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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뉘우침만으로 부족합니다. / 마 27:1-10
명절 기간 코로나19 전염병 확산세가 확 줄었는데, 그 이유가 명절을 지내면서 검사자가 줄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명절 다음날부터 3만 명대 확진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어제 발표된 신규 확진자, 금요일 확진된 수가 23,612명이라고 합니다. 전라북도는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3명 중 2명은 확진 경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젠 지금 우리 모임 중에 확진자가 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 함께 조심하고는 있지만, 우리 중 누군가 확진되면, 검사를 받고 자가격리를 하는 등의 곤란한 처지는 불가피합니다. 아무쪼록 이 어려움이 잘 또 빨리 지나가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19가 그냥 좀 답답하고 우울한 정도라면 시간이 약이겠지만, 사실 우리 주위에는 날마다 실패와 절망을 겪어내고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은 죽음과 같은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이들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실패가 있어도 삶은 계속됩니다.” 살다보면 누구나 ‘망했다!’ 이런 생각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망해도 삶은 계속됩니다. 인생이 만나는 실패와 좌절은 아픈 것이지만, 결코 끝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생이 만나는 실패와 절망이, 결코 끝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심지어 죽음조차 우리에게 끝이 아님은, 우리는 영생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 10월 목사 안수식이 세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교단의 이 안수식에서는 일명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씨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985년 9월 김근태를 당시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고 가, 이십 여일간 물고문과 전기고문, 구타 등으로 잔인하게 고문하여, 그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을 앓다가 사망하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반신불수에 이르게 한 것을 비롯한, 여러 건의 고문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수배를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7년의 교도소 복역 중 통신으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회개했다고 하여, 목사안수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된 후 언론인터뷰와 간증 등을 통해, ‘자신은 고문 기술자가 아니라 심문 기술자이며, 고문은 하나의 예술이었다, 고문은 곧 애국이었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이 할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자신의 과거를 합리화하는 주장을 반복하였습니다. 그의 발언으로 사회적 공분이 일자, 그에게 안수를 준 합동개혁 측은 2012년 징계위원회를 열었습니다. 거기서 ‘다른 사람들보다 수백 배 더 조심하고 낮아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함에도, 지난 행위를 미화하면서, 또 다시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밝히며, 이근안 씨의 목사직을 면직, 제명 처리하였습니다. 그는 목사직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하며 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한국교회는 또 다시 사회로부터 원색적인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다른 건 놔두고라도, 회개도 제대로 안 한 사람을 덜컥 목사로 세웠으니, 열 번 비난 받아 싸다. 교회 스스로가 제 무덤을 판 격이다. 아니 어떻게 회개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을, 목사로 세울 생각을 했는지, 뇌구조가 의심스러울 뿐이다.’
우리가 잘못 사용하는 용어 중에 하나가 “회개”입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다움사전에 보면, ‘죄나 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고쳐먹음, 삶 속에서 저지른 죄를 깨달아 반성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풀이 되어 있습니다. 한자사전에 봐도 뜻이 동일하게 풀이 되어 있습니다. 회개는 한자로 ‘뉘우칠 회(悔)’에 ‘고칠 개(改)’자를 씁니다. 자구적인 풀이를 해도, 뉘우치고 고침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뉘우치기만 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온전한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뉘우친 것도 부분적인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분이 “오늘 예배 때 설교을 듣고 많이 회개했습니다.” 했다면, 그건 부분적인 회개이지 온전한 회개는 아닙니다. 온전한 회개는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잘못을 고치는 것입니다. 사실 설교를 들으며 마음을 고쳐먹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그냥 지나갑니다. 고개만 몇 번 끄덕이고 지나갑니다. 눈 지그시 감고 있다 보면 끝나고 맙니다. 좀 졸다가 정신차려보면 어느 새 마치고 기도합니다. 설교를 들으며 잘못을 인정하고 가슴을 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이게 우리 예배의 현실입니다. 하긴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이 소수라도 있다면 그게 어딥니까? 그럼 마음을 고쳐먹은 사람이, 맘먹은 바를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정말 극소수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뉘우침과 회개의 차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뉘우침은 죄보다 죄에 대한 징계를 더 무서워하고, 회개는 죄에 대한 징계보다 죄 자체를 더 무서워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죄보다 죄에 대한 징계를 더 무서워합니까? 죄에 대한 징계보다 죄 자체를 더 무서워합니까? 뉘우침은 죄를 깨닫고 가책이 되어 자기 속으로 들어가고, 회개는 죄를 깨닫고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죄를 깨닫고 가책이 되어 자기 속으로 들어갑니까? 죄를 깨닫고 부끄럽지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까? 뉘우침은 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피하려고 하고, 회개는 죄의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죄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피하려고 합니까? 죄의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려고 합니까?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셨습니다. 처음엔 가룟 유다도 그 자리에 참석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여기에 자신을 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그에게 망신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제자 공동체에서 매장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사랑하셨기에 마지막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가룟 유다는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고, 밖으로 뛰쳐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열 한 제자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려 가셨습니다. 마 26:37-38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좀체 드러내지 않았던 심경을, 세 제자 앞에서 밝히셨습니다. 자신 앞에 놓인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자신이 아니면,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아셨습니다. 그랬기에 목숨을 연장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다고 주님이 십자가만을 위해서 기도했을 거 같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 그 집중력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자기를 팔러간 가룟 유다가 눈에 아른 거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를 위한 기도도 건너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가룟 유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그는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애쓰고 힘써서 기도하는 시간에,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께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파멸의 길로 몰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자신을 잡으려고 오는 일행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들은, 예수님을 확실하게 잡기 위해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왔습니다. 아무리 횃불을 들고 오긴 했지만, 혹시라도 엉뚱한 사람을 잡을 수도 있기에, 현장에서 군호를 짰습니다.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그리고는 태연하게 예수님께 다가가 인사를 하며 입을 맞췄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예수님은 그의 거짓된 인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걸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영원한 결별이었습니다. 유다는 한 때는 재정을 맡았던 제자였습니다. 넉넉한 살림살이라면 재정도 맡을만하지만, 제자 공동체의 재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재무에 밝은 전직 세리인 마태가 있었음에도, 유다에게 재정을 맡기신 것을 보면, 그 역시 계산에 능하고 관리능력도 뛰어났던 모양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절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예수님은 체포되어 대제사장에게로 끌려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그 새벽에 그 바쁜 양반들이, 예수님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모였습니다. 참 대단한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살리는 것보다는 죽이려고 하는 것에, 더 열정이 있는 거 같습니다. 누구 살리려고 하는데 모이라고 했다면, 그 새벽에 그들이 모였을까 싶습니다. 어떻게든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합니다. 어떻게든 사람을 살리는데 앞장 서야 합니다. 그게 내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데 앞장 선 사람은, 자기에게도 죽는 길이 열립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해놓고, 자기는 기쁨의 눈물 흘리는 것을 기대해선 안 됩니다.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라면 또 모릅니다.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종이고, 장로는 백성의 대표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양을 잡아서 사람 살리는 일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잡으려고 합니다. 장로는 백성을 대변해주는 사람입니다. 힘없고 빽없는 백성의 권익을 대변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힘 있는 종교지도자들의 대변자가 되어, 힘없고 빽없는 백성의 지지를 받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용감하게 예수님을 잡아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쥐도 새도 모르게 헤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논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를 잘 죽일 수 있을까? 어떻게 예수를 뒤탈 없이 죽일 수 있을까?’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습니다.
2절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일단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총독을 좋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건 자기들에게 예수님을 사형시킬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한 피지배민족들에게 비교적 관대했습니다. 그들의 종교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사형에 대해서만은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평소 총독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서는 총독을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덕분에 실제로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여 놓고,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해서, 빌라도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자기들은 쏙 빠졌습니다.
3절 ‘그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 무렵 가룟 유다는 뭐가 잘못 돼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긴 의미를, 유다는 뒤늦게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는 말은, 예수님이 공회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것이고,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아가겠다는 의미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를 종교지도자들에게 은 30에 넘겼지만, 그렇다고 예수님을 죽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잔뜩 기대를 했지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자 메시야로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극단의 상황으로 몰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결박을 당하여 빌라도 앞에 끌려온 것입니다. 한 때는 자기의 희망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이었습니다. 그런데 결박을 당한 채, 죄수의 몸으로 총독 앞에 넘겨졌습니다. 유다는 가책이 되었습니다.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뉘우쳤습니다. ‘어, 이게 아닌데, 야! 이거 뭐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내가 계산을 잘못한 건데, 아이 참 내가 왜 그랬지? 내가 그 때 왜 그런 판단을 했지?’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때 그의 머리에 불현 듯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서 계약을 물려야겠네.’ 그는 그 상황을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어서 순진한 생각을 했습니다. 유다는 자기 손에 있는 은 삼십을 잠시 바라보다, 급히 종교지도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가면서 몇 번이고 뉘우쳤습니다.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자신에게 너무나 후회가 됐습니다.
