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고 다시 멜로의 계절이 돌아왔다. 단풍잎뿐만 아니라 극장 간판들도 선남선녀의 고혹적 자태로 물들여지고, 관객들은 다시금 멜로를 찾아 극장으로 모여든다. 누구라도 올 가을의 흥행 리스트 중 하나에 단연코 멜로가 포함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고, 벌써 <정사>의 흥행 성공으로 그 조짐은 맞아떨어져 가고 있다. 물론 가을로 들어서면서 멜로가 다시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것은, 선거 때만 되면 북풍이 몰아닥칠 것을 예언하는 것과 함께, 대한민국에서는 삼척동자라도 할 수 있는 예언 중의 하나이기는 하다.
그러나 대한민국 영화의 지형도에서 멜로란 장르는 다른 나라에 비해 좀 유별난 면이 있다. 왜 우리들은 텔레비전만 켜면 멜로연속극들을 언제든 볼 수 있는데도 극장까지 가서 멜로를 찾는가? 상업적 안전판으로 인식돼온 멜로가 예술의 영역에서도 대한민국의 영화수준을 끌어올리고 있는가? 그렇다면 과연 멜로영화는 데뷔감독을 흥행으로 인도하는 수호천사인가 아니면 개인의 창작력을 박제로 만드는 악마인가?
이 모든 의문들은 관객들이 <8월의 크리스마스>와 <정사>에 몰려든 지금, 그리고 <약속>을 필두로 앞으로도 계속될 멜로영화의 행진과 더불어 '역시 한국영화는 멜로여야 흥행되며, 멜로가 한국영화를 부흥시키고 있다'는 팽배한 도그마를 받아들이기 앞서,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첫번째 테제 : 멜로는 한국영화의 뿌리다?
트로트가 한국가요의 뿌리라는 통념 못지 않게 위험한 고정관념 중의 하나가 멜로가 한국영화의 뿌리요, 그래서 한국영화는 멜로여야 흥행이 잘 된다는 시각이다. 흔히 한국 영화연구자들은 한국멜로의 뿌리를 개화기 신파극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멜로가 타 장르보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전통장르처럼 인식되는 하나의 근거로 간주돼 왔다. 그러나 신파는 지금의 의미와는 달리, 당시로는 말 그대로 뉴웨이브, 구파연극에 반대되는 개념이었다. 당시 신파극은 일본의 신연극 전통이 국내에 번안된 것으로,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멜로의 이야기 구조도 실은 서양적 전통과 함께 수립된 100년이 채 안 돼는 수입품목인 것이다. 그러므로 '특유의 애조 띤 민족적 정서'와 멜로가 친화적이라는 사실이 한국영화의 근원을 멜로 한가지로 묶는 논리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영화는 '시작 부터 멜로'는 아니였다. 일제시대에 제작된 몇작품만 훑어봐도 한국영화는 꽤 일찍부터 다양한 장르를 구사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1920년대 한국영화의 초창기 대표작으로 <홍길동전> <장화홍련전>과 같은 고전의 각색은 물론, <상록수> 같은 문예물이 있는가 하면, 나운규 작품 연보 안에서도 <아리랑> 같은 '멜로성'영화 못지 않게 <금붕어> <철인> 등 무술/액션영화 등 꽤 다양한 색채의 작품들이 엄연히 포함돼 있었다. 이같은 사정은 60년대를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러도 마찬가지다. 60년대의 대표적 히트작 <미워도 다시 한번>이 전형적인 멜로요, 70년대의 <영자의 전성시대> <별들의 고향> 또한 멜로영화임이 분명하지만, 그 못지 않게 한국영화는 <월하의 공동묘지> 같은 호러물에다 <용가리> <우주괴인 왕마귀> 같은 괴수-SF영화, 또는 <빨간 마후라>와 같은 스펙터클의 전통을 갖추고 있다.
비교적 가까운 90년대의 상황을 들여다봐도 멜로가 '한국영화의 뿌리'로서 영화산업을 지탱해 왔다는 증거는 별반 보이지 않는다. 96년 전까지 한국영화의 흥행 수위는 거의 액션 아니면 코미디였다. 91년 <장군의 아들>(91년, 만명)을 필두로 하는 액션물과, 92년 <투캅스>(94년, 86만명)를 필두로 하는 코믹물은 <테러리스트>(95년, 32만명) <투캅스2>(96년, 63만명)의 흥행으로 이어지고, 판타지영화 <은행나무침대>(96년, 45만명)도 있었다.
