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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첫 관문 인천 지역의 교회 일꾼
제19대 중부연회 한경수 감독
항구 도시 인천은 나라의 관문으로서 그 역할을 했다. 19세 말 나라 문빗장을 꼭꼭 잠가 둠으로써 감정지와(坎井之蛙)가 되어버린 조선이 처음 문빗장을 열어젖힌 역사적인 장소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은둔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아침 햇살이 밝게 비치는 진정한 아침의 나라가 되었다. 1883년 1월 1일은 아침의 밝은 햇살이 조선을 비추었던 역사적인 개항일이다. 이후 서구 열강들이 앞 다투어 조선에 서구 문물을 흘려보냈다. 국가적으로는 전근대적인 낡은 겉옷을 벗고 근대화의 새 옷을 갈아입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열린 틈을 이용하여 조선에 복음의 물결이 흘러 들어왔다. 1884년 6월 24일 일본 주재 미감리회 매클레이 선교사가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당시 제물포항을 이용하여 입국했다. 그는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교육과 의료라는 조건부 선교를 윤허받았다. 이로써 하나님은 반만년 동안 황폐했던 이 땅을 기경(起耕) 하시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셨다. 마침내 복음의 씨앗을 뿌릴 두 농부가 조선에 도착하였으니 감리교 아펜젤러(亞篇薛羅) 선교사 부부와 장로교 언더우드(元杜尤) 선교사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에 이들이 제물포항(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디면서 인천은 한국 기독교 역사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인천은 한국교회 신앙의 요람이요 성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천의 교회들은 이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선교 140년을 바라보는 2023년까지 부흥과 성장의 수레바퀴를 돌리며 달려왔다. 대한민국 근대역사의 중심 역할을 다한 신앙의 성지로서 후세에게 한국역사에 길이 남을 분명한 이정표를 제시했다. 이러한 일이 있기까지는 이름 모를 선진들의 숨은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그 가운데 복음의 관문으로서의 인천의 위상을 우뚝 세워 인천을 빛낸 분이 있다. 그가 바로 주암(朱巖) 한경수(韓景洙) 목사다. 그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주안교회 제8대 담임목사요 중부연회 제19대 감독을 지내신 분이다. 이 글은 한경수 목사가 인천을 한국 기독교 성지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헌신적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의 발자취를 조명한다. 이 글의 대부분은 그의 자서전 「한경수 감독 회고록」(1997), 「한경수 감독 은총의 팔십 년」(2005)을 참고하였다.
1. 신실한 복음의 일꾼
한경수 목사는 1926년 9월 1일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일신리 412번지에서 아버지 한홍석(韓洪錫)과 어머니 이창순(李昌順) 속장의 4남매 중 막내이자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여 서부연회 해주지방 정덕리교회의 속장으로 충성하는 일꾼이었다. 모태신앙인 한경수 목사는 유아기 시절에는 속장인 어머니 등에 업혀서 속회를 참석하여 어깨너머로 신앙의 세계를 맛보았으며 정덕리교회 안에 있던 진명학원(유치원)에서 신앙교육을 잘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나이 14살 때 1940년 해성면 심상소학교를 졸업하고, 17세 되던 1943년 12월 25일에 연안읍감리교회 김영순(金靈淳)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944년 연안공립중학교 2학년에 편입하여 중학교 시절에는 달리기 선수로 전국체전에도 출전할 정도였다. 해방을 맞이하고 1948년에 연안공립중학교를 졸업했다.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참전을 위하여 군 입대하고 훈련을 받던 중 영양실조에 걸려 의병제대했다.
그 후 고향 연백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임시로 강화도 항포에서 거주하다가 망월복음중학원에서 잠시 교사로 있었는데 마침 조산교회 김봉록(金鳳祿) 전도사의 요청에 의하여 강남복음중학원으로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조산교회 권사로 속회를 돌보는 속장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때 김봉록 전도사의 소개로 고향 연백 출신의 처자인 이을순(李乙順)을 만나 1952년 12월 8일에 결혼하여 새 삶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953년 강남복음중학원이 동광중학교로 정식 개교하면서 한경수 권사는 이 학교에서 국어와 체육 담당교사로 봉직했다. 그즈음 양도면 길정리에 있는 길정교회에 담임자가 군 입대하는 바람에 담임자가 부재 상황이 발생했다. 갑자기 담임자가 필요하자 당시 강화지방 박용익(朴容翼) 감리사는 지방 서기였던 김봉록 전도사의 추천을 받아 한경수 권사를 이 교회 담임자로 파송하였다.
