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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신묘세 자춘조하 불우 종불득파 천택구갈 민심유작 / 김안국
辛卯歲 自春徂夏 不雨 種不得播 川澤俱渴 悶甚有作 金安國
杲日朝朝出(고일조조출) 밝은 해는 아침마다 떠오르고
遮雲不作霖(차운부작림) 구름은 끼나 비가 오지 않네
過夏何所用(과하하소용) 여름이 지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堪笑野人心(감소야인심) 촌사람의 마음이 웃을 만하구나
〈감상〉
이 시는 신묘년(1531) 봄부터 여름까지 비가 오지 않아 곡식을 뿌릴 수 없고 시냇물이나 연못이 모두 말라 버려 근심이 심하여 지은 것으로, 김안국의 애민의식(愛民意識)을 엿볼 수 있는 시이다.
봄부터 여름이 되기까지 밝은 해는 아침마다 떠올라 맑은 날이 계속되니 비 올 기미는 안 보이고, 하늘에 구름은 끼지만 비가 오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어 파종(播種)도 못 하고 있다. 여름이 지나서 비가 온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농부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허탈한 웃음이 나올 만하다.
그의 농민에 대한 이러한 의식은 『병진정사록』에도 간략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모재는 성품이 순일하고 부지런하며 상세하고 치밀하여 만약 방아를 찧을 때면 싸라기와 쌀겨도 함께 거두어 저장하였다가 춘궁기(春窮期)에 굶주린 백성을 먹이도록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하늘이 물질을 낼 때에 모두 쓰일 곳이 있도록 마련하였으니, 마구 없애 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사람들이 혹시 비방하면 웃으며 말하기를, ‘범인(凡人)은 마음이 거칠고 성인은 마음이 세밀하니라.’ 하였다
(慕齋性精謹詳密(모재성정근상밀) 如舂杵則碎米細糠(여용저칙쇄미세강) 幷收藏之(병수장지) 以賑春飢(이진춘기) 嘗曰(상왈) 天之生物(천지생물) 莫非有用(막비유용) 暴殄不祥也(폭진불상야) 人或譏之(인혹기지) 笑曰(소왈) 常人心麤(상인심추) 聖人心細(성인심세)).”
〈주석〉
〖徂〗 가다 조, 〖播〗 뿌리다 파, 〖杲〗 밝다 고, 〖遮〗 가리다 차, 〖霖〗 장마 림
사월이십육일 서동궁이어소직사벽 / 이행
四月二十六日 書東宮移御所直舍壁 李荇
衰年奔走病如期(쇠년분주병여기) 분주한 노년에 기약한 듯 병이 찾아드는데
春興無多不到詩(춘흥무다부도시) 봄 흥이 많지 않아 시를 짓지 않노라
睡起忽驚花事了(수기홀경화사료) 잠 깨자 봄이 다 저무는 것에 갑자기 놀라노니
一番微雨落薔薇(일번미우락장미) 한 차례 가랑비에 장미꽃이 져 버렸네
〈감상〉
이 시는 1523년 의정부 우찬성으로 있을 때인 4월 26일 동궁 이어소의 숙직하는 방 벽에 쓴 시이다.
노년에 이런저런 일들로 바쁜데 병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 그래서 봄이 와도 흥이 많이 나지 않아 시를 짓지 못하고 있다. 이어소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니 놀랍게도 어느새 봄빛이 저물어 한 차례 보슬비에 장미꽃이 져 버렸다.
화려하고 낙관적이며 진취적이기보다는 사화(士禍)를 겪은 탓인지 우울하고 비관적이며 인생의 슬픔이 드러나 있다. 앞서 보았던 성현(成俔)의 시와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행(李荇)은 김만중(金萬重)의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본조의 시체는 네다섯 번 변했을 뿐만 아니다. 국초에는 고려의 남은 기풍을 이어 오로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성종, 중종 조에 이르렀으니, 오직 이행(李荇)이 대성하였다. 중간에 황산곡(黃山谷)의 시를 참작하여 시를 지었으니, 박은(朴誾)의 재능은 실로 삼백 년 시사(詩史)에서 최고이다. 또 변하여 황산곡과 진사도(陳師道)를 오로지 배웠는데, 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황정욱(黃廷彧)이 솥발처럼 우뚝 일어났다. 또 변하여 당풍(唐風)의 바름으로 돌아갔으니,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이 순정한 이들이다.