본격적인 정통 멜로의 열풍이 다시 불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97년부터다. 물론 <할렐루야> 같은 코미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97년 말과 98년 초에 걸쳐 <접속>(서울관객 80만) <편지>(80만) <8월의 크리스마스>(45만)가 예외적으로 3연속 사이클 히트를 기록하는 이변이 생긴 것이다. 98년에 들어와 <조용한 가족> <여고괴담> <퇴마록> 등 호러-판타지영화가 또한번 사이클 히트를 터뜨리자 일순 멜로 붐은 주춤 하는 듯 보였지만, 찬바람이 불자마자 시작된 <정사>의 흥행성공과 <실락원> <남자의 향기> <약속>의 잇따른 개봉으로 인해 또한번 한국영화계는 멜로 신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므로 근자의 멜로 열풍이 민족적 정서와 맞아떨어진 근원적이고 필연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하루아침에 변해버린 시대상황에 남루하게 구겨진 한국관객들의 마음이 발빠른 영화제작자들의 기획감각에 공명하는 현상인가 하는 것은 분명히 따져 보아야 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두번째 테제 : 한국관객은 유독 멜로를 선호한다?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과거의 흥행작 대부분이 멜로요, <편지> <정사> 같은 오늘의 흥행작도 기실 멜로였다. 총동원 관객수 천만을 넘지 못하던 한국영화계가 모처럼 1천2백만명이라는 급작스런 반등을 기록한 것도 멜로가 연속적으로 히트한 97년도였다. 뿐만 아니라 <사랑과 영혼> <타이타닉>같이 한국 흥행사에 1백만, 2백만의 흥행이정표를 세운 외국영화도 멜로가 가미된 영화다. 이쯤 되면 한국에선 역시 멜로가 통한다는 주장이 정설 중의 정설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되물어 보자. 외국관객들은 멜로라는 장르를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만큼 좋아하지 않는가? 그러나 비토리오 데시카의 <해바라기>는 이탈리아 멜로였고, <애수>는 미국식 멜로의 전형이었다. <실락원>은 일본 멜로고, 세계 제1의 영화생산국인 인도영화의 90%는 멜로-뮤지컬이다. 이같은 의문에 대해 제임스 카메론은 꽤나 의미심장한 답을 던진다. <타이타닉>에 대한 전세계 관객의 반응을 체크한 결과 '웃는 부분은 나라마다 달랐지만 우는 부분은 모두 같더라는 것'. 즉 웃음은 사회적 관습이나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지만 눈물은 만국공통의 코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요컨데 멜로란 특정국가의 선호도가 높은 장르라기보다는 보편적인 장르다.
당장 우리의 주변을 보아도 한국 관객들은 <사랑과 영혼>에 열광하는 것 못지 않게 <다이 하드>나 <인디펜던스 데이>를 보기 위해 극장 앞에 늘어선다. 결국 관객이 문제 삼는 것은 영화적 재미와 완성도이지, 결코 특정장르에 대한 편중된 선호도가 아닌 것이다.
물론 멜로에 관한 한 한국에서 특히 더 잘 먹히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사랑과 영혼> <타이타닉>의 흥행돌풍이다.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비현실적이리만치 여성에 헌신한다. <사랑과 영혼>의 패트릭 스웨이지는 죽어서도 아내를 보살피며, <타이타닉>의 디카프리오는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대신 북대서양의 차가운 바다에서 얼음으로 식어간다. 슬픔이라는 감정적인 측면에서 멜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만국 공통이지만 그 반응 포인트 즉 '왜 슬퍼하느냐'의 지점에 이르러서는 외국 관객과 한국 관객들은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즉 외국의 멜로가 자아내는 정서적 반응은 '로미오와 줄리엣식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에 슬퍼하는 것임에 반해, 한국의 관객들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방식으로 여자에게 헌신했던 남자의 죽음 자체'가 슬픈 것이다. 죽어서까지 봉사하는 이 무조건적 헌신성은 유독 한국의 여성관객에는 그야말로 폭탄과 같은 카타르시스로 작용하는 것 같다.