한경수 권사는 길정교회에서 목회경험을 하면서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어머니의 유언이 생각났다. 어머니 이창순 속장은 아들이 목회자가 되는 것을 유언했었다. 시대가 매우 혼란스러운 때라서 한경수 권사는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그 유언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다가 비로소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서 동광중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당시 전쟁으로 인해 임시 부산으로 내려갔던 장로회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했다.
1955년에 한경수 전도사는 안양에서 삼막교회를 개척하여 첫 목회를 시작했다. 그해 수원지방 제암교회에서 분리 개척된 발안교회에 부임하여 정식 감리교 목회자로 파송받았다. 1957년 감리교 대전신학교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발안교회 목회 이후 인천동지방 도화교회(1957~1961), 만수교회(1961~1964)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1964년 해방 후 제15회 중부연회에서 이환신(李桓信)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바로 인천동지방 만석교회로 파송받았다. 한경수 목사는 3년 주기로 목회지를 옮기는 것이 싫었다. 이번 만석교회에서는 장기 목회를 꿈꾸고 있었지만 파송제 감리교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3년이 되니까 새로운 임지로 파송받게 되어 1967년 한경수 목사는 정든 만석교회를 떠나서 주안교회로 부임하게 되었다.
장기목회의 꿈을 주안교회에서 이루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이곳이 평생 목회지가 되기를 기도했다. 그즈음에 감리교 내에서는 파송제도의 폐단을 직시하고 이 제도에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주안교회에서 장기 목회를 가능하게 했다. 1973년에 중부연회 인천동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70년대 남구 주안동은 인천의 개발 중심지로 떠오르면서 개발의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경수 목사는 이런 도시 발전에 보조를 같이 하여야 교회가 부흥한다고 믿고 목회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오직 목회에 전념했다. 그 계획에는 대성전 건축이 포함되었다. 그릇대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1974년에 주안교회 옆 주안동 190-4번지에 1,350석 규모의 시민회관이 개관되었다. 한경수 목사는 부활절과 성탄절 때는 시민회관에서 연합으로 모여서 예배했다. 대성전은 시민회관보다 더 큰 규모를 의미했다. 당시로서는 상상불가의 꿈처럼 보였지만 꿈은 꾸는 자에게 이루어진다고 했듯이 마침내 한경수 목사는 1983년에 시민회관보다 더 큰 2천 석 규모의 대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봉헌했다.
큰 그릇은 그만큼 일하는 분량을 의미했다. 한경수 목사는 1982년에 인천시 기독교연합회장에 취임하여 인천시 전체 교회를 섬기는 사명을 감당했다. 지역 내에서 크고 작은 일에 참여하며 목회와 지역 발전에 수고의 땀을 아끼지 않았다. 1988년 중부연회 제19대 감독에 당선되어 감리교단과 한국교회를 위하여 활동 보폭을 더욱더 넓혀 나갔다.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 연구자요 신실한 후예인 한경수 목사는 ‘세계는 나의 교구’라는 웨슬리의 선교 비전을 품고 실천하느라 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를 후원함으로써 땅 끝의 증인으로서의 사명도 감당했다.
2. 성경의 사람
1995년은 주안교회가 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창립기념으로 한경수 목사는 한국교회에 길이 남을 큰일을 준비했으니 성서박물관 설립이다. 이 일은 평소 성경 수집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어 맺은 알찬 열매였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오직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목회자다. 특히 목회자는 누구보다 성경을 사랑하고 많이 읽고 묵상하며 영감 있는 말씀을 준비하여 전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어느 해인가 한경수 목사는 한해에 구약 13번 신약을 28번을 다독할 만큼 성경을 사랑했던 목사다. 또한 역사에 남다른 관심이 많아서 기독교 관련 고서적을 수집했다. 은퇴하는 선배 목회자들을 찾아가서 감리교회의 옛 자료들을 수집하였는데 고 성경도 많았다. 이때 그는 기왕에 수집할 거라면 의미 있는 서적을 수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성경수집에 힘을 쏟았다. 세계 각처를 여행할 때마다 남들 관광하는 시간에 혼자 빠져나와 고서적 책방을 찾아다니며 가격이 얼마나 되든지 고 성경을 보는 족족 수집하였다. 수십 년 동안 변함없이 감당했던 성경 수집으로 다양한 언어, 시대별로 꽤 많은 고 성경들이 모아졌다.
