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앞에서 소개한 바 있는 우리 가곡 '동심초'의 원작자로, 당나라의 유명한 기생인 설도는 어렸을 때 부터 詩文에 뛰어났다고 한다. 8살 되던 해, 설도의 아버지가 오동나무를 보고 시를 한 수 읊고.
庭除一古桐(정제일고동) 마당 섬돌가의 한 그루 오래된 오동나무
聳干入雲中(용간입운중) 줄기가 구름까지 솟았구나
딸보고 대련을 지어 보라고 하였다. 이에 설도는 즉시.
枝迎南北鳥(지영남북조) 그 가지는 사방의 새들을 맞이하고
葉送往來風(엽송왕래풍) 잎은 오가는 바람을 전송하네요
(가지(枝)와 잎(葉), 맞이하다(迎)와 전송하다(送), 그리고 南北과 往來가 기막힌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지요.)
이 시를 보고 아버지는 딸의 천재성에 감탄하면서도 몹씨 슬퍼하였다고 하는데, 딸이 장래에 보통 여염집 여인으로 살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예감은 적중하여 그 후 설도의 아버지가 임지인 성도(成都)에서 반란을 집압하다 전사하고 어머니 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의지할 데가 없는 그녀는 결국 낙기(樂妓-技藝를 팔아도 몸을 팔지 않는 기생)가 된다. 설도는 노래와 시 그리고 서화(書畵)에 두루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며 빼어난 미모까지 지녔다고 한다.
이런 그녀의 재주 때문인지 당대의 유명한 시인인 백거이(白居易),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그리고 원진(元鎭) 등과 교류했다. 특히 원진과는 정분도 각별하였다 하는데, 원진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로 사천 감찰어사로 성도에 왔고, 설도는 자신보다 10살 연하인 원진을 사랑하게 된다. 원진이 배를 타고 떠난후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나 평생 그리워하며 살았다고 한다(원진은 몰락한 집안의 처자인 미녀 앵앵(鶯鶯)과 혼약을 깨서 자살하게 만들고, 당시 권세가인 한 재상의 딸과 혼인하는 등 출세만을 좇는 한량으로 알려짐)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허난설헌이 8살 때 지었다는 광한전 백옥루(廣寒殿 白玉樓) 대들보 올리는 글(上樑文)은 그녀의 천재성을 잘 나타낸 문장이다. 광한전 백옥루는 전설속의 인물 항아(姮娥:달에 산다는 여신 )가 산다는 상상속의 궁전으로 이 궁전을 짓고, 대들보를 올릴 때 난설헌이 초대되어 그 상량문을 지었다는데... 그 일부만 보자,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지네
새벽에 봉황을 타고 요궁(瑤宮)에 들어갔더니
날이 밝으면서 해가 부상(扶桑) 밑에서 솟아올라
붉은 노을 일만 올이 바다를 붉게 비추네
들보 남쪽으로 떡을 던지네.
옥룡이 아무 일 없어 연못 물이나 마시니
은평상 꽃그늘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나
웃으며 요희(瑤姬)를 불러 푸른 적삼을 벗기게 하네.
들보 서쪽으로 떡을 던지네.
푸른 꽃에 이슬이 떨어지고 오색 난새가 우는데
옥자(玉字)를 수놓은 비단옷 입고 서왕모(西王母)를 맞아
학을 타고 돌아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네.
들보 북쪽으로 떡을 던지네.
북해가 아득해서 북극성이 잠기고
봉새의 깃이 하늘을 치니 그 바람에 물이 치솟네.
구만리 하늘에 구름이 드리워 빗기운이 어둑하네.
들보 위쪽으로 떡을 던지네.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단 장막을 밝히고
신선의 꿈이 백옥 평상에 처음으로 감도는데
북두칠성의 국자 돌아가는 소리를 누워서 듣네.
들보 아래쪽으로 떡을 던지네.
팔방에 구름이 어두어 날 저문 것을 알고
시녀들이 수정궁이 춥다고 아뢰네.
새벽 서리가 벌써 원앙 기와에 맺혔네.
拋梁東。曉騎仙鳳入珠宮。平明日出扶桑底。萬縷丹霞射海紅。
拋梁南。玉龍無事飮珠潭。銀床睡起花陰午。咲喚瑤姬脫碧衫。
拋梁西。碧花零露彩鸞啼。春羅玉字邀王母。鶴馭催歸日已低。
拋梁北。溟海茫洋浸斗極。鵬翼擊天風力掀。九霄雲垂雨氣黑。
拋樑上。曙色微明雲錦帳。仙夢初回白玉床。臥聞北斗廻杓響。
拋樑下。八垓雲黑知昏夜。侍兒報道水晶寒。曉霜已結鴛鴦瓦。
여기까지 다 보신 분들은 아마 대부분 머리에 쥐(?)가 나셨을 것이다. 과연 이런 시가 8세 여자아이의 머리에서 나왔을까요. 가인박명(佳人薄命)이라 했던가, 하늘은 이 천재시인을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서둘러 데려가신다.
