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해 1길 : 망우 왕숙길 : <한양에서 관동으로 넘어가는 시작의 길>
걷고 싶다. 우리 땅을 발목이 시리도록 걸어보고 싶다. 하지만 무항산無恒産으로 인하여 60이 넘는 나이에도 현직에서 은퇴하지 못하여 휴일이 아니면 걷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 울분이 쌓일 뿐이다
하지만 화禍와 복福은 겹쳐 온다는 옛말이 무색하게 이 땅에 몰아친 코로나 19의 확산 우려로 인하여 한 주에 한 번밖에 걸을 수 없는 기회조차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평택 섶길을 2020년 11월에 마치고 4개월간을 코로나가 억제되기를 기다리며 방콕 생활을 하여야 했다.
다소 억제될 것 같았던 코로나는 겨울에 접어들자 더욱 기승을 부리었고 꽃피는 봄의 향기가 이 땅에 펼쳐지는데도 확진자는 더욱 증가하였다. 걷기는 나에게는 일상생활이기에 이 땅을 걸을 수 없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행위이며 우리 불광회의 존립 목적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불광회 회원들과 협의한 결과 방역 수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우리 땅을 걷기로 서로의 의견이 합치되었는데 때마침 경기 문화재단에서 조성한 평해길이 개통되어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걷기로 하였다.
3월 19일 금요일이다. 평해길 첫 번째 길을 걷는다. 배낭을 꾸리고 약속 장소인 양원역을 가고자 경의 중앙선을 탔다. 아침 출근하는 사람들로 매우 혼잡하였다. 저들은 바쁘게 삶의 현장으로 뛰어드는데 휴일도 아닌 평일에 등 뒤에 불룩 튀어나온 배낭을 메고 혼잡한 틈바구니에 서 있는 것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오고 가는데 3시간여가 소요되고 걸어가는데 3~4시간이 소요되어 조금 일찍 집에 귀가하기 위해서 출근 시간대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공덕역에 이르니 많은 사람이 내려 좌석을 잡았지만, 아직 1시간을 더 가야 되어 지루하게 느껴졌다. 양원역에 이르러 2번 출구로 빠져나오니 서울 둘레길 안내도가 세워져 있다.
2015년, 화랑대역에서 고덕역까지 걸었던 서울 둘레길의 한 구간인데 주변을 살펴보니 희미한 기억만 스칠 뿐 생생한 기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길은 변한 것이 없는 옛길 그대로 일 땐 테 세월의 무게로 검은색의 머리가 하얀색으로 변한 세월을 탓할 때 일행들이 도착하여 들머리인 딸기원으로 향했다.
평해길 패스포트에는 들머리에 이르려면 경의 중앙선 구리역 2번 출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딸기원 중문에서 하차하면 된다고 설명해 놓았지만 우리는 들머리까지 걸어가고자 양원역 2번 출구에서 서울 둘레길을 따라 딸기원 중문에 이르렀다.
하지만 딸기원 중문에 이르렀는데 평해길의 시작 지점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없고 단지 딸기원 중문임을 알려주는 비석만이 세워져 있었다. 경기 문화재단에서 조성한 길에는 반드시 들머리에는 표지석을 설치하여 놓은 것을 그간 걸었던 의주길. 삼남길, 영남길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었기에 의아하게 여기며 건널목을 건너 망우리 고개로 향하는데 평해길의 들머리를 알리는 표지목과 안내 설명문이 세워져 있었다.
평해길의 들머리는 딸기원 중문이 아닌 딸기원 서문이었다. 즉 버스 하차 지점이 중문이며 출발지는 서문이었다. 옛길을 찾아 새길을 걷는 평해길의 제1길인 망우 왕숙길의 걷기가 시작되었다.
125km 대장정의 시작점인 망우 왕숙길은 서울에서 경기도로 넘어오는 첫 관문인데 이곳은 “본래 ‘응골’이라 불리는 집도 몇 채 되지 않는 조그만 마을이었지만 1960년대에 왕숙천 범람하는 바람에 26가구 정도가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마을의 규모가 점차 커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이 커지면서 이곳에도 버스 정류장이 설치되었고 정류장의 이름도 필요하였는데 당시 정류장 근처에 딸기를 재배하던 농가에서 “딸기원”이라는 푯말을 세웠고 이를 본 안내양이“딸기원 내리실 분 안 계세요”라고 외치기 시작하면서 마을 이름이 딸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구리시 교문동 딸기원(상덕마을) 지명 유래>
집도 몇 채 되지 않는 조그마한 마을이 왕숙천이 범람하면서 비로소 커지기 시작한 마을의 도로는 이제는 8차선 도로가 되어 자동차의 통행량은 넘쳐나 교통 신호를 지키지 않을 수 없는 커다란 도로가 되어 오로지 딸기원이라는 지명에서 옛 정취를 느끼며 고갯 마루에 올랐다.
