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악마 사이>
- 헬무트 틸리케 지음, 손성현 옮김, 복 있는 사람, 2022
1. 지난 여름 창천교회에서 함께 사역을 했던 손성현 목사님이 안식월을 얻어 3개월 간 학위를 받았던 독일과 주변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둘러보고 오신 것을 페이스북을 통해 본 적이 있다. 나도 2017년에 가족들과 48일간의 자동차유렵여행을 다녀오긴 했지만 신학과 문학과 관련한 유서 깊은 곳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다녀온 터라 목마름이 남아 있었는데, 이번 목사님의 여정을 눈으로 함께 여행하며 많은 배움을 얻었더랬다. 가끔씩 통화도 하고 카톡도 남기면서 목사님의 여정을 응원했었다. 손 목사님은 안식월 기간에 그동안 번역해온 독일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의 <신과 악마 사이>를 번역해 세상에 내놓으셨다. 바쁜 목회사역 중에서도 꾸준히 번역을 이어오시는 손 목사님의 번역서들은 언제나 큰 도전과 숙제를 주어온 터라 이번에도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책을 주문해 읽어 내려갔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독문과 출신답게 손 목사님의 번역은 언제나 매끄럽고 탁월하며 읽는 이로 하여금 책에 흠뻑 취하게 만든다.
2. <신과 악마 사이>는 1938년 나치가 세상을 전쟁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던 시절, 인간의 잔혹함과 절망적 현실을 경험하던 한 젊은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악마에게 받은 시험의 근본적 의미를 물으며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악마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바, 하나님의 뜻을 품고 이 땅에 보내진 인간의 삶은 낙관적이지 않다. 본의 아니게 시험은 우리에게 다가오며, 스스로 시험거리를 만들어 누군가에게 괴로움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시험을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시험이 주는 압도적 힘에 짓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시험의 늪에 허우적거릴 때가 많다. 시험을 벗어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도치 않은 절망적인 상황을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에서 맞닥뜨리곤 한다. 신학이 죄와 시험, 유혹의 문제에 시원한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라 믿지만 신학이 존재함에도, 우리의 삶은 지지부진함을 면치 못하고 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의 문제일까?
성서는 하나님과 악마의 전쟁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승리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철저히 패배한 모습으로도 등장한다. 하나님의 승리만을 이야기한다면 성서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후회, 하나님의 한숨, 하나님의 걱정, 하나님의 분노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뻔한 하나님의 승리의 메시지가 성서 도처에 있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는 여전히 시험의 한복판에 서 있다.
헬무트 틸리케는 그동안 우리가 이해해왔던 예수의 시험 이야기에 관한 뻔한 결론을 전복시킨다. 우선 그리스도와 악마가 대결하는 이 이야기를 우리들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는다. 예수의 시험은 곧 인류의 시험이 된다. 하여 예수의 시험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틸리케는 여기서 ‘시험’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포기하려는 마음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하나님에게서 벗어나고자 계속해서 기회를 엿보는 것,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품고 살아가는 것’(29쪽)이라고 설명한다. 시험의 본질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 무엇인 셈이다. 이런 시험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가온다. 그 중에 위험한 것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고, 또한 이런 분이셔야 한다”라는 나의 생각, 즉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다. 악마는 이런 인간의 욕망과 약점을 물고 늘어져 자기만의 하나님 우상을 만들도록 한다. 악마의 시험은 매우 정교하고 섬세할 뿐만 아니라 경건하기까지 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해와 상식, 종교적 심성을 통해서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균열을 일으킨다.
틸리케의 인간 이해는 ‘처음부터 의심하는 존재, 시험에 드는 존재’(37쪽)라는 데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이 본디 시험에 드는 존재라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창세기 3장.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는 뱀의 유혹에 따라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 악마가 의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 그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곧 시험인 셈이다.
틸리케는 이러한 시험이 예수께서 광야에서 고독 속에 있을 때 찾아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46쪽). 시험은 생의 우여곡절이 깃든 위험천만한 때에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질만 한 여건이 전혀 없는 곳에 찾아든다는 것이다. 고독은 외부적인 것이 배제된 오롯이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이다. 그렇기에 현대인들은 고독을 마주하기 싫어한다. 거기에서 우리의 삶의 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험이 고독 가운데 깃든다는 것은 외부적인 충격이나 사건을 통해 시험에 빠져들기보다는 수많은 악한 생각들이 갈마드는 마음 안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외부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시험이 시작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3. 첫 번째 시험 : 굶주림의 현실
광야의 깊은 고독 속에서 시험을 당하고 계신 예수를 통해 시험 앞에 선 인간의 실존을 본다. ‘우리와 똑같은’인간이었던 예수에게서 ‘굶주린 인간, 배고픔의 고통을 달래 줄 산더미 같은 빵을 바라보는 인간’을 본다. 그분 안에는 ‘성전 꼭대기를 바라보며 자신의 야망이 활짝 펼쳐지는 환상에 빠진 인간’이 있다. 그분 안에는 ‘이 세상의 지배자, 이 세상의 신이 되기를 갈망하는 인간, 바고 그 갈망 때문에 굶주리고 목마른 인간’이 있다(54쪽). 우리가 시험으로 흔들릴 때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함께 하신다.
