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은 젊어서 이름은 마다(末多)이고 왜왕 고오(455~477) 곧 유랴꾸 천황이었던 고니끼 곧 곤지 왕의 둘째 아들이다. 백제 임금이 된 뒤 이름은 오다라였다고 일본서기는 적고 있는 것이다. 왜나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고 고마(곧 공주)로 백제 서울을 옮긴 문주왕 그리고 그 아들 삼근왕이 시해되자 급거 백제로 돌아와 임금 자리에 올랐다. 동성왕의 출자 마다왕은 다복했던 젊은 시절을 현재 사꾸라이 시에 있던 오시사까 궁에서 지낸듯하다.
규슈 앞 가까라 섬에서 태어나 마다 등 다섯 사촌 형제와 어린 시절을 함께 지낸 사마왕 곧 왜왕 부(577~501)이자 무령대왕(502~523)과도 사이좋게 정답게 지냈던 것 같다. 그 유명한 스다하찌만 구리거울에 새긴 본치 곧 아홉명의 인물은 다름아닌 이들 고니끼 임금 집안과 정답게 지낸 사마 임금을 상징한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475년에 고구려군의 손에 비명으로 돌아간 형왕인 개로왕과 국모, 태자의 죽음 그리고 쑥밭이 된 가나구루 소식에 충격을 받았는지 왜왕 고오곧고니끼 임금 곧 유랴꾸 천황(武)은 477년 즈음에 돌아간다.
그 뒤를 이은 왜왕이 사마왕이며 왜왕 부로 중국문헌에 적히는 임금이다. 당시 나이가 열여덟이였다. 서기 479년에 모국 백제의 대왕이 돌아가자 불야불야 고니끼 임금의 다섯 아들 가운데 가장 슬기롭고 굳세다는 둘째 아들 마다가 백제 왕실의 추앙을 받으며 왜나라에서 백제로 돌아가 왕위에 오른다. 475년에 고구려군에게 짓밟혀 잿더미가 된 가나구루(한성)를 빠져나와 고마(공주)에서 새로 백제를 세우겠다는 문주왕에게는 지키는 호위 군사도 변변치 못했을 상황이라 토박이 호족들에게 힘없이 노출되어 있다 싶이한것이 당시 백제 왕실의 모습이 였겠다. 이러한 바드러운 정황 속으로 동성왕은 뛰어든 것이었다. 믿는바는 왜나라에서 이곳까지 호위해온 왜군사 500명뿐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함께온 가신이 아무래도 가와찌 왕실에서 몇 명 왔겠으나 장수와 병사는 주로 쓰꾸시에서 댄 것이었다. 일본서기에 쓰꾸시에서 500명 군사가 마다왕을 지키며 백제로 간 것으로 적고 있는 것이다. 당시 쓰꾸시 곧 규슈에는 백제 다무로인 히쮸(火中) 곧 고마구니(肥國)라는 나라가 있었으며 종주국의 구원에 적극이었던 것이다. 왕실을 지키는데 500명이란 큰 숫자는 크지 않았으나 그래도 가장 미더운 군사였을 것이다. 우선 동성왕이 한 일은 선왕 시해에 가담한 역적을 치는 일이였겠다. 그리고는 지방 거점에 대리고 온 심복 장수를 배치하며, 국내외로 다무로 제도를 활용하여 나라 안정과 왕권 강화를 꾀해갔던 것이다. 그 자세한 것은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으니 짐작을 해 볼 따름이다. 이런 짐작에 도움이 되는 고고학 자료 한 가지가 있다. 전라도 광주시내에 있는 둥글모난 무덤 두 기이다. 그 무덤에서 나온 유물로 봐서 5세기 후반에 지은 무덤이라고 고고학자들은 말한다. 이곳 광주는 전라도의 군사와 정치의 요충지이고 보면 이곳에 동성왕은 왜에서 데리고 온 심복 장수를 보내 지키게 한 것은 아닐는지? 이 장수가 천수를 다한 뒤에 임지였던 그곳 다무로에서 그의 고향 왜나라 풍속에 따라 귀인을 묻는 방식인 둥글모난 무덤을 지어줬다고 짐작한다. 이런 둥글모난 무덤이 5세기 후반에 왜 광주에 지어졌는지 그 까닭이 비로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사실은 성왕 시대에 백제 벼슬아치 가운데 왜식 이름을 가진이가 여럿이 눈에 띄는 사실이다.