4절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이 예수님을 판 대가로 받았던 은 삼십을, 그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외쳤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는 너무나 마음이 아파 진심을 다했습니다. 유다의 말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죄없는 사람을 배반하여 그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나는 죄인입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대제사장 앞에서 행한 일종의 가룟 유다의 고해성사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돌아온 말은, 상처 난 마음에 소금을 치는 매몰찬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역시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그들은 모든 책임을 가룟 유다에게 떠넘겼습니다. 처음에 유다를 회유할 때는, 그냥 예수를 잡는 데 도와달라고 했었습니다. 예수에게 조사할 게 좀 있으니까 협조해 달라고 했을 거 같습니다. “굳이 은 삼십을 안 줘도 된다”고 하니 “그래도 그러면 안 되고 성의 정도로 생각하고 받아두라”고 해서, 일단 받아둔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종교지도자들은 교활했고, 가룟 유다는 순진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아무리 회유를 했어도, 넘어간 가룟 유다의 잘못이 크긴 합니다. 그가 무슨 변명을 하고, 어떤 항변을 해도, 자기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잘못된 일 앞에, 잠시 갈등은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돈이 필요한 상황인데, 누가 돈을 가져와서 회유할 때, 갈등이 왜 안 되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게 당연합니다. 갈등이 되고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 것과,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산상수훈에 보면, 예수님이 율법을 재해석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 중 일곱 번째 계명에 대해서입니다. 마 5:27-28절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마음에 음욕이 가득하면서도 신체적인 접촉이 없었다고, 칠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도,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엄격하게 해석하셨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간음하고, 몸의 간음이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죄의 질이 다르고, 죄의 급이 다릅니다. 그에 따른 회개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전혀 동정이 안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가룟 유다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의 마음에 마귀가 예수 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요 13: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가룟 유다의 마음 관리가 안 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였다면, 마귀가 접근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마귀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자리를, 누가 무엇이 차지하고 있는지를, 매순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마음의 자리를 마귀에게 내주는 순간,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지금 무너지지 않았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마귀가 던지는 낚시 바늘에, 언제라도 걸려들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유다가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 거래를 무르자고 했으나 소용 없었듯이, 우리와 마귀와의 거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마귀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여라.”
우리는 마귀 탓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귀 핑계 대서는 안 됩니다. 인류의 첫 번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타자의 핑계를 댔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핑계 댔고, 하와는 뱀을 핑계 댔습니다. 그러자 에덴동산은 실낙원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오답노트 정리를 잘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책망에 대해 이렇게 답했어야 합니다. “모든 잘못은 나한테 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입니다.” 그렇게 나오는 사람을 마귀는 다시 건드리기 힘듭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내 마음의 자리를 다른 것에 빼앗기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합니다. 유다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오면서, 번복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은 삼십을 주고받은 엄밀한 계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파기하는 게 쉽겠습니까? 그럼에도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심하게 나오는 것을 보며, 끓어오르는 성질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그래서 은 삼십을 성소에 던져 버리고 뛰쳐나왔습니다. 그는 은 삼십을 놓아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판 죄로부터 놓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까지 놓아지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은 삼십을 잡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은 삼십으로 악마와의 거래를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유다는 성소에서 나왔으나 갈 곳이 없었습니다. 평생 예수 판 제자라는 주홍글씨를 이마에 새기고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는 힌놈 골짜기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겼습니다. 걸어가는 내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후회의 눈물이요, 때늦은 뉘우침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힌놈의 골짜기 어디에선가, 스스로 목을 매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진심으로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못난 행동을 한 자신을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런 가룟 유다가 베드로에 비해, 남자다워 보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죽음으로서 속죄한 것처럼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남자다운 것도 아니고, 죽음으로 속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죄의 무게로 따지면, 가룟 유다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평가는 다릅니다.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로 평가받고, 가룟 유다는 영원한 배신자로 평가 됩니다. 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습니까? 비슷한 죄를 지었는데, 왜 평가는 이처럼 나이가 날까요? 대관절 무엇이 한 사람은 위대한 사도가 되게 했고, 다른 한 사람은 배신자의 아이콘이 되게 했을까요? 그게 회개와 뉘우침의 차이입니다. 회개한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로 재탄생했고, 뉘우친 가룟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뉘우침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뉘우침은 자신에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그리고 자신에게와 타인에게 하는 것입니다. 뉘우침은 지적이고 심적인 것입니다. 회개는 지적이고 심적인 것에서, 더 나아가 행동적인 것입니다. 행위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회개는, 온전한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분적인 회개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회개의 시늉만 내다가 말 때가 다반사입니다. 때로는 뉘우침에도 못 미칠 때가 있습니다. 일단 죄를 부인하고 끝까지 숨기려고 합니다. 그래도 가룟 유다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누가 지적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죄를 뉘우쳤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부인하고 끝까지 숨기려고 하는 자들은, 심하게 표현하면 가룟 유다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도 그 중 한 사람입니다.
6-8절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는데 방해가 된다면,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도 겉으로는 거룩을 내세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지만, 실제로는 가룟 유다보다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제 이의, 제 삼의 가룟 유다가 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가룟 유다가 던지고 간 은 삼십의 사용처를 두고, 잠깐 의논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의 묘지를 구입하는 것으로, 그럴듯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헌금으로 잡을 수 없으니, 대신 자선이나 구제의 용도로 쓰자는 식의 결의를 한 것입니다. 본래 헌금은 깨끗한 돈으로 해야 합니다. 깨끗하게 번 돈, 정당한 노동을 통해 번 돈으로, 헌금을 해야 합니다. 뇌물이나 불의한 방법으로 번 돈으로 헌금을 하면, 교회에서는 모르니까 받겠지만,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자신의 생업을 주의 일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렇게 번 돈은 깨끗할 수밖에 없고, 그 깨끗한 돈으로 헌금할 때,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9-10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예수님의 핏값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는 것은, 이미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된 말씀이기도 합니다. 액수가 은 삼십이고, 밭 임자가 토기장이라는 것까지 예언된 것이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무조건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말은 조석변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불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베드로와 유다의 이야기를 나란히 들려줍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모두 실패했습니다. 물론 다른 열 제자도 실패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실패 이후의 선택은 서로 달랐습니다. 실패 이후의 선택이 작은 것 같지만, 운명을 가르는 큰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실패의 일보다 실패 이후의 선택이 그들의 삶에서 더 중요했습니다. 간혹 인생이 만나는 실패와 좌절은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와 절망이 인생의 끝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실패와 허물조차도 하나님보다 크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슨 일을 만나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비록 실패와 좌절이 있을 지라도, 믿음으로 결국은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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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뉘우침이 생각에서 머물지 않게 하옵소서.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하시고 생각과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계산하고 따지는 것이 아닌, 진정한 회개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아니하고, 신앙적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게 하시며, 남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고 내가 책임을 지게 하시고, 주님 앞에 손들고 무릎 꿇게 하옵소서. 실수와 허물을 반복하지 않게 하시고,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용서받아, 주님을 따라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지막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우리의 삶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들로, 가장 가치 있고 보람된 인생을 살아가실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불의는 정의를 이기지 못합니다. / 마 27:11-26
배우 차인표 씨가 2016년 KBS 연기대상에서 베스트 커플상을 받았습니다.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이라는 드라마에서 배우 라미란 씨와 부부로 나왔는데, 감초 같은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상을 받은 차인표 씨 수상소감이, 한동안 화제였습니다. “1967년생 양띠, 올해로 나이가 50살입니다. 50살에 베스트 커플상을 받아, 진심으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50년을 살면서 느낀 것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둘째, 거짓은 결코 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셋째, 남편은 결코 부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차인표 씨가 참 의식 있는 배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엉뚱한 말 같았지만, 당시가 국정농단으로 한참 촛불을 들던 시점임을 생각하면, 시대상황을 빗대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촛불 집회 현장에서 많은 노래들이 불렸는데, 그 중에 단순한 멜로디의 노래가 있었습니다. 세월호 침몰의 진상규명을 위한 집회에서 불렸던 노래입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노래입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설교 예화를 찾기 위해 검색을 하던 중, 이 노래를 찾게 되었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들어봤습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노랫말 같은 신념과 역사관을 가져야 합니다. 동시에 그건 우리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불의가 정의를 잠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의는 정의를 잠시 이길 수 있을 뿐입니다. 불의는 정의를 결코 이기지 못합니다. 어둠이 빛을 잠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거짓이 참을 잠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습니다. 떠오릅니다. 진실은 묻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드러납니다. 대신에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빛이 어둠을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이 거짓을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침몰한 진실이 떠오를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묻힌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포기하면 불의에 영원히 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은, 가룟 유다를 매수하여, 예수님을 붙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불의한 재물에 매수되어, 악마와의 거래를 했고, 그들이 예수님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가룟 유다가 돈을 좋아하기는 했습니다. 그렇다고 은 30이 탐나서 스승을 팔지는 않았을 거 같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른 목적도 돈에 있지 않았습니다. 한 눈에 봐도, 예수님은 돈 버는 것 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자신의 꿈을 이루어줄 분으로 믿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꿈은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술렁거렸습니다. 다음날은 불가침의 영역인 성전에 들어가 뒤집어엎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흥분했습니다. 대망해 왔던, 이스라엘의 독립이 드디어 눈앞에 왔습니다.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습니다. 딱 용두사미였습니다. 자신이 머잖아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마 26:2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와서 흐지부지 된다는 것입니까?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압박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코너로 몰면, 예수님이 비상한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겼는데, 아뿔싸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수님이 묶인 채 빌라도에게 보내지는 게 아닙니까? 죄수가 빌라도에게 보내졌다는 말은, 최소 사형입니다. 그것도 십자가형이라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어 이건 아닌데, 뭐가 잘못 된 거 같은데...’ 그는 스스로 뉘우쳐 은 30을 들고, 부리나케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가서 계약을 무르자고 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그러나 그에게 들려온 말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성소에 던져버리고, 돌아가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더 이상 살아야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자들과의 거래의 결말은, 불행을 넘어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이때까지도 불의가 정의를, 잠시 이기는 듯하였습니다.