그러던 중에 성경수집에 매우 귀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서울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소개로 웨이커필드라는 성경학자를 만났다. 그도 세계 각처를 다니면서 옛날 성경을 수집했는데 그의 소장품 중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성경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후세들에게 성경을 보여주고 가르치기 위하여 이 일에 전념하였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의 비전을 이룰 수 있는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 중에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에게 연락을 했다. 김홍도 목사는 그 적임자가 한경수 목사인 줄 알고 그와 연을 닿게 한 것이다. 웨이커필드 박사는 수천 권의 성경을 한경수 목사에게 기증하는 조건으로 박물관을 건립하여 후세들에게 성경 교육의 장을 마련할 것을 제시했다. 마침 주안교회는 교회학교가 차고 넘치던 때여서 당장 교육관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교육관 부지로 교회 바로 앞에 있는 약 300여 평의 대지를 구입한 상태였다. 그 교육관 5층에 성경박물관 개관을 계획하고 있었다. 마침내 교회창립 70주년을 맞이하는 1995년 4월 30일에 교육관 봉헌식과 국제성서박물관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한경수 목사는 이 박물관 초대 관장에 취임함으로써 성서박물관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 박물관은 제2대 임봉대 관장이 부임하고서 성경교육의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이후 주안감리교회 한상호 목사가 제3대 관장으로 취임하고서 대대적인 공사를 단행했다. 현재 국제성서박물관은 최첨단 교육시설을 갖추고 성경을 구경하는 박물관에서 실제로 체험하며 배우는 박물관으로 환골탈태하여 인천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성경을 가르치는 교육의 전당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감당하고 있다.
3. 한국 기독교 성지 인천의 꿈
1985년은 한국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온 지 백주년이 되는 해다. 한국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발 빠르게 준비하여 1983년에 「재단법인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총재를 맡았다. 이 사업회는 선교대회를 개최하고 기념교회 및 순교자기념관을 설립하기로 사업계획을 세웠다. 이때 기념탑도 순교자기념관 뜰에 세우고 복음이 들어온 인천 앞바다의 작약도에 큰 십자가를 세우기로 했다. 이러한 기념사업회의 계획을 접한 당시 인천기독교연합회장 전주석 목사(제22대, 요광장로교회)는 기념탑 건립은 용인 산속에 세우기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복음을 들고 들어온 복음의 첫 관문인 인천에 세우는 것이 더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100주년기념사업회 임원들을 설득하였다. 마침내 이 사업이 받아들여져 기념탑 건립을 인천에 세우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건이 붙었다. 부지마련과 건축비의 절반은 인천기독교연합회가 담당하는 안이었다.
이에 인천기독교연합회는 「선교100 주년기념사업회」를 조직하였다. 회장에 전주석 목사가, 총무는 조춘혁 목사가 맡았다. 1983년 5월 30일에 인천준비대회를 인천내리교회에서 개최하였다. 기념탑 건립에 부지 마련은 가장 시급한 일이었기에 연합회는 당장 이 문제를 인천시와 협의에 들어갔다. 마침 당시 김찬회 인천시장은 한미수교백주년기념탑, 인천개항백주년기념탑을 건립하였던 당사자였으므로 선교100주년 기념탑 건립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흔쾌히 부지 마련에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다. 김찬회 시장은 100년 전 제물포 포구였던 중구 항동 1-3의 땅이 기념탑 건립 부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항만청 소유의 국유지를 인천시가 사용할 수 있도록 행정절차를 마무리하고 기념탑 건립부지로 허가했다. 대신 기념탑은 건립 후 인천시에 기부채납하고 시는 이 탑의 유지, 관리, 보수 등의 책임을 지기로 했다. 1983년 12월 5일에 올림포스호텔에서 백주년 기념탑 부지허가서 전달식이 있었다. 이날 한경수 목사는 ‘믿음의 역사’라는 제하로 설교하였고 김찬회 인천시장으로부터 부지허가서를 전달받았다.
