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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 가르쳐 준 계대결혼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나타난 여성 후손, 기업 무르기와 십자가의 구원원리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왕이 가르쳐 준 새계명 이웃 사랑은 복음 전파에서 희년법(천국 경제법)까지 지켜야 완성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알아야 할 내용이므로 퍼나르기 홍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종파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마 16:6)
주후 1세기 경 유대교의 종파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쿰란 동굴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금욕생활을 했고, 예수님에게 적대감을 가지거나 추종한 사실이 없으므로 성경에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반감을 보이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여러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외에 유대교와 로마 정부에 현실적 영향을 끼친 헤롯당과 열심당이 있습니다. 오늘은 화요일 성전강론을 비롯하여 고난주간에 자주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관련된 단체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바리새인>
바리새인은 ‘분리된 자(헬, Pharisee)'를 의미하고, 히브리어 '페루쉼(perushim)'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유대교 바리새인, 바리새파 유대교도로 신앙보다 종교 의식이나 낡은 관습을 존중하며, 독실한 체하는(위선적인) 사람들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위키백과). 이들은 모세오경 외에 선지서와 장로들의 유전까지 받아들여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했습니다. 바리새파에는 제사장뿐만 아니라 중산층까지 넓은 부류의 사람이 속해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 당시 바리새인의 수가 약 6,000명에 이르렀으니 1세기에 예루살렘의 인구가 2.5만~3만명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그 세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 온건적인 힐렐(Hillei) 학파와 로마와 외세에 배타적인 샴마이(Shammai) 학파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빌 3:5)과 니고데모는 개종하기 전까지 바리새인에 속해 있었습니다.
<사두개인>
사두개파는 사독의 후손들로 마카베오(마카비) 시대까지 제사장직을 수행했습니다.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정치적으로 지배 세력을 지지하고 협력하던 다윗시대에 사독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성전 중심의 기득권층 종교인들입니다. 넓게 보면 유대교 및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지지한 당파입니다. 주전 2세기에서 예루살렘 멸망(기원후 70년)에 이르는 기간에 세력을 가졌던 당파로, 귀족들이며, 대제사장 및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상류 계층입니다. 이들은 바리새인과 대립했는데, 바리새인이 종교적인데 반하여, 그들은 아주 정치적 색채가 강했습니다. 사두개인의 수는 비교적 소수이지만, 교양도 있었고, 특히 제사장 계급을 거의 독점하면서 세력을 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보수적, 현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나 천사, 영생, 영혼의 존재는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대립하지만, 예수를 베척하는 데에는 함께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산헤드린 공회에서 법관의 역할도 했으므로, 사도 바울도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행 23:1~9)
<에세네인>
엣세네파”는 “조용한 자들” 또는 “경건한 예배자들”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온 것으로, 개인적이고 은둔적이며 신비적 성향의 사람들이 따로 모여 형성한 분파입니다. 에세네인들은 여러 도시에 떨어져 살았지만, 서로 구제하고 몸을 씻으며 금욕주의적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모임을 가졌습니다. 학자들은 이들이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에서 분리된 분파로 봅니다.
에세네파가 흔히 쿰란 공동체라고 불리는 이유는 이들이 금욕생활을 하던 곳이 정치적 이유로 완전히 파괴되고, 그들의 정착지 중 하나였던 쿰란 동굴이 온전하게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앞으로 도래할 종말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세상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로마 제국이나 사회와는 격리되는 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성전 제사를 오염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했던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에 속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헤롯당>
유대의 종파는 아니지만, 헤롯 왕가에 속하는 자들과 이들에게 동조하는 유대의 분파를 뜻합니다. 이들은 통치자 헤롯의 지배를 따라 로마에 호의(好意)를 보이며, 유대의 민족주의를 반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적대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게 세금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 열심당>
열심당은 1세기경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여 조직된 유대인 분파이며, 로마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폭력과 무력 사용을 주장한 애국자 집단입니다. 예수의 제자 가운데 시몬(Simon, the Zealot)이 열심당원었으며(행 1:13), 예수를 배반한 가롯 유다도 열심당원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마지막 한 주간의 사역을 하는 중입니다. 처음 3일간은 성전에서 왕으로서 해야 할 통치와 강론을 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에 대하여 적개심을 품고 트집을 잡거나 그를 제거할 생각으로 고소 거리를 찾고 있습니다. 먼저 찾아온 무리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에 내는 세금에 대한 질문으로 책을 잡으려고 했습니다(막 12:13). 그다음은 사두개인이 찾아와서 부활의 때에 계대결혼을 한 자들의 미래에 대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눅 20:27).
