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여행 / 양선례
아프리카에 다녀왔다. 교회의 목사님, 스무 명이 넘는 교인들과 탄자니아에 선교 봉사 활동을 가는 친구를 따라갔다. 교회도 다니지 않는데 국내도 아니고 아프리카까지, 게다가 다른 교인들과 섞여 선교 여행이라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지인이 많았다. ‘교회 다니는 사람과는 친구하지 않는다.’를 넘어 ‘아내가 교회 다니는 순간 이혼이다.’고까지 말하는 남편과 살기에 그에게 사실을 밝힐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오랜 친구를 팔아 그녀들과 여행 간다고 꾀를 냈다.
남편은 한 직장에서 20년 넘게 근무했다. 그런데 사사건건 부딪히는 사람이 하필 고등학교 선배였다. 직속 상사여서 피할 수도 없었다. 말도 못하고 끙끙 앓으면서 그 스트레스로 속앓이를 오래 했다. 그분은 큰 교회의 장로셨다. 그때부터 개인의 행동을 일반화시키는 오류를 범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무조건 싫어했다. 일주일 내내 실컷 남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는, 일요일에 교회 가서 회개하면 그 죄가 사하여지는 거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사람과 살다 보니 나 역시 교회 문턱을 넘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친구가 대학 다닐 때부터 교회를 그리 열심히 다녔더라면 아마도 나는 그녀와 친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 배우고 싶은, 따라 하고 싶은 선배 교사에게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교회를 찾기 전까지 그녀도 나처럼 비신도였다. 여행을 즐기는 내게 아프리카 여행을 시켜 주고 싶었는지, 아니면 이 기회에 전도를 할 모양이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어쨌든 나는 당근을 덥석 물었다. 혼자 끼기는 쑥스러워서 망설이는 또 한 친구까지 설득해 가면서 말이다.
일요일마다 교회 차량을 운전하는 친구 남편, 그리고 그들의 두 자녀에다 젊은 시절 선교사가 되고 싶었다는 그녀의 여동생, 우리 둘까지 친구 꼬리에 달린 사람이 일곱이나 되었다. 도하 공항을 경유하여 아프리카 케냐 공항에 내렸다. 그곳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던 중형급 승합차 두 대에 나눠 타고 다섯 시간을 달려 탄자니아 아루샤에 도착했다. 그 도시의 킬리만자로 공항에 바로 닿는 비행기도 있었지만 짐 때문에 육로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차 지붕에 끝도 없이 짐을 실었다. 아루샤는 근처에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킬리만자로 산뿐만 아니라 세렝게티, 응고롱고로 분화구와 같은 사파리 여행의 중심이 되는 곳이어서 관광 도시로 유명하다.
주민들이 주로 쓰는 스와힐리어를 한마디도 못하면서 무슨 선교를 하랴. 선교사가 사는 모습을 살피고, 의료 시설과 치안이 좋지 않아 여러 위험에 노출된 그들을 위로하는 게 더 큰 목적이었다. 유치원이나 학교, 고아원을 운영하는 선교사에게 필요한 물건을 가져갔다. 그러다 보니 화물칸에 실을 수 있는 인당 40kg의 짐은 포기하고, 우린 기내용 가방 하나에만 소지품을 챙겨야 했다. 컴퓨터나 노트북, 크레파스나 색연필 등의 교육 기자재나 학용품, 샴푸, 화장품, 화장지, 칫솔 등의 생필품, 깨나 고춧가루, 간장, 된장 등의 먹거리가 화물칸에 담겼다. 오지에 사는 선교사를 후원하는 교회는 많다. 재정이 튼튼한 교회는 교인 중에서 선발하여 직접 파송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이 역시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파송이라는 말도). 그런데 대다수가 책상을 놓고, 창문을 수리하거나 컴퓨터를 지원하는 등 눈에 보이는 시설 투자에 돈을 쓴다. 재정의 일정 부분을 해외 선교 사업에 쓰는 이 교회는 선교사 개인의 생활을 돕는 데 초점을 맞췄다.
지역별로 선교사들이 흩어져 있기에 몇 군데를 돌면서 관광을 겸했다. 식사는 그들이 성의껏 준비한 한식이었다. 잡채나 김밥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비싸게 팔리던 열대과일 망고가 특히 맛있었다. 일요일에는 오랜 가뭄으로 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한 시간 반 달려 교회에 갔다. 에어컨도 없는 차안은 더웠으나 먼지 때문에 창문을 열 수도 없었다. 아프리카 내에서도 그들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지키며 살아가는 마사이족의 교회였다. 허허벌판에다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 한 동이 전부였다. 빨강이나 주황의 긴 보따리를 어깨에 둘러 한쪽 어깨는 가리고 다른 쪽은 그대로 내놓은 아이들이 적어도 백 명 이상 모였다.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는 아이도 많단다. 예배가 끝나고 주는 옥수수 가루가 욕심 나서 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당의 커다란 솥에서 음식을 떠서 접시에 담아 주니 손으로 집어 먹었다. 그날은 한국 교인들이 내는 특식이 있는 날이라 다른 날보다 많이 모였다고 했다. 다른 반찬 아무 것도 없이 밥에 카레를 넣어 조리한 염소탕 하나를 맛나게 먹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가진 게 많은지 깨달았다. 그늘 하나 없는 땡볕에서 점심을 먹으면서도 칭얼대는 아이도 없었다. 순한 눈망울로 낯선 우리를 호기심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슬리퍼 사 신을 여유가 없는지 맨발인 아이도 꽤 되었다.
