시경 쇄도했다가 5시경에 물러나기를 반복하였다.
형산강북쪽능선전투가 10여일 계속되던 어느 날
포항 북쪽 비양산 상공을 미군폭격기가 네이팜(Naplm)탄을 떨어뜨리자 적군은 소사했다.
아군은 이 기회를 틈타 30리 북쪽 영일군 기계면까지 진격해 올라갔다.
8월 26일 적군의 야포 탄이 비 오듯 낙하하여 아군은 많은 부상을 입는 중 한성택 소대장도 왼쪽 대퇴부와 등에 파편이 꽂혀 울산 수도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군의관이 파편 2개는 대퇴부에 너무 깊이 박혀있어 당장 활동에는 큰 지장이 없으니 전쟁이 끝나면 수술 받으라고 했고 나머지 파편은 모두 제거했다.
지금도 2개의 파편은 대퇴부에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
□ 대 반격작전에 참가하여 북으로 북으로
이 병원에서 22일간 입원하고 9월 16일 퇴원하는 날은 인천상륙작전 다음 날이라 대 반격전에 들어갔고 그의 부대는 진까지 북진해 있었다.
한 소위는 제3대대 제9중대 제1소대장을 맡았다.
제1연대는 강릉을 넘어 10월 초순에 38선을 넘었다.
보병 수도사단은 보병 제3사단과 함께 한국군 제1군단에 소속되어 북진작전을 전개 하였다.
큰 저항 없이 양양, 속초, 고성, 장전, 통천, 고저, 안변을 지나
드디어 보병 수도사단 기갑연대는 보병 제 3사단 제23연대와 함께 10월 10일 원산에 입성하였다.
□ 함경북도 청진에 입성
영흥을 지나 수도 사단본부 및 제 1연대는 청진으로,
기갑연대는 길주로,
제18연대(연대장 대령 任忠植)는 혜산진으로 진격하였다.
한성택소위가 지휘하는
제 1연대 제3대대 제9중대 제1소대는 청진 겨외에 있는 고지에 배치되어 산병호를 파고 모진 한파에 대비하였다.
10월 19일 펑떠화이((彭德懷) 원조의용군총사령이 이끄는 대규모 준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들어왔다.
그들은 10월 25일부터 제1차 추계공세를 전개하여 운산, 온정리, 장진호등 3개방면으로 공세를 취했다.
10월 30일 보병 제6사단이 온정. 운산지구에서 철수를 개시하였고
12월 4일 평양에서도 철수를 단행하였다.
수일이 지나 원산으로 중공군이 들이닥쳤다.
퇴로가 막힐 긴박한 시점에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12월 9일 한성택 소재장도 연대본부와 합류해서 야간 철수를 시작하였다.
12월 3일 길주역에 이르렀다.
길주 역에는 수도사단을 철수시키려고 대기하고 있는 화물열차를 타고 함흥에 이르고 도보행군으로 흥남까지 왔다.
이 때 동원된 함정은 193척이었다.
이 수송선은 3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제1연대 장병들은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도보로 동래에 있는 어느 학교로 들어갔다.
□ 금성화랑 무공훈장 수상
제1연대는 1951년초 주문진에 상륙하여 설악산에 많은 적군들을 공격하기로 했다.
제 3대대가 설악산을 점령하여 방어하고 있는 데 강력한 북한군이 몰려와 강릉으로 철수해야 했다.
제1연대가 삼척으로 가는길 삼거리에 이르렀을
데 제1군단장 백선엽장과 수도사단장인 송요찬 준장이 서있었다.
송사단장은 지금 적 1개 사단이 오대 산 쪽에서 내려오고 있으니 제1연대는 대관령 쪽으로 가서 방어하라고 했다. 백선엽 군단장이 항공기 지원은 책임지고 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제 1연대는 99고개를 돌고 돌며 대관령에 올랐다.
얼마 없어 고지위에 북한군이 나타났다.
그러나 북한군은 오대산에서 걸어오느라 기진맥진한 상태라 잠시 대기하는 중인데 그 때 함재기가 날아와 포탄을 퍼 붓자 불바다가 되면서
북한군은 도처에서 쓰러지고 아군은 용기가 되살아났다.