부활과 계대결혼에 대한 질문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마 22:23,24)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들은 평소에 영생이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행 23:8). 사두개인들은 대제사장 가문으로 종교계의 최고위층임에도 영생이나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종교계의 최고 지도자들이 영적인 소경입니다. 그들은 평소에 의문이 있는 부활의 주제를 가지고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사두개인들은 많은 군중들 앞에서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나름대로 치밀한 준비를 갖춘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명기 25:5에 기록된 “계대결혼”에 대하여 묻습니다. “계대결혼이란”, 결혼한 형제가 후손을 보지 못하고 죽었을 경우 다른 형제가 이 죽은 형제의 아내와 결혼하여 죽은 자의 계보와 상속권을 이어주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는 의지할 때 없이 홀로 남은 여성을 보살피기 위한 제도입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계대결혼 질문에서 한 여성에게 남편이 일곱 번이나 바뀌는 극단적인 예를 들고 있습니다. 만약에 부활이 있다면, 이 여성의 남편은 누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도 몰랐고, 하나님의 능력도 몰라서 한 오해라면서 이렇게 답변을 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은 부활의 때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으며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은 자의 부활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다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 아래에서 모세에게 하신 출애굽기 3:6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바와 같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출애굽을 하게 하였으며, 그 후에도 구원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인간의 죽음 문제보다는 현재의 삶과 역사에 있으며, 그러면서 미래의 영생과 천국에 대한 소망을 두고 있습니다. 부활의 때는 모든 것이 온전하게 회복되는 것이므로 사두개인처럼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두개인들이 믿지 못하는 부활에 대하여, 부활의 실상을 확인시켜주고, 그 부활의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있는 자들에게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계대결혼제에 대한 사두개인의 성경 무지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이라 부를 것이니라(신 25:9,10)
그리고 질문을 한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지적한 것처럼 성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계대결혼에 대한 경제적 현실과 구속사적 이해가 약합니다. 삶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를 혼동하거나 염려하는 것입니다. 계대결혼제도는 지금 우리도 전통 윤리관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하여 부부가 된다는 것이 그렇습니다. 룻은 친족의 시당숙뻘인 보아스와 결혼으로 혈통을 잇습니다. 이런 결혼제도는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예의범절의 기초도 지키지 않는 비윤리적 행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대결혼제도는 그 당시 사회에서 결혼한 여성이 자녀도 없이 홀로 남았을 때, 필요한 생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몰락한 한 가정을 복원시키는 생활구원의 수단이었습니다. 끊어진 남성의 족보와 기업을 여성의 역할로 잇는 제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결혼으로 이루는 한 가정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결혼으로 성립된 한 가정은 미래에도 역사 속에서 그 혈통과 기업이 끊어지지 않고 영구로 존속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유업으로 주어질 때까지 계속됩니다.
