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동난사춘(今冬暖似春), 이안눌, 무금정
🇰🇷 이재익 (시인)
▣ 봄볕 풀리면 좋은 일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됐다고 몇 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울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이 글은 오래전에 객지에 있는 아들에게 겹겹이 싼 소포 속에 유자 아홉 개와 함께 동봉한 어머니의 편지글이다.
신문기자(한국경제신문)요, 시인인 고두현 님이 고향 남해 본가의 노모가 보내온 틀린 맞춤법 그대로의 정감 넘치는 편지를 자신의 저서 <<옛시 읽는 CEO>> 에서 소개하였다.
노모가 아들에게 희망에 차고 건강하게 생활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봄볕이 풀리면 좋은 일 안 있겠나'라는 이 한 마디에 담겨있고, 이 기운이 절실히 와 닿는 요즈음의 심정이다.
우리 고장 부산의 동래부사와 경주부윤을 지낸 이안눌이 함경도 관찰사를 지낼 때 지은 시 <寄家書> 중 한 구절인 '今冬暖似春' 문구를 이번 우리 벗님들 [2025년 봄 정기모임]의 식당 벽에 붙인 현수막에 끼워 넣었다.
'迎春,今冬暖似春' ; '지난 겨울은 봄처럼 따뜻했다. 이제 새봄을 희망으로 맞이하자'는 의미이다, 사실 지난 겨울은 늦추위가 있어서 봄꽃이 한 열흘 늦어져 각지의 매화, 산수유, 벚꽃, 진달래 등의 꽃축제가 낭패를 겪고 있다. 이안눌은 왜 지독하게 추운 북녘 함경도의 겨울을 봄같이 따뜻하다고 했을까? 이안눌의 한시를 감상해본다.
寄家書 / 李安訥
欲作家書說辛苦 恐敎愁殺白頭親
陰山積雪深千丈 却報今冬暖似春
<기가서> (부모님 본가에 보낸 편지) / 이안눌
집에 보낼 편지에 괴로움 말하려다
흰머리 어버이 근심할까 두려워
북녘 산에 쌓인 눈 천 길인데도
올겨울은 봄날처럼 따뜻하다 적었네.
처음은 함경도 북녘땅에 쌓인 적설과 매서운 북풍에 생활하기 힘들다고 쓸까 하다가 부모에게 큰 걱정을 끼칠까 저어해서 ’올겨울은 봄처럼 따뜻하다‘ 고 적어 안심시켜드리는 효심을 볼 수 있다. 이 때가 1631년이었다. 이안눌은 도량이 큰 文才士였다.
▣ 이안눌(李安訥)에 대하여
본관은 덕수이씨, 1571년 선조 4년~1637년 인조 15년, 조선 중기 문신, 호 東岳.
일생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에 걸쳐 있었다. 그는 이기의 증손자이며, 청렴근면한 관리로 벼슬이 형조판서 겸 홍문관 제학에 올랐다.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피난갔다가 돌아와서 병사했다.
그는 특히 詩作에 주력하여 두보의 시를 만 번이나 읽었다고 하며, 문집에 4,379수의 시를 남겼다.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607년에 동래부사로 부임해와서 임진왜란당시 송상현 부사 등 동래 관민들이 장렬하게 싸워 순국한 사적을 자세히 살펴서 정리하여 <동래사월십오일>의 국난을 형상화한 사실적 장편 시를 남겼다. 이것으로 임진왜란사, 향토사 중요한 자료 업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이안눌(이기의 증손자)家와 이준(이언적의 손자)家는 원한이 있었다. 그러나 극적인 반전이 경주 안강읍 옥산서원 부근 독락당 앞 무금정 정자에 어려있다.
성리학계 동방오현으로 정여창, 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들며,
그중 한 분인 회재(晦齋) 李彦迪(1491~1553. 본관 여주) 선생을 향사하는 玉山書院은 경주시 안강읍 소재이다.
회재 이언적이 거처하던 개울가 사저가 獨樂堂이다. 가사문학의 대가, 노계(蘆溪) 朴仁老(1561~1642) 선생의 가사문학 작품 <獨樂堂>은 장엄하다.
