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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성과 경주김씨
과거 500여년 이상 옥과현 지역과 인연을 맺고 현재 옥과면, 입면, 겸면, 오산면, 지역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는 경주 김씨들은 대부분 김충한(金沖漢)을 파계조(派系祖)로 모시고 있는 후손들이다.
옥과현 지역 후손들에 의해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모셔지고 있는 수은 김충한(樹隱 金冲漢)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농은 민안부와 더불어 육은(六隱)으로 불리던 충신으로 고려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했다.
조선이 개국하고자 고려 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겠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했던 72현중의 한사람이다. 후에 남원시 송동면 두신리 현 두곡(杜谷:壹谷)마을로 떠나와 마을 이름을 두문동과 같은 맥락의 ‘막을두(杜)’를 써서 두곡(杜谷)이라 명명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1395년 (태조 4년) ‘경죽김씨 세계서(慶州金氏 世系序)를 펼쳐내 경주김씨의 기원과 계대(系代)를 소상히 밝혔다. 이 세계서(世系序)는 현재 우리나라 족보학(族譜學) 발전의 귀중한 사료로 알려져 있으며, 그 목판본이 문화재로 등록되어 잇다.
김충한은 3남1녀를 남겼는데 3남(자, 승, 작)은 모두 벼슬길에 나가 현령, 부사, 직제학을 각각 역임하였으며, 그의 딸은 두문동에 같이 들어갔다 함께 남원 두곡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낸 절친한 친구 신덕린(申德隣:고려 예의판서 역임, 그의 묘가 오산면 가곡리 5층석탑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치일재)의 아들 신포시(申包翅 : 신숙주,신말주의 祖父)에게 시집보내 고령신씨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된다.
김충한의 장남 김자(金滋)는 유윤(有潤 교리), 유간(有間 부사), 유직(有直 현령)유율(有栗)을 남겼다. 옥과 향교지(玉果 鄕校誌)에 따르면 옥과현(玉果懸)과 맨 처음 인연을 맺게 된 후손은 김자(金滋)의 둘째아들인 김유간(金有澗)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1407년(태종 7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 육순에 부모상을 연이어 당해 묘앞에 초막을 치고 시묘살이를 하는 가운데 병을 얻어 사경을 해매였으나 그 효심을 알았음인지 호랑이가 초막을 호위하고 사슴과 멧돼지 등 제사 지낼 제물을 간간히 가져다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참봉(參奉)과 함께 도사(都事), 담양부사(潭陽府使 :현 담양군에 행정구역상 부(府)가 설치된 시기는 1398년부터 1413년까지 15년간)직을 제수(除授)하였으나 취임하지는 않고 금강산에 들어가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말년을 지내다가 70세에 눈을 감았다는 내용이 제단비문(祭壇碑文)에 전한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현재 김유간의 묘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다고 전하나 실전되어 알려지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그가 어느 때 어떤 연유로 옥과 땅에 들어와 거주했는지 큰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다.
김유간의 아호(雅號)가 현석(玄石)인 까닭에 그 후손들은 모두 현석공파(玄石公派)라 칭하고 있다. 현재 곡성군 옥과면 주산리 산 85번지 경주김씨 재실인 금산재(金山齋) 뒤쪽에 제사만 지낼 수 있는 그의 단소(壇所)가 마련되어있다. 정작 옥과 쪽에서 경주김씨 선조 묘가 처음 나타난 것은 생, 몰, 연대 미상인 김유간의 손자 김사웅 (金士雄) 때부터이다.