대저 소동파(蘇東坡)를 배워 잘못되면 왕왕 군더더기가 있는데다 진부하여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강서시파(江西詩派)를 배운 데서 잘못되면 더욱 비틀고 천착하게 되어 염증을 낼 만하다
(本朝詩體(본조시체) 不啻四五變(불시사오변) 國初承勝國之緖(국초승승국지서) 純學東坡(순학동파) 以迄於宣靖(이흘어선정) 惟容齋稱大成焉(유용재칭대성언) 中間參以豫章(중간삼이예장) 則翠軒之才(칙취헌지재) 實三百年之一人(실삼백년지일인) 又變而專攻黃陳(우변이전공황진) 則湖蘇芝(칙호소지) 鼎足雄峙(정족웅치) 又變而反正於唐(우변이반정어당) 則崔白李(칙최백이) 其粹然者也(기수연자야) 夫學眉山而失之(부학미산이실지) 往往冗陳(왕왕용진) 不滿人意(불만인의) 江西之弊(강서지폐) 尤拗拙可厭(우요졸가염)).”
라고 언급한 것처럼, 송풍(宋風)의 영향을 받아 소동파(蘇東坡)에 뛰어났던 시인이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용재 이행은 화평하고 순숙한 시를 지어서 넉넉하게 신경(神境)에 들어갔다. 허균은 용재를 조선조 제일 대가라고 했다(李容齋荇爲詩和平純熟(이용재행위시화평순숙) 優入神境(우입신경) 許筠稱爲國士第一(허균칭위국사제일)).”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용재집(容齋集)』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문장이 있다. 그러나 체격(體格)이나 운치(韻致)는 용재가 택당보다 낫다(容齋集(용재집) 予所最好(여소최호) 繼此而有澤堂文章(계차이유택당문장) 然體格韻致(연체격운치) 容勝於澤(용승어탁)).”라 하였다.
〈주석〉
〖東宮(동궁)〗 태자(太子)가 거처하는 궁. 〖移御所(이어소)〗 임금이 자리를 옮겨서 거처하는 곳. 〖直〗 번들다 직, 〖睡〗 잠 수, 〖番〗 차례 번
각주
1 이행(李荇, 1478, 성종 9~1534, 중종 29): 박은(朴誾)과 함께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라고 불렸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택지(擇之), 호는 용재(容齋)·창택어수(滄澤漁叟)·청학도인(靑鶴道人). 김종직의 제자인 이의무(李宜茂)의 아들이다. 1495년 증광문과에 급제한 뒤, 권지승문원부정자를 거쳐 검열·전적을 역임했고, 『성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1504년 응교로 있을 때 폐비 윤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었고,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목숨을 잃을 뻔하다가 다행히 살아나 거제도로 가서 염소를 치는 노비가 되어 위리안치 된 생활을 했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교리에 등용, 대사간·대사성을 거쳐 대사헌·대제학·공조판서·이조판서·우의정 등 고위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펴내는 데 참여했고, 1531년 김안로(金安老)를 논박하여 좌천된 뒤 이듬해 함종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시는 허균(許筠) 등에 의해 매우 높게 평가되었다. 당시(唐詩)의 전통에서 벗어나 기발한 착상과 참신한 표현을 강조하는 기교적인 시를 써서 새로운 시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표현의 격조가 높아진 반면 폭넓은 경험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은 없었다. 저서로는 『용재집(容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定)이고, 뒤에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차중열운 / 이행
次仲說韻 李荇
其三(기삼)
佳節昏昏尙掩關(가절혼혼상엄관) 좋은 계절 저무는데 여전히 문 닫고 지내노니
不堪孤坐背南山(불감고좌배남산) 남산 등지고 차마 홀로 앉았기 어려워라
閑愁剛被詩情惱(한수강피시정뇌) 한가한 시름은 바야흐로 시흥에 몹시 시달리고
病眼微分日影寒(병안미분일영한) 병든 눈은 찬 햇살을 겨우 알아보겠네
止酒更當嚴舊律(지주갱당엄구률) 술 끊자니 옛 맹세 더욱 엄하고
對花難復作春顔(대화난부작춘안) 꽃을 보고도 다시 봄 얼굴빛 짓기 어렵네
百年生死誰知己(백년생사수지기) 인생 백 년 삶과 죽음에 누가 지기인가?