고갯마루가 바로 망우리 고개이다. 예전 같으면 가파른 오르막길이 되어 숨을 헐떡이며 올랐겠지만, 지금은 자동차 도로를 만들면서 완만한 오르막이 된 망우리 고개의 망우는 근심을 잊는다<忘憂>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근심을 잊으면 바로 즐거움인데 이곳에는 어떠한 근심을 잊는다는 말인가? 전하는 바로는 ”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가 묫자리를 정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동구릉의 건원릉 터를 유택지로 정하고 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잠시 쉬면서 멀리 건원릉 터를 바라보면서 신하들에게 이제야 오랫동안의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 (於斯吾憂忘矣)”라 하였다. 이후부터 이 고개를 망우 고개라 하고 이 일대를 망우리(忘憂里)라고 하였다.
역성혁명을 통해 나라를 열었으면 하늘의 뜻을 따르고 민심에 순응하여 민생 안정을 국왕의 근심으로 삼아야 함에도 개인의 안락을 위한 묫자리를 잡고서 근심이 풀리었다는 술회는 백성을 근본으로 한다는 국가의 이념과 괴리되지는 않았을까 ? 라는 쓸모없는 생각이 일어날 때 망우리 공원 주차장에 이르렀다.
우선 패스포트에 망우 왕숙길을 걷는다는 신표인 인증 도장을 찍었다. 오늘로써 이곳에 3번째 왔다. 첫 번째 인연은 한북 수락지맥을 종주할 때 지나갔고, 두 번째는 서울 둘레길을 걸으면서 지나갔고 오늘 또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망우산을 직접 찾아오지 않고 길을 걸으면서 지나갔기에 망우산 전체의 모습을 온몸으로 대할 수 없었는데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올 때마다 숙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곳이 바로 근, 현대사를 살았던 선각자들이 고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용운, 방정환, 이중섭. 조봉암, 지석영, 오세창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한분 한분 찾아뵐 수 없어 마음속으로 묵념을 하고 성동구 둘레길과 평해길로 나뉘는 Y자 갈림길에서 좌측의 평해길로 걸어갔다.
아아, 망우산 순환산책로는 언제 한 바퀴 돌아볼까나 ! 올 때마다 자책하지만 돌아가면 까맣게 잊고 말았으니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소인의 무리와 달라질 게 없다고 또다시 자신을 질타하면서
김구 선생님이 잠들어 계신 효창공원, 만고에 푸르른 충절의 대명사 노량진의 사육신의 묘, 민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낸 4, 19 묘지와 함께 이 땅의 성지로 길이 받들어야 할 곳으로 여기면서 걸어갈 때 평해 길은 구리 시청을 향하여 하산하는 길로 이어졌다.
망우산을 하산하니 좌측 한쪽에 구리 시청이 있었다. 한눈에 보아도 호화로운 초현대식 건물이다. 국민의 공복을 스스로 인정하면서 그들이 머무는 공간을 초현대식으로 건설한 것을 보면 나와 똑같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기관인 것 같다.
왕조시대에는 임금의 권위를 앞세우고자 대대적인 궁궐 공사를 하였지만,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오늘날에서도 관공서를 이처럼 웅장하게 건설하여야만 할까?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질타를 하며 구리 시청 앞의 건널목을 건너 이문 안 호수공원을 좌측에 두고 구리 전통시장으로 향하였다.
신도시도 아닌데 시내 속에 호수공원이 있는 사실이 신비로웠는데 뒤늦게 찾아보니 본래 농업용수 저장을 위해 조성한 저수지였지만 주변의 도시화로 농업을 위한 저수 기능이 상실되어 친환경적인 것으로 개량하여 이문안 호수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고 한다.
이제 시내를 걸어가는 길이 되면서 불현듯 평택 섶길을 걸을 때의 길 찾기의 고통이 되살아나며 다소 긴장된 눈으로 전봇대 곳곳을 주시하였는데 평해 길을 인도하는 방향 지시표지기가 잘 매달려 있어 도시를 감상하며 걸어갈 수 있었다.