김유간은 세 명의 아들(일, 건, 상,)을 두었는데 큰 아들인 김일(金鎰)은 또 4명의 아들(사영, 사웅, 사호, 사걸)을 두었다. 김일의 큰 아들 사영은 후사가 없었으며 차남으로 별좌(別坐)벼슬에 있었던 김사웅(金士雄)의 묘소가 옥과면 배감리 마을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김사웅의 묘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옥과 일대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기 때문에 처음 옥과에 입향한 선조로 추측하기도 한다. 셋째인 김사호(金士豪)의 묘소는 순창군 풍산면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후손들 역시 대부분
풍산면 일대에서 뿌리를 내리고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옥과 에서는 김사웅대에 이르러 이미 정착을 완료하고 그의 손자(구, 침, 요)와 증손자대에 이르러서는 상당히 후손들이 벌족 해져 중흥의 기틀을 맞이한 것으로 보여진다. ‘경주김씨 현석공파 세보’에 따르면 김유간의 후손들 중 생, 몰, 연대가 정확히 나와 있는 맨 위 선대는 김사웅의 장 손자인 김구(金玖 1519~1607년)로 지금으로부터 4백 년 전 인물이다.
집에 매화와 국화를 즐겨 가꾸어 호를 쌍향당(雙香堂)이라 칭하는 김구(金玖)는 경주김씨 가문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중간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향토자료에도 학행(學行)이 뛰어난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가 쌍향당을 칭송한 시문(詩文)이 전한다.
후손들의 전언에 따르면 김구가 원래 살았던 곳은 옥과면 무창리 현재 금의리 마을 근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렇게 견주어 볼 때 경주김씨가 맨 처음 이거해 들어와 4~5대에 걸쳐 금의리에서 정착했던 것으로 예측된다. 즉, 옥과 지역에 세거를 펼치며 살아왔던 경주김씨들의 정신적인 고향은 금의리에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 싶다. 금의리는 자연마을 명으로 “쑥댕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까닭에 그 후손들을 ‘쑥애(艾)’자를 써서 애당파(艾堂派)라고도 부르고 있다.
김구는 5남(익수, 극수, 득수, 정수, 순수)2녀를 남겼는데 둘째 아우인 김침(金琛)은 1남(취수) 셋째 아우인 김요(金瑤)는 3남(연수, 인수, 성수)을 각각 남겼다.
김구의 장남 김익수의 후손들은 입면 입석과 삼오리 등지에 그 후손들이 펄쳐저있다. 그는 중직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을 역임,
그 후손들은 동추공파(同樞公派)로 구분지어 부르고 차남 김극수(金克修 1561~1615)는 1590년 성균 생원시에 합격한 인물로 태인 허씨 가문의 도봉 허계(道峰 許繼 1527~?1561년 중사마시 합격)의 딸과 결혼 슬하에 아들 넷(홍기, 홍임, 홍서, 홍거)을 두었는데 그의 아들들의 활약으로 인해 옥과 지역에서 토호반열에 오를 개기를 더욱 공고히 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그의 묘는 입면과 옥과면의 경계지역인 백련지 (일명 쌍방죽)위 야트막한 9만여 평의 경주김씨 세장산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다.
첫째아들 김홍기가 후사 없어 둘째 아들 홍임의 둘째아들(김이정)을 양자(養子)로 후계를 이었다. 후손들은 대부분 겸면 현정리 삼기면 월경리 옥과면 주산리 등지에 거주하고 있으며, 금의리 종가댁이라 하여
‘애당파(艾堂派)‘ 또는 ‘옥당공파(玉堂公派)’라 구분지어 부르고 있다. 둘째아들 김홍임(金弘任 1588~1623)은 호가 주효당(主孝堂)으로 그의 후손들은 모두 ‘주효당파’로 분류해 부르고 있다. 묘가 오산면 선세리에 있으며 그가 옥과면 수리(水里:물안실)로 이거해 간 후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옥과면 수리에 거주학고 있다.
김홍임이 금의리에서 현 옥과면 수리 마을로 이거해간 까닭은 그때까지 수리마을에 누대에 걸쳐 터를 잡고 살아온 여산송씨(礪山宋氏)가문으로 장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 습관상 흔히 있었던 사위가 처가로 들어가 사는 혼인 풍습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수리 마을은 예로부터 ‘송씨 1000년, 김씨 1000년의 터’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마을이다. 현재 수리마을에 살았던 송씨들은 모두 이거해 가고 후손들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1970년대 까지도 경주김씨 가문에서 김구의 장모(丈母)의 묘를 관리하여 왔었는데 현재는 묘마저 이거해 간 상태이다.