만약에 한 가정에서 결혼한 부부에게 아내가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경우 남편은 아내를 다시 맞으면 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남자는 가정을 가지면 기업이 주어지기 때문에 아내가 죽으면 재혼으로 다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죽었을 때입니다. 이때는 살아있는 여성이 살아갈 수 있는 생계 수단이 없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결혼한 여성에게는 기업의 상속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한 부부에게 남편이 아들 없이 죽으면 살아있는 과부에게는 기업의 상속권이 없으므로 생존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 홀로 된 여성이 시동생의 씨를 받아서 죽은 남편의 씨와 기업을 잇는 제도를 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의 죽음으로 파기된 가정도 자녀를 얻어서 복원하게 됩니다. 물론 형수(또는 제수)에게 씨를 빌려준 시동생은 자기 아내인 본처와 자녀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대결혼은 홀로된 여성의 생존을 보장하고, 가족과 가정의 영구적 존속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배된 토지는 그 지파와 가족에게 영구로 존속시키려는 희년법 취지의 연속입니다. 한 가정에 분배된 기업은 아들이 없어서 상속자가 끊어지면 딸에게 상속권을 주어서 그 지파에 남겨지도록 합니다. 이것도 희년법의 적용 원리입니다. 이것은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기업을 보장하기 위하여 정하신 경제 규례입니다. 이것이 땅의 소유자 되시는 하나님이 친히 정한 희년법이고, 계명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계대결혼제도는 당사자들이 지키기를 꺼립니다. 유다의 장남 엘이 아들 없이 죽었을 때 유다의 둘째 아들 오난이 자기가 해야 할 계대(繼代)의 의무를 거부합니다. 오난은 형수인 다말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고 설정을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악하므로 오난은 바로 죽어야 했습니다(창 38:9,10). 셋째인 셀라도 나이가 차서 계대 의무를 준행할 때가 되었지만, 이를 기피합니다. 그래서 다말은 시아버지의 씨를 직접 잇습니다. 룻기를 보면 홀로된 룻에게 먼저 계대결혼 의무를 수행해야 할 자가 있었지만, 이를 거부하여서 보아스가 그 의무를 대행하게 됩니다(룻 4:6). 이처럼 계대결혼 의무를 거부하는 이유는 죽은 형제의 기업을 죽은 자의 아들에게 상속하기보다 자기 이름의 직계 자손에게 그 기업을 상속하게 하려는 재물욕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율법은 이 계대결혼법을 엄격하게 지키도록 당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계대결혼법을 지키지 않으면 장로들에게 고하여 신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신 벗긴 자의 집”으로 낙인을 찍습니다. 그만큼 모세의 율법은 희년법과 그 부속법인 계대결혼제도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성이 대(代)를 이은 족보를 선택하여 오십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마 1: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눅 3:23)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보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구원의 역사는 씨(혈통)와 땅(기업)을 이어주는 과부나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5대손 베레스는 시부의 혈통을 직접 받은 이방 여인 다말의 용기있는 결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사사시대에 에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역시 이방 여인, 기생 라합이 살마(살몬)의 씨를 이었습니다. 이방 여인 룻도 보아스와의 계대결혼으로 다윗 왕가의 혈통을 잇습니다. 이것이 희년법이 말하는 고엘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 땅을 준다는 약속은 누가복음 족보에서 이방 여인인 다말, 라합, 룻의 생존권을 보장하여 준 기업의 상속권을 통하여 이어지고 있습니다. 포로시대에도 베들레헴의 기업은 여고냐와 네리의 기업을 상속받은 여성 혈통을 따라서 스알디엘과 스룹바벨로 이어집니다(마 1:12, 눅 3:27, 대상 3:19). 포로시대에 스룹바벨은 여성 상속자(딸, 슬로밋)를 통하여 레사에게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상 3:19, 눅 3:27).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적 아비 요셉은 마리아의 상속권을 따라서 기업을 이어받습니다. 누가복음 족보 기록이 상향식인 것은 혈통보다 상속권을 중시하여 이를 추적한 계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성을 통하여 한 가정의 기업을 이어오는 레위기 희년법이자(레 25:23~28), 민수기 상속법입니다(민 27:7, 36:8).