난설헌은 허균의 누이로 15세에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했으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다. 남편은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나 너무 똑똑한 아내 때문인지 기방이나 드나들며 집밖을 돌았고, 시어머니는 시기와 질투로 그녀를 학대했다. 게다가 어린 남매를 잃고 뱃속의 아이마저 유산한다. 동생 허균도 귀양가 버리자 삶의 의욕을 잃고 시를 지으며 나날을 보내다가 27세로 요절한다. 시 213수가 전하며, 그 중 위와 같은 神仙詩가 128수이다. 그녀의 시는 봉건적 현실을 초월한 도가사상의 시와 삶의 고민을 그대로 드러낸 작품으로 대별된다. 난설헌은 그의 시를 모두 불태워 버리라 했으나, 누이의 재능을 안타갑게 여긴 동생 허균이 모아 후에 <난설헌집>을 내고,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도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나오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18세기 동래에 무역차 나온 왜인들의 손에 의해 일본에 전해지고 분다이야 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간행된다. 난설헌과 허균 오누이는 유명한 三唐詩人 이달(李達)의 문하생이었다.
허난설헌의 한시를 소개한 적이 별로 없어 여기에 그녀의 죽음을 예언한 듯한 시 한편을 덭붙인다.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닷물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청난기채난) 파란 난새는 오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二九朶(부용이구타)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차갑기만 해라.
박엽(朴燁, 1570~1623)
박엽이 8세가 되던 겨울 마침 큰 눈이 왔는데, 그의 숙부가 밖에서 들어오는데 박엽이 공부하던 책을 눈 온 나무기지에 걸어 놓고 이를 과녁으로 장난감 활을 쏘고 있었다. 이에 숙부가 몹시 화를 내며 회초리를 들려하자 박엽이 말하길, "책속의 내용이 소자의 속에 다 있아온데 어찌 책이 필요하겠읍니까." 숙부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눈(雪)을 제목으로 시를 짓게 하고 4자의 운(韻)을 주었다. 이에 박엽은 즉시 붓을 들어,
如手復如席(여수부여석) 손바닥 만하기도 하고 자리떼기 만하기도 하게
隨風覆更斜(수풍복경사) 바람따라 뒤집히기도 하고 다시 옆으로 날리네
窓含無影月(창함무영월) 창에는 그림자 없는 달빛(눈빛) 머금고
林吐不香花(임토불향화) 숲속엔 향기없는 꽃(눈송이)을 토하네
山上瓊爲窟(산상경위굴) 산위에는 옥으로 된 굴을 만들고
人間玉作家(인간옥작가) 사람사는 데는 옥으로 집을 지었네
一痕能深白(일흔능심백) 한번 온 자취 깊고 하얀데
寒樹有飢鴉(한수유기아) 차가운 나무엔 주린 갈까마귀 앉아 있네
이 시를 보고 놀랜 숙부가 혼자말로 '이 아이는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되겠고 힘들이지 않아도 과거시험에는 쉽게 붙겠군' 하였다나...이런 시가 8세의 어린 아이에게서 나왔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특히 3번째 구와 4번째 구 '窓含無影月 창에는 그림자 없는 달빛(눈빛) 머금고, 林吐不香花 숲속엔 향기없는 꽃(눈송이)을 토하네' 는 어린 아이의 작품같지 않은 빼어난 명문이고, 마지막 구 '寒樹有飢鴉 차가운 나무엔 주린 갈까마귀 앉아 있네' 인생을 달관한 노인의 글 같은 느낌마저 든다. 기록에 의하면, 박엽은 시문에 능했으며, 광해군 때에는 함경도 병마절도사와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는 등 크게 활약하다 인조반정 후, 그를 두려워한 훈신들의 모함으로 임지에서 처형된다. 누가 말했던가 '충신은 호랑이와 같아 살아있을 땐 잡아 죽이지 못해 안달이고, 죽으면 그 업적(호피)을 칭송하기에 바쁘다고..'
매창(梅窓, 1573-1610)
'梨花雨 흣뿌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의 작가 매창이 10살 되던 해 백운사에서 시 짓기 대회가 열려 부안의 내노라 하는 시인묵객이 모두 모였는데, 구경삼아 절에 간 매창이 실로 절묘하기 이를 데 없는 시를 지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