11절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예수님이 총독 앞에 섰습니다. 그 장소는 총독 관저로 보입니다. 빌라도는 죄수로 끌려온 예수님 앞에서 재판장입니다. 예수님이 피고이고, 예수님을 고소한 종교지도자들이 원고입니다. 재판장은 원고의 말만 듣고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고인 예수님한테 물은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무슨 죄목으로 피소되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단순히 랍비나 선지자라면, 총독 앞에 설 이유가 없습니다. 로마는 피정복민들의 종교와 풍습, 문화에 비교적 관대했습니다. 단지 로마에 항거하지만 않으면 되었습니다. 로마의 평화, 로마의 질서에 대항하지만 않으면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로마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 자리입니다. 로마 황제가 충성 서약을 받고서야, 유대인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발을 당해, 총독 앞에 서 있습니다. 로마 황제와 무관한 왕은,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인물입니다. 로마의 평화, 로마의 질서에 해가 되는 사람입니다. 총독 입장에서는 그냥 넘길 수 없습니다. 총독이란 자리가 그렇게 안전한 자리도 아닙니다. 피정복민의 집단 민원이 들어가면, 황제에게 언제든지 파면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자리입니다. 빌라도 총독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재판을 맡게 된 것입니다. 빌라도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두 번 물을 필요가 없이 명쾌한 대답입니다. 빌라도는 의외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보이는 정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은 가져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는 곳에 민중들이 몰리니, 혹시나 싶어 동태파악은 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으로 고발을 당해 온 것입니다. 그러니 확인이 필요했고, 본인으로부터 직접 답변을 듣고 싶었습니다. 빌라도는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으며, 속으로는 “아니예요. 내가 무슨 왕이겠어요? 내가 왕처럼 보여요? 저들이 그렇게 짜 엮은 거예요.”라고 대답하길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럼 너무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재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당신의 말대로입니다.” 했습니다.
12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종교지도자들은 기세가 올랐습니다. 자신들이 억지로 고발한 것이 아니라는 게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피고가 자백한 것 아닙니까? 당시만 해도 피고의 진술이 가장 중요한 증거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온갖 증거를 갖다 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증거는 조작된 것입니다. 그들 고발의 결론은 예수님한테 십자가형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그들의 고발을 듣고 있었습니다. 뭐라도 한 마디 대꾸할만한데, 입을 꾹 다물고 계셨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걸 인정하게 되는 셈이고, 그럼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다 못한 빌라도가 끼어들었습니다.
13절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보는 빌라도가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뻔히 아닌 게 보입니다. 그런데 아무 말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습니다. 보고 있자니 너무 안 돼 보였고, 조금이라도 편들어주고 싶은 심정으로 끼어들었습니다.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십자자형에 해당하는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 총독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들의 고발하는 내용이 너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한테 자기 변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혹시라도 숫자에 눌려, 자기 할 말을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자기 변호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14절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변호할 기회를 받았을 때, 변호를 잘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바보입니다.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를 스스로 날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애초에 살고자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이뤄야 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죽어야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슬픈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피고는 자신의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재판장은 피고의 그런 태도를 안타깝게 여기는,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아무나 자신의 생사가 정해지는 결정적인 상황에서도, 그렇게 덤덤할 수 없습니다. 사형 언도를 받고 대기 중인 사형수도, 자기 수형번호가 불리어지면 털썩 주저앉고 맙니다. 자신의 삶을 후회 없이 살아오지 않고서는, 죽음을 그렇게 덤덤하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할 부담을 가지고 있기에, 그 앞에 서는 것을 하루라도 미루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다고 아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보면 생명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서 문제입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이 연명시키는 것은 더 문제입니다. 웰빙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웰다잉입니다.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잘못 살아온 사람이 잘 죽을 수 없고, 잘 죽지 못한 사람은 잘못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죽어야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절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생각해서 변호할 기회를 줬는데도 침묵하는 예수님에 대해, 빌라도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빌라도는 어떻게든지 예수님을 놓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한테 덕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다만 총독으로서 죄없고 힘없는 한 사람을 억울하게 십자가 형을 언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좋은 전례가 생각났습니다. 그건 명절에 총독이 무리의 청원이 있을 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였습니다. 총독이 임의로 놓아주는 것이 아니라, 무리의 청원이 있을 때입니다. 마침 유월절 명절입니다. 빌라도가 좋은 카드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빌라도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 봐도 예수님에 비해 훨씬 죄질이 나쁜 죄수를, 예수님하고 비교를 시키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6-18절 ‘그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바라바였습니다. 바라바는 보통 죄수가 아닙니다. 좀 도둑이 아닙니다. 바라바 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죄수입니다. 악명 높은 죄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라바가 사형을 언도받고 대기 중이었다면, 반란을 음모했던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보기에, 바라바는 여지없이 사형감입니다. 흉악범입니다. 악명 높은 죄수입니다. 그래서 바라바와 예수님을 군중들 앞에 세웠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빌라도는 무리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둘 다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설명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 시기로 넘겨진 예수님과, 유명한 죄수 바라바가 무리의 선택을 받기 위해 한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때로는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가진 자들 눈 밖에 나면, 생사람 잡는 일이 흔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지혜에 만족했습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바라바와 그리스도라는 예수를 비교시킨 것은, 탁월한 아이디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리가 바보가 아닌들 예수를 선택할 게 뻔해서였습니다.
19절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총독은 잠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처음에 판단하기로 별 대수롭지 않는 재판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사형은커녕 특별한 죄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재판이 복잡해졌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총독의 심신은 피곤해졌습니다. 그래서 잠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총독에게로 왔습니다. 총독의 아내가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사모님의 부탁이라며, 총독에게 귓속말을 전했습니다.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빌라도가 전날 골치 아픈 재판을 앞두고 있다고 부인한테 말했던 모양입니다. “무슨 재판인데요” 물었을 거고, 예수님 얘기를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였는지 빌라도의 아내가 그날 밤에 예수님 꿈을 꿨습니다. 빌라도의 아내의 꿈에 나타난 예수님은, 한 마디로 옳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남편이 이 재판에서 손을 떼기를 바랐습니다. 혹이라도 재판을 잘못하여, 옳은 사람을 죄인으로 판결하여 사형이라도 당하면, 큰 문제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급히 사람을 보냈던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놓고도, ‘이미 판결을 내렸으면 어떻게 하나’,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도착했을 때,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아내가 보낸 사람에게, “그래 알았다”며 돌려보냈습니다.
20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재판정 아래는 소란스러웠습니다. 빌라도는 아내의 부탁까지 더해지자, 예수님이 무죄라는 확신이 더 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재판정 아래 분위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갑작스런 빌라도의 제안을 예상하지 못했던 종교지도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보낸 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누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종교지도자들이 무리를 선동했습니다.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는 죽이자 하게 하자.” 생각 없는 무리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에 넘어갔습니다. 지도자들은 이처럼 생각 없는 무리를 잘 활용해 먹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우민화정책을 쓰기도 합니다. 우리는 정치인 수준을 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치인이 누구 수준에 맞추겠습니까? 국민들 수준에 맞춥니다. 그들이 국민을 우습게 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그들로 하여금 우습게보도록 만들었습니다. 정치인들에게 수준을 높일 것을 요구하기 전에, 국민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 수준이 올라가면, 정치인들의 수준이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는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작은 부분에까지 큰 영향을 미칩니다.
21절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총독은 무리들을 조용하게 한 후 물었습니다. 내심 예수님을 놓아주라는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습니다.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바라바로소이다.” 무리들은 옳은 사람이 아닌 유명한 죄수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편들고 있고, 종교지도자들은 바라바를 편들고 있습니다. 무리에게 빌라도는 점령군 사령관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래도 자기 지도자들입니다. 무리들은 빌라도를 편들 수 없다면, 그래도 자기 지도자들 편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진영논리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지도자들은 옳고 그름보다 진영논리로 몰아가기를 좋아합니다. 옳고 그름 앞에서는 생각이 필요합니다. 진영 논리 앞에서는 생각 자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미 어떤 진영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은 처음부터 종교지도자들 진영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22절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자신의 예상과 기대를 크게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예수님이 큰 죄인이라면 사형시키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은 것입니다. 무리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빌라도를 더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아니 이게 말이 됩니까? 빌라도는 너무나 당혹스러웠습니다.
23절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더 나아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언성을 높였습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아니 예수가 무슨 악한 일을 했다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란 말인지, 그 이유나 좀 알자는 물음입니다. 그들이 무슨 이유를 댈 수 있겠습니까? 종교지도자들이 입에 넣어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그렇게 말하는 무리의 소리는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24절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빌라도는 무리의 함성에 흠칫 놀랐습니다. 사실 빌라도가 두려워하는 것은 민란입니다. 자기 통치 구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고 하면 자기는 끝장입니다. 바로 황제에게 소환당하여, 총독 직에서 파면 당하게 됩니다. 아무 성과도 없이,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예수님을 편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어떻게든 옳은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한 총독이라는 오명만은 벗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다며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를 무죄로 봐주지 않았습니다.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빌라도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무리를 향해 한 마디 던졌습니다. “너희가 당하라.”