回首西風淚獨潸(회수서풍루독산) 가을바람에 고개 돌리며 홀로 눈물 흘린다
〈감상〉
이 시는 중열 박은(朴誾)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남산의 푸른빛에 젖는다는 ‘읍취헌(挹翠軒)’에 칩거하고 있는 박은(朴誾)은 좋은 계절인 가을이 저물어 가는데 아직도 대문을 닫아걸고서 남산을 등지고 홀로 앉아 있다. 이행(李荇)도 한가로운 시름으로 시를 짓고는 있는데 눈병이 나서 햇살조차 희미하다. 눈병이 나서 술을 마실 수 없지만, 그렇다고 술을 끊자니 술 마시기로 한 약조(約條)가 엄하여 한 잔 들이킨다. 술을 마시고 국화꽃을 보면 기분이 봄을 대하는 얼굴처럼 좋아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다. 백 년을 사는 인생인데 누가 나를 진정으로 알아줄 지기(知己)인가? 그 지기(知己)가 없어 가을바람에 홀로 눈물 흘리고 있자니, 지기(知己)를 만나면 마음이 풀어질 것도 같다.
이처럼 송시(宋詩)는 머리로 써서 사변적(思辨的)이고 설리적(說理的)이며 고전적(古典的) 이성적(理性的) 취향을 지니고 있다. 신경준(申景濬)의 「시칙(詩則)」에,
“당나라 사람은 광경을 즐겨 서술한다. 그러므로 그 시에는 영묘가 많다. 송나라 사람은 의론을 세우기를 즐긴다. 그러므로 그 시에는 포진이 많다. 무릇 광경을 서술함은 국풍의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상당히 참되고 두터운 맛이 적다. 의론을 세움은 소아(小雅)·대아(大雅)의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니, 생각의 자취가 완전히 드러나 있다.
모두 삼백 편의 나머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는데, 삼백 편과 견주어 보면 또한 차이가 많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당인은 시를 가지고 시를 삼았고, 송인은 문을 가지고 시를 삼았다고 여겨 당시가 송시보다 훨씬 뛰어나고 송시는 당시보다 훨씬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당시는 영묘가 많고 송시는 포진이 많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시가 당시만 못한 것은 바로 기격(氣格)이 모두 밑도는 까닭이지, 포진이 본래 영묘만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唐人喜述光景(당인희술광경) 故其詩多影描(고기시다영묘) 宋人喜立議論(송인희립의론) 故其詩多鋪陳(고기시다포진) 大抵述光景(대저술광경) 出於國風之餘(출어국풍지여) 而頗小眞厚之味(이파소진후지미) 立議論(입의론) 出於兩雅之餘(출어량아지여) 而全露勘斷之跡(이전로감단지적) 俱未始不出於三百篇之餘(구미시불출어삼백편지여) 而其視三百篇(이기시삼백편) 亦遠矣(역원의) 世之人皆以爲唐人以詩爲詩(세지인개이위당인이시위시) 宋人以文爲詩(송인이문위시) 唐固勝於宋(당고승어송) 宋固遜於唐(송고손어당) 世以唐詩多影描(세이당시다영묘) 宋詩多鋪陳故也(송시다포진고야) 然而宋之不如唐(연이송지불여당) 是因氣格俱下之致也(시인기격구하지치야) 非由於鋪陳素不如影描而然也(비유어포진소불여영묘이연야)).”
라 하여, 당시(唐詩)는 영묘(影描, 그림자를 묘사함), 송시(宋詩)는 포진(鋪陳, 사실 그대로 진술함)이 많다고 말하고 있다.
〈주석〉
〖仲說(중열)〗 박은(朴誾)의 자(字). 〖剛〗 바야흐로 강, 〖更〗 더욱 갱, 〖潸〗 눈물 흐르다 산
제천마록후 / 이행
題天磨錄後 李荇
卷裏天磨色(권리천마색) 책 속에 천마산 빛이
依依尙眼開(의의상안개) 어렴풋이 여전히 눈앞에 열리네
斯人今已矣(사인금이의) 이 사람 지금 이미 가고 없으니
古道日悠哉(고도일유재) 옛길은 날로 아득해지네
細雨靈通寺(세우령통사) 영통사에는 가랑비가 내리고
斜陽滿月臺(사양만월대) 만월대에는 석양이 비끼었네
死生曾契闊(사생증계활) 죽고 삶에 일찍이 서로 약속했는데
衰白獨徘徊(쇠백독배회) 쇠약한 백발의 몸으로 홀로 배회하노라
〈감상〉
이 시는 박은(朴誾)이 죽고 난 후 함께 천마산을 올랐던 기록인 「천마록」 뒤에 쓴 회고시(懷古詩)이다.
