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2022년2월3일(목), 오후 3시, 설날을 지내고, 자택인근의 임경업 장군(林慶業,1534-1646)의 충렬사를 찾아보았다. 충주 건국대 곁을 끼고 좌측으로 꺽어지니 충렬사가 보였다. 충주에 첫 목회로 이주해 와서, 50년 전에 방문했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산자락에 방치 된 낡은 사당으로 기억 된다.
그러나 정교하게 잘 시설 되고 단장 된 모습에 저으기 감탄하였다. 안내지를 받아보니, 1978년에 단장 되어 일반인들에게 개방 된다고 하였다.
내가 군목 입대로 충주를 떠난 것이 1975년이니, 새롭게 단장 된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선교사로 32년을 해외 나가 있었으니 더욱 잊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퇴 후 충주에 호암호숫가에 거쳐를 마련하고 호숫가를 날마다 거닐어 오고가면서, 호암예술관 앞의 "임경업 장군상" 을 보고 있으며, 그 때마다 충렬사가 늘 생각이 났고, 언젠가는 찾아 보아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설날을 맞아 찾아 보게 된 것이다. 진입로도 큰 길가에서 가까우며, 200m들어 서도록 포장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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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업 장군은 선조 27년(1594년) 충주 단월 달천강변 풍동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뛰어 났다. 광해군 10년(1618년), 무과에 급제한 후 함경도 갑산, 산수의 소농보추관으로 관직에 들어섰다. 이어서 가선대부에 올랐고, 방담첨사에 임명 되고(1625년) 낙안군수로 나갔다. 검산성 방어사(1631년)로 산성을 수축하였고, 정주목사가 되었을 때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인조11년(1633년) 다시 관직으로 나가 청북방어사와 영변부사를 겸하였다. 백마산성, 의주성을 수축하고, 명나라 반군을 토벌하는 국토방위의 공로를 세웠다.
임경업 장군은 평안도 병마 절도사 겸 안주목사 등 평안도 함경도 북방에서 요직을 두루 맡았고, 국토방위를 위하여 대외항전의 일선에서 큰 공헌과 명성을 남겼다. 그러니 장군은 내 고향 평남 검산에서도, 어머니의 고향 안주에서 산성을 수축하고 지킨분이시다.
장군은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진압하여 "진무원종공신 1등"에 서훈되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백마산성, 의주성등을 수축하여 국방강화 하셨고, 청나라에 대항하여 결사항전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청군은 의주를 우회하여 한성으로 진군하였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인조는 청태종 앞에 무릎 꿇고 굴욕적인 항복과 화의가 이루어졌다. 장군의 강화도 진군도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임경업 장군은 청에 포로가 되어 압송 되었고, 부인은 청에 압송에서 자결하였다 장군은 국내 모반사건에 연루 날조되어 조선으로 송환 되었고, 극심한 고문에 숨을 거두었다. 즉 장군의 혁혁한 공로와 위업에도 불구하고 친청 중앙관리들의 모함에 의하여 감옥에서 고문으로 억울한 일생을 마친 것이다.
그 후 숙종 23년(1697)에 임경업 장군의 공적이 인정되어, 왕명으로 충주 단월에 충렬사를 건립케 되었고 수처례 보수 되서 왔다. 1791년(영조3년)에는 왕의 친필로, "어제달천충렬사비"란 비석을 서웠다. 달천강변 풍동 고향에 안장 되었다.
영조 3년(1727년)부터는 봄 가을로 향제를 올려 왔으며, 1977년 3월 박정희 대통령이 충렬사를 성역화하도록 지시함에 따라 새롭게 시설단장공사를 시행하여 오늘날의 충렬사로 개방 되고, 풍동 산1번지에 묘역도 합장묘로 조성되어 있다.
충렬사 경내에는 임경업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장군의 유품들을 전시한 "유물관", 정조 15년 왕의 친필 비석인 "어제 달천 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와, 장군의 부인 완산 이씨의 충절을 기리는 "완산이씨정렬비각"(完山李氏貞烈碑閣)의 루각 2개가 나란히 있다.
또한 유물전시관에는 장군의 유상, 교지, 유필, 충렬사현판 등이 전시 되어 있다. 장군이 사용하던 호신용 단검인 추련도"가 전시 되어 있다.
그러나 전투에 사용하던 큰 칼, "용천검"은 일제강압시대에 일본사람들이 훔쳐가 없어졌고, 다만 칼에 쓴 장군의 시 한수만이 전해질 뿐이다.
광해군 10년(1618년), 25세가 되던 해에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때, 어느날 큰 칼을 소유케 되었는데, 즉석에서 '용천검(龍泉劍)'이라는 시 읊었다고 한다.
三尺龍泉萬卷書
皇天生我意何如
山東宰相山西將
彼丈夫兮 我丈夫兮
(석자의 용천검은 만권의 서적과 같다
하늘이 나를 냄은 어인 뜻인가
산동에 재상나고 산서에 장수난다는데
저들이 대장부면 나 또한 대장부가 아니냐)
유물전시관에 전시 되어 있는 임경업 장군의 추련도(林慶業 秋蓮刀)에 새겨져 있는 시가 전시 되어 있다.
時呼時來否再來
平生丈夫報國心
一生一死都在筵
三尺秋蓮磨十年
(때여 때는 한번 와서 다시 오지 않나니
한번 나서 한번 죽는 것은 바로 여기 있네
장부의 한평생 나라에 바친 마음
삼척 추련검을 십년이나 갈았네)
[참고:전홍식: 역사의 도시 충주의 발자취와 기억(좋은땅, 2021. 342~346쪽). 충주여행정보, "문화유산답사"]
또한 임경업 장군의 전기도 전해지고 있다. 작자·연대 미상의 고전소설로 전해져 오는, 임경업전(林慶業傳)은과 국문목판본·활자본으로 조선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의 일생을 작품화한 한글소설로서 ‘님장군전’·‘림경업전’ 등이 있다.
"님장군젼"은 판본으로는 목판본 3종과 활자본이 있다. 목판본은 모두 경판본 으로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27장본, 일본 도요문고[東洋文庫]에 소장된 21장본, 단국대학교 율곡기념도서관 나손문고(舊 金東旭 소장본)에 소장된 16장본이 있다.
활자본으로는 세창서관에서 간행된 "임경업전"이 있다. 목판본과 활자본은 전체적인 내용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으나, 활자본은 뒤에 이루어진 임경업의 연보를 참조하여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임경업전"은 정조의 명령에 따라 임경업에 관한 유문(遺文)·비문·행장·연보·사당봉안제문(祠堂奉安祭文)·현령록(顯靈錄) 등의 실기(實記)를 모아 1791년에 간행된 "임충민공실기"를 참고하고, 민간에서 구전되는 설화를 토대로 하여 창작된 것으로 보인다.
작자는 밝혀지지 않았으며, 작품연대 또한 확실하지 않다. 경판본 "님장군전" 끝에 김자점(金自點)을 처치하고 임경업의 집에 정문을 세우며, 장군의 고향인 달천에 서원을 세우고 장군의 화상을 모셔 제사지내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이와 관련한 사실 및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은 임경업이 1697년(숙종 23)에 신원복관되고, 1726년(영조 2)에 달천(達川)에 충렬사가 건축된 사실을 아울러 참조할 때, 이 작품은 1726년 이후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경업전(林慶業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