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석목곽분은 북방초원세력의 무덤양식입니다. 경주.김해.일본열도의 적석목곽분들은 4-5세기 무덤들로, 보통 흉노족의 무덤들로 인식하고 있으나, 시기적으로 무덤들의 주인은 흉노족을 흡수한 선비족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흉노족은 한나라와 선비족의 연합공격으로 인하여 이미 2세기에 몽골초원의 패권을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비족이 2세기부터 단석괴 추장을 중심으로 흉노족을 흡수하여 몽골초원의 주인으로 군림하게 됩니다. 또한 흉노족때문에 골치를 앓았던 한나라가 동맹관계로 흉노족을 제거한 공로로 인하여 용인하게 됩니다.
▲[영상자료]5세기 유럽에 출현하여 로마제국의 멸망을 제촉한 훈족.훈족은 청동가마솥과 편두 등 흉노족과 동일한 풍습과 유물을 가지고 있었다. |
| 그리고 한나라와 선비족에 쫓겨 서진하여 5세기에 갑자기 유럽에 출현하여 게르만족을 밀어서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훈족이 바로 흉노의 잔존세력입니다. 제사용기에 해당하는 청동솥과 편두풍습 등 훈족의 유물과 풍습또한 흉노족의 유물과 풍습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4-5세기 경주.김해.일본열도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바로 선비족입니다. 선비족 중에서도 모용선비족에 해당된다 할 것입니다. 선비족의 혈통적 뿌리를 추적한다면 만주지역의 숙신(말갈=몽골)족의 갈래로 흑룡강.송화강지역에서 어로생활하다 초원지역으로 이주하여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정벌한 거란족의 주거지역이였던 사이무렌강 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였습니다. 선비족을 대통합하여 초원을 지배했던 단석괴가 죽자 다시 분열하여 지나 북부지역으로 이주하여 용병생활을 하다가 북위.토욕혼(탁발선비족).전연(모용선비족) 등 선비국가들을 지나대륙에 건설하게 됩니다. 대홍안령 지역을 조상의 고향으로 두고 있는 탁발선비족의 나라-북위의 경우 북위황제의 어머니의 나라이기도 한 고구려를 상국으로 섬기며, 수.당나라를 낳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구려가 기른 북위에서 나온 새끼나라 수나라.당나라가 9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구려에 도전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처참하게 패배하고 항복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선비족 중에서 모용선비족과 고구려는 악연이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용선비족의 나라 전연이 중원을 공격하기 위해 후방지원을 할 지도 모를 고구려를 먼저 선제공격하여 고국원왕의 황후와 태후를 인질로 데리고 가고, 미천왕의 무덤까지 도굴하여 시신까지 파헤쳐 갔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모용선비족에게 처참하게 당할 수 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당시 모용선비족 공격에 대응했던 고구려의 전술이 치명적으로 빗겨 나가는 바람에 당했던 고구려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이였습니다.
▲ 고구려와 전연(모용선비족)과의 전쟁과정에서 이주한 모용선비족의 기마군대 이주로 |
| 즉, 당시 고구려 고국원왕은 모용선비족이 험한 남쪽루르를 타지 않고 편한 북쪽루트를 공격루트로 이용할 줄 알고 동생 고무를 사령관으로 삼아 4만을 선비족이 진입하기 좋은 북쪽루트를 지키게 했고,고국원왕 자신은 1-2만의 군대로 남쪽루트를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모용선비족 전연은 험한 남쪽루트로 5만의 대군을 집결시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그야말로 속수무책 고국원왕은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대신 전연 모용황의 동생이 이끈 1-2만의 군대는 고국원왕의 동생이 이끄는 고구려 4만의 군대에 패하여 쫓기던 중에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그 모용선비군대의 일부가 고구려북부노선에서 패하여 일부가 동해안을 따라 경주.김해지역으로 들어와서 사로국을 무너뜨리고 신라를 개국하고 무덤들을 남기니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입니다. ▲ 경주지역의 적석목곽분의 주인은 2세기 이후 흉노족을 흡수하고 초원의 주인이 된 선비족 |