「천마록」을 꺼내 읽어 보니, 책 속에 천마산에서 함께 노닐던 일들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박은은 죽고 없어 함께 걷던 옛길이 나날이 아득해진다. 가랑비 내리는 영통사, 석양이 비껴 있는 만월대를 함께 거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죽고 살자고 약속했는데, 박은은 죽고 쇠약한 백발의 자신만이 홀로 살아남아 배회하고 있다.
홍만종은 『소화시평』에서 위 시와 관련하여 시(詩)에 지명(地名)을 사용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한다. 중국의 지명은 모두 문자로서 시에 들어가면 아름답다. 예를 들면, ‘봄풀 너머 구강이 흐르고, 저녁 배 앞에 삼협이 놓여 있네(진도(陳陶)의 「분성증별(湓城贈別)」)’, ‘물기운은 운몽택을 찌고, 파도는 악양루를 흔드네(맹호연(孟浩然)의 「임동정(臨洞庭)」)’는 지명에 단지 몇 자를 더했을 뿐인데도 시가 빛을 낸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는 지명이 모두 방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용재 이행의 「천마록」에 ······의 구절이나, 소재 노수신의 「한강」에 ‘저자도(뚝섬)에 봄이 깊어 가고, 제천정(보광동 언덕 한강변에 있던 정자 이름)에 달 오르네’가 있는데, 아름답지 않는가? 시의 아름다움은 오직 단련을 오묘하게 하는 데 있을 뿐이지 [중국 지명과 우리나라 지명의 차이에 있지 않다]
(世謂中國地名(세위중국지명) 皆文字入詩便佳(개문자입시편가) 如九江春草外(여구강춘초외) 三峽暮帆前(삼협모범전) 氣蒸雲夢澤(기증운몽택) 波撼岳陽樓等句(파감악양루등구) 只加數字(지가수자) 而能生色(이능생색) 我東方皆以方言成地名(아동방개이방언성지명) 不合於詩云(불합어시운) 余以爲不然(여이위불연) 李容齋天磨錄詩(이용재천마록시) 細雨靈通寺(세우령통사) 斜陽滿月臺(사양만월대) 蘇齋漢江詩云(소재한강시운) 春深楮子島(춘심저자도) 月出濟川亭詩(월출제천정시) 豈不佳(기불가) 惟在鑪錘之妙而已(유재로추지묘이이)).”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의 「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이행(李荇)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詩)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이몽양(康海·李夢陽, 명(明)의 전칠자(前七子)로 시문(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文)은 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詩)는 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
(吾東僻在海隅(오동벽재해우) 唐以上文獻邈如(당이상문헌막여) 雖乙支(수을지), 眞德之詩(진덕지시) 彙在史家(휘재사가)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불감신기과출어기수야) 及羅季(급라계) 孤雲學士始大厥譽(고운학사시대궐예) 以今觀之(이금관지) 文菲以萎(문비이위) 詩粗以弱(시조이약) 使在許鄭間(사재허정간) 亦形其醜(역형기추) 乃欲使盛唐爭其工耶(내욕사성당쟁기공야) 麗代知常(여대지상) 足窺一斑(족규일반) 亦晩李中穠麗者(역만이중농려자) 仁老奎報(인로규보) 或淸或奇(혹청혹기) 陳澕洪侃(진화홍간) 亦腴艶(역유염) 而俱不出長公度內耳(이구불출장공도내이) 及至益齋倡始(급지익재창시) 稼牧繼躅(가목계촉) 圃陶惕(포도척) 爲季葉名家(위계엽명가) 逮國初(체국초) 三峯陽村(삼봉양촌) 獨擅其名(독천기명) 文章至是(문장지시) 始可稱達(시가칭달) 追琢炳烺(추탁병랑) 足曰丕變(족왈비변) 而中興之功(이중흥지공) 文靖爲鉅焉(문정위거언) 中間金文簡得圃(중간김문간득포), 陽之緖(양지서) 人謂大家(인위대가) 只恨文竅之透不高(지한문규지투불고) 其後容齋相詩入神(기후용재상시입신) 申鄭亦瞠乎其後(신정역당호기후) 蘇相又力振之(소상우력진지) 玆數公(자수공) 使生中國(사생중국) 則詎盡下於康李二公乎(칙거진하어강이이공호) 當今之業(당금지업) 文推崔東皐(문추최동고) 詩推李益之(시추이익지) 俱是千年以來絶調(구시천년이래절조) 而儕類中汝章甚婉亮(이제류중여장심완량) 子敏甚淵伉(자민심연항) 此外則不能知也(차외칙불능지야)).”
