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넋두리
어호선
넋두리란 말은 불평을 늘어놓는 두덜거림을 지칭한다고, 사전에선 정의하고 있다. 허나, 나는 나이테를 두를수록 불평불만은 눈 녹듯 사라지고 매일 감사만으로 넘쳐나고 있으니, 넋두리치고는 호사스런 넋두리하고나 할까. 아무리 어려운 처지가 닥쳐와도 불평보다는 감사함으로 넘쳐나는 일상을 맞고 있으니 자연 불평의 넋두리를 할 틈과 겨를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불평의 넋두리보다는 발길 닿는 곳마다 뒤쫓아 오는 감사의 넋두리를 읊조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생계를 위협받는 나라가 아닌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은 고사하고라도, 오늘 이 시간까지 살아있음에 무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60대까지만 해도, 80을 넘어 중반 대에 이르기까지 살아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었다. 아버님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서 제대하던 해 일찍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갑년도 사시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고, 어머님은 80을 넘어 사시긴 했지만 나는 이보다 더한 연륜을 쌓으며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것도 내 발로 걷고,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듣고, 가고 싶으면 가고, 놀고 싶으면 놀고 있어도, 누가 간섭하는 사람 없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뭘 해도 누가 탓하는 사람 없이, 말 그대로 자유인이니 노년에서만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니겠는가. 어디 그 뿐인가. 아내와 헤어지거나 사별하지 않고 지금껏 동행하고 있음에 더더욱 감사할 따름이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일시 멈춰서 있으나, 이 나이까지 동 연갑 아내와 함께 댄스스포츠와 사교춤도 즐기고 있으니, 더 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 같다.
보통 인생을 3단계로 분류하는데 나이 30까진 배우며 터득하는 1단계, 이후 60까진 사회활동을 하는 2단계, 이어 90까진 노년을 즐기면서 인생을 마무리하는 3단계로 나뉘어볼 수 있단다. 물론, 백세시대라곤 하지만 실질적으로 100세까지 생존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볼 때 나는 인생 후반기를 그런대로 좋은 그림을 그리면서 잘 살아왔고 또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면 자만이고 무리수일까. 퇴직 후에도 프리랜스 방송인으로, 경로 나이가 될 때까지 8년 동안 방송을 이어왔는가 하면, 이후 각 사회단체에서 회장과 임원 고문과 위원 그리고 홍보대사와 강사 등으로 활동하면서 대학 특강과 노인대학 강의를 지속해 왔으니 말이다. 최근엔 코로나로 상황으로 뒤틀려 있긴 하지만-. 특히 무엇보다 300쌍이 넘는 결혼주례 집례는 내 후반기 인생길에 큰 보람이요, 긍지가 아닐 수 없다. 또한 회원은 많진 않지만 “행복의 씨앗 심기”란 카폐와 블로그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과 교감을 하고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요즘은 코로나로 온 지구촌이 몸살을 단단히 앓고 있으니 우리도 예외일 순 없다. 폭서가 계속 중인데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죄인처럼 입을 가리고 마음대로 나다닐 수도 없이 죄인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른바 집콕하고 있는 게 요즘의 대세다. 이런 집콕시대에 그나마 나에겐 유일한 낙이 둘씩이나 있으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하나는 하모니카이고 또 하나는 피아노이다. 이 두 악기는 우울할 수밖에 없는 코로나 시대에 크나큰 위로의 수단이 아닐 수 없다. 우울함이 엄습하려는 기세를 보이기만 하면, 하모니카를 불거나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쫓아버린다. 스트레스가 닥아 오려다가도 슬금슬금 꽁무니를 뺀다고나 할까. 언제 그랬나싶을 정도로 두 악기에 몰입돼 그저 즐겁고 행복의 늪으로 깊이 빠져들고 만다.
나의 하모니카 역사는 꾀나 깊다고 할 수 있다. 고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불기 시작했으니 수많은 연륜을 더했다고나 할까. 하지만, 악보를 익히면서 체계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만을 불어왔기에 악보엔 맹탕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때문일까. 지금도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하모니카에 입만 갖다 대면 연주가 되어 나온다. 내가 생각해도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피아노의 경우는 좀은 다르다. 처음엔 아는 노래를 중심으로 연주를 하다가 정확한 음을 잡기 위해 악보를 보면서 익혀왔기에, 피아노의 음과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감이 합성된 이른바 짬봉 연주라고나 할까. 두 연주 모두, 누가 들으면 가관일 수도 있겠지만, 코로나로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겐 유일한 낙이요, 스트레스 해소법이 아닐 수 없어 무한 고맙기만 하다.
이 세상 모든 생물은 언젠가 죽음이란 한계를 피해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자녀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서서히 죽음 준비를 서둘러야 하는 황혼기에 접어든 것 같아, 고삐를 바짝 조이고 나름대로 서둘러 실행에 나섰다.
우선, 내가 사후에 영원히 머무를 안식처와 영정사진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장소 문제로 몇 년을 고민 끝에, 고향 부모님 밑자리에 나를 비롯한 가족들의 납골묘를 조성하고, 부모님의 비는 물론, 아예 큰아들 이름으로 우리 내외 비(碑)까지 미리 세우고 나니 큰 짐을 벗어버린 듯 마음이 홀가분하다. 다음, 영정사진에 대해선 사연이 많다. 일찌감치 60대 중반에 찍어둔 영정사진이 있지만, 너무 젊고 마음에도 썩 내키지 않아 70대 중반에 찍은 사진으로 대체했다가, 납골묘를 조성하던 2년 전 다시 장안의 유명 사진관을 찾아 촬영해 교체시켰다. 이젠 앞으로 얼마를 더 살든 최종 영정사진으로 굳히기로, 집사람과 합의해 놓은 상태다. 그러하니 이제 당장 삶의 종착역을 맞는다 해도, 자녀들이 당황할 일은 없을 것 같아 안심이다. 이제 사는 날까지 마음껏 세상을 유유자적 누리기만 하면 될 것 같다.
따라서 언제 이승을 등진다 해도 일말의 후회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떠나야할 인생종착역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성명 : 어호선(魚浩善)
등단 : 한국수필(1983년)
약력 : 전 방송인(KBS). 함종어씨중앙종친회 회장. 대한노인회중앙회 이사.
화성시인재육성재단 이사. 국민건강보험 장기요양기관 평가위원.
한국주택금융공사 명예홍보대사. 동탄노인대학 학장.
수상 : 대통령 표창, 국가정보원 감사장. 화성시 문화상 등.
첫댓글 저는 조금 눚게 세상에 나왔지만 같은 생각입니다
아이쿠, 저는 아직 영정 사진 생각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