셋째 김홍서 (金弘緖 1620~1674)는 숙부인 김취수에게로 양자를 들어 후계를 이었다. 친부인 김극수에 이어 1648년 28세에 성균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가문을 빛냈다. 또한 그는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모아 창의(倡義), 의병을 이끌고 청주에 다다랐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던 충의지사이다.
그의 후손들을 창의공파(倡義公派)라 칭하며 겸면 괴정리, 신흥리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넷째 김홍거(金弘擧 1604~1663) 그의 후손들을 ‘처사공파(處士公派)’라 구분해 부르며, 그 후손들은 입면 매월리, 흑석리, 오산 가곡리, 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3,역사적 인물과 유물 유적
옥과면 수리를 중심으로 입면, 오산면, 겸면, 삼기면에 세계(世系)를 펼쳐 온 김유간(金有澗)의 후손 현석공파(玄石公派)는 현재 크게 네 갈래로 파계(派系)가 정리되어 있다.
즉 김충한(수은공파)--김자—김유간(현석공파)--김일(장남)--김사웅(차남)김구(장남)--김극수(차남)--김홍기 (애당파), 김홍임(주효당파), 김홍서(창의공파), 김홍거(처사공파)
상기한 4개 파를 제외한 세계(世系)는 후손들이 이어지지 못해 도중에 결손 되기도 하고, 양자(養子)를 들여 대를 이어오기기도 했으나 대부분 경기도 용인군, 경상도 하동군, 통영군, 사천군등지로 이거 해 나가 곡성 관내에는 그 후손들의 수가 매우 미미한 형편이다.
경주김씨 현석공파 (玄石公派)를 연 김유간의 후손들로써 맨 처음 문과에 합격한 인물은 김유간의 둘째 아들(김건)의 장남인 손자 김윤해(金潤海 : 世宗朝에 合格, 鍾城 府使 역임)이다. 그는 조선시대 들어 옥과현의 맨 처음 문과 급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차남인 김응서(金應瑞 正5品 通德郞 역임)가 중종조(中宗朝)에 있었던 성균 생원시험에 등과(登科)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후손들은 모두 타 지역으로 이거해 나가 현재 곡성지역에는 대부분 거주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본 고에서는 논외로 하고자 한다.
현재 곡성지역에 세거를 펄치고 있는 경주김씨 현석공파 선대들의 경우, 선조조(宣祖朝)에 들어서야 비로소 김극수(金克修 1561~1590년 생원시 합격)와 김홍서(金弘緖 1620~1674,1648년 진사시 합격) 부자가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경주김문(慶州金門)이 누대에 걸쳐 옥과 사람의 중추에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선대인 쌍향당(雙香堂) 김구(金玖 1519~1607)가 면학의 터전을 애써 가꾸어 놓은 토양에서 자라난 결정체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교적 시대상에 따라 비록 초시에 불과 하였다고는 하나 생원, 진사에 합격하였다 함은 희귀성 상징성에 따라 나름대로 가문의 영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현석 김유간이 곡성지역과 인연을 맺은 후 5~6대 후손들에 접어들어야 비로소 경주김씨 가문이 중흥기적 대문을 활짝 연 계기가 마련된 것 같다.
김구(金玖)는 백호 임제 (白湖 林悌 1549~1587 : 문장과 시가 뛰어난 당대의 명 문장가, 기생 황진이 묘에서 제사를 지내고 시 한수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예조정랑 역임)와도 절친한 사이였던 것 같다. 입면 내동마을 외가댁에서 젊은 시절은 보냈던 임제는 지척지간에 살고 있었던 김구를 자주 찾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김구가 학문을 연마하고 손님을 맞이했던 집을 쌍향당(雙香堂)이라 불렀다고 전해온다. 임제가 직접 쓴 쌍향당기(雙香堂記)에 의하면, “정원에 매화(梅花)와 국화(菊花)를 가꾸어 놓아 이 집을 이름하여 쌍향당(雙香堂)이라 불렀다.”고 적고 있다.