1984년 제23회 정기총회에서 용재호 목사(석바위장로교회)가 제23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용재호 회장은 그해의 주요 사업으로 선교100주년 기념탑 건립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1984년 6월 11일에 선교100주년 기념탑 건립위원회 1차 모임을 가지고 교단별로 대표를 선정했다. 1984년 7월 26일 주안감리교회에서 열린 2차 모임에서 기념탑 모형결정, 기공예배 날짜 결정, 모금방법을 논의했고, 구체적으로 건립위원장, 백주년 사업총장, 모금위원장, 모금부위원장 겸 사무국장, 회계를 선임했다. 특히 건립위원장은 인천시 전체 교회에 신망이 두터우며 원만한 관계를 가지고 존경받는 목사가 되어야 전체 교회 협력을 받아낼 수 있으므로 그 적임자인 한경수 목사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이후 건립위원회가 구체적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그해 11월 19일에 올림포스호텔 앞 로터리에서 기공식을 개최했다. 목원대학의 윤경자 교수가 설계하고 신동아건설에서 시공을 담당하여 선교100주년 기념탑 건축의 첫 삽을 떴다.
1985년 7월 22일에 기념탑 준공 대비 모임이 열렸다. 17m의 기념탑이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자 8월 15일에 준공식을 개최하기로 정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1차 중도금을 지불해야 했지만 모금된 건축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불가불 준공일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했다. 100주년이 되는 1985년을 넘기는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듬해 1986년 3월 30일 부활주일에 준공하고 기념탑 제막식과 박배근 인천시장에게 기념탑 기부채납식도 거행하였다. 준공하기까지 갖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마침내 선교 100주년 기념탑이 인천 중심지에 우뚝 세워짐으로써 명실상부 인천은 한국교회 기독교 성지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이는 한경수 목사의 숨은 노력과 헌신으로 이루어낸 인천기독교와 한국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기념탑은 준공되었지만 해결해야 할 부채가 남았다. 그동안 모금된 금액은 건축비에 많이 부족했다. 장기간 부채로 남을 경우 오히려 선교 100주년의 기념사업에 누가 될 것이 분명했고, 이는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될 것이었다. 이에 1990년 인천기독교연합회 제29대 회장 장자천 목사(인천송현성결교회)는 선교 백주년 기념탑 청산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또다시 한경수 목사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기념탑 건립위원장이었던 한경수 목사가 끝까지 이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지만 그만큼 해결할 적임자가 없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인천의 모든 교회가 동심동덕(同心同德)으로 건축비를 조성하는 사업이라서 모두에게 신뢰받지 않은 인물이 건축비 청산위원장에 앉을 수 없었다. 그런 면에서 한경수 목사는 인천시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인품과 성실하고 강직한 지도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터였기에 그가 이 일에 적임자로 다시 추대받는 일은 당연했다. 사실 부채청산은 건축보다 더 어려운 과정이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도록 설득하는 일은 인생사 가운데 꽤 힘든 일 중의 하나다. 좋은 인간관계, 존경받는 인물이 아니면 쉽지 않다. 이미 건축위원장으로 수고했으니 이 일은 다른 사람이 맡아야 도리 상 맞을 것 같았으나 청산위원장도 한경수 목사가 또 맡게 된 것은 그만이 이 일의 적임자임을 자타가 인정한 것이다. 한경수 목사 역시 자신이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대로 말없이 감당하며 열심히 모금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그의 지도력은 빛을 발하여 3년 만에 건축 부채를 모두 청산하였으니 주변의 놀람이 매우 컸다.