그동안 한국의 멜로물들은 유독 그 여주인공들에게 가학적인 화법을 구사해 왔다. 관객의 눈시울을 적시는 슬픔의 원천은 흔히 여주인공의 비극적 운명에서 비롯되는데, 이들은 사회적 관습을 어기고 욕망을 실현한 결과로 죽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유부남을 사랑하거나 불륜을 저지른 여자 <미워도 다시 한번> <실락원> 등, 사랑 없이 순결을 잃은 여자 <겨울여자>, 정조를 상품화한 여자 (호스티스 영화들)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사회적 지위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욕망을 직접화법으로 행동화하고 처벌받았다. 이렇게 자식을 빼앗기고,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때로는 목숨까지 버리는 멜로영화의 여성들에게 멜로물의 남성은 동등한 사랑의 파트너라기보다 한때는 사랑했어도 이야기의 비극성이 진전될수록 가해자로 변신하거나, 최소한 방관자로 머문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양상도 변화한다. 일명 '죽어서도 헌신하는 남성상'은 여자는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의 이념처럼 받드는 독특한 대한민국 멜로의 새로운 남성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편지>가 영화적 형식이나 연출 측면에서 두드러지지 않음에도, 왜 엄청난 힘으로 여성관객을 유인할 수 있었는지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스타일의 세련화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한국적 멜로 자체의 관습은 거의 변한 게 없다. 결국 한국적 멜로는 한국 여성의 억압된 감정의 가장 손쉬운 출구이자 여성의 정서적 공감대를 자극하는 그 무엇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작금에 이르러서는 변화하는 남성상을 채용한 90년대 멜로가 관객을 유인하는 경향과 한국 관객이 특?ㅗ? 관습의 멜로를 선호하는 두가지가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지, '대한민국의 관객들은 무조건 멜로를 좋아한다'는 전제 자체는 본질을 단순화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세번째 테제 : 멜로적인 요소는 흥행의 안전판이다?
멜로가 흥행의 안전판이라는 믿음은 암암리에 어느 장르 영화에나 멜로적 요소를 가미하고자 하는 유혹과 강박으로 몰아간다. 한 예로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하며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새로운 장르의 실험을 도모하던 <퇴마록>도 결국 오컬트영화의 분위기에 멜로적인 요소를 억지춘향격으로 끼워넣다가 그 균질성을 잃어버린 채, 두고두고 스토리상의 결함을 지적받았다. <퇴마록>의 제작진이 멜로=흥행의 안전판이라는 등식에서 벗어나기만 했어도 <퇴마록>은 비주얼이나 기술적 성취외에 훨씬 더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사실 제작진쪽에선 멜로란 흥행의 안전판과도 같았을 터인데, 아이러니하게 바로 이점이 마이너스 요소가 돼버린 것이다.
사실 멜로는 다른 장르와 쉽게 병합됨으로써 한국영화사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60년대의 <미워도 다시 한번>이나 <맨발의 청춘>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정통 멜로는 70년대를 거치면서 호스티스물 멜로, 80년대를 거치면서 <애마부인>같은 에로물에 스며들었고, 90년대 와서는 코믹멜로로 탈바꿈했다.
최근작 멜로들도 마찬가지다. <남자의 향기>는 결국 조직폭력배와 순결한 여대생의 사랑이야기를 주축으로 액션과 멜로를 혼성했다. 또한 김승우가 주연했던 다른 영화 <깊은 슬픔> 역시 어린 시절의 연인인 조직폭력배와 대학생 사이에서 방황하는 한 여성의 순애보가 그 중심축을 이룬다. 최근 개봉한 <약속> 역시 조직폭력배와 여의사간의 사랑이야기다. 멜로는 타 장르에 들어가 장르의 내러티브를 변화시키고, 이 내러티브는 또하나의 모델로 굳어지면서, 재탕삼탕 비슷한 이야기들을 양산한다. <남자의 향기>나 <깊은 슬픔>은 액션과 멜로, 남성관객과 여성관객,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전략을 구사했건만 모두 흥행에서는 기대 이하였다. 한때 반짝하는 호시절을 누렸던 코믹 멜로 역시 마찬가지이다. <키스할까요?>는 <박봉곤가출사건>으로 재치있는 상상력을 발휘했던 김태균 감독의 작품이었건만, 전혀 공감을 얻을 수 없었던 여주인공의 연기와 별다른 차별성 없는 기획으로 인해 여성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흥행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연출과 완성도 문제이다. 게다가 <정사>의 히로인 이미숙이 보여주었듯 좋은 멜로에는 섬세한 내면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여배우가 필수적이다.
네번째 테제 : 수준 높은 세련된 멜로의 화법은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멜로의 성과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견해는 '한국영화도 멜로영화 하나는 깔끔하게 잘 만드는 경지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접속>을 한번 보자.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과 섬세한 감정의 선을 따라가는 연출이 돋보인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보자. 은근한 절제와 디테일에 대한 배려가 남다르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그래도 예술적 성과를 올릴 가능성이 가장 높으면서도 상업적으로 타협할 여지가 있는 장르는 멜로라는 믿음이 확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멜로의 융성이 영화제작을 활성화시키고, 영화연출의 내공이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을 도모한다는 가정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지난 30여년간 한국영화가 멜로에 집착해 오면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엄밀히 말해 멜로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은 스타일의 세련화를 일컫는 것이요, 이 점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도 한국적 멜로 자체의 관습은 거의 변한 게 없다.