예수 그리스도는 여성의 계대결혼과 여성의 기업 무르기로 상속권을 이어온 가계를 택하여 이 땅에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두개인이 질문한 부활과 계대결혼 문제는 이런 인간의 생존 문제와 역사, 그리고 이를 지켜온 하나님의 구속사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여성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가난한 자의 기업을 지켜주기 위한 계대결혼과 기업 무르기는 희년법에서 기업 무를 자, 고엘 제도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는 영어로 ‘kinsman- redeemer’입니다. 기업 무를 자의 히브리 원어는 ‘고엘(גאל)’입니다. 고엘은 ‘무르는 자(레 25:24)’, ‘보수자(신 19:12)’, ‘갚아주는 자(신 15:1,12)’란 뜻으로 곤경에 빠진 동족이나 이웃을 구해주는 구원자(속량자, 대속자) 가리킵니다. 고엘의 동사는 ‘가알’이며, “구속하다”의 뜻입니다. 룻기는 계대결혼과 기업 무르기로 경제 구원을 다룬 책인데 여기에 기업 무를 자, 고엘에 대하여 무려 10회 이상(룻 3:9, 3:12, 3:13, 4:1, 4:3, 4:6, 4:8, 4:14 등)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업 무를 자, 예수 그리스도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토지 무르기를 허할할 지니라
인자가 온 것은 ...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 20:28)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을 베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은 이 희년법에 있는 고엘 제도의 원리가 적용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두개인들은 고엘 제도가 가진 큰 의미를 잘 모릅니다. 홀로 남은 여성의 생존권과 가난한 자의 기업권을 보장하여 살아있는 자의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제도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이런 무지한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참 고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엘 제도로 혈통과 기업을 이어오는 가계를 선택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생활에서 필수 수단인 기업 무르기를 모르면, 궁극적으로 기업 무를 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사두개인들은 기득권층에 살아서 가난한 자의 생활경제를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습니다. 사두개인이 제사장 가문이면 그들은 레위인 출신입니다. 레위인은 원래 기업이 없으며, 백성들의 토지거래와 기업 무르기를 중간에서 지도하고, 관리 감독을 해야 하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구약 역사를 보면 레위인과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토지거래와 기업 무르기, 기업의 상속권 계승에 대해 지도를 하거나 언급한 행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와 같은 타지의 기업을 소유한 부재지주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이 종교지도자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희년법과 경제문제는 철저하게 외면하여 버립니다. 물론 행정을 맡은 왕과 관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은 자가 부활하는 영생의 문제도 몰랐습니다. 또한 부활이라는 영생의 문제를 알았어도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제장한 희년법을 모르면, 지금도 사두개인들처럼 고엘 제도의 현실성과 참 의미는 모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희년법과 고엘 제도에 대하여 사도개인처럼 무지함을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계대결혼이나 토지 무르기와 같은 고엘 제도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경제 구원의 수단이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경제 구원은 사두개인과 같은 상류층과 부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엘 제도는 생존의 터전인 기업을 잃어서 구원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자들에게는 필요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영적이든, 경제적이든 윤리 도덕의 차원과 별개이며, 그 차원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집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는 죄에 대한 것이며, 이것이 영생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의 윤리와 도덕, 빈부의 격차, 신분의 귀천과는 관련없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주권적인 은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실 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고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계대결혼과 기업 무르기로 힘겹게 이어오는 족보와 기업은 궁극적인 기업 무를 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예비(예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엘 제도를 따라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영원한 대속자로 오셔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궁극적 기업 무를 자로서 삶에 필요한 경제 문제까지 온전하게 해결하여 주실 분입니다. 이것이 사두개인이 질문한 부활과 계대결혼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쳐 준 내용입니다.
왕의 강론, 십계명을 새계명으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의 명쾌한 대답으로 인하여 그들은 책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율법사를 다시 보내어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 것인지를 물으며, 시험하고 있습니다(마 22:35,36).
