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사회주의
이스트번 메자로스 지음,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2.
국제연대는 자본의 구조적 적대자(노동계급: 역주)에게만 하나의 긍정적 잠재력이다. 그것은 좌파들의 이론적 논의에서 부르주아 국수주의와 습관적으로 혼동되는 애국주의와 조화를 이룬다. 좌파들의 이런 혼란은 흔히 착취적인 구조적 종속의 고리를 끊어야 할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에 대한 다소 의식적인 변명일 경우가 많다. ‘선진 자본주의’노동자들도, 비록 그들의 계급 적대자들보다는 훨씬 더 제한된 정도일지라도, 이 착취적인 구조적 종속의 부인할 수 없는 수혜자들이다. 그러나 애국주의는 외세에 의해 또는 실제로는 자신의 지배계급의 투항 행위에 의해 자신의 나라가 위협당할 때, 정당한 민족적 이해관계를 배타적으로 편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레닌과 룩셈부르크가 내부의 계급 착취자에게 대항한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 것은 옳았다. 그것은 또한 피압박 인민의 진정한 애국주의와 전면적으로 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애국주의의 실현 조건은 단순히 지배적인 국가 간 관계들을 변화시켜 기존의 정치적 또는 군사⋅정치적 종속을 강요하는 외세에 맞서 얼마쯤이라도 반격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공을 지속시킬 조건은 얼마가 걸리든 전 세계에 걸친 자본의 위계적인 구조적 지배에 대항한 지속적인 투쟁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지 않으면, 가끔 외세의 옛 정치⋅군사적 패권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벗어났지만 그다음의 사태 전개에서 옛 형태로든 아니면 새로운 형태로든 재건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피압박자의 국제연대는 이런 핵심적인 전략적 지향원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일관되게 실천적으로 준수할 것이 요구된다.117-118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는 다른 민족들의 노동 인민의 열망에 대한 충분한 존중 없이는 상상할 수도 없다. 이런 존중만이 건설적인 협동적 교류의 객관적 가능성을 창출할 수 있다. 최초의 정식화 이래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다른 민족들을 지배하는 민족은 자신의 자유도 빼앗긴다고 주장했다. 이는 레닌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했던 금언金言이다. 왜 그런지를 알기는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국가 간 지배 형태는 모두 통제의 행사가 상대적으로 소수에 의해 전유되는 사회적 교류의 엄격히 규제된 틀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체 또는 이른바 주변부와 변경 지역들을 지배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된 국민국가는 자국의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시민들이 그 지배의 행사에 공모共謀하는 것을 전제하며, 따라서 해방을 열망하는 노동 대중을 미혹시키고 약화시킨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지배해온 매우 사악한 국가 간 관계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피할 수 없는 사회주의 이론의 필요조건이다. 이는 방어적 민족주의의 개념적 기반을 제공한다. 그러나 자본의 사회질서에 맞설 절실하고 긍정적인 대안이 방어적인 것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모든 방어적인 입장은 궁극적으로는 불안정함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심지어 최선의 방어도 적에게 이롭게 세력관계가 바뀔 경우 집중포화를 받고 괴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사악한 세계화에 맞서서 이런 측면에서 필요한 것은 실행 가능한 긍정적인 대안의 명확한 표명이다. 즉 다양한 구성인자의 진정한 평등을 기반으로 제도화되고 관리되는, 형식적이 아니라 물질적⋅문화적으로 일체감을 가질 수 있게 실질적으로 규정된 국제적인 사회재생산 질서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국제주의 전략은 자본의 재생산적 ‘소우주들’(자본 시스템의 포괄적인 ‘대우주’를 구성하는 특정한 생산⋅분배 기업들)의 아주 사악한, 그리고 극복하기 어려운 정도로 대립적인 구조화 원리를 완전히 협동적인 대안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국적 자본의 파괴적 공세는 특정 국민정부만의 행동을 통해서는 국제적인 수준에서 긍정적인 극복은커녕 경감될 수조차 없다. 