일례로 최근의 히트작 <정사>를 보자. 분명 <정사>는 이전의 '울고짜고 구질구질한' 정통 신파조의 멜로영화들보다 일정 부분 달라지거나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정사>의 미장센은 정적이면서도 세련되고, 무채색으로 통일된 세트는 대사로는 표현될 수 없는 두 주인공의 핏기 없는 삶을 형상화한다. 결정적으로, <정사>는 불륜이라는 테마에 관한 한 이전까지 숱하게 통용되던 남상가학-여성피학의 내러티브를 뒤집었다. 또 자칫 비난을 뒤집어쓸 두 주인공에게 해피엔딩쪽으로의 열린 결말을 주었다.
하지만 <정사>가 거둔 기획상의 승리는 여기서 끝난다. <정사>의 흥행성공이 빛날수록 역설적으로 <호모 비디오쿠스>라는 단편을 통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하던 이재용 감독의 영화적 역량이 아쉬워 지기만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감독은 멜로를 만들어야 한다, 또는 멜로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얘기는 더욱 아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사>는 한국의 재능있는 신인감독이 어떤식으로 상업적 도그마가 판을 치는 충무로에서 매몰되가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이기도 하다. 어째서 <호모 비디오쿠스>를 만든 감독의 상업영화 데뷔작은 <정사>이어야 하며, <파업전야>를 만들어도 데뷔작은 <접속>이거나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이나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이어야 하는가. 그들이 독립영화나 단편영화에 기울인 열정과 재능이 깊고 클수록 이러한 아쉬움의 두께는 더해만 간다. 얘기는 또 있다. <부활의 노래> <두여자 이야기> <채널69>으로 여러해 동안 흥행의 사각지대에서 있었던 이정국 감독이 <편지> 한편으로 단박에 흥행감독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서 이 때문에 한국영화의 수준도 같이 올라갔는가?
만일 멜로를 잘 만들어야 나중에 다른 영화도 잘 만들 수 있다면, <저수지의 개들>의 타란티노나 <증오>의 마티유 카소비츠, 대니 보일의 <쉘로우 그레이브> 같은 데뷔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영화보다 먼저 충무로를 배우게 하는 멜로영화의 독주는 역으로 단편영화나 독립영화의 테두리 안에서는 다양한 영화형식을 실험해보고 깨는 발상으로 무장했던 신인감독들의 패기라는 대한민국 영화의 가장 소중한 생장점을 끊어내고 있다. 멜로가 한국영화계의 발전에 끼친 가장 큰 해악은 멜로 자체에 있다기보다 멜로가 새로운 영화 만들기 자체를 끊임없는 회피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멜로가 남긴 것
물론 멜로는 여성의 호주머니를 바라보고 만드는 영화다. 더글러스 서크는 멜로영화의 틈바구니에서도 여성들의 갇힌 사회구조를 작가적인 기질로 형상화했다. 그러나 한국적 멜로의 관습에서 여성들의 밑바닥에 도사린 만만치 않은 억압적 현실의 무게를 다루는 영화는 극히 드물다. 멜로영화는 대개 여주인공들이 사회적 관습에 지배당하고 투항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여성, 특히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성찰은 연하의 남성과 연애하거나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의 대상이 되는 현실도피적인 환상이나 대리적 만족의 욕구로 가득찬 <정사>와 <편지>의 영역에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사실 <정사>나 <편지>가 제시하는 상황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이러한 최면적인 멜로는 여성들에게 '끔찍히 잘 해주는 남자'를 찾는 것이 '못되게 구는 남자'를 피하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수동적이고 비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주지 못한다. 멜로 왕국의 울타리는 정서성을 풍부하게 이끌어내는 고급 멜로영화 보기를 사실 무슨 예술 문화적 체험의 일환처럼 다가오게 하지만 멜로가 얕은 한, 기실 멜로 보기는 일회적 소모용 정서 환기 행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한국의 멜로는 그 장르나 사회성에 대한 인식의 측면 모두에서 대안없이 커가고 있다. 멜로가 한국영화에 준 것에 비해, 멜로로 인해 한국영화계의 장르적 다양화와 영화적 성숙이 치른 대가는 너무나 혹독하다.
세계화를 외치면서 유독 멜로만은 요지부동인 경향, 그리고 세련화하는 멜로의 화법에 비해 현실적으로는 퇴보만 거듭하는 여성의 사회참여 문제들,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진정 슬퍼해야 할 98년 대한민국의 가장 멜로적인 부분이 아닌가. 대체 이런 멜로적 소재를 놔두고 누가 어떤 멜로를 또다시 만든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