이 질문에 예수님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두 계명을 주십니다. 구약의 계명은 10가지 계명입니다.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에게 대한 것입니다. 5계명에서 10계명까지는 이웃과 사회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10계명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두 가지 계명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10가지 계명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이렇게 두 가지 핵심 주제로 단순하게 요약되고, 응축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왕의 신분으로 가르쳐 준 두 가지 게명 중 첫째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께 우리도 목숨을 걸고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첫째 계명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대로 목숨을 걸고 하나님은 섬겨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정금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때로는 두 마음을 품은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인간의 이런 약점을 알고 있고 그래서 늘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기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1계명에 대한 우리의 영적인 태도입니다.
그러나, 둘째 계명의 순종 여부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남은 과제입니다. 둘째 계명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의 순종 여부는 상당한 의문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2계명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 적용과 준행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1)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먼저 나와 이웃을 동일시하라는 뜻입니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듯이 이웃도 나와 똑 같이 소중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기적이라서 나를 이웃보다 우선순위에 둡니다. 강도를 만나 다친 사람을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피할 수가 있습니다(눅 15:31,32). 때로는 약육강식을 일삼는 동물적 본능으로 이웃을 나의 이기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전쟁 포로, 정치적, 계급적 노예제도, 경제적 착취 등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2) 그다음은 신앙 공동체가 이웃에 대한 사랑은 주로 복음 전파의 대상자로서의 관심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웃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죽어가는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귀한 것입니다. 특히 언어와 풍습이 다르고, 극한 가난과 질병의 위험과 치안의 위협에서 몸을 던져서 헌신하는 해외 선교사들을 볼 때 이보다 더 소중한 사역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 나라에도 초기에는 목숨을 걸고 복음을 갖고 들어온 선교사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그분들에게 받은 복음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빚을 갚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삶에서 필요한 이웃 사랑은 정신적, 육적인 희생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이 의사가 되려면, 의사보다 선교적인 사명과 희생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의사가 안정적인 직업, 높은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기보다 의사가 필요한 해외로 가거나, 산간오지, 낙도 등에서 봉사하려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자가 가져야 하는 은혜에 대한 보답이며,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에게도 빚을 갚으며 살아가야 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헌신적 또는 선교적 사명을 다했다고 하더라도 2계명의 순종이 영적인 복음 전수나 선교에만 머물러 있다면, 이웃에 대한 문제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이것이 희년법이 정해놓은 기업과 물질 문제에서 우리의 삶이 이웃 사랑으로 구현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3) 그래서 이웃 사랑의 완성은 이웃에 대한 경제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큰 주제이므로 제목과 단락을 바꾸어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과 경제법의 준행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 19:18)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는 서로 속이지(압제하지) 말라(레 25:14) 너희도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싱이 있으리요 세리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 5:46)
공동체에서 이웃 사랑은 사람이 만든 법과 윤리, 종교와 철학을 초월하는 생활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의 대상입니다(마 5:44). 야고보서는 굶주린 형제 자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약 2:15,16). 이스라엘 공동체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한 각종의 경제적 계명을 준수해야 했습니다. 이 경제적 계명을 집약된 하나의 용어로 표현하면 희년법의 순종입니다.
희년법의 준수가 이웃 사랑의 첫째 수단
레위기는 거룩한 생활을 위한 규례를 내용으로 하는데 앞 부분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필요한 제사 규례를 두었고, 뒷 부분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곧 이웃과 공동체의 삶에 필요한 경제 규례를 두고 있습니다.
레위기 희년법은 이웃에게 기업을 거래할 때는 서로 속이지(또는 압제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웃에게 기업을 팔 때는 희년까지 기간을 정하여 시한부로만 팔고 사야 합니다(레 25:15,16). 이 시한부 거래도 기업주(상속자)가 무르기를 요청하면, 항상 그 무르기에 응해야 하는 조건(레 25:24,25)이 붙습니다. 기업의 영구 거래는 영원히 금지합니다(레 25:23). 그런데 이런 조건이 필요 없는 기업의 거래는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에서 세(貰)를 제시한 임대제도 하나뿐입니다.