두산 한성아파트를 지나니 분수대가 조성되어 있고 앞에는 참 좋은 동방 아파트가 있다. 동방 아파트를 우측에 두고 진행하여 전통시장의 입구에 이르러 동행한 김 총무가 약속된 일로 인해 헤어지고 조 회장님과 함께 시장안으로 들어갔다.
전통시장에 들어서니 문득 어린 시절의 시골 오일장이 생각난다. 농악대가 흥을 돋우고 이 마을 저 마을에서 각자의 특산품을 진열하여 놓은 상품들을 보는 것만으로 신기하였고 국밥. 순댓국, 부침개, 떡, 팥죽 등 먹거리가 풍성했지만, 무엇보다도 시장 사람들의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막걸리 한잔을 할 수 있는 곳은 없는지 눈여겨보지만 붐비는 사람들로 인하여 혼잡한 시장을 빠져나오니 구리역 0.8km를 알린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전통시장인 숨겨진 명소인 돌다리 곱창 골목을 찾아가 식도락을 만끽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배불리 먹어서는 아니 되기에 구리역을 향하여 더욱 빠르게 진행하였다.
걸어가는 길은 비록 아스팔트 길일지라도 발전하는 도시의 전경을 감상하며 걸어간다. 경기 옛길은 유도표지가 제대로 정비되어 있어 길을 이탈할 염려도 없어 걷는 기분에 젖어 편안하게 걸어갈 수 있어 좋았다.
구리역 바로 옆에 조성된 광장을 지나 또다시 도심 속으로 진행하여 다소 지루함을 느낄 때 인창 빗물 펌프장을 지나 한북정맥 수원산에서 발원하여 남양주시를 흐르다가 구리시에 이르러 한강에 흘러드는 길이 37.34km의 한강의 1 지류인 왕숙천에 이르렀다.
왕숙천은 조선의 태조가 제위에서 물러나고 상왕으로 있을 당시 남양주시 진접읍 팔야리에서 8일간 머물렀다 하여 그 인근의 하천을 왕숙천으로 불렀다 하고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先王)이 길이 잠든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국왕이 물을 마시면 그 우물은 어정御井 그 물은 양원수養源水가 되고, 근심을 잊었다고 하면 망우리忘憂里, 여덟 밤을 자고 가면 팔야리八夜里, 임금이 잠들어 있으면 왕숙천 王宿川이 되는 왕조시대가 남긴 유물들 !
조선 왕조의 비극은 왕조시대의 낡은 유물을 시대의 변화 속에 개혁과 혁신을 통해 적극적으로 반성하며 적폐를 청산하지 못한 채 오로지 왕권 강화만을 위해 철저하게 백성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탐관오리의 생활을 탐닉함에 있었다.
왕이 곧 국가라는 신념을 지녔던 낡은 유산을 지닌 왕숙천이란 지명을 개탄하면서 잔잔히 흐르는 물길을 바라보니 흐르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잔잔하기만 하다. 슬픔에 잠겨 소리조차 내지 않는 것인가 ?.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왕숙천 변을 걷는다. 옆에는 자전거가 질주하고 있고 앞, 뒤로는 사람들이 오고 간다. 평해 길이 어느새 구리 둘레길이 되어 있다.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는 아무런 말이 없어도 그 아래에는 길이 저절로 이루어진다桃李不言下自成蹊는 옛말과 같이 명품 길은 가만히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데 여기저기서 자치단체에서 우리 고장의 둘레길로 정비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직사광선이 곧바로 내리쬐며 일자로 쭉 뻗어 있는 천변을 보면 가는 길이 멀어 보이기만 할 텐데 걷고 싶은 충동이 오히려 충만함은 무엇 때문일까? 흐르는 물이 말없이 흘러가듯 걷는 사람 또한 말없이 걸을 때 기쁨에 젖을 수 있을 것이다.
한 발 한 발 내디딘 걸음이 어느새 오늘의 종착지인 왕숙천과 한강이 합류라는 합수 지점인 세월교 이르렀다. 걷는 사람의 발걸음은 멈추지만 가는 길은 어서 와라. 손짓하고 있다. 내 마음을 나와 같이 알아주는 우리의 길이 펼쳐있는데 어찌 다시 찾아오지 않으랴 !
● 일 시 : 2021년 3월19일 금요일 맑음
● 동 행 : 조용원 회장님. 김헌영 총무
● 행선지
- 10시18분 : 딸기원 중문
- 11시40뷴 : 구리시청
- 12시07분 : 구리역
- 13시17분 : 세월교
●소요시간 및 거리
- 거리 : 8.8km
- 시간 : 2시간 5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