항공공격이 끝나자 미군과 함께 대관령에서 서북진하여 오대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눈은 계속내리고 심산유곡이라 보급이 두절되어 배고픔에 허덕였다.
미군수송기가 날아와 시레이션을 낙하했지만
풍향에 따라 적군진영으로 절반은 날아가 버렸다.
그러다가도 떨어진 시레이션박스를 들고는 좋아했다.
식량두절과 눈 속에서 2개월여를 지내다 향로봉 공격명령을 받고 제3대대는 이동하였다.
능선을 내려가며 행군하는 도중
한 소위가 지휘하는 제1소대는 백담사부근에서 중공군 35명을 붙잡아 연대본부로 인계하였다
한 소위는 전과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였다.
□향로봉 점령후 건봉령으로
제1연대는 병력을 동서로 배치하여 횡적대형을 유지하며 향로봉을 공격하여 단숨에 정상을 점령하고 그 북쪽에 있는 남강을 넘었다.
그러나 동서에 있는 전선과 균형을 맞추어야 해서 다시 남쪽 건봉령으로 되 돌아 왔다.
1951년 녹음이 우거지기 시작할 때 북한군이 접근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한성택 소위가 지휘하는 제3대대 제9중대 제1소대는 산병호에 숨어 적의 동태를 관찰하기 시 작했다.
적군이 50m까지 오기 전에는 절대 사격해자 말라는 지시사항을 따라 제1소대원은 쥐 죽은 듯 숨소리도 죽이며 발사명령이 있기를 기다렸다.
적은 아군이 아무런 기척이 없자 물러간 줄 알고 북한군 소대장을 선두로 그 뒤에 기관총이 따르고 이어서 병사들이 일렬종대로 능선위로 올라왔다.
제1소대원은 한소위의 사격개시 명령과 함께 일제히 공격하여 북한군이 일망타진했다.
그 후 잠시 공격이 멈추게 되었다.
□ 서남부지구 공비토벌
1951년 11월 수도사단은 서남부지구(경남. 전북. 전남의 소백산맥지역)로 이동하여 공비토벌을 하게 되었다.
1951년 12월 31일 밤 제1연대 제3대대는 함양 북동쪽에 위치한 함양군 안의면과 거창군 위천면 경계에 놓인 기백반을 넘어 거창으로 행군 중에 공비의 공습을 받아 대대장, 정보장교, 사병 몇 명이 불의의 전사를 했다.
제3대대는 즉시 눈 위에 발자국을 쫓아 남원군 운봉면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대대장과 정보장교등을 사살하고 그들의 권총을 소지하고 있던 25명의 공비를 체포했다.
□ 김화전선에서 휴전
수도사단은 김화지방으로 이동하여 지형능선에서 휴전 때까지 중공군과 싸웠다.
밤에는 중공군이 들어오고 낮에는 아군이 가서 점령하기를 반복하다보니 시체가 쌓여 썩어갔다.
이때 가장 고생한 사람들은 노무자들이었다.
식사와 탄약을 지게에 져서 산을 오르고 내려갈 때는 아군시신을 지고 내려갔다.
1952년 3월 1일 한 소위는 중위로 승진했고,
전후방 교류 시 제주도 상모 리 소재 제1훈련소로 전근하여 조달 부 구매 장교로 근무하다 광주보병학교의 초등군사반에 입교하여 교육 중에 대위로 승진하였다.
마침 중부전선에서 격전이 벌어져 교육을 중지하게 되었다.
이 때 한 대위는 보병 제6사단으로 전근되어 제19연대 제1대대 제1중대장을 맡았고 백암산 전투 중에 휴전을 맞이하였다.
그 후 한성택 대위는 소령으로 승진했고 1963년 2월 15일 예편하였다.
이제 한성택 전 소령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다. 그 많던 전우들이 이미 타계하여 10여명이 생존해 있다고 한다.
<발췌> 정수현 지음. 한라의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 재향군인회. 2008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