〈주석〉
〖天磨錄(천마록)〗 이행(李荇)과 박은(朴誾)이 함께 천마산을 유람하면서 지은 글. 〖依依(의의)〗 흐릿한 모양.
〖悠〗 아득하다 유, 〖契闊(계활)〗 서로 약속함.
독취헌시 용장호남구시운 / 이행
讀翠軒詩 用張湖南舊詩韻 李荇
挹翠高軒久無主(읍취고헌구무주) 읍취헌 높은 집에 오래 주인이 없어
屋樑明月想容姿(옥량명월상용자) 지붕 위 밝은 달에 그 모습 그립네
自從湖海風流盡(자종호해풍류진) 이로부터 강산에 풍류가 사라졌으니
何處人間更有詩(하처인간갱유시) 인간 세상 어느 곳에서 다시 시가 있겠는가?
〈감상〉
이 시는 읍취헌의 시를 읽고 장호남의 옛 시에 차운하여 지은 것으로, 죽은 박은(朴誾)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박은(朴誾)이 거처했던 읍취헌은 오래 주인이 없는 채 비어 있다. 지붕 위에 뜬 밝은 달을 보니, 그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박은이 죽은 뒤로부터는 강산의 뛰어난 경치를 보아도 풍류의 흥이 일지 않으니, 인간이 사는 이 세상 어느 곳엔들 진정한 시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이행(李荇)을 포함한 조선의 시사(詩史)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시(詩)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이행(李荇)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충암(冲庵) 김정(金淨)·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란히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조선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수신(盧守愼)은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정욱(黃廷彧)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달(李達)이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필(權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
(我朝詩(아조시) 至中廟朝大成(지중묘조대성) 以容齋相倡始(이용재상창시) 而朴訥齋祥(이박눌재상), 申企齋光漢金冲庵淨鄭湖陰士龍(신기재광한김충암정정호음사룡) 竝生一世(병생일세) 炳烺鏗鏘(병랑갱장) 足稱千古也(족칭천고야) 我朝詩(아조시) 至宣廟朝大備(지선묘조대비) 盧蘇齋得杜法(노소재득두법) 而黃芝川代興(이황지천대흥) 崔白法唐而李益之闡其流(최백법당이이익지천기류) 吾亡兄歌行似太白(오망형가행사태백) 姊氏詩恰入盛唐(자씨시흡입성당) 其後權汝章晩出(기후권여장만출) 力追前賢(역추전현) 可與容齋相肩隨之(가여용재상견수지) 猗歟盛哉(의여성재)).”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에는 이행(李荇)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 시로는 이용재(李容齋)를 첫째로 함이 마땅하다. 그의 시풍은 침착하고 화평하며 아담하고 순숙(純熟)하다. 오언고시(五言古詩)는 두보(杜甫)로 들어가 진후산(陳後山)으로 나와 고고(高古)·간절(簡切)하여 글이나 말로는 찬양할 수가 없다. 내가 평소에 즐겨 읊던 절구 한 수로, ‘평생에 사귄 벗 모두 늙어 죽어 가고, 흰머리 마주 보니 그림자와 몸뚱이라.
때마침 높은 누각에 달조차 밝은 밤엔, 애처로운 피리소리 어찌 차마 들으리’는 감개가 무량하여 이것을 읽노라면 가슴이 메어진다
(我國詩(아국시) 當以李容齋爲第一(당이이용재위제일) 沈厚和平(침후화평) 澹雅純熟(담아순숙) 其五言古詩(기오언고시) 入杜出陳(입두출진) 高古簡切(고고간절) 有非筆舌所可讚揚(유비필설소가찬양) 吾平生所喜詠一絶(오평생소희영일절) 平生交舊盡凋零(평생교구진조령) 白髮相看影與形(백발상간영여형) 正是高樓明月夜(정시고루명월야) 笛聲凄斷不堪聽(적성처단불감청) 無限感慨(무한감개) 讀之愴然(독지창연)).”