충분하게 예산이 확보되지 않은 건축은 남다른 희생이 뒤따른다. 당시 선교 100주년 기념탑 건립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한국교회 안에서 인천기독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은 일이라서 모두가 이 일에 기꺼이 찬성하였지만 정작 그 무거운 책임을 질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경수 목사는 남들이 꺼려하는 일에도 마다하지 않고 솔선수범의 자세로 늘 맡겨진 일에 열심을 다했다. 그 덕에 한경수 목사는 건립위원장을 본의 아니게 7년 동안 맡으면서 깔끔하게 모든 일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4. 세계로 복음을 내보내는 첫 관문
2000년대를 바라보는 한국교회는 선교 2세기를 맞이한다. 이제 새로운 선교를 준비하고 인천을 새로운 선교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었다. 한국교회는 국내외 선교를 위하여 문화와 선교전략을 보다 효율적으로 펴 나가야 할 시점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는 100년 전 인천이 복음을 받아들인 첫 관문이었지만 선교 2세기를 맞이하는 인천은 이제 복음을 다시 내보내는 첫 관문으로서 그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기독교선교문화연구회가 조직되어 1993년 11월 22일에 주안감리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 연구회는 다음과 같이 4가지의 활동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문화와 복음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이해한다.
둘째, 상이한 문화에서 효율적인 복음 전달의 방법을 모색한다.
셋째, 문화에서 오는 제 문제들의 근원과 해결 방안들을 모색한다.
넷째, 선교와 문화에 대한 깊은 연구와 실제성을 통하여 한국 개신교의 첫 요람지인 인천지역 사회를 한국 기독교선교문화의 기지로 확보한다.
연구회는 선교와 문화를 접목하기 위한 사업을 준비하였다. 문화 행사로 학술좌담 토론회, 기독교 문학과 미술연극공연, 전시회, 문집발간 등이 있었다. 선교 행사로는 성경연구, 생활상담, 해외선교사 초청간담회, 지역 내 선교 기관과의 연계를 통한 공동사업 모색, 회원교회를 방문하여 사업홍보 및 활동 사항 보고 등이었다. 이날 창립총회에서 한경수 목사는 이사장 겸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회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어도 담을 그릇이 없으면 물건의 가치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이 일은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실행해야 할 과제였다. 좋은 계획을 가지고 인천이 한국교회 기독교 성지가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일들을 감수해야 했다. 그것이 개척시대의 일꾼들의 몫이었다. 한경수 목사는 선교100주년기념탑 건립위원장을 맡아서 건축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몸으로 체험했었다. 여러 교회의 도움을 받아 건립해야 하는 건축은 그 고단함이 거의 희생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기독교회관 건립 역시 만만치 않는 사업이라서 누구나 쉬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경수 목사는 이 일 역시 인천 기독교회를 위한 일이고 초창기 일꾼들이 감당할 몫이라고 여기고 개척자들이 겪는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궁극적으로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고 인천시 기독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인천성시화운동본부 이사장으로 있을 때 인천이라는 지역사회 변화를 위한 노력으로 “살기 좋은 인천을 만들자”는 평소 신념이 또 이 험난한 일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했다. 한경수 목사는 인천 기독교회를 위하여 또 헌신할 수 있어서 기쁘게 초대 이사장 및 기독교회관 건축위원장을 맡았다.
사실 기독교회관 건립의 필요성은 이 연구회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태동되었었다. 1991년 2월 11일에 기독교회관 건립추진 준비위원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이 회의는 인천기독교연합회 증경 회장들을 준비위원으로 하며 32명의 발기인이 함께했다. 한경수 목사는 준비위원장을 맡고 적극적인 홍보와 모금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부지 선정부터가 난항이었다. 많은 예산이 소요되는 일이라서 목표하는 건축비를 마련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한경수 목사는 기독교성지 인천에 꼭 필요한 회관이기에 중도 포기할 수 없어서 불철주야 하나님께 기도하며 열심히 이 일에 매진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와주셨다. 기적이 일어났다. 희망백화점 황인철 장로가 자신 소유의 구월동 1131-12 소재 216평을 헌납함으로써 그토록 해결하기에 어려웠던 부지가 마련된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것이다. 황 장로의 대지 헌납은 회관 건립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렇게 하여 1995년 4월 2일에 기공예배를 한 후에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건축비 모금은 여전히 어려웠다. 결국 건축비 미지급 사태가 발생하여 공사는 1996년 5월 4일부터 중단되고 말았다. 게다가 건축에 대한 교계의 신뢰성도 떨어지면서 모금활동에 많은 제동이 걸렸다. 입주하려던 기관이나 단체도 뒤로 빠지고 나니 재정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했다. 한경수 이사장은 각 교회 목회자와 장로들에게 기독교회관 건립의 시대적인 요청을 강조하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해 달라는 공문을 보내고 도움을 요청했다.