가령 긴메이 2년 7월(541) 대목의 일본서기 기사에는 백제 사절 가운데 기신 나솔 미마사라는 이름이 보인다. 그 다음 글에 기신 나솔은 기신(왜인)이 가라 여인과 결혼해 생긴 자손으로 백제에 머물러 살면서 나솔 벼슬에 오른 사람이라고 하고 기신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겠다고 했다. 이들은 동성왕이 데리고 온 왜인들의 후손일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동성왕은 어려운 정치, 군사 상황에서 빈사 상태의 백제에 돌아와서 어렵게 중흥의 기틀을 마련해간 것이다. 고니끼 임금의 무덤 아마도 477년에 갑자기 돌아간 작은 아버지 왜왕 고오(興)곧 고니끼 임금의 뒤를 이은 왜왕 부 곧 시마 임금은 백제 왕실의 법도대로 삼년상 끝에 고니끼 임금을 장지에 묻었을 것이다. 그 장지는 어디일까? 우리 짐작에는 이른바 닌도꾸능 이라고도 하는 다이센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문헌과 고고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무덤은 오사까 남쪽 사까이 시에 있으며 세계에서 셋째로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째는 진시황 무덤이요 둘째는 이집트 파로아의 무덤이고 그 다음으로 큰 것이 다이센 무덤인 것이다. 무덤의 모양은 둥글모나고 그 길이는 약486m정도이고 둥근 부분의 지름은 약25m, 높이는 약33m이다.
이것을 짓는데 어림으로는 열해가 넘께 걸렸을 것이란다. 문헌상 여러 정황을 살피며 왜왕 부는 478년에서 501년 사이에 왕위에 있었다. 그리고 다이센무덤에서 나온 유품의 제작연대로 봐서 5세기 후반에 이 무덤은 지어졌다는 것이 통설이고 이때 당시 왜왕은 부였던 것이다. 이 무덤에서 나온 구리 거울은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과 닮았고 용무늬고리자루칼은 백제대왕이 흔히 후왕에게 하사하는 위세품인 봉황내지 용무늬고리가 달린 것이 였다. 현재 일본에서는 천황 무덤은 절대로 손을 못대게 되어 있는데 위 고고학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고고학자 모리에 따르면 19세기 말에 아직도 법이 느슨할 때 사까이 고을의 우두머리가 이 무덤을 파봤고 발굴품은 곡절 끝에 골동상 통해 미국 보스턴 미술관으로 넘어가서 그 곳에 보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무덤에서는 그 밖에 투구와 갑옷도 나왔고 로마 유리잔도 나온 것이 발굴당시 기록에 그림과 더불어 전해지고 있다. 이 갑옷과 투구도 그 꾸밈새로 봐서 5세기 후반 내지 6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밝혀졌고, 유리잔은 멀리 로마 유리임이 밝혀지고 있다.
무덤을 두른 도랑을 보수하다가 나온 원통 토기도 그 질그릇의 생김새가 5세기 후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고 보면 이 무덤은 아무래도 5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덤에는 누가 묻혔을까? 5세기 중국 역사서에 적혀있는 왜 오왕 중의 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밝힌바 5세기 후반에 가와찌 왕권에는 왜왕 부(478~501)가 있었고 이는 바로 시마왕이며 6세기 초에 백제로 돌아와서 무령대왕이 된 임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477년 즈음에는 왜왕 고오(455~477)이였던 고니끼 임금이 이즈음에 돌아갔으므로 바로 이 임금이 다이센 무덤에 묻혔을 것이고 백제 관련 유물도 바로 이것을 뒷받침 한다고 우리는 보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고고학 사실은 이 무덤의 둥근 부분에도 돌칸이 있고 돌널이 있으나 유물은 아무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는 것이다. 우리 추측에는 모난 아래 부분에 고니까 임금이 묻혔다면 위쪽 둥근 부분에는 당시에 비명에 돌아간 개로 임금을 위한 것이 아니었겠나 생각해 본다. 왜왕 부의 아버지가 개로왕이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적었지만 이 무덤을 짓는 데는 막대한 국력이 필요했겠으며 가와찌 왕권은 이것을 어떻게 감당 했을까 궁금해진다. 대왜 개국 당시에 가와찌 일대는 가와찌 호수를 두른 물진 거친 곳이 었다는 것이며 치수위한 토목공사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곳에는 주로 백제 이민들이 많이 살던 곳이여서, 고국에서 지니고 온 쇠 연장이며 토목 기술이 큰 이바지를 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런 토목 기술은 그대로 이 무덤을 짓는데 요긴 했을 것이다. 다이센 무덤이 고니끼 임금을 묻은 무덤이라면 동성왕도 아버님 무덤을 짓는데 나름대로 힘을 보태지 않았을까? 다만 기록이 없으니 알길은 없으나 힘껏 이바지 했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당시 왜왕은 부/시마 였으며, 이이가 작은 아버지를 기리면서 이 무덤을 지었을 것으로 우리는 보는 것이다. 요서에 있던 백제 다무로 백제 본기 동성왕 10년(490년) 대목에는 다음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위나라에서 군사를 보내 침입해 왔으나 우리 군사에게 졌다.”
