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회의 (日本会議)
최근 수정 시각: 2019-08-06 16: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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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会議 にっぽんかい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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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최대 규모의 우익 결사체[1].
일본의 모든 우경 활동과 논란들을 추적해보면 정점에 항상 이 조직이 있을 정도이다. 일본 종교계 우익의 구심점이 신사본청이라면, 정치-사회계에서는 바로 이 일본회의.
2. 상세
1997년 5월 30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두 단체가 통합해 발족한 민간조직이다. 2017년 8월 현재 회장은 다쿠보 다타에. 회원수는 2016년 기준 약 3만 8천 명이고, 일본 도도부현 47개 전체에 본부가 있으며, 시정촌 241곳에 지부를 두고있다. 브라질에도 해외 지부를 두고 있다.
일본 국회의원 중 약 260명 정도가 일본회의 회원이라고 한다. 이는 일본 국회의원의 40%에 달하는 숫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의원연맹 하의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라는 것도 결성해 현재 원외, 원내 포함해 국민민주당, 일본 유신회도 있으며, 95% 이상이 자민당이다. 현직 수상인 아베 신조를 포함한 내각 각료 14명도 일본회의 회원이다. 관련 기사 아베 신조는 일본 회의의 창립 멤버이며, 아베 내각의 80% 이상이 이 회의 출신이다. 극우적인 말을 자주 하는 스가 요시히데, 아소 다로도 일본 회의 멤버이다. 자민당 정조회장 기시다 후미오와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도 회원. 일본의 대표적 우익사관론자인 가세 히데아키 역시 이 단체의 대표회원을 역임하였다.
궁극적으로 천황제 국가의 복원을 꿈꾸는 신흥종교 생장의 집(生長の家)[2] 원리주의자 무리가 그 배후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곧 후술하겠지만 ‘천황제 국가의 복원’을 노린다면서 한편으로는 황태자였던 나루히토 덴노와 노골적으로 갈등을 빚었던 모순적인 집단이기도 하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는 조직이었는데,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와 이로 인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 2019년 들어 한일 양국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 한국 내에서도 일본회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베 정권 들어 극심해지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이해하려면 일본회의에 대한 분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다스 뵈이다 70회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가 일본회의에 대해 소개[3]했으며,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08회에서도 일본회의에 대해 심층 분석했다.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수석·보좌관 회의에 일본회의의 정체를 파헤친 책 《일본회의의 정체》를 들고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다룬 영화 《주전장》에서도 일본회의가 등장한다.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지만 우익사상의 기원과 일본회의에 대한 조사 또한 겸해진 작품이기도 하다.
3. 역사
3.1.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일본회의의 근간이되는 조직 중 하나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1981년 10월 연호법제화운동을 추진한 단체들로부터 시작되었다. 헤이세이 등 일본 특유의 연호체계를 법제화해서 지켜나가자라는 주장을 중심으로하는 이 운동은 당시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있던 일본 우파계 조직들이 한데 모여서 활동하는데에 있어서 큰 기반이되었다.
천황 재위 50년을 기념하는 75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79년 원호법의 제정을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한 후, 함께 운동에 참여했던 우파조직들이 이대로 해산하기에는 아깝다는 공감대에서부터 시작해 재계, 정계, 학계, 종교계에 흩어져있던 우파인사대표들이 한데모여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를 결성하게된다.
발족 당시 의장으로는 유엔 대사 등을 지닌 가세 도시카즈가 참여하였고, 사무총장으로는 메이지 신궁의 부대표인 소에지마 히로유키가 그 역할을 맡는 등 당시 일본의 많은 고위층들이 이 국민회의라는 조직에 참여하고있었다. 특히 이 국민회의는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인 신편 일본사를 편찬하여, 오늘날 일본 교과서왜곡의 핵심이되는 복고조의 역사관을 주창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4]
3.2. 일본을 지키는 모임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위의 국민회의보다 좀 더 앞선 74년에 결성되었다. 이들은 주로 우파계 종교단체들이 중심이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임제종 승려 아사히나 소겐이 있었다. 가마쿠라 엔라쿠지 주지를 맡기도했던 아사히나는 이전까지는 평화운동에 주로 참여하던 종교인이었지만, 70년대초반 이세신궁을 참배하던 도중 갑자기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전까지 알고지내던 메이지신궁과 도미오카하치만궁 등의 주요 종교단체들에게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창설하자고 호소하면서 이들을 모아 조직을 형성하였다.
특히 이 모임에는 신흥종교단체인 생장의 집 교조 다니구치 마사하루가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데, 이 단체는 전후 전성기때에는 300만명의 교세를 자랑할정도로 일본내 신흥종교단체 중에서는 특히나 큰 힘을 가진 조직이었다. 생장의 집은 신흥종교단체들 중에서도 우파경향이 특히 강할뿐만 아니라 직접 생장의 집 정치연합이라는 정치조직을 결성하여 적극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려하였는데, 이 단체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창설에 크게 관여하면서 '일본을 지키는 모임'의 영향력은 우파단체들 중에서도 큰 규모로 성장할 수 있게된다.
일본 신토의 중심이자 신사본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메이지신궁의 주요인물들과, 신흥종교단체들 중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는 생장의 집이 만나면서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일본내 우파조직들중에서도 종교계인사들이 모인 막강한 조직이되었고, 동시에 이 두 단체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음에따라 우파 조직들 중에서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게된다.