25절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무리는 빌라도의 “너희가 당하라”는 말에, 바로 화답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멘’한 것입니다. 무죄한 피를 흘린 사람을 향해, 하나님은 피 값을 묻습니다. 피 흘린 자가 개인이든 단체든 반드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심판을 자신이 더 나아가 자기 자손들도, 기꺼이 받겠다는 용감한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몰라서 그랬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어울립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기억해두셨다가, 그대로 갚으셨습니다. 그들은 주후 70년에 로마로부터 완전히 멸망당하고, 그 후 세계 각지로 흩어져 끝없는 유랑을 하다가, 1948년에 독립을 했습니다. 세계2차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600만 명이 학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심판 무시하면 안 됩니다. 저주 함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아멘’한대로 됩니다.
26절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는 불의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무리들 아니 종교지도자들이 원하는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지켜보겠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었지만, 그는 총독의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그는 황제에게 본국으로 소환 도중에 자살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본디오 빌라도는, 오늘도 그리스도인의 입에 불명예스럽게 오르내리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전혀 죄가 없음에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정치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유대 종교의 기득권을 장악한 대제사장, 장로들, 바리새인 등의 공갈 협박에 매수되어 굴복하므로, ‘바라바’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는 이 선동정치에 굴복해, 무죄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했습니다. 정의와 진리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빌라도와 이스라엘은 결국 망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정의와 진리가 매몰된다면, 그 사회와 국가는 결국 망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손해를 보고 고통과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정의와 진리,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때, 개인과 더불어 그 사회, 국가가 온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악이 비록 성하여도 진리가 더욱 강한 것입니다. 진리 따라 살아갈 때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그리고 그 앞길에 어둔 장막이 덮친다 해도, 진리가 되시는 예수 따라 살기를 바랍니다. 빌라도는 민란이 두려워 자기 자리를 보전하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지만, 예수님은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불의를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불의가 정의를 잠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정의가, 하나님의 공의가 승리합니다. 불의가 물러가고 정의가 승리하는 그날까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빌라도는 민란이 두려워 자기 자리를 보전하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지만, 예수님은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모든 불의를 이기고 승리하셨습니다. 어둠이 빛을 잠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거짓이 참을 잠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을 알게 하옵소서. 대신에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정의가 불의를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빛이 어둠을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참이 거짓을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묻힌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가치 없는 인간의 감정에 의존하지 말고, 주님 십자가지심의 의미를 바로 깨달아, 가치 있는 것에 영적선택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 마 27:27-44
여러분, 4복음서에 나온 예수의 생애를 보면, 각각 특징이 있습니다. 그 중에 특히 마태복음은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구약에서 예언하고 있는 메시야가 바로 예수라는 것을, 유대인들에게 증명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마태복음에는, 예수께서 조롱을 받으셨다는 말씀이, 다른 어떤 복음서보다도 많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홍포를 입히고, 갈대 막대기를 들게 하고, 얼굴에 침을 밷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희롱하였습니다. 그리고 옷을 벗기고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씀들이 이미 구약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것을 아십니까?
예수님에게 입혔던 홍포를 벗기고, 다시 예수님이 입으셨던 옷을 갈아 입힌 것은, 다소 예외적인 일입니다. 보통 죄수들은 발가벗긴 채, 채찍을 맞으면서 형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은 예수님께는 옷을 갈아 입혔습니다. 더 이상 채찍으로 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불필요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유대인들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비아 돌로로사 길을 지나가셨습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슬픔의 길, 또는 십자가의 길이라고도 합니다. 이 길을 지나면 골고다 언덕입니다. 아주 좁은 골목길을 연상하면 됩니다. 지금의 비아 돌로로사는 골목 양쪽으로 가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길을 걸으면서 주님이 걸으셨던 그 길이 상업화 된 것을 못마땅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비아 돌로로사는 그렇게 사람들이 사는 골목길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때도 그 길에 가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비아 돌로로사에 가면 골고다 언덕까지 모두 14개의 스테이션(station)이 있습니다. 각 스테이션마다 가슴 뭉클한 스토리들이 있습니다만, 성경에는 그 스토리들이 모두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세 번째 스테이션에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모두 세 차례 넘어지셨는데, 세 번째, 일곱 번째, 아홉 번째 스테이션에서 예수님은 넘어지셨습니다. 네 번째 스테이션에서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만납니다. 다섯 번째 스테이션부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이 가파라집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더 이상 가파른 언덕을 올라갈 힘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 마지막 14번째 스테이션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 기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여러 사람들의 공로가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데는 하나님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된 인류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시기로 했습니다. 롬 5: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자청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시니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직접적으로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몇 차례나 말씀하셨습니다. 마 20:18-19절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종교지도자들을 일컫습니다. 여기엔 백성의 장로들도 포함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예수님을 없애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12제자 중 한 명을 매수하여, 예수님을 잡는데 성공했고, 형식적인 산헤드린 공회의 결정을 통해, 빌라도에게 넘겨 십자가형 판결을 얻어냈습니다.
다음은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잔뜩 기대했지만 대 실망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의 분위기는 좋았고 성전을 정화할 때까지는 뭐가 되고 세상이 뒤집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실망이 커져가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26:2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서, 그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서 은 30에 스승을 팔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하셔서, 이런 자극적인 말씀까지 하며 회개할 기회를 제공하셨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닫았습니다. 마 26:24절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결국 은 30을 성소에 던지고, 스스로 죽음을 택함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은 빌라도 총독입니다. 당시 사형 판결권은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데려왔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해 보고, 그게 단순히 종교 문제지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자기를 향해서 온갖 거짓 증언을 하는데도, 일절 침묵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살려보고자 했습니다. 명절에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전례를 들어, 예수님을 석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더구나 자기 아내의 부탁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법을 공정하게 집행해야 하는 총독의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과 합세한 무지한 무리들이,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소리 소리를 질렀습니다. 금방이라도 민란이 일어날 것만 같았습니다. 자기 관할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하면, 빌라도는 끝장납니다. 황제로부터 본국으로 소환되어, 책임 추궁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고라도 자기 자리를 지키고 싶어 했지만, 결국 황제의 소환통보를 받고 소환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속마음은 내키지 않았지만, 종교지도자들과 무리의 압박에 굴복하여 결국 예수님을 내주고 말았습니다. 26절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 한 번의 결정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영원한 꼬리표가 되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주으시고”
27절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총독의 결정이 떨어지자 군병들이 예수님을 데리고 갔습니다. 총독은 깊이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줬는데, 그 뒤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그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군인이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군인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명령만 따릅니다. 일반적으로 군대 생활은 단순한 사람이 잘 할 수 있습니다. 생각이 깊고 복잡한 사람은 여간 힘듭니다. 총독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잠시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좋은 놀잇감이 생긴 셈입니다. 그래서 온 군대를 모았습니다. 무슨 비상이 걸린 것도 아닙니다. 무슨 작전이 걸린 것도 아닙니다. 죄수 한 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온 군대가 모였습니다. 좀 과한 반응인 거 같기는 한데, 아마 예수님이 대단한 능력을 가진 소문을 들었기에, 만반의 준비를 했던 거 같습니다.
28-30절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십자가 형을 위해서는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대기 시간을 무료하게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희롱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더니 홍포를 입혔습니다. 예수님의 옷은 멀쩡한 옷이 아닙니다. 모진 채찍질을 당하여,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옷입니다. 옷에 살이 달라붙어 있어, 옷을 벗길 때 심한 통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준비한 홍포를 입혔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자색옷이라고 했습니다. 홍포는 로마의 장관들이 입던 짧은 망토를 가리킵니다. 자색옷은 황제나 왕이 입는 옷입니다. 또한 그들은 어디서 준비했는지 가시관을 가져와 씌웠습니다. 갈대를 예수님의 오른손에 들려줌으로 마치 홀을 든 왕처럼 보이게 연출했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놀리기 위해서, 참 준비도 열심히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인 것과, 자기들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한테 무슨 피해본 적도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심심풀이로 예수님을 희롱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악합니다. 물론 군중심리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죄수 앞에서 힘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래서 가진 힘을 이용하여 약자의 인격을 마구 유린하고 있습니다. 당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 자체를 오락처럼 즐겼습니다. 채찍에 맞아 초주검이 되어 있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 군인들은 모처럼 웃고 떠들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31절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이제 준비가 다 됐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한테 입혔던 홍포를 벗겼습니다. 본래 입었던 옷으로 갈아입힌 후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는 죄수는, 자기가 매달릴 십자가를 처형장까지 지고 가야만 했습니다. 십자가 행진을 해야 했습니다. 상당한 거리를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했습니다. 그 십자가의 무게는 건장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막 15:15절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기기 전에 채찍질이 있었습니다. 그건 예수님을 심한 채찍질로 피투성이를 만들어놓으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 채찍질이 보통이 아닙니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 모진 고문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채찍질을 당함으로, 온 몸의 기력이 소진되었습니다. 일어서 걸을 힘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봐줄 군인들이 아닙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어깨에 십자가를 지웠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얼마쯤 가다가 쓰러졌습니다. 그럼 여지없이 채찍질이 가해지고 군화발이 날아왔습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다시 십자가를 져보지만, 얼마가지 못해서 또 쓰러지고 맙니다. 쓰러지면 채찍질과 발길질, 겨우 일어나서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 채찍질과 발길질... 이게 몇 번이고 반복됩니다. 그 무자비한 군인들이 보기에도 더 이상 안 되겠던 모양이었습니다. 십자가 처형장까지 가지도 못해서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나 봅니다. 그들은 어떻게든 처형장이 있는 골고다까지, 예수님을 데려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대신 좀 지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주위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32절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그때 한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깨가 떡 벌어져, 한 눈에 봐도 힘 좀 쓸 거 같은 건장한 젊은이였습니다. 시몬은 당시 구레네 지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왔다가, 시끌벅적 해서 무슨 일인가 싶어 구경 나왔다가 강제 징발된 것입니다. 그는 유월절을 지키려고 멀리서 왔습니다. 그런데 피 묻은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아무리 대신이긴 하지만 그래도 재수 없는 일입니다. 이건 전혀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그렇다고 십자가를 못 지겠다고 끝까지 반항할 수도 없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살기 어린 눈빛 때문입니다. 군인들은 당황하는 시몬을 향해 손짓으로 재촉했습니다. 계속하여 못 지겠다고 하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자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는 십자가를 대신 진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 이후 그의 행적은 잘 모릅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 않아서입니다. 확실한 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막 15:21절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롬 16:13절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이 말씀을 근거로, 시몬의 온 가족이 구원 받은 것 같습니다. 시몬의 아내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후견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두 아들은 초대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억지로 십자가를 지긴 했지만, 주님은 보상해 주셨습니다.