분명히 북위군과 백제군이 싸웠는데 북위군이 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반도 안에서 있던 전쟁이 아닌 것이다. 곧 바다건너 중국 동북지방에 백제의 다무로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해서 백제는 중국 땅에 다무로를 차리게 됐을까? 313년 당시에 고구려는 요동을 차지하면서 여세를 몰고 남하하여 낙랑을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오호십육국 시대라는 정세여서 극히 불안정 하던 때였다. 313년 당시에 중국은 잠시 진(晋) 아래 하나되었으나 팔왕자의 난리라는 격변의 시대에 접어 들면서 한반도에 있던 낙랑은 본토로부터 버려진 상황이였던 것이다. 다가오는 고구려 압박 아래 낙랑 태수는 요동에 있던 태수의 권유로 그 곳으로 물어나게 됐다고 한다. 한편 요동으로 물러난 낙랑 태수는 낙랑 남쪽에 있던 백제에게 손짓하며 이곳 요서로 군대를 보내 고구려를 요동 서쪽에서 치면서 남하하는 고구려를 서쪽과 남쪽에서 견제 하자고 제안해 왔을 것이라는 것이다. 낙랑철수에 따라 그 유민 일부는 백제에도 흘러 들었겠고 이들을 통해 백제와 요동의 낙랑 태수 사이에는 소통이 잘 됐을 것이다. 그 뒤에 요서에 진출한 백제 모습을 단편이나마 중국 문헌에서 찾아 볼 수 가 있다. 가령 진서 서기342년 대목에는 요동, 요서에서 활동하던 고구려 군, 백제 군, 우문 단부군의 기사가 있다.
진서 모요광전 함강 8년 기사를 보면 고구려, 백제 및 우문단부 사람은 모두 군사가 옮겨온 무리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가 하면 자치통감에도 목종2년 346년 대목의 기사에서 녹산으로 쫓겨왔던 부여 일파가 백제의 공격을 받고 서쪽 연나라 쪽으로 옮겨 갔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백제군은 340년대에 요서에서 활동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기사에 더하여 송서(宋書),양서(梁書),남사(南史),통전(通典) 등의 백제전에는 백제가 동진(晋)나라 때(317~420) 유성과 북평 사이에 백제군(郡)이라는 다무로가 있었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사실을 밝혀 주는 전거의 하나로 만주 원류고에 실린 백제 관계 기사를 들을 수 있다. 여기에 실린 백제의 상표문(589년)을 간추려 본다. 동성왕 10년(서기 488년)에 있던 위군의 침공을 막아낸 기록에 이어 두해 뒤인 서기 490년에도 위나라는 백제의 요서 다무로에 침입해옴에 동성왕은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장수들을 보내서 이 위군을 크게 무찔렀음을 남제서 백제전에서 엿볼 수가 있다. 서기490년 남제에 보낸 백제의 상표문을 보면 이 싸움에서 이긴 공로를 기리면서 이들 장수들에게 벼슬을 내린것을 알 수가 있다.
곧 영삭 장군 면중왕(面中王) 저근을 관군 장군, 도장군, 도한왕(都漢王)에, 건위장군 팔중후(八中侯)여고를 영삭 장군 아착왕(阿錯王)에, 건위 장군 여력을 용양 장군 매로왕(邁盧王)에, 광무 장군 여고를 건위 장군 불사(弗斯)후에 임관했으며, 서기 495년에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상표문에서는 사법명을 정로 장군 매라왕(邁羅王)에, 찬수류는 안국 장군 벽중왕( 壁中王)에, 해례곤을 무위 장군 불중후(弗中侯)에 목간나는 광위 장군 면중후(面中侯)에 제수됨을 알수가 있다. 이들의 임지는 한반도 안이지만 이 상표문에는 중국 안에 있던 다무로에 제수된 장수 이름들도 보이는 것이다.
