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천큰새미’(부산시 동구 수정동 봉생병원 뒤편)는 자식을 위해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던 우물이었다. 큰 인물이 유독 많았던 ‘큰 마을’ 좌천동. 정화수 길어다 치성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어머니는 통행금지가 풀리는 새벽 4시 땡! 소리가 들려오면 우물에서 맑은 물을 떠 치성을 드렸다. 가족들의 무병장수와 함께 멀리 떠난 자식 잘 되게 해달라고 용왕님께 정성으로 기도했다. 우물을 보물처럼 여기며 우물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마을 주민들은 공동으로 1년에 두 번 우물을 청소하고 주변을 정결히 하였다. 좌천큰새미는 어머니들의 소원처였다.
이 우물은 현재 부산 지역에 남아 있는 재래식 우물 가운데 비교적 크고 원형이 제대로 보존된 경우에 속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 일대는 매립지로서 우물은 매립되기 이전인 약 150여 년 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우리나라 전통적인 우물 양식의 경우에는 지붕을 세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큰새미에 철제 지붕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지어졌거나 해방 후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우물 개량 사업의 결과로 보완됐다는 의견이 있다.
좌천큰새미와 관련된 한 일화가 전해져 온다. 과거에 마을의 한 재력가가 마을 주민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이 우물과 우물 터를 본인 집 앞뜰에 넣고 일정 기간에만 개방하겠다고 주민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일이 있었다. 사실상 우물을 독점하겠다는 욕심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힘을 모아 항의 시위와 반대 운동을 벌였고 결국 우물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상수도가 보급되기 전까지 생명수 역할을 했던 공동 우물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주민 스스로 주인이 되어 지켜낸 큰새미를 통해 오늘날 마을 공동체의 의미도 다시 새길 수 있다.
‘좌천작은새미’(봉생병원 맞은편)는 공원들이 시원한 등목을 치던 우물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일본식 나가야 양식으로 지어진 아담한 단층 건물들이 즐비했던 이 일대는 고무공장과 유리공장 등이 있었던 산업 중심지였다. 공장에서 하루 일을 마친 공장 사람들은 새미에서 시원한 등목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등에 물을 뿌리기만 해도 온몸이 시원한 등목. 서늘한 물줄기가 등줄기를 타고 목으로 흘러내리자 차가움을 참지 못해 업-퍼 업-퍼, 하다 보면 공원들의 하루 고된 삶이 싹 가신다. 등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동료들만이 느낄 수 있는 ‘애정’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사냥 나갔다가 우물가에서 신덕왕후 강씨를 만났다. 목이 몹시 탔던 그는 물 길어 온 아가씨에게 물을 청했는데, 슬기로운 여인은 급히 마시는 물에 체하지 않도록 버드나무 잎을 띄워준다. 인물도 곱고 생각도 깊은 여인에게 반한 이성계는 그렇게 인생의 반려를 만났다. 이 상징적인 일화처럼 우물가는 다양한 사건사고가 많이 일어나는 공동체의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우물가에서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정보를 소통했다. 모든 게 물이라는 소중한 공공재를 매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시대가 변하고 주거 시설과 상수도 시설이 발전하면서 우물은 서서히 사라져 갔다.
부산 동구 좌천동 우물 3곳인 '좌천큰새미' '좌천작은새미' '호천샘'(범일초등학교 근처)은 도심 속에 폐쇄된 우물을 주민들의 소통 공간으로 다시 복원한 사례다. 부산 동구와 부산YMCA가 이곳을 새롭게 정비한 때가 지난 2013년. 우물 이름 짓기 공모, 우물에 얽힌 사연 찾기 등 마을 주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한 ‘정다운 정(井) 마을 만들기’ 사업의 뜻깊은 결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