또한 김구를 쌍향처사(雙香處士)라 불렀던 임제는 매화와 국화의 향기가 선비의 풍취를 더욱 드높인 쌍향당을 칭송하는 시문(詩文)을 한수 남기고 있다.
옥과 지역에 세거를 정한 후 1590년 맨 처음 성균 생원시에 합격, 후세들에게 학풍을 물들인 김구의 차남 김극수(金克修 1561~1615)가 당시 옥과 지역에 자리매김한 토호세력 중 하나인 태인 허 씨 가문의 도봉 허계(道峰 許繼 중종조 생원 합격)의 딸과 혼사를 맺어 더욱 가문이 공고해질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그의 묘소는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입면과 옥과면의 경계지역인 백련지(일명 쌍방죽) 위 비탈진 9만여 평의 경주김씨 세장산 (연산등 白蓮嶝)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그를 제사 지내는 제각(祭閣)즉 ,연산재(蓮山齋)가 그의 묘소로부터 500m거리인 입면 연지리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슬하에 김홍기, 김홍임, 김홍서 김홍거등 아들 넷을 두었다.
첫째인 김홍기는 일찍 유명을 달리해 김홍임의 둘째 아들(김이정)이 양자를 들어 종손의 대를 이었으며 애당파(艾堂派)또는 옥당공파(玉堂公派 :옥과의 별칭인 옥당골에 거주한 후손들 중 入玉果한 제일 종가 댁이라 하여 붙여진 명칭)라고 부르고 있다. 그의 후손들 중에는 김일승(전 삼기면 면장), 김일현 (재일 교포 일본 平成 회장), 김일웅(영진화학 대표), 김동식(전 경신여고 교감), 김채정(전 법무부 갱생보호소 과장, 재광 삼기 향우회장), 김태정(전 농협 지점장), 김효정(상공부 사무관), 김기정(특허청 사무관)등이 있다.
주효당파(主孝堂派)의 시조인 김홍임(金弘任 1588~1623)의 후손들은 대부분 옥과면 수리 마을에 자자일촌을 이루며 거주하고 있다. 김홍임의 묘소는 오산면 선세리 작산(鵲山) 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선세리 마을에 그의 재각인 작산재(鵲山齋)가 있다. 그가 옥과면 수리로 이거해간 후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옥과면 수리(물안실)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후손 중 학행이 뛰어난 월계 김진(月溪 金縉)이 있으며 김진의 재각 월산재(月山齋) 1963건립)가 수리 마을 앞에 자리 잡고 있다.후손들중 김진호(전 옥과향교 전교), 김정욱(전 옥과 향교 전교), 김경욱(전 초등학교 교감), 김태영(전 광주 풍향동 새마을 금고 이사장), 김정수(서울시 환경보호과장), 김태훈(서울 현대증권 삼성지점장), 김태학(아시아나 항공 정비과장), 김영준(서울 지방법원 동부지원 근무), 김용욱(서울 강북구 의회의원), 김희창(변호사), 김순자(공인회계사),등이 김홍임의 후손들이다.
김홍서(金弘瑞 1620~1674)가 숙부인 김취수에게로 양자를 들어 후계를 이었다.
친부인 김극수에 이어 1648년 28세에 성균관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또한 그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모아 창의,
의병을 이끌고 청주에 다다랐으나 이미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던 충의지사이다. 그의 후손들을 창의공파라 칭하며 겸면 괴정리 신훙리 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후손으로 김성희 (전 입면 초등학교 교장) 김창희(전 초등학교교장) 김진우(전 초등학교 교장) 김문희(전 도로공사 순천지사장)등이 있다.