사실 십자가가 좋아서 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져야 하니까 지는 것입니다. 안 지면 안 되니까 지는 것입니다. 억지로 져도 보상을 해주신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지면 어떨까요? 기쁘게 못 지겠거든 불평은 하지 말고 져야 합니다. 기쁘게 못 지겠거든 억지로라도 한 번 져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진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나 주어지지 않나 확인해 보기 바랍니다. 그때 임하는 은혜를 나는 ‘강요된 은총’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싶습니다. 때론 우리에게 강요된 은총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져준 구레네 시몬에게, “고맙다”며 인간적인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는 좋지 않은 기분 탓에, “됐수다”며 퉁명하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그게 지금은 많이 후회됩니다. 시몬은 시간이 지난 후 깨달았습니다. 전에 자기가 졌던 십자가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사실은 자기의 십자가였다는 것을, 사실은 예수님이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감사해야 할 사람은 정작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마 16: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기 십자가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말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게 동반돼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가 더 크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본래 자기 떡은 작아 보이고, 자기 십자가는 커 보이는 법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서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한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왔습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 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습니다. 주님은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아주 잘 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 밑에 내동댕이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이라구요!” 주님은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두 번째 제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앞 사람은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는 말씀입니까?” 주님이 그에게 타이르셨습니다. “십자가를 탓하지 말아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늘어났던 거야.” 십자가의 무게가 늘어났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그럼 십자가의 무게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A란 사람은 점점 무게가 줄어들어 가볍게 지고, B란 사람은 점점 무게가 늘어 무겁게 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합니까? 십자가에 대한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져라. 그리하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너를 져줄 것이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으로 유명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입니다.
33-34절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군인들은 예수님에게 마지막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특별히 호의를 베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쓰디쓴 포도주를 사형당하는 죄수에게 제공하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합니다. 쓰디쓴 포도주가 어느 정도 마취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고통이 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지막 호의마저 거절하셨습니다. 맛을 보시더니 마시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고통을 덜지 않고 온전히 받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고통을 덜어보려고 애를 씁니다. 수술을 받고 나면 무통 주사를 어떻게 할 건지를 묻습니다. 그럼 열의 아홉 이상은 달아달라고 합니다. 얼마나 아플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만일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오면, 괜히 돈 좀 아끼려고 했다며 후회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온전히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부어진 고난의 잔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시기를 원하셨습니다.
35-36절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거기 앉아 지키더라.’
몇 번의 호의를 계속 거절하자,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슬쩍 지나가는 투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사형을 집행했던 군인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죄수의 옷은 사형 집행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사형 집행하는 것은 못할 짓입니다. 모르긴 해도 맨 정신으로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죄수가 입었던 옷을 가질 수 있도록 했나 봅니다. 그래도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놓고, 그 밑에서 옷을 나누기 위해 제비 뽑는 것은 좀 심하기는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시간을 보냅니다. 어차피 그들은 죄수들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는, 그곳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서라도 무료한 시간을 달래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37절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아무나 십자가에 처형시킬 수 없습니다. 로마법이 그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형틀인 십자가에 죄패를 붙임으로, 한 번 더 인격적인 사형을 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죄패는 좀 이상합니다. “유대인의 왕 예수” 이게 죄패입니다. 요한복음에는 죄패에 대한 좀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요 19:19-22절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고 쓴 것이 맘에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부탁했지만, 빌라도는 그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죄패를 남기고 죽으셨습니다. 그건 우리가 죽을 때 남겨야 할 죄패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남겨야 할 죄패는 사라졌습니다. 혹 묘비명은 남길 수는 있을지 모릅니다. 굳이 재미있거나 심각한 묘비명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예를 들면 버나드 쇼의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소설가 헤밍웨이의 “일어나지 못해 미안하오.” 걸레스님으로 유명한 중광의 “괜히 왔다 간다.” 개그우먼 김미화의 “웃기고 자빠졌다.” 묘비명은 내 삶을 짧은 한 줄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정할 수도 있고 타인이 헌사할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묘비명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삶을 통째로 기억하시는 주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38절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예수님께는 십자가 동무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자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동무가 됐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해서 동무로 붙여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처형될만한 죄를 지었습니다. 두 사람을 예수님 좌우에 못 박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두 사람보다 더 큰 죄인처럼, 두 강도의 두목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39-40절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지나가는 자들이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생각 없는 자들의 소리니, 우리도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겠습니다.
41-43절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종교지도자들도 예수님을 회롱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놓고도 직성이 안 풀린 모양입니다. 그러나 진짜 내려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나 봅니다. 참 사람들이 못 됐습니다. 누구보다 배운 사람들이 못된 심성을 가졌고, 더군다나 종교지도자들이 악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누구를 가리치고 누구를 지도한단 말입니까?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에 희롱하는 죄를 더하고 있습니다.
44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더 가관인 것은 두 강도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다 보니 예수님의 십자가 동무가 됐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욕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욕해도 두 사람은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마치 자기들이 십자가에 달린 것이 예수님 탓이나 되는 양, 예수님을 욕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한 강도가 돌이켜 다른 강도를 꾸짖고는, 예수님한테 정중히 부탁을 합니다. 눅 23:42절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님은 그런 강도를 받아주셨습니다. 4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걸으신 비아 돌로로사는, 이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은 좁고 험한 길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결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그 길을 걸으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길을 함께 걷자고 하십니다. 더 넓고, 더 쉽고, 더 편한 길을 버리고, 좁고, 험하고, 고통와 아픔이 있는 비아 돌로로사를 걷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운명적으로 그 길을 걸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길을 걸음으로써, 세상은 우리에게서 비아 돌로로사를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고통과 아픔의 길이고, 그 길의 끝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진정한 행복의 길이요, 진정한 승리의 길이요,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내 십자가입니다. 내가 짊어져야 할, 다른 누구도 대신 질 수 없는, 순전히 내 십자가입니다.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없고 기독교도 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 Via Dolorosa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음을 알게 하옵소서. 죄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시작이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달려 죽고, 예수님 부활하실 때 함께 부활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고, 인생의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방법이 달라지게 하옵소서. 다른 누구도 대신 짊어질 수 없는, 나만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죽어야 살아납니다. / 마 27:45-56
노르웨이에 사는 한 할머니는, 노구의 몸을 의탁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습니다. 아는 친척들을 찾아가서 같이 살자고 사정을 했지만, 아무도 할머니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 할머니는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꼭 이런 약속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저는 저의 죽음이 아름답기 위해서 줄곧 기도해 왔거든요. 하나님께서 제 마지막을 책임지실 거예요. 그러니 염려마시고 저를 받아 주세요.” 그러나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 할머니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기도하셨다면 틀림없습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같이 사세요.” 그래서 할머니는 이 젊은 그리스도인 부부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이 부부의 자녀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본을 가르쳤습니다. 젊은 부부의 가정은 이 할머니 때문에 무척 행복했습니다. 매일 저녁 할머니를 모시고 온 가족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그 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맑은 아침이었습니다. 할머니의 기도 시간이 끝날 쯤 되어 식사시간이 되었는데도, 할머니가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 부부는 할머니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아무 기척이 없었습니다. 방문을 연 그들의 눈에 순간 비쳐진 것은, 엎드린 채로 기도하며 숨져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할머니 곁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하였는데 할머니가 남긴 유서였습니다. 유서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맞아 주지 않았는데 당신들은 나를 믿어 주었고, 나와 함께 살아 주고 베풀어 준 은혜에 참으로 감사하오. 당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재산을 가장 잘 관리할 사람들로 믿어졌소. 하나님의 사업에 이 재물을 써주오.” 의사이자 세계적 사상가인 아툴 가완디는, 자기 책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그 할머니의 죽음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자신의 죽음을 위해, 자신의 죽음이 추하지 않고 아름다운 죽음이기를 위해, 기도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무엇이 그 할머니로 하여금, 그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전적으로 의탁한 신앙이었습니다.