모금에 어려움이 계속되면서 건축 중단은 기약을 모르고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또 나타났다. 재단법인 인천청소년문제연구소가 미래발전을 위하여 건물을 가지기 원했지만 자체 여력이 부족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 기독교회관 건축비를 일부 감당하고 건축비만큼의 지분을 건물로 할당받아 무상 증여받는 형식으로 동참하게 되었다. 상호 계약이 잘 성사되어 건축이 1997년 7월에 재개되었고 5개월이 지난 1997년 12월에 완공되었다. 돌이켜 보면 동일한 목적을 가진 두 단체가 한 건물을 같이 사용한다는 것은 보기에도 좋은 일이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했다. 다행히 해를 넘기지 않고 그해 12월 20일에 인천기독교회관 1층에서 감격적인 봉헌식을 거행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이렇게 한국기독교 복음의 첫 관문인 인천에 기독교회관이 건립됨으로써 이제는 복음이 들어온 인천이 다시 전 세계로 복음이 나갈 수 있는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기독교선교문화연구회는 날개를 달은 듯 21세기 새로운 시대를 향한 비상을 꿈꾸게 되었다. 이런 위대한 사업의 이면에는 초창기 개척자들의 헌신적인 수고는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누구나 맡기를 꺼려하는 이 사명을 한경수 목사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묵묵히 양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가면서 인천지역에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던 것이다.
5.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한경수 감독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고향 황해도 연백으로 가는 뱃길 10km 정도의 떨어진 강화에서 살면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닫힌 고향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타향에서 제2의 인생을 꿈꾸어야 했다. 목회자로 부름 받은 후 그는 주로 인천에서 목회활동을 함으로써 그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특히 인천이 기독교 복음의 첫 관문으로서 기독교 성지로서 위상을 높여야 할 시기에 필요한 중책을 성공적으로 감당하여 인천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1997년 3월 12일 숭의교회에서 개최된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56회 중부연회에서 은퇴하고 목회 일선에서 물러났다. 원로가 된 이후에도 한경수 감독은 국제성서박물관 관장으로 그의 사역은 중단되지 않았다. 국제성서박물관은 그 규모나 소장하고 있는 성경의 가치로 보아서는 세계에서 최고라는 이름에 걸맞는 위상을 지닌 국내 최고의 성경박물관이 되기까지 한경수 감독의 헌신은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이루어놓은 기독교 성지로서 인천의 위상을 제고하는데 또 하나의 기념비를 추가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푯대를 바라보며 쉼 없이 달려간 한경수 감독은 바울처럼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2011년 9월 22일에 향년 85세의 일기로 하나님 품에 안기었다. 그는 생전에 장기 기중을 서약했으므로 그의 몸은 또 다른 생명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죽음으로써도 그는 희생의 본을 보여주었다.
어떤 일이 생기면 사람은 방법을 찾고 하나님은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 한국기독교 역사 가운데 인천이라는 지역이 가지는 비중은 매우 크다. 복음의 첫 관문이고 첫 번째 선교사 아펜젤러가 갑신정변으로 인해 서울 입성이 불투명하자 잠시 기다리는 동안 인천에 머물면서 바로 예배를 드림으로 실제적으로 한국교회 첫 예배당이 형성된 자리이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역사 속에서 인천은 여러 모로 중요한 일들이 일어난 역사의 본고장이요 복음 선교에 있어서도 그 어느 지역과 비교할 수 없는 한국 기독교 성지다. 이런 인천의 위상을 잘 갖출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눈앞에 두었을 때 하나님은 ‘한경수’라는 당신의 종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하여 복음의 기념비적인 사역을 펼치셨다.
인천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한경수 감독, 이 일에 기쁨으로 헌신했으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신앙의 귀중한 유산을 남김으로써 다음 세대들에게 신앙의 선구자가 되었다. 마치 앞을 모르는 개척시대에 빛을 비추는 낮의 해처럼, 죽음으로써 어둠에 갇힌 여러 사람에게는 밤의 달처럼 빛을 비추는 삶이었다. 그의 수고와 헌신의 땀은 인천이라는 선교의 텃밭에 떨어져 이 땅은 이제 더욱 비옥하게 되어 미래 한국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제19대 중부연회 주암 한경수 감독
한경수 감독과 이을순 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