김홍거(金弘擧 1604~1663)의 후손들을 처사공파(처사공파)라 구분 해 부르며 그 후손들은 입면 매월리 흑석리 오산 가곡리 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후손들로는 김주환(곡성군청 과장), 김경욱(한학자) 김상욱(포항공대 교수) 김종인 (전 전남 교육위원)등이 있다.
옥과 지역의 경주 김씨들의 최고 상징적인 선대배향 공간은 금산재(金山齋)이다. 금산재는 옥과면 배감리 마을로 들어가는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옥과의 진산인 설산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내린 산자락에 맺힌 금당산 옥녀봉 하단에 자리 잡고 있다. 금산재 입구에 ‘현석효자비(玄石孝子碑)’가 자리 잡고 있으며,
금산재 뒤쪽에 현석 김유간의 제사를 지내는 단소(壇所)가 마련되어 있다. 금산재 주변에는 그의 후손 김사웅(金士雄), 김희(金熹) 김구(金玖)등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4, 경주김씨와 곡성종회
곡성군 옥과면 수리를 중심으로 입면, 오산면, 겸면, 삼기면에 세계(세계)를 펼쳐 온 김유간의 후손 “현석공파(현석공파)”들은 비록 후대에 내려 오면서 애당파, 주효당파, 창의공파, 처사공파로 나뉘어 후손들의 갈레를 파악하고 있으나 각 존파간에 각별한 교류가 여타 성씨들 못지않게 끈끈한 것 같다.
이들은 네 파계가 나뉘지기 직전의 선대를 받들어 성균생원공파라는 고리를 또하나 형성, 전체 문중을 대표하게 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있다.
현석공파 대종중 위토답으로 32정보의 산과 4,000여평의 논이 있으며, 성균공파 위토답으로 옥과면과 입면 사이를 잇는 백련지 위쪽에 세장산 82.030평에 9홀의 골프장을 기안레저에 위탁 신설하여(2009~2011) “옥과CC”로 허가받아 영업중이다.
수은공파 대제는 음력 3월 5일, 현석공파 대제는 3월 6일, 성균생원공파 대제는 3월 7일로 연이어 열리고 있으며 각 계파별로 대제날 모여 정기 총회를 열고 있다.
종중 규약에 따르면 후손들에 대한 효행표창과 장학사업을 펼치기로 되어 있으나 아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주김씨 개관 (곡성신문 사장 박정하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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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주김씨와 곡성종회
곡성군 옥과면 수리를 중심으로 입면, 오산면, 겸면, 삼기면에 세계(세계)를 펼쳐 온 김유간의 후손 “현석공파(현석공파)”들은 비록 후대에 내려 오면서 애당파, 주효당파, 창의공파, 처사공파로 나뉘어 후손들의 갈레를 파악하고 있으나 각 존파간에 각별한 교류가 여타 성씨들 못지않게 끈끈한 것 같다.
김홍거(金弘擧 1604~1663)의 후손들을 처사공파(처사공파)라 구분 해 부르며 그 후손들은 입면 매월리 흑석리 오산 가곡리 등지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후손들로는 김주환(곡성군청 과장), 김경욱(한학자) 김상욱(포항공대 교수) 김종인 (전 전남 교육위원)등이 있다.
김충한은 3남1녀를 남겼는데 3남(자, 승, 작)은 모두 벼슬길에 나가 현령, 부사, 직제학을 각각 역임하였으며, 그의 딸은 두문동에 같이 들어갔다 함께 남원 두곡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낸 절친한 친구 신덕린(申德隣:고려 예의판서 역임, 그의 묘가 오산면 가곡리 5층석탑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치일재)의 아들 신포시(申包翅 : 신숙주,신말주의 祖父)에게 시집보내 고령신씨 가문과 인연을 맺게 된다.
다정하고 친절한 말은 모두에게 기쁨을 준다 합니다.
오늘도 다정하고 친절한 마음으로 사랑를 베풀고 삶의 향기가 가득한 하루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