2014년 6월 15일, 아프리카의 수단 법정은 출산을 불과 10여일 남겨둔, 만삭의 임산부 이스학(마리암 야히아 이브라힘 이스학, 27세)을 피고인석에 세웠습니다. 그의 죄명은 ‘개종(改宗)’이었습니다. 이슬람 샤리아 법에 따르면, 무슬림 여성들은 비무슬림 남성과 결혼할 수 없으며, 무슬림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배교행위입니다. 수감 당시 법원은 이스학의 한 살배기 아들 마틴도, ‘개종하고서 낳은 자식’이라는 이유로 함께 감옥에 넣었습니다. 재판 끝에 이날 수단 법원은, 그에게 채찍 100대의 태형과 교수형을 각각 선고했습니다. 12일 후에 그녀는 딸 마야를 감옥에서 출산했습니다. 이스학의 아버지는 독실한 무슬림(이슬람 신자)이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소속의 기독교인인 어머니는, 딸 이스학을 남몰래 자신의 신앙대로 키웠습니다. 이스학은 2011년 수단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 다니엘 와니를 만나 결혼식을 올렸고, 이듬해 마틴을 낳았습니다. 둘째를 갓 임신했던 지난해 8월, 이스학은 수단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이스학의 아버지 쪽 친척이, ‘이스학이 이슬람을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으며 기독교인과 결혼했다’라고 고발했습니다.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따르면, 이슬람에서는 다른 종교로의 개종이나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결혼은 금지하고 있습니다. 수단 당국은 현지법상으로는, 이스학은 아버지의 종교를 물려받은 무슬림이기 때문에, 기독교인 남편과의 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스학은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기독교인으로 자랐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적이 없다”고 맞섰습니다. 법원은 최종 심리에서 이스학에게 사흘 말미를 주고, 이슬람으로 복귀할 것을 권유했지만, 이스학은 “진짜 종교는 취소하거나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거절했습니다. 결국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남편 와니는 애초부터 기독교도인데다,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처벌받지는 않았습니다. 이스학의 투옥 소식을 들은 서방사회는 크게 반발했습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오늘날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야만적 대우”라고 수단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이스학의 ‘옥중(獄中) 출산’ 이후 국제사회의 비판이 한층 거세어지자, 수단 카르툼 고등법원이 이스학에게 내린 사형선고를 내린 1심 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이스학의 석방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과 인권단체들은 일제히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마리 하프 미 국무부 대변인은 “미국인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우려했던 사건에 대한, 수단 고등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면서, “지난 2005년 제정된 수단 과도정부의 헌법과 세계인권선언 등과는 다른 내용을 담은 현행 법률은 폐기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순교할 각오를 한 한 연약한 여인이, 지독하게 인권을 말살하던 현행 법률을 무효화하는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여인은 죽음으로 살았습니다. 살기 위해 믿음을 포기했다면, 육체의 생명은 연장될 수 있었겠지만,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주고 영생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이 땅의 삶은 길지 않습니다. 이 땅의 삶은 영생으로 가는 여정입니다. 사는 동안 잘 살되, 떠날 준비도 하고 살아야 합니다. 죽음은 끝나는 게 아닙니다. 죽음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45절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종교지도자들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스승을 은 30에 판 가룟 유다의 배신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총독 자리를 보전하려는 빌라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장 적극적인 이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스승에 대한 실망감이 컸습니다. 극단의 자리로 몰면, 예수님이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믿었습니다. 은 30을 들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달려가 계약을 무르자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을 죽게 하려는 의도는 없어 보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애초에 예수님의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풀어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더구나 아내의 간절한 부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민란이 일어나려는 움직임에 겁을 먹고, 무리가 원하는 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고 말았습니다. 총독으로부터 예수님을 건네받은 군인들은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그리고 관례대로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워서, 처형장소인 골고다까지 가도록 했습니다. 십자가는 성인 남자면 충분히 질 수 있는 무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대로 지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를 가다가 쓰러지고, 그러면 군인들의 채찍이 가해지고, 겨우 일어나 몇 걸음 가다가 쓰러지고, 그러면 군화발이 날아들고, 그렇게 하기를 몇 차례나 반복됐습니다. 보다 못한 군인들이, 구경하던 건장한 남자 구레네 시몬을 차출하여,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했습니다. 더 이상 진행했다가는 죄수가 처형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치 강도의 우두머리처럼 보이게 할 목적으로, 예수님을 기준하여 좌우에 강도를 십자가에 단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숱한 조롱과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심지어 같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조차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제 삼시였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시간은 흘렀습니다. 어느덧 세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때 갑작스럽게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누가 봐도 어둠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또한 어둠은 아들이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달려 있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속 타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사람들이, 죄값으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도 고통스럽습니다. 그 인류를 구원할 목적으로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버려두는, 아버지의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본래 힘든 시간은 길게 느껴집니다. 학교나 군대에서 기합을 받을 때, 시간이 왜 그리 안 갔는지 모릅니다. 인생의 고난과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시계는 멈춰 있는 거 같습니다. 그 엄청난 세 시간을 한 절로 가볍게 처리했지만, 결코 가볍게 지나가는 시간이 아닙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2시간짜리고, 그 중 고문과 십자가에서 죽으신 장면이 1시간입니다. 그 장면을 영화로 보는데도 여간 힘듭니다. 하물며 그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어떠셨겠습니까?
46절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은 어둠 속에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께 버림받은 아들의 처절한 몸부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항상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의 기도하실 때조차도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물론 시편 22:1절의 말씀으로 기도하신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대신 아버지로 바꿔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은, 아들로서 부르신 게 아니라 죄인의 대표로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혀있고, 머리에 가시관이 씌워져 있습니다. 육체적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더 큰 고통은 영적인 고통, 곧 아버지께로부터 버림받은 고통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절규를 통해, 죄인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을 부르는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행 2: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이름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이름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행 4: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가 시험 가운데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름 예수,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름 예수, 우리가 죄 중에 있을 때조차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은 예수 뿐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처절하게 불러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안 불러봤다면, 개인적으로는 삶이 평탄했다는 말이고, 축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교회에 대해, 나라와 민족에 대해, 그리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게 살아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프지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47절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아버지께 버림 당하신 예수님의 절규에 대해, 함께 아파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놀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엘리야가 죽지 않고 승천했기에, 고통 당하는 자를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엘리 엘리’ 하는 절규를 듣고, 엘리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처절하게 절규하심으로, 엘리야를 부르시는 줄 잘못 들었을 수 있습니다. 최후의 몸부림으로 부르짖었는데, 발음에 신경 쓸 여력이 있었겠습니까?
48절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십자가 아래 있던 한 사람이, 어디론가 달려갔습니다. 그가 가서 가져온 것은 해면에 신포도주를 적신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목마름을 호소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19:28-29절 ‘그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그 사람의 행위는, 죽어가는 예수님에 대한, 최소한의 동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 정도 호의는 베풀 수 있었습니다. “살려달라” “십자가에서 내려달라”는 말 외에, 다른 부탁은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습니다.
49절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그런데 그보다는 예수님의 생명을 더 연장시켜,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 주는지 보고 싶어서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은 자신만만해 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놀린 것입니다. 그들은 최후의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후의 승자라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십자가 위에서 내려온 사람은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사람 중에 살아난 사람은, 아직까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그런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50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결국 엘리야는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전, 뭐라고 소리 지르셨는지는 다른 복음서를 참조하면 이렇습니다. 눅 23: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잠자기 전에 하는 기도라고 합니다. 저도 어쩌다 한번씩 이 기도를 하고 잡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하고 잤다가 천국에 깨어나는 게, 가장 멋진 삶의 시나리오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주기도문이 좋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께 오늘의 일용할 양식과 용서와 보호를 구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밤에 잠들기 전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잠잘 때 내 영혼을 맡아줄 아버지가 계시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이 땅에서의 짧디짧은 33년의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짧고 비참한 최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야로 보기에는,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눈엣 가시와 같던 예수를 없앴으니, 한 시름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51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그런데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졌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휘장이 찢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휘장은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 일 년에 단 한 번만 열렸습니다. 휘장이 허접한 게 아닙니다. 전 교인 수련회로 평택 광은기도원에 간 일이 있었지요? 그 광은기도원에 세계성막복음센타가 있습니다. 그곳에 실물 크기의 성막이 있습니다. 세계에서 성막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세 곳뿐인데, 실내에 만들어진 곳은 그곳뿐이라고 합니다. 그곳에 가면 휘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카페트 몇 장 두께입니다. 말 몇 마리가 당겨도 찢어지기 힘듭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쫘악 찢어진 것입니다.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사실상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히 10: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휘장을 예수님의 찢겨진 육체에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의 찢겨진 육체 때문에 죄인이 바로 지성소 곧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구를 거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나 성인이나 사제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바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 4: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피를 힘입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잔잔하면서도 은혜가 있는 찬양입니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며 가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나 여전히 부족하나
나를 품으신 주의 그 사랑 그것을 믿으며 가네
자격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자격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예배합니다
예수 피면 족합니다. 십자가에서 쏟으신 예수님의 보혈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혈로 덮여진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우리는 성소 휘장이 찢어진 의미만 알면 되지만, 종교지도자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충격에 휩싸였을까요? 얼마나 불길한 징조로 비춰졌을까요? 그들에게 비상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극비에 부치고, 휘장을 다시 제작하는 조치를 취했을 것입니다. 휘장은 정교한 작업이고,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오늘날처럼 구입해서 바로 교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유월절은 정월이고 대속죄일이 칠월이니까, 그래도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52-54절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났음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진을 동반한 여러 일로 인해, 백부장은 자기도 모르게 특별한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 백부장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체를 지휘했던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입니다. 십자가형이 집행되는 6시간의 과정을 쭉 지켜본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이 평범한 죽음과는 뭔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정적으로 지진과 그로 인해 일어난 일들을 통해, 그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희롱했습니다. 십자가를 지워 쓰러지면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모든 일을 자신이 진두지휘했습니다. 그의 고백이 얼마나 오래갔는지 모릅니다. 그가 후에 예수님을 믿었는지, 그때 두려움에 사로잡혀 했던 한번의 고백으로 끝났는지 모릅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제 정신으로 사는 게 힘들었을 것입니다.