첫 번째 시험인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시험은, 시험이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하나님과 우리의 결속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교리를 수긍하지 못하는 데서 오지 않고 먹고 사는 실제적인 문제들에서 시작된다(63쪽). 악마는 뜬구름 잡는 이론이나 질문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현실을 통해 예수에게 달려든다. 악마는 이렇게 속삭이며 예수에게 기적을 부추긴다. “굶주림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신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이 돌덩이를 빵으로 만들어 나누어 주어라” 틸리케는 악마가 예수를 유혹할 때 ‘하나님’이라는 사실의 토대 위에서 기적을 부추기는 것에 주목한다. 그의 말이다. “하나님이 그의 사악한 손아귀 안에서 하나의 전제(前提)가 되면, 사람들은 그 전제에서 결론을 도출하는데, 그 결론이란 언제나 지기에게 옳은 것이 된다”(78쪽) 악마의 유혹은 우리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전제한 다양한 질문들을 만들어 낸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좀더 구원받은 모습이어야 한다”, “만일 사랑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전쟁이나 자연재해, 암이나 정신병원 같은 것들은 없어야 한다.” , “만일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느 때나 어느 곳이나 악을 행하는 자와 피 흘리는 자와 양심 없는 자에게 벼락이 떨어져야 한다. 그렇다. 온 세상의 역사는 온 세상의 심판이어야 할 것이다...” 등등(79쪽). 하나님을 전제한 해법들이 교회 안팎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포장되어 유포되고 있다. 이는 실은 악마의 속삭임인 것이다.
지독한 굶주림의 현실에서 예수는“하나님이 계시다면 마땅히 .... 해야 한다”는 악마의 교묘한 속삭임에 대해 “빵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선언하신다. 굶주림의 현실 가운데 빵이 문제를 해결할 것 같지만, 그렇게 될 때 빵이 곧 하나님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런 도식을 예수는 철저히 거부하신다. 예수는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수단에 의존하는 것을 거부하신다. 우리가 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빵과 생명을 약속하시고 가을들판에 황금물결이 일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신다(90쪽). 우리가 이 대목에서 예수에게 배우는 것은 그분은 빵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신다는 사실이다. 빵이 있든 없든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신다.
4. 두 번째 시험 : 자기과시의 부추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두 번째 시험에서도 악마는 경건한 몸짓과 거룩한 언어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공명심을 자극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자신의 손으로 주무르려고 한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권능의 하나님을 악마는 인간들에게 계속해서 속삭인다. 악마가 말하는 권능의 신은 인간의 입장에서는 ‘편리의 신’이다(101쪽). 만일 악마의 속삭임대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하나님께서 천사로 하여금 예수를 떠받들게 한다면, 악마는 하나님의 의지까지도 조종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예수께서는 이런 매카니즘을 꿰뚫어보신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하신다. 이런 악마의 속삭임은 우리 곁에서 흔히 들을 수 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악마는 하나님의 가면을 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며 우리에게 명령한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악마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경건, 예배, 종교, 기적, 표징 등이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는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하나님의 것과 악마적인 것의 차이는 얼마나 근소한가! 우린 하나님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전제로 하여 우리로 하여금 양자택일하게 만드는 악마의 교묘한 술수에 우린 너무나 쉽게 넘어가 버린다. 이런 틸리케의 통찰은 하나님의 이름을 도깨비방망이 마냥 생각하는 우리들의 그릇된 신앙에 죽비가 되어 내리친다. 하나님 언약에 대한 철두철미한 신뢰와 하나님의 것과 악마적인 것을 분별하는 세심한 분별력이 우리들에게 요구되고 있다.
5. 세 번째 시험 : 예수의 이 세상 나라
마지막 ‘네가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세상을 줄 것이다’라는 시험은 악마와 하나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싸움이다. 그러나 이 비장한 싸움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강한 용사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으셨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약하디 약한 모습으로,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이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음을 의미한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오시어 시험 받으시고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와의 친밀한 사귐의 여지를 남겨주셨다. 십자가는 그분이 우리를 향해, 우리와 함께 걸어간 사랑의 길 맨 마지막의 자리였다. 틸리케는 이를 ‘하나님의 무방비의 은혜’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권능’이 아닌 ‘무방비’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145쪽). 권능을 부추기는 악마의 속삭임에 무방비의 주님은 묵직한 한 마디를 건네신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여우에게도 있는 거처 하나 없던 분, 들짐승보다도 가난했던 그분’은 실은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시다. 인간들은 세상의 권력,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아무런 거침이 없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님 전능자의 모습이 아닌 박해받는 자들, 헐벗은 자들, 벌거벗은 자들, 굶주린 자들, 목마른 자들,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 불에 태워진 자들, 비천하고 고통받는 자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한없는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능이 아닌 이러한 사랑으로 구축된다.
6.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는 한참을 멍하니 있어야만 했다. 큰 울림의 여파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그분의 시험 받으심은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에필로그에 남긴 틸리케의 마지막 말을 남기며 긴 여운이 남아 있는 이 책을 덮는다.
“우리는 이중의 위로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이시기에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결코 외롭지 않다. 사탄이 만들어 낸 가장 깊은 시험에 우리가 떨어져도 그분은 거기서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신다. 또한 그분은 모든 죄를 초월하여 하늘의 순결함 속에 계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그분께 우리를 시험에서 보호해 달라고 간구할 수 있다.”
“예수의 평화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는 평화다. 이 평화는 두 가지 확신에 기초한 평화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일의 주님이시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악마 사이의 줄다리기, 곧 시험으로 마주하는 모든 인간적인 사건들 속에 나타난 깊은 고통까지 다스리는 주님이시라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확신은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건, 그런 깊은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다.”
* 웹진 평상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