왜냐하면 적대적인 ‘소우주들’의 지속적인 존립과 그것이 (오늘날 자본의 집적⋅집중을 통해 발달하기 시작한 거대 초국적 기업과 같은) 점차 커지는 동일한 갈등적 유형의 구조하에 포섭되는 것은 필시 일시적으로 진정된 갈등을 조만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긍정적인 국제주의는 문화적⋅정치적 수준에서뿐 아니라 물질적 수준에서도 비위계적 의사결정 형태를 분명히 하고 포괄적으로 조정하는 것을 지원함에 의해, 사회신진대사 통제양식으로서의 자본을 넘어서기 위한 전략으로 규정된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의 재생산을 통제하는 핵심 기능이 ‘소우주들’의 성원에게 긍정적으로 양도될 수 있고, 동시에 그 성원들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에 의해 분열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활동이 매우 포괄적인 수준까지 아우르도록 적절히 조정될 수 있는, 그런 질적으로 상이한 의사결정 형태에 의해 긍정적인 국제주의는 규정된다.119-120
그러한 적대는 심지어 시몬 볼리바르가 실행 가능한 대안을 창안하려고 영웅적인 노력을 벌였을 때조차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왜냐하면 성공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 노예들의 법적 해방 같은 조치들을 훨씬 넘어선 사회의 전체 구조변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리바르가 (아직 그 역사적 시간이 도래하지 않았던) 영구적인 해법을 마련하려고 노력할 때, 그는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서조차 완강한 적의에 맞닥뜨렸다. 그 당시 그는 이들 나라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기여했고, 그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해방자라는 남다른 칭호로 존경을 받았었는데도 그러했다. 그 결과, 그는 생애의 마지막 나날을 비참하게 고립되어 보내야 했다.
그의 계몽된 평등관의 전파로 위협을 느꼈던 미국에 있는 그의 적들에 관해 말하면,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볼리바르를 ‘남쪽의 위험한 미친 놈’이라고 비난하고 묵살했다. 그들은 대내적으로는 노예주들이 볼리바르의 노예해방에 의해 직접 도전받음에 따라 위협을 느꼈고, 대외적으로는 전 세계의 조화로운 국가 간 관계들에 대한 그이 주창 때문에 위협을 느꼈다.
주요 방해물은 볼리바르가 주창한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정치적 통합과 그들 사회 소유주들의 적대적이고 갈등적인 구성인자들 간의 날카로운 대조對照였다. 그 결과, 정치적 통합에 대한 매우 고결하고 감명 깊은 호소조차도 식민주의 적수인 스페인의 위협이 심각할 때에만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위협만으로는 내부의 적대들을 치유할 수 없었다. 또한 상황은 새로운 위험에 대한 볼리바르의 선견지명이 있는 통찰에 의해서도 근본적으로 바뀔 수 없었다. 즉, 그는 “북아메리카의 미합중국이 신의 섭리로 자유의 이름으로 아메리카를 불행에 빠뜨릴 운명인 것 같다”고 통찰했다. 이 위험은 나중에 호세 마르티가 같은 기조로 훨씬 더 단호하게 강조했다. 두 사람 모두 인류의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이상적 해법은 편견 없이 주창했던 것만큼이나 그들의 새로운 위험에 대한 진단에서 현실적이었다. “콘스탄틴 대제大帝가 비잔티움을 고대 서반구西半球의 수도로 삼기를 원했던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파나마 지협地峽을 지구의 수도로 삼아 인류의 모든 민족을 조화롭게 결합시킬 방안을 제안했을 땡의 볼리바르, 그리고 ”인류가 우리 조국이다“라고 주장했을 때의 마르티가 그러했다.121-122
이들 이상의 정식화되었을 때 역사적 시간은 아직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즉 사회적 적대의 섬뜩한 심화와 그로부터 발생된 두 차례 세계대전의 끔찍한 유혈의 방향을 가리켰다. 말년에 볼리바르는 예전에 그가 상상한 아메리카의 날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음을 비참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상황은 매우 다르다. 미국이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에게는 유사類似 식민지 지배를 행사했던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조건들은 이제 유지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볼리바르의 ‘아메리카의 날’은 도래했다. 이 측면에서, 소수의 제국주의 열강이 다수 나라들에 오랫동안 유지해온 민족적 지배가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시대착오가 되었기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유효한 민족 주권이라는 이해관계는 도처에서 민족 분규들을 극복하려는 필연적인 공세와 완전히 부합한다.122-123