55-56절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멀리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지켜본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여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섬겨왔던 여인들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따라왔던 여성들이었습니다. 이름이 기록된 여성은 몇 명 안 되지만, “많은 여자”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습니다. 큰소리치던 사내들은 자기 살겠다고 도망치고 없습니다. 연약한 여성들만,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들은 골고다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우리도 예수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아니 예수와 함께 죽지 않는다면 큰일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갈 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버릴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그가 원하는 때에, 자신의 의지로, 그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비참한 패배가 아닙니다. 아무 능력도 없고 권세도 없어서, 무기력하고 비참하게 짓밟혀서 어쩔 수 없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게 아니란 뜻입니다.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안 죽으실 수 있고, 오히려 반대로 대적들을 모조리 십자가에 매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그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기에,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키며, 인류를 구원하실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가장 어렵고 힘든 선택을 스스로 하셨던 것입니다. 흔히 사랑하는 부모를 위해, 또는 자녀를 위해 신장이나 간 이식을 해 주는 식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온 몸을, 그것도 십자가의 극도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 스스로 모두 내어주셨습니다. 그만큼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강제에 의해서, 또는 종교지도자들의 모략에 내몰려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안 지실 수 없는 지경에 내몰려서, 강제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스스로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사랑’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남은 삶을,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어야 살아난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이 시간 깊이 묵상하게 하옵소서. 십자가는 나의 구원의 길이요, 믿음의 참된 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십자가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을 따르는, 복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십자가의 그 사랑과 구원의 은총이, 가장 큰 축복임을 다시금 고백하고, 더욱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함께, 다음 세대에게 십자가의 위로를 복되게 심어주는 성도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죽음은 삶이 끝나는 문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의 생명으로 나아가는 영생의 문임을 알게 하시고, 부활을 믿는 믿음으로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예수님을 무덤에 가둘 수 없습니다. / 마 27:57-66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 사이에 되어진 일입니다. 흔히들 예수님의 십자가는 깊이 묵상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도 많이 묵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냥 지나쳐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늘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 우리는 이 가운데서 놀라운 영적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라 함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섭리(providence)는 이적(miracle)과는 다릅니다. 이적이라 함은 하나님이 그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가 세우신 자연 법칙을 잠시 깨뜨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태양이 중천에 머무르면서 내려오지도 아니하고, 또는 쇠도끼가 물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와는 달리 섭리라 함은 하나님이 자연 법칙을 그대로 유지하시면서, 그 배후에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적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어느 날,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이 유명한 경제학자인 베버리지를 불렀습니다. “앞으로 영국은 국민의 건강과 복지를 책임지는 복지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각하!” “어떤 방법으로 영국을 복지 국가로 만들 것인지 연구해 주시오.” 베버리지는 ‘사회 보험 및 관련 서비스에 관한 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복지 국가에 대한 연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1942년 ‘베버리지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국민의 건강과 복지에 대해 책임지는 국가’ 베버리지는 보고서에 위와 같이 적으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국가가 도와줘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처칠은 이 보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영국을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평등한 사회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용어는, 출생에서 사망까지의 전 생애 중에, 예측 가능한 사고는 국가가 최저한도의 사회보장책임을 진다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아무리 선진국이라도, 아무리 세계에서 사회복지가 가장 잘된 북유럽 국가들도, 국가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입니다. 그럼 무덤 이후는 어떻게 됩니까? 무덤 이후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무덤 이후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무덤에 가두는 일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무덤이 이생의 끝인 것은 맞습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만 어느 정도 보장이 돼도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생이 있습니다. 무덤 이후의 삶이 있습니다. 육체의 죽음 너머의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왜 문제입니까? 신을 부정해서입니다. 그들은 유물론에 입각해 있습니다. 유물론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다움 사전에는 이렇게 풀이를 했습니다. ‘세계는 물질로 이루어졌으며, 정신이나 의식 따위는 물질의 산물이라고 보는 이론’ 유물론을 철학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풀이해 놨습니다. ‘물질을 제1차적, 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 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유물론에서는 물질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마음이나 정신은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신을 인정할 까닭이 없습니다.
2017년 11월 14일 뉴스1 코리아 인터넷 뉴스는 헤드라인을 이렇게 자극적으로 뽑았습니다. “예수 믿을래, 시진핑 믿을래, 시진핑 믿으면 보조금” 기사를 좀 인용해보겠습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이 마오쩌둥(毛澤東)을 넘어, 하느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는 듯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기독교도들에게, 예수나 하느님 관련 시각물 대신 시진핑 주석의 초상화를 붙이면, 생활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법으로 기독교를 탄압하고 있다고,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가 보도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기독교도들의 집에, 기독교 관련 시각물 대신 시 주석의 초상화를 걸면, 생활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법으로, 공산당이라는 종교(?)를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간현은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 중 하나이자, 기독교도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위간현의 인구는 약 100만 명이고, 이중 11%가 평균 이하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 10%가 기독교도입니다. 위간현의 공산당원들은 극빈층을 방문, 집안에서 기독교 관련 선전물을 떼어내고, 시진핑 주석의 초상화를 걸면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600여 명의 주민들이 기독교 관련 선전물을 떼어 냈으며, 이중 453명은 시 주석의 초상화를 걸었습니다. 시 주석 집권 이후 중국 공산당은, 종교에 대한 통제를 특히 강화하고 있습니다. 2017년 3월부터 중국 공산당은, 전국 교회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하고 있습니다. 저장성 원저우시는 중국 기독교의 메카입니다. 원저우시에만 약 100만 명의 기독교도가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최근 시정부는 원저우의 한 교회를 방문해, 교회 출입구와 예배당 등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습니다. 테러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습니다. 신도들의 격렬한 저항에도 감시카메라는 설치됐고, 신도들은 저항하는 과정에서 수십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이같은 반발에도 감시카메라 설치를 전국 교회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글쎄 하나님이 그를 권좌에 얼마나 둘지 모르겠습니다. 1953년생인 그가 아무렴 영원하겠습니까? 자기 영혼에 무관심했던 것에 후회하고, 예수님과 그의 몸된 교회를 박해한 것에 대해, 땅을 치며 무덤에 들어갈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대국의 권좌를 누렸으면 뭐합니까? 그걸 무덤까지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무덤은 화려하게 꾸밀 수 있습니다. 무덤 앞에 비석은 크게 세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기껏 100년의 삶을 위해,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삶을 포기하는 것은, 정말이지 어리석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하신 분입니다. 만유의 주라는 말입니다. 만왕의 왕이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섬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까지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아이들을 섬기셨습니다. 여인네들을 섬기셨습니다. 병든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세우셨지만 그들은 변변찮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미움을 받으셨습니다. 이 땅에 인류 구원자로 오셨지만 거부 당하셨습니다. 끝내 그것도 제자의 배신으로, 종교지도자들의 고소로, 총독 빌라도의 판결로, 십자가에 달리셔야 했습니다. 그것도 젊디젊은 서른셋의 나이에, 그렇게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상칠언(架上七言)입니다.
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②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③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④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⑤ “내가 목마르다.”(요 19:28) ⑥ “다 이루었다.”(요 19:30)
⑦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보면 첫마디 말씀도 기도요, 마지막마디 말씀도 기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기도로 태우셨습니다. 자신을 따라올 자들에게 십자가를 이기는 유일한 길이 기도임을 밝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면서 기도에 무관심하거나 소홀한 것은 모순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예수님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됩니다. 예수님도 못한 것은 자신은 할 수 있다는 교만인 것입니다.