같은 상표문에서 사신으로 보내는 세 사람 곧 건위장군, 광양 태수, 겸장사인 고달, 건위 장군, 조선 태수, 겸사마 인 양모, 선위 장군, 겸참군 인 회매 등의 작위 진급을 바라고 있다. 아울러 모대 백제왕은 진동 대장군에 제수됨을 알수가 있다. 여기에 적힌 다무로 열여섯개 외에 왜나라에 있던 다무로가 세 곳 제주도에 있던 다무로와 흑치국에 있던 다무로와 양자강 하구에 있던 다무로를 다하면 모두 스물 두 곳의 다무로를 백제는 거느렸던 것이며 이것은 량나라 역사 책에 적힌 대로 22개의 다무로가 백제에 있었다는 기사와 일치하는 내용인 것이다. 위 상표문를 보면 백제말 확고 대신에 왕이니 태수라는 한자 호칭을 쓰고 있으며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 이기에 중국 호칭을 쓴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밝힌바 왜나라의 이나리야마 쇠칼의 글에서 보면 다무로를 다스리는 벼슬아치의 칭호는 다스리는 나라 땅 이름에 더하기 확고 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으며 이러한 다무로 호칭 제도는 369년 이래로 백제의 전통이였던 것이다. 백제는 538년에 왕도를 고마에서 소부리 곧 부여로 옮기면서 다무로 제도에서 중앙집권제도인 오부 오방제도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던것이다. 이에 따라 다무로 제도는 자연히 없어 졌을 것인데, 곳에 따라서는 가령 중국 요서에 있던 다무로의 잔제는 백제가 멸망한 서기660년 대 까지도 연면히 존재했던 놀라운 사실을 통전 백제전은 전해주고 있다. “장성(요서 동부)가까이 있던(백제)잔당은 차츰 그 힘이 빠져 돌궐이나 말갈과 더불게 됐고, 그들 임금이였던 부여 숭은 고국에 돌아 갈수도 없어 그만 사라졌다.”
믿나라를 읺은 백제의 요서 다무로는 300여년 동안 존속 끝에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요새 밝혀진 사실인데 이른바 흑치상지가 다스리던 흑치국은 그의 묘비가 발견되면서 밝혀진바 이 다무로 또한 백제 멸망과 더불어 사라졌으나 그 다무로의 후손들은 아직도 중국 광서성 백제허 라는 고장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들 다무로의 분포로 봐서 백제는 그 판도가 한반도 서부와 남부 그리고 왜나라와 중국의 요서와 흑치에 걸쳐 아주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가히 대백제이었던 것이다. 신라에 청혼과 왜인 벼슬아치 빈사 상태의 백제에 돌아온 마다 임금은 그 동안에 다무로 제도의 강화로 지방 세력의 통치에 성공했고 나라 밖에서도 중국 요서 지방에서 다무로를 다지면서 고구려 압력을 국내외에서 잘 막아 낸 것이다.
중국 남제가 고구려 장수왕에게 표기 대장군이라는 작위를 내리자 고구려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동성왕은 사신을 484년에 바로 남제에게 보내 내속하기를 바라고 허락을 받아내며 국제 외교에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고구려에 맞서기 위해 신라와도 화친 정책을 유지하면서 고구려 에 함께 맞서고자 한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동성왕 7년(485년)에는 신라에 친교사신을 보냈고 동성왕 15년(493년)에는 신라에 청혼을 하여 신라는 이찬 비지의 딸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동성왕 16년(494년)에는 고구려의 침공을 받은 신라가 견아성에서 포위 당하자 백제는 3천 병사를 보내 신라를 구출했고 이듬해에 이번에는 고구려가 백제군을 치양성에서 에워싸고 침공하자 신라는 장군 덕치를 보내서 이들을 구원 하기도 한것이다. 이렇듯이 동성왕은 군사와 외교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후 한 것을 볼수가 있다. 그러면 왜나라와는 어떠한 교섭이 있었을까? 일본서기에 따르면 오다라 임금은 현재 사꾸라이시의 오시사가 궁에서 살다가 479년에 쓰꾸시에서 보낸 500명의 왜군의 호위하에 백제에 돌아와 대왕자리에 오른 것으로 적혀있는데 삼국사기는 이에 관해 한마디도 적지 않고 있다.
이들 왜나라 군사는 어떻게 됐을까?
이들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는 문헌상으로는 일본서기 긴메이 임금 대목에 등장하는 이들 쓰꾸시 장수 아니며는 가와찌 장수의 2세 내지 3세로 짐작되는 왜식 이름을 가진 백제 벼슬아치의 존재이다.