변화된 역사적 조건은 전前 제국주의 열강列强, 무엇보다도 열강 가운데 최대로 강력한 미국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리고 세계를 재식민화하려고 애쓴다고 해서 복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목적을 위한 그들의 계획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구실로 그들이 최근에 취한 몇몇 대단히 파괴적인 군사모험 방식으로 이미 드러났다. 실제로 매우 침략적인 열강은 ‘새로운 세계질서’에서 참 우습게도 그들의 의로운 ‘국제 테러와의 전쟁’의 성공을 위한 핵심 조건으로 새로운 만병통치약, 즉 사실상 뻔뻔스런 재식민지화 모험을 시작함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업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정당한 민족 분규들을 바로잡으려던 수많은 시도들은 국수주의 전략을 추구함으로써 탈선되었다. 왜냐하면 쟁점이 된 문제들이 성격상 지배하는 나라들의 강요된 민족적 이해관계가 국가 간 관계에 요구되는 전적으로 공평한 국제적 조건을 훼손하면서 몇몇 여타 민족의 정당한 사회적 목표를 희생하여 영구히 관철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볼리바르 계획Bolivarian project은 단지 미국에 맞서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조화로운 국제적 연합으로 상정된 매우 광범한 틀 내에서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의 전략적 통합과 평등을 표방하는데, 이는 선견지명과 역사적 타당성을 지녔음이 십분 확실하다. 실제로, 그들 사이의 연대에 기초하여 사회적⋅정치적 통합을 실현함으로써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은 인류 전체를 위하여 오늘날 선구적 역할을 떠맡을 수 있다. 그들 누구도 개별적으로는 북아메리카에 있는 그들의 강력한 적수(미국: 역주)에 반대한다 하더라도 성공할 수 없지만, 함께한다면 긍정적인 연방제적 해법을 창출하여 우리 모두에게 전진의 길을 보여줄 수 있다. 더욱이 그들은 진정한 국제주의로써 그것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그것은 그들이 수많은 유럽 제국주의나 유사 제국주의 전통의 과거로 인한 짐을 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23-124
세계의 다른 부분들도 민족모순의 심각한 문제를 마찬가지로 겪고 있다. 이 점은 끊임없이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동, 전 유고슬라비아의 폭력적인 붕괴, 소련의 해체와 그 매우 걱정스러운 (체첸 같은 데서는 심지어 폭발적인) 여파, 중부 유럽의 드러나거나 잠재된 갈등들, 인도 아亞대륙에서 주기적으로 분출하는 심각한 내부의 적대, 캐나다의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민족 분규, 북아프리카와 중앙아프리카의 다양한 무장충돌 등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민족적인 것과 국제적인 것의 변증법적 상호보완성을 우리 자신의 역사적 시간에 적절한 것으로 존중함으로써 만들어질 공평한 국가간 관계라는 지속적으로 무시된 쟁점을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고서는 근원적 문제들의 영구적인 해법을 찾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124-125
소수의 다수에 대한 제국주의 지배에서 그 절정에 달한 자본의 사회신진대사 통제양식의 적대적인 구조적 규정하에서는 일관된 사회주의 접근방식만이 이 측면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동전의 뒷면도 검토되어야 한다. 즉 우리의 사회신진대사 재생산양식의 핵심적으로 필요한 사회주의 변혁은 실질적으로 공평한 국제주의 틀 내에서 오랫동안 무시당한 피지배 나라들의 정당한 민족 분규에 대해 진실로 실행 가능한 해법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전혀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교류의 민족적⋅국제적 차원을 도처에서 그들의 긍정적인 공통분모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전략을 역사적으로 적절하게 추구할 때에만 우리 사회질서의 심각한 구조적 위기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125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