3.3. 두 조직의 결합
이 두 조직이 결합한데에는 당시 두 조직의 사무국이 하나였다는 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양 단체의 사무국장을 겸임하고있던 메이진신궁의 전 신관 도야마 가쓰시와, 생장의 집 학생조직 출신이었던 가바시마 유조는 서로 협력하여 양 조직의 임원회에 조직의 통합을 설득하였고, 이를 각 단체의 대표가 받아들이면서 일본회의가 탄생하게된다.
4. 주장과 활동
'아름다운 일본의 재건과 자부심 있는 나라 만들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 운동을 실시하고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매달 ‘일본의 숨결(日本の息吹)’이란 기관지도 발행한다. 표지 그림[5]부터가 일본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나 명절을 쇠는 모습 등 전통적인 가치관을 반영한다. 아래는 이들의 대표적인 주장.
•덴노
◦남계(男系)에 의한 황위의 안정적인 상속을 목적으로 한 황실 전범 개정[6]
•헌법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
◦덴노 중심의 남성사회 = 여성참정권 박탈[7] #
•사회
◦반일 발언하는 외국인 추방
◦외국계 이민자(귀화인)의 사후 활동 감시
◦외국인 지방 참정권 반대
◦우생보호법 개정[8]
◦인권 기관 설치법 반대[9]
•교육
◦학교 교과서에 있어서 '반국가적' 서술의 시정
◦일본의 역사를 모욕적으로 단죄하려는 자학사관 교육의 시정
◦학교에서 국기 게양 · 국가 제창 추진
◦애국심, 공공예절 교육 등을 담은 '신교육 기본법'의 제정
◦국기국가법의 제정
•역사
◦대동아전쟁은 미국과 영국 등에 의한 경제 봉쇄에 저항한 자위적 전쟁임을 명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실현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국립 추도 시설’의 건설 반대[10]
•일본식 성풍속 복고
◦부부별성 법안에 반대
◦젠더 프리 교육의 시정
◦페미니즘 운동 저지
5. 사건 사고
•아베 신조 내각의 지지율 하락을 불렀던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도 일본회의와 깊숙한 연관이 있다. 해당 사건 모리모토 학교 법인의 이사장은 일본회의 임원, 학교의 명예 교장은 일본회의 회원 아베 신조의 부인 아베 아키에다.
•모리토모 학교 법인에서 운영하는 쓰카모토(塚本) 유치원은 2016년 12월 혐한, 혐중 통신문을 학부모들에게 보내 한국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해당 유치원은 원생들에게 중대 사태가 발생하면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에 관한 칙어를 낭독시킨다.
6. 관련 도서
•스가노 다모쓰(菅野完) 著 《일본 우익 설계자들》
•아오키 오사무(青木理) 著 《일본회의의 정체》
7. 관련 기사
[1] 극우 종교세력과 극우 정치세력의 결합으로 탄생했다.[2] 한때 오모토 신자였던 다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 1893-1985)가 1930년에 창시한 종교. 그 때문인지 교리에서 오모토의 영향이 엿보인다. '한국광명사상보급회'란 이름으로 한국 지부가 있으며, 다니구치가 쓴 《생명의 실상》도 한국어판이 있다.
[3] 1시간 46분부터
[4] 본격적으로 교과서 역사왜곡이 표면화된것은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부터지만 일본 우파단체들은 8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교과서 역사왜곡을위한 물밑작업을 펼치고있었다. 실질적으로 이들의 이런 행각을 일본내 주요좌파조직인 일본교원노조가 틀어막고있었지만, 90년대 이후 교원노조의 힘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역사교과서왜곡이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5] 다케나카 도시히로(竹中俊裕)라는 삽화가의 그림이다.
[6] 명예직인 덴노 상속에 관한 것인데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딸만 있어서 문제가 된다. 남계만이 상속할 수 있게 되면 차기 황위는 아키히토 전 덴노의 둘째 아들인 후미히토 친왕의 아들이 잇게 된다. 이 후미히토 친왕이 극우 까진 아니어도 우익 노선과 함께하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였기 때문에, 일본회의에서 황실을 컨트롤하기 쉬워진다.
[7] 이 부분이 얼핏 이해가 안 갈 사람들을 위해 설명을 하자면,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망한 이후인 1946년부터 미군정에 의해 비로소 여성의 참정권, 즉 선거권이 주어졌다. 그러니까 1946년 이전인 일제 시절에는 일본인 여성들한테 아예 참정권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만큼 일제 시절 일본은 남존여비 사상이 사회 전반에 가득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회의가 여성 참정권 박탈을 모색하는 이유는 그것이 패망 이전의 일제 시절로 돌아간다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8] 여전히 이런 생각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
[9] 이는 북한의 주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일본의 인권은 이러한 감시기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논리.
[10] 타쿠보 타타에 일본회의 회장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중국 · 한국 등 외국의 주장대로 “A 급 전범을 제외하면, 다음은 B, C, 마지막으로는 야스쿠니 신사 자체를 없애 버리라고 할 것은 눈에 선하다”며 “외교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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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상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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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대 규모의 극우 단체. 산하에 일본회의 국회의원간담회가 있음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회의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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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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