| 당시 수천 수만의 기마군대는 농경국가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유럽을 초토화시킨 훈족의 기마군대가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물론 몽골군대의 지나국과 유라시아정벌도 그것을 충분히 입증합니다. 기마군대는 말을 타고 하루에 500km를 달리는 빠른 기동성과 조직력과 협동성을 기반으로 각궁.쇠궁 등 최첨단 무기체계로 신속하게 정벌하고 초토화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유라시아와 아메리카의 무속신앙이였던 세계 샤먼니즘의 고향은 동북아시아입니다. 샤먼이즘은 '3한있음'에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단군천황들이 통치하는 3한은 분명히 동북아시아에 있었으며,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과 하늘의 이치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는 통치자들이 3한 지역의 단군들이였으며, 3한의 최고 제사장과 통치자는 단군천황이였습니다. 흔들리는 신라금관양식은 바로 샤먼니즘의 고향 동북아시아 북만주지역에서 초원지역으로 이주했던 선비족 왕들의 금관양식입니다. 유라시아 초원세력이 남긴 왕관들의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 하늘의 정령이 내려오는 신단수로써의 생명나무와 사슴들을 왕관에 새겨 넣었습니다. 광개토태왕비문에 보면 신라는 왜군의 공격으로 나라가 위급하니 광개토태왕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에 광개토태왕은 신라를 이용하여 백제를 견제하기위한 차원에서 5만의 군대를 투입하여 왜군을 몰아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왜군의 실체는 누구일까? 왜 왜군은 신라을 공격했던 것일까? 그것은 신라에 대한 적대감정이 없다면 대규모로 광개토태왕에게 군대를 요청할 정도로,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공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에 적대적인 세력은 누구일까? 그것은 신라권력에서 소외되어 일본열도로 건너간 모용선비족과 신라와 전쟁하고 있던 가야세력밖에 없다. 지나문헌은 일본열도에 거주하는 모든 세력을 보통 <왜>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 당시 상황을 전제로 신라를 위협한 <왜>의 실체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당시 신라와 전쟁을 했던 <왜>의 실체는 신라에 대한 적대세력은 대마도와 일본열도와 가야지역을 매개로 활동하던 모용선비족이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백제세력이 일본열도를 지배하게 되는 시기가 광개토태왕의 백제공격으로 온조백제 아신왕이 항복하고 웅진(공주)공격으로 웅진백제 응신왕과 백제세력이 일본열도로 대거 망명한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는 가야세력이 일본열도 지배세력이였는데, 그 지배세력의 실체는 기마군대로 무장한 모용선비족이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북방 기마군대가 지배를 하는 것이지 농경족이 지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 일본무사들의 머리모양은 사실 북방 선비족의 풍습에서 나온 머리모양이다. '황비홍'이 하고 나온 머리모양도 모두 북방 초원세력의 머리모양이다 |
| 머리털을 일부만 남기고 깨끗히 밀어 버린 일본무사들의 머리모양은 바로, 지나문헌에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만, 머리의 균을 제거하기 위한 위생적인 차원에서 나온 선비족의 풍습입니다.