레위기의 경제 규례, 곧 희년법은 사람이 운전에서 도로교통법처럼 지켜야 하는 경제생활의 필수 규정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준 새계명 이웃 사랑의 시작은 이 희년법이 정한 경제 규례를 지키는데 있습니다. 도로교통법이나 희년법의 준수가 이웃 사랑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까 하는 의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법을 어기면 교통사고가 나서 나는 물론 이웃이 피해를 보듯이 경제에서도 희년법도 지키지 않으면, 나와 이웃, 그리고 공동체 전체가 피해를 입게 됩니다. 여기에 레위기 희년법을 따라 값을 대신 치러서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기업 무르기는 그 자체로 형제와 친족,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는 레위기 제사법을 따라 제사를 치러서 죄 문제를 해결받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째 수단인 것과 같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첫째 조건이면, 빚을 사하고 경작권을 되찾아서 경제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것은 이웃 사랑의 첫째 조건이 이라 할 있습니다. 희년법 준수는 이웃 사랑보다 먼저 해야할 전제 조건이며, 이웃 사랑이 완성되는 충분조건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법을 준행하였더라면, 그 나라는 자유와 활기가 넘치는 사회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혼란이나 왕정시대의 실패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전도 남아있고, 포로기도, 나라를 잃은 슬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년법의 준수는 나 자신과 가족의 생존은 물론이고, 이웃과 사회 전체의 안전과 화평을 위해서 필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곧 성경이 말하는 이웃 사랑은 희년법을 지키는 것과 관련이 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경제 강론은 이웃 사랑의 실체
예수님께서 공생애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과 재물신을 동시에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마 6:24). 부자에게는 가진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합니다(눅 18:18~30).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나의 이름을 위하여 가족과 전토를 버리라고 합니다(마 19:29, 눅 14:26,33). 이런 말씀을 하나하나를 깊이 파고 들어보면 모두 모세오경이 정한 희년법과 경제 계명을 복음시대에도 더 성실하게 지킬 것을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희년법이나 경제법 전체를 곱씹어 보면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구제는 본질이 아니다”라고 너무 쉽게 말합니다. 물론, 이 말은 그리스도에게는 신앙이 최우선이고, 구제는 그다음에 해야할 순서라고 이해한 것이라면 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희년법이나 구제에 대한 각종 경제 규례의 준수는 신앙 공동체를 넘어서 생활 공동체에서 필요한 계명들이었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지금도 우리는 희년법의 복음적 의미를 준수하면서 살든지 아니면 희년법이 필요 없을 만큼 온전한 구제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가 행한 공동체의 유무상통과 사도 바울이 말하는 교회의 연보도 공동체 전체의 평균적인 삶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었습니다(고후 8:13,14,15). 경제로만 보면 굶주린 이웃에게 빵을 주는 구제는 이웃 사랑의 시작이고, 기업을 주어 영원히 굶지 않게 하는 희년법 순종은 이웃 사랑의 완성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포도원 비유로 가르쳐 주는 천국 경제법은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 체제에서 희년의 목적과 구제의 의미를 동시에 실현하거나 충촉시킬 수 있는 제도입니다. 희년 없는 구제는 나의 재산이나 소득을 세금으로 내거나 구제금으로 지출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희년법과 천국 경제법은 나의 사유재산을 지키면서 이러한 경제적 계명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교회가 유무상통으로 내어놓은 토지와 재산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토지와 재산을 재분배하고, 사용 관리해야 하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며 성경의 경제법을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 공동체는 이 주제가 물질과 경제문제이기 때문에 덮어두고 있습니다. 그 세월이 2천년 그대로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초대교회에 임한 성령의 능력을 제한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사도행전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언급해야 할 주제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고간주간 화요일 성전강론에서 말하는 새계명은 먼저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나와 이웃을 한 몸처럼 동등하게 여기는 것, 진리와 생명의 복음을 전하여 사람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희년법이 가르치는 기업 무르기나 구제, 물질적 유무상통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온 율법이고,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성경 66권 전체의 가르침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 큰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