가령 기신 나솔 미마사, 물부 시덕 마기무, 덕솔 시나노 시수, 나솔 시나노 실라, 나솔 물부 가꾸 등 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며 이들 이름 가운데 특히 기신 미마사의 경우 일본서기 긴메이 대목을 보면, 기신 나솔은 기신이 백제 여인과 결혼해서 나은 이이며 백제에 머물어 살면서 나솔이란 벼슬을 받은이 같다고 적고 있다. 이들이 왜와 갖은 외교 무대에 비치는 것이다.
또 한가지 단서는 고고학 자료인데 5세기 후반에 광주 월계동에 지어진 둥글모난 무덤 두기와 명화동 장고분이다. 월계동에 있는 둥글 모난 무덤의 경우 그 규모는 작으나 생김새는 일본에서 흔히 보는 둥글모난 무덤을 닮았으며 둘레에는 도랑까지 두르고 있다. 다만 이들 무덤에는 너와 돌을 깔지 않았고 무덤의 옆에 켜를 만들지도 않았다. 한편 부장품을 봐서는 백제 제품이며 원통 토기도 일본것을 닮았으나 그 제작 기법은 판이하다는 것이 이 무덤을 연구한 고고학자의 견해이다. 물론 압록강 상류 연안에서 발견되는 2세기 즈음의 둥글 모난 무덤 등의 존재, 이성산성 기슭이나 임진강 물가에서 볼 수 있는 둥글모난 무덤 또는 3~4세기에 지었다는 방이동에 있는 둥글 모난 무덤의 존재로 봐서 일본에서 보는 둥글모난 무덤의 원류는 백제일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4~6세기를 통해 일본 각지에서 크고 작은 둥글모난 무덤이 유행 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관주에 5세기 말 즈음해서 이 같은 무덤이 지어졌을까? 당시 광주에는 면중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확고를 동성왕은 보내고 있었으며 이 고장은 백제의 다무로 였던 것이다. 당시 동성왕 휘하에는 왜군 장수가 여럿 있었음은 일본서기에 분명히 적혀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왜인 장수가 임지인 이 곳에서 살다가 둥글모난 무덤에 묻혔을 가능성이 커보이는 것이다. 그의 고향 풍속을 따라 그 공로를 기리며 이런 무덤을 썼을 것으로 우리는 어림해본다. 왜왕 부는 동성왕의 사촌동생 477년에 돌아간 왜왕 고오 곧 유랴꾸 천황을 뒤이어 조카인 시마는 왜왕 부가된다. 그리고 479년에는 고니끼 임금의 둘째 아들 마다가 백제로 돌아와서 동성왕이 된 것은 이미 앞에서 살핀바 있다. 이들 두 임금 사이는 사촌 사이였을 뿐이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터라 그 사이는 아주 두터웠던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501년에 시해되자 왜왕 부는 황급히 백제로 돌아와 무령 대왕의 자리에 오른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왜왕 부가 서기 501년까지 왜왕이였음을 알 수 있는 증거는 502년에 왜왕 부를 진동 대장군으로 제수한다는 기사가 양나라 사서 무제 대목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바로 502년은 양나라가 세워진 해이고 건국을 경축하는 사절을 왜왕 부는 보냈었을 것이기에 그 답례로 위 제수기사가 실린 것으로 우리는 보는 것이다. 그 전례로 제(齊)나라가 세워진 479년에도 왜왕 부를 안동 대장군에 제수한 데서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때에도 왜왕 부가 경축 사절을 보냈을 것이 짐작되는 것이다. 501년까지는 왜왕 부는 왜왕이였던 것이다. 또한 동성왕이 501년까지 엄연히 임금 자리에 있는데 왜국왕이던 시마가 501년 이전에 백제로 돌아 올 리도 없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는 461년에 시마 임금이 태어나자 백제로 돌아온 것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479년에 유랴꾸 임금이 돌아갔고 그 뒤를 세이네이, 겐소, 닌껜, 부레쓰 네 임금이 왜 왕위를 506년까지 이어간 것으로 적으나 이것은 왜왕 부의 재위기간을 호도하려고 꾸며낸 가필이라고 우리는 보는 것이다. 돈독한 사촌 사이였던 왜왕 부와 백제 동성왕이 다스리는 두 나라 사이에 있었을 국제 관계 기사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 거의 없다는 것은 아무래도 일부러 역사 관계를 숨기려 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비명에 간 임금 동성왕은 스물세해 동안 온 힘을 다해 백제를 지키고 다시 일으켰다. 