▣ 無禁亭
자, 이제 옥산서원, 독락당, 무금정을 무대로 이언적, 이기, 이준, 이안눌에 얽힌 역사적 사실을 시로 읊은 이재익의 시 <무금정無禁亭>으로 간다.
<무금정> / 이재익
양동 서백당 명당에 태어난
언적명행일치(彦迪名行一致)* 선비
앞으로 나아가다 가다가, 어찌
천만리 밖 강계 귀양* 떨어지고
귀양이야 갈 수 있다손
천수(天壽) 줄이심 또 어인 일고
응당 쌓인 원한, 곧바로 정자 짓고, 제호 지어
대손(代孫) 구원(舊怨)* 그 고리 빨리도 끊어내니
큰 나무 밑에 잔 나무는 없어도
큰 인물 밑에 현손(賢孫)은 있구나.
산운야천(山雲野川) 형승(形勝)이
연비어약(鳶飛魚躍) 물까치만 주인이랴 (* 鳶 ; 솔개 연)
피리 소리 드높이는 마음 선비 제 모두 것
고요히 맑은 마음 큰 기쁨 주는 무금정(無禁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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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적 명행일치 ; 이언적 선생은 원명은 李迪. 중종 임금이 학덕 높은 선비관리에게 이름에 선비 언(彦) 자를 하사하여 李彦迪(1491~1553)이 되셨다. 이름 그대로 ’선비가 나아가는‘ 생을 사셨다.
* 강계귀양, 代孫舊怨 ; 을사사화(1545) 여파로 양재역벽서사건(명종의 외숙부 윤원형 일파를 비방하는 익명 벽서 서건)이 일어났는데, 그 때 이기 등에게 이언적 선생이 모함을 당해 강계로 귀양 가서 거기서 여생을 마쳤다.
* 역사적 화해 ; 후일 이언적의 손자 이준이 조부를 추모하여 경주의 모처에 정자를 지었고, 바로 이때, 이기(李芑. 1476~1552, 본관 덕수, 윤원형과 손잡고 을사사화 일으키고, 영의정까지 오름, 사후에 훈록이 삭탈됨)의 증손자 이안눌이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여 화해의 손을 내밀어 無禁亭이라는 정자의 제호시를 지어주며, 후손끼리 역사적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 정자가 무금정인데. 오랜 역사가 흐른 후라 존재는 기록되어 있으나, 그 위치를 가늠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뜻있는 향민들이 최근에 그 無禁亭 정자를 이언적 선생 사저 독락당 유적 앞에 이전 복원하였다.
* 무금정의 그 無禁이란, 자연 감상은 어느 누구에게나 금함 없이 자유롭다는 의미다.
無禁! ’제나라 국씨의 그 하늘의 것‘ 이다. 옛날 송나라 향씨가 제나라 국씨에게 부자 되는 법을 물었다. 국씨는 말했다. 사람의 것은 가져오면 도둑이 되니 안되고, 하늘의 것을 가져오면 된다 했다. 사유물은 안되고 자연의 것은 된다는 그 자연이 곧 무금이다.
옥산서원
독락당
무금정
▣ 희망의 새봄 맞이
이제 2025년 겨울은 혹독했다. 나라 사정으로도 큰 정변이 있어서 나라를 걱정하는 국민들의 애국의 열기로 추운 겨울도 후끈하였다.
추운 겨울도 따뜻하다고 편지보낸 ’今冬暖似春‘ 진의를 느끼며, ‘봄볕이 풀리면 좋은 일 안 있겠나' 하고 희망해 본다. 이안눌과 이준의 화해가 보여주었던 무금정의 의미도 함께 되새기며, 진정한 봄이 오기를 기다려 본다.
봄의 산천을 자세히 보세요. ’산은 우람해도 작은 꽃 한송이 피움에 정성을 다하고, 꽃송이는 작아도 산을 웃게 한다.‘(이재익 <각시붓꽃> 중)
봄은 우리 곁에 벌써 와 있어도 느끼는 자 만의 것이다. 봄의 종착지는 천지간의 꽃과 나무들 산야에 있지 않고 우리들 마음 속이다. 그리하여 자연을 경외(敬畏)하며 따뜻함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
2025.3.21.이재익 시인(학정)
각시붓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