〈주석〉
〖屋樑明月(옥량명월)〗 당(唐)나라 두보(杜甫)의 「몽이백(夢李白)」 시(詩)에, “낙월만옥량(落月滿屋梁),유의조안색(猶疑照顔色)”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낙월옥량(落月屋梁)’은 뒤에 고인(故人)에 대한 회념(懷念)을 의미하게 됨.
능성루수중 / 조광조
綾城累囚中 趙光祖
誰憐身似傷弓鳥(수련신사상궁조) 화살 맞아 다친 새와 같은 신세 누가 불쌍히 여기랴
自笑心同失馬翁(자소심동실마옹) 말 잃은 늙은이 같은 마음 스스로 우습다
猿鶴正嗔吾不返(원학정진오불반) 원숭이와 학은 내가 돌아보지 않는다고 꾸짖겠지만
豈知難出覆盆中(기지난출복분중) 엎어진 동이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줄 어찌 알겠나?
〈감상〉
이 시는 능주에 귀양 와 죄인의 신세가 된 것에 대해 노래한 것이다.
화살에 맞아 다친 새와 같은 자신의 신세를 누가 불쌍히 여기겠는가? 말 잃은 새옹(塞翁)처럼 재앙이 복으로 바뀌는 것을 바라는 자신의 마음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다. 원숭이와 학과 같은 은군자(隱君子)는 내게 은거(隱居)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꾸짖겠지만, 엎어진 동이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줄 어찌 알겠나?
정조(正祖)는 『홍재전서(弘齋全書)』 「일득록(日得錄)」에서 조광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는 불세출의 현인으로 일찍이 임금의 인정을 받아서 그 도를 행할 수 있었다.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을 때에는 남녀가 길을 달리할 정도로 한 시대가 영향을 받았다. 다만 권력을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불행히 화를 입었기 때문에 그의 사업을 논할 때면 오히려 미진했다는 탄식이 있게 된다
(靜菴以不世出之賢(정암이불세출지현) 早被知遇(조피지우) 得行其道(득행기도) 爲都憲也(위도헌야) 男女異路(남녀이로) 一世風動(일세풍동) 而但柄用未久(이단병용미구) 不幸罹禍(불행리화) 故論其事業(고론기사업) 猶有未盡之歎(유유미진지탄)).”
“우리나라의 유자(儒者) 중에 조정암(趙靜庵)과 이율곡(李栗谷)은 타고난 자질이 고명하고 뛰어나 이학(理學)과 경륜에 있어 원래부터 대현(大賢)인데다 왕을 보좌하는 재능까지 겸하였다
(東方儒者(동방유자) 靜菴栗谷(정암율곡) 天姿高明豪逸(천자고명호일) 理學經綸(이학경륜) 自是大賢(자시대현) 兼王佐之才(겸왕좌지재)).”
홍만종은 이 시에 대해 『소화시평』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이 기묘 당적(기묘사화에 연루된 사인(士人))에 연좌되어 능성에 매를 맞고 유배되었는데, 「누수중」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말이 극히 처절하다(靜庵先生坐己卯黨禍(정암선생좌기묘당화) 杖配綾城(장배능성) 累囚中有詩一絶曰(누수중유시일절왈) ······詞極凄切(사극처절)).”라 평하고 있다.
〈주석〉
〖傷弓鳥(상궁조)〗 화살에 맞은 새로, 재앙이나 근심을 겪고서 마음에 두려움이 남아 있는 상태를 비유함(『전국책(戰國策)』 「초책사(楚策四)」). 〖失馬翁(실마옹)〗 =실마새옹(失馬塞翁), 화(禍)로 말미암아 복(福)을 얻음.
〖猿鶴(원학)〗 원숭이와 학으로, 은둔한 선비.〖嗔〗 성내다 진, 〖覆盆(복분)〗 엎어진 동이로, 진(晉) 갈홍(葛洪)의 『포박자(抱朴子)』 「변문(辨問)」에 “시책삼광부조복분지내야(是責三光不照覆盆之內也)”라고 한 데서, 밝은 빛도 엎어진 동이 아래를 비출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뒤에는 어두운 사회나 하소연 할 곳이 없는 억울함의 비유로 쓰임.
각주
1 조광조(趙光祖, 1482, 성종 13~1519, 중종 14):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士林派)의 영수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처형되면서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당하게 되자, 조광조도 유배당하는 몸이 되었다. 정계의 현실을 몸소 겪은 그는 유배지에서 학업에만 전념했다.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勳舊)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임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