그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호국의 수단으로 왕권과 군력 증강에 힘을 다한 듯하다. 그의 치세 21년 대목을 보면 그 여름에 가믐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서로 잡아먹는 극한 지경에 이르고 도적이 들끓자 군신들은 곡식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할 것을 아뢰었으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한산 사람들 오 천명이 고구려로 도망갔다고 한다. 그리고 10월에는 염병이 크게 돌았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임금은 왜 곡간을 열고 굶주린 백성을 풀어 먹이지 않았을까? 짐작컨대 언제 있을지도 모를 외적 침입에 대비하고저 군량 비축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다음해 22년 기사를 보면 봄에 임류각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길이 되고 연못을 파서는 진기한 새들을 기르게 하자, 간관이 상소로 말렸으나 무답이었고 궁문을 닫았다고 적고 있다. 군력 증강에만 몰두한 것도 아닌 것이다. 한편 임금의 사냥 이야기가 잦다. 치세 5년 기사에도 14년 기가에도 23년 기사에도 사냥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군사 목적을 곁들인 사냥이 아니었겠나 생각해보기도 한다. 불행히도 501년에 마지막으로 사비벌로 11월에 사냥갔다가 큰 눈을 만나 마을에 갇히게 된게 화가 됐다. 그 동안에 좌천에 앙심을 품고 있던 백가 장수가 놓은 자객에 임금은 찔려 앓다가 12월에 돌아 간 것이다. 502년에는 왜왕 부가 백제로 돌아와서 대왕 자리에 오른다. 그의 이름은 사마 였다. 이 사마는 섬을 뜻 하는 백제 말이며 그는 ‘가가라’라는 규슈 앞바다의 작은 섬에서 태어났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그는 왜왕 자리를 또 다른 사촌형 ‘오오도’에게 물려준다. 502년의 일인 것이다.
이 사실은 스다하찌만 구리거울에 새긴 글에서도 알 수가 있다.
503년에 시마 임금은 닛쥬(日十)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구리거울을 만들어 다네데/오오도 임금에게 장수를 빌며 하사한다. 이른바 스다하찌만 구리 거울이다. 다네데/오오도 임금은 일본서기에 ‘게이따이’라는 시호 이름을 가진 임금이다.
이 구리 거울에 새긴 대왕 이름에서 닛쥬(日十)는 대왕 이름으로 보인다. “쥬”라면 백제 말로 땅이나 나라를 뜻한다. 이것은 동성왕이 임명한 백제 다무로의 확고 땅 이름들 가령 히쥬, 후쥬, 멘쥬 등 이라고 부른데서도 볼 수가 있다. 닛쥬(日十)는 ‘해나라’를 뜻하게 된다.
백제를 다스리는 자신을 해나라 대왕이라고 그는 부르던 것이다. 쥬(十)나 쥬(中)나 백제 소리로는 한가지 땅을 것이다. 맺는 글 고구려 침공으로 쟂더미가 된 가나구루(한성)을 뒤로 하고 왕도를 고마(공주)로 옮긴 문주왕이 시해되고 그 아들 삼근왕마저 돌아간 빈사 상태의 백제로 마다 임금 곧 동성왕은 왜나라에서 500명 왜군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대왕 자리에 오른다. 그 뒤 국내외로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 있던 백제를 안정시키고 재도약의 기틀을 동성왕은 이룩한 것이다.
근초고왕 때부터 시행하던 다무로 제도를 잘 쓰면서, 과감히 호족들을 기용하는가 하면 데리고 온 왜장을 지방에 보내 안정을 도모하기도 하고, 신라와 손 잡고 고구려의 침공을 막아내는가 하면 중국 요서에 있어오던 다무로도 잘 지키면서, 사촌인 왜왕부가 다스리는 왜나라와도 협조가 잘 된듯하다. 빈사 상태의 백제의 국방과 내실에 그는 힘 썼던 것이다. 그리고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만년에 저질은 실책으로 그는 오랜 근위 장군이던 백가가 놓은 자객의 칼을 맞아 비명에 돌아간다. 그리고 왜왕 부는 502년에 모국 백제에 돌아와서 대왕 자리에 오르면서 백제는 또다시 강성한 나라가 되는 것이다.
-문헌 김 영덕 : 백제를 되살린 동성왕 ; 바히네 백제 배움 복판, 2009.10 *필자/서강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