신라개국신화는 모용선비족의 신화와 같습니다. 모용선비족의 족장 또한 흔들거리는 왕관을 쓰고 다녔다는 점에서 흔들거리는 금장식의 신라왕관의 주인은 모용선비족이 분명하다 할 것입니다. 선비족 모용부족의 나라 '전연'에서 활약한 사람들의 고분에서 발견된 장신구와 유리그릇 등 각종 출토물이 신라와 가야, 나아가 일본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한 점이 많아 선비족 모용씨가 신라-가야-일본열도로 진출하는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최근 신라 문무왕비문기록과 관련하여 경주지역 적석목곽분의 주인이 흉노족이 아니냐 하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그러나, 신라의 흉노세력은 기원전에 이미 한나라에 투항하여 서서히 한족화되어 버렸습니다. 신라문무왕비문에 기록된 '투후'와 관련된 인물로 한무제에게 투항한 흉노왕 태자 김일제의 후예인 김알지 세력은 이미 지나화된 흉노세력으로 왕망이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할 때에 적극 가담한 세력으로, 15년만에 후한에게 신나라가 망하게 되자, 후한의 탄압을 피하여 산동지역에서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한반도남부지역으로 들어와 가야와 신라세력을 형성하게 되는 세력입니다. 그러나, 신라를 개국하고 가야를 지배한 실질적인 세력은 4세기 기마군대를 앞세우고 동해안을 따라 들어온 모용선비족입니다. 모용선비족이 바로 김알지 성씨로 개명하고 신라왕조의 주인이 된 실체들입니다. 따라서 신라와 가야는 모용선비족의 나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사학계의 논쟁과 연구를 제안합니다. 신라 김씨왕조의 주인을 보통 김알지세력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기존 인식과 전혀 다르다를 알아야 합니다. 신라 법흥왕은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성과 이름을 개명한 왕입니다. 이는 [삼국사기][만주원류고][양서]에서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컨대,요사렴(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다른 지나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습니다. 법흥왕이 김씨로 개명한 이후 모용선비출신의 왕들은 김씨가 되었으며, 신라 문무왕은 자신의 비문에 김일제 후손이라고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용선비족이 조상을 바꾸었다면 왜? 그것은 고구려가 모용선비족의 공격으로 인하여 받은 당한 수모와 고통을 이해해야 비로소 인식될 수 있습니다. 신라왕조가 모용선비족임을 고구려가 알게 된다면 고구려가 신라를 가만 둘리도 없고, 신라의 구원요청을 절대 들어줄 리도 없습니다.자신의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선비족의 침략을 통하여 당한 수모와 치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광개토태왕이 그러한 사실을 안다면 절대 <왜>의 침략으로부터 신라를 구원할 수도 없는 일이며, 오히려 초토화시켜야 할 적국에 불과하기 때문이였을 것입니다. 조선말 강증산 선생은 뼈다구(조상)를 바꾸면 후손이 망한다고 했습니다. 신라 법흥왕이전까지 신라왕족은 모두 모씨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라가 김씨왕조라는 인식은 진흥왕시대부터입니다. 법흥왕은 자신의 이름을 모진에서 김원종으로 개명했다고 [삼국사기][양서-신라전][만주원류고]에서는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경북 울진군에서 발견된 법흥왕봉토비문에도 수 많은 모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라 법흥왕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법령을 공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 신라개혁에 앞장서게 됩니다. 순장의 인원도 사람에서 모형으로 대체하도록 국법으로 명시한 것은 아마도 초원문화를 포기하고 농경문화를 선택한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선비족의 구리솥-동복(좌),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선비 기마상(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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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635호 황금 장식 보검(계림호14호 고분출토).이런 모양의 황금보검은 해외에도 유례가 드문데,카자흐스탄의 보로로에 지역에서 출토된 칼과 지나국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주에 있는 키질 제69굴의 벽화에 그려진 무사의 칼이 가장 비슷하다.모두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이다.이 황금보검이 신라자체적으로 제작했나 아니면 수입했나하는 논쟁이 있었으나, 현재는 로마문화권에서 제작주문하여 수입한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보검을 자세히 보면 테두리와 내부가 수많은 금 알갱이로 장식되어 있는데, 바로 그리스 로마 양식인 누금 기법이다.이 황금보검의 원형은 트라키아에서도 출토되었다.트라키아는 375년부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즉 흉노의 근거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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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남대총 출토 유물-로마에서 수입한 유리잔-당시 신라가 해로를 통하여 로마와 교역했음을 증명하는 유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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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가 울진지역을 신라영토로 삼는다는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91) 돌비석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신라가 동해안 지역에 실직주를 설치하고, 울진 지역을 새롭게 신라의 땅으로 정하자 이 곳 주민들이 항쟁을 일으켰다. 이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보내 주민들에게 벌을 주었다. 그리고 다시는 신라에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하는 증표로 이 비석을 세운다." 이 돌비석의 발견으로 울진지역이 삼국시대 신라의 영토였음이 밝혀졌으며,법흥왕 11년, 서기 52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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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일제 후손 김알지세력은 김씨로 개명한 모용씨 신라의 기반세력이 된다.
골품제에서 왕족은 모용씨(성골)이 되고, 귀족(진골)은 김알지세력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