신앙의 처음과 마지막은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의 처음은 영접기도로 시작합니다. 신앙생활의 마지막은 임종기도로 마칩니다. 하루의 시작과 마침도 기도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대로 하루의 시작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로 시작합니다. 하루를 마치고 밤에 잠잘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상의 마지막마디인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로 기도하고 자면 됩니다. 우리는 신앙의 열기가 식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살 수 있을 거 같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른 시간은 있어도 기도할 시간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른 게 위기가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는 게 신앙의 위기입니다. 기도가 안 되는 게 신앙의 위기입니다. 기도할 맘이 안 생기는 게 신앙의 위기입니다. 다시 기도의 끈을 붙잡아야 합니다. 기도의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야 합니다. 인생 광야학교에 보내기 전에, 기도의 자리로 나가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죽는 연습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죽는 연습입니다. 기도의 자리는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는 자리입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육체적 죽음을 맞기 전, 겟세마네 기도를 통해 자아의 죽음을 경험하셨습니다. 이미 기도로 죽음에서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6시간 달려계셨습니다. 우리시간으로 오전 9시에 못 박혔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지 3시간 후에,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차마 볼 수 없어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렇게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지진이 일어나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이 열리기도 하여, 죽었던 사람들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 광경을 목도한 예수님의 사형집행을 처음부터 주도했던 백부장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더욱 특이했던 것은, 예수님이 운명하는 순간에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이, 둘로 찢어졌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몸이 찢기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이 열린 것입니다. 히 10:20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사람에 대해,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비록 죄수라 할지라도, 안식일에 달려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 전에는 시체를 내려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반면 로마인들은 십자가에서 죽으면 그대로 두었습니다. 날짐승에게 쪼아 먹히게 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형을 판결한 사람이 로마 총독입니다. 사형 집행도 총독의 명령을 받은 로마 군인들이 했습니다. 그러니 시체를 처리하는 것도 총독의 권한에 속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유대인이고 고소인들이 유대인이지만 일단 총독에게 일임한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가족들과 제자들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에게는 어떤 힘도 없습니다. 막무가내로 총독을 찾아가서 사정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고위급 인사 중 알고 지내는 사람도 딱히 없습니다. 정말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채 십자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자기들에게 어떤 방법도 해답도 없으니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자 기적적인 응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의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57절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저물었을 때에 아미마대의 부자 요셉이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천사가 동원됩니다. 천사가 동원되면, 환경이 변화되든지, 응답의 사람이 찾아옵니다. 본문에서는 그들이 기도함으로 응답의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을 찾아온 요셉은 단순한 부자가 아닙니다. 공회의원이었습니다. 눅 23:50-51절 ‘공회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선하고 의로운 공회의원입니다. 그는 공회에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할 자로 결의할 때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존경받는 공회의원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공회의원인 아리마대 요셉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요셉은 와서 자신도 예수님의 제자라고 밝혔습니다. 그들은 사정 얘기를 하며,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역시 확답은 할 수 없지만, 가서 총독을 한 번 만나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당부를 했습니다. “대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아, 물론입니다. 바로 기도하겠습니다.”
58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은 그들과 인사를 하고 급히 총독 관저로 떠났습니다. 빌라도는 표정이 밝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으로부터 예수님 처형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라서 그렇습니다. 자신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풀어주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만한 죄를 지었다면 사형에 처해야 하지만, 자기는 아무리 봐도 예수님은 죄가 없어보였습니다. 무리가 들고 일어나 민란이라도 날까봐 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지만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백부장으로부터 예수님이 죽었다는 보고를 받고는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요셉이란 공회의원이 찾아왔습니다. 기분 같아서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공회의원이 찾아왔다니, 안 만나줄 수도 없었습니다. 요셉은 빌라도에게 정중히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의 시체를 주십시오.” 사실 어려운 부탁입니다. 빌라도는 요셉의 부탁을 받고는 선뜻 “내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달라고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시체를 달라고 하는 목적이 장사를 치르려고 하는지, 혹시 다른 목적이라도 있는지 따져 묻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공회의원이긴 하지만 그래도 총독을 찾아올 때는 부담이 없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기도했고, 기도 부탁도 하고 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빌라도 총독을 만나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부탁했더니, 마치 자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순적하게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회의원 요셉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빌라도 총독의 마음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59-60절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요셉은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새 무덤에 장사 지냈습니다. 예수님이 갑작스럽게 죽었고, 또한 바로 안식일이 닥쳐서 장례 준비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시신에 바를 향품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체를 잘 닦고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장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을 때 자기가 묻힐 무덤 하나 장만해 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잠깐이지만 남의 무덤을 빌려서 장사되셨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님한테 와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할 때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살아계실 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죽어 묻힐 때도 그랬던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었다면, 잘 살았다는 말 듣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낌 없이 주는 나무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쉘 실버스타인이 쓴 ‘아낌 없이 주는 나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옛날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에게는 사랑하는 소년이 하나 있었고, 그 소년과 나무를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여 자주 놀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소년은 점차 나이가 들며 나무를 잘 찾아오지 않아, 나무는 혼자 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나무를 찾았을 때, 나무는 소년을 반기며 “같이 놀자”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나무에게 “돈이 필요한데 돈을 주지 못하겠냐?” 물어, 나무는 “자기에게 달린 사과를 따서 도회지에서 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사과를 따 도회지에서 팔았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돌아왔습니다. 그 소년은 “집 한 채를 마련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나무는 “자기 가지를 베어다가 집을 지어라” 하였고, 가지를 베어간 소년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다 되어 돌아 온 소년은 멀리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하였고, 나무는 “자기의 줄기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 여행을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나무는 행복하였지만 정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소년은 다시 돌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 때 그 나무는 가진 것이 밑동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소년이 필요한 것은 편안히 앉아서 쉴 곳이었습니다. 나무는 “앉아서 편히 쉴 곳은 늙은 나무 밑동이 최고”라며, “밑동에 앉아 편히 쉬라”고 하였고, 소년은 그리 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무는 행복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낌없이 주는 분으로 표현했습니다. 롬 8:32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61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아리마대 요셉의 도움을 받아 급하게 장사를 지내긴 했지만, 여인들은 무덤에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그 여인들을 무덤에 붙잡아놓았습니까?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 아낌 없는 사랑을 받았던 여인들입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예수님을 따랐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운명을 달리한 예수님이 보고도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도 바르지 못하고, 급하게 장사를 치른 것이 너무 마음에 걸립니다. 그렇다고 그 여인들이 계속 그곳에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두 사람이 예수님의 무덤 위치를 봐두었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다시 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62절 ‘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예수님이 처형된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빌라도를 찾아왔습니다. 빌라도 입장에서 썩 반가운 손님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들을 찾아온 목적은 뻔합니다. 예수님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이 양반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 사실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면, 입장이 난처해집니다. 자신의 입장도 그렇고, 공회의원인 요셉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집니다. 이미 무덤에 장사를 지냈는데, 무덤에 가서 시체를 다시 가져올 수도 없는 일입니다.
63-64절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다행히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에 무덤을 지켜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그것도 사흘간만 지켜달라는 거였습니다. 세상에 무덤을 지켜달라는 요구를 받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하마터면 웃음이 나올 뻔한 걸 겨우 참았습니다. 아니 죽으면 끝 아닙니까? 그가 살았을 때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주장을 했다고 해도, 그건 살아있을 때 주장입니다. 살아 있을 때 무슨 주장인들 못하겠습니까?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한 사람이, 아담 이래로 한 둘이었겠습니까? 하지만 이제 그는 죽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죽은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그런데도 종교지도자들은 그마저도 미덥지 못하다며, 무덤까지 지켜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예수의 시체를 도둑질하고는, 예수가 부활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65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빌라도는 조금은 빈정거리는 투로 대꾸했습니다. 성전의 경비병으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룟 유다를 앞세우고 가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잡았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본의 아니게 무덤 앞에서 보초를 서게 되었습니다. 살다살다 무덤 앞에서 경계 근무를 서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산 사람을 지키기 위해 보초는 서봤지만, 시체를 지키기 위해 보초를 서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습니다.
66절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종교지도자들은 무덤마저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러 갔지만, 이번에는 빌라도의 협조를 받지 못했습니다. 빌라도의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전 경비병으로 지키면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돌을 인봉했습니다.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원히 무덤에 가둬두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덤문을 가로막고 있는 돌을 열어주지 않으면, 죽은 자 스스로 나올 수 없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습니다. 빌라도에게 사형 판결을 얻어낸 것,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한 것에 이어, 무덤을 돌로 봉인함으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불의가 잠시 정의를 이긴 거 같았습니다. 무덤이 잠시 예수님을 가둔 거 같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은 예수님을 결코 가두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송가 160장을 쓴 로우리(R. Lowry)라는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새벽 기다렸네 예수 내 주,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주, 거기 못 가두네 예수 내 구주, 우리를 살리네 예수 내 주.” 그렇습니다. 그들은 헛되이 지켰습니다. 그들은 헛되이 무덤을 봉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덤 속에 가두려고 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그분은 사망에 매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갇혔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의 헌신도 헛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 살아있는 자와, 먼저 죽은 자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무덤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잘 알게 하옵소서. 그리고 가슴으로 늘 뜨겁게 감사하며 감격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와 희생을 우리가 기리며, 우리도 그렇게 살게 하옵소서. 거짓이 승리할 수 없으며, 불의가 승리할 수 없고, 이 악한 세상이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일시적으로 거짓과 불의와 악한 세상이 승리하고, 우리는 무참하고 철저하게 짓밟히며 패배하고, 진리는 영원히 땅 속에 파묻혀 버리는 듯하더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거나 불안해하거나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무덤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삶의 행위 가운데 진정한 십자가가 살아있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