탄자니아 제3의 도시 아루샤에서 비포장과 포장도로를 번갈아 가며 일곱 시간 달려 음카타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어린 왕자」에도 나오는 바오밥 나무를 보았다. 뿌리가 위로 뻗고 있는 듯한 나무가 맑고 푸른 탄자니아 하늘과 어우러진 풍경은 그대로 그림이었다. 기린 무리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야생의 기린은 생각보다 훨씬 목이 길었다. 아프리카라는 게 실감났다. 음카타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마을 주민 대다수가 전기도 안 들어오는 집에서 산다. 방 한 칸 크기의 작은 집에, 흙이 그대로 드러난 맨바닥에 이불을 덮고 누운 아이도 보았다. 우물을 파는 데도 돈이 많이 들고,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방법이 없으니 주로 빗물을 받아서 생활한다. 그곳에 한국인 선교사 부부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운영한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해 보이지만 유치원은 교실 두 칸, 초등학교는 한 칸이 전부이다. 물론 교사는 현지인이다. 이슬람이 주 종교인 사람들의 믿음을 파고들기에는 교육이 최고이다. 그 나라의 공교육의 수준이 신뢰할 만하지 않기에 이런 교육 사업은 효과가 있단다.
음카타에서는 한국에서부터 가져간 모기장을 치고 교실 바닥에서 잤다. 사람이 많다 보니 요와 이불이 충분하지 않았다. 바닥의 냉기가 그대로 올라와서 잠자리가 편하지는 않았다. 원래도 물이 귀한 데다 가뭄이 길어서 대지는 메말랐다. 선교사들도 빗물을 받아 정수한 물을 마신다고 했다. 종이컵에 받은 생수 한 잔으로 양치질과 세수를 했다. 햇살은 강하고, 눈을 보호할 선글라스조차 없다 보니 일찍 노안이 온다고 했다. 우리가 온 이튿날은 유치원 마당에서 돋보기 나눠 주는 행사가 있었다. 그 동네 사람이 다 모인 듯 200개나 준비했는데 금방 동이 났다. 젊은 아이 엄마까지 와서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구호품을 받을 때도 이랬을까. 학교에서 옥수수빵 받던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동생을 업고 낯선 외국인 무리를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던 여자아이도 떠오른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 중부, 동쪽에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 열 배나 되게 넓지만 오랜 사회주의 국가로 경제 발전이 더디다. 평균 수명이 2015년 기준 61.8세에 머문다. 그곳에 다녀온 지 만 9년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종교가 없다. 기도할 일이 생기면 망설이지 않는다. 그뿐이랴. 절에 가면 부처님께도 절한다. 정면과 양 측면에 각 세 번씩, 모두 아홉 번 공손하게 인사한다. 오래전에 동학년 선생님이 그럴 때면 빈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기에 곧잘 성의도 표시하면서. 그렇다고 선교 여행 따라간 게 무의미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남편과 살면서 나도 모르게 가졌던 편견이 많이 엷어졌다. 백 년도 더 전에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이 학교와 병원을 지으며 개화에 힘쓴 것처럼 우리나라 선교사도 오지에서 그런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믿음 하나로 사서 고생하는 사람이었다. 늙고 병들면 돌아올 것이 마땅치 않아 어려움에 처하는 선교사가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무엇보다 아프리카 속살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던 특별한 여행이었다.
다녀온 인연으로 음카타의 선교사로부터 종종 소식을 듣는다. 그 사이 건설 붐이 일고 있단다. 도로가 포장되고, 새 건물이 수시로 들어섰다. 주유소와 슈퍼마켓도 생겼다. 비만 오면 질척이던 시장도 새단장하여 지붕이 있는 데서 채소와 과일을 살 수 있단다. 언제쯤 다시 그곳에 가 보나. 나는 또 꿈을 꾼다.
첫댓글 정말 특별한 경험을 하셨네요. 묘사를 잘 하셔서 그 상황들이 그려집니다.
교수님 편하게 글을 좀 줄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마무리가 맘에 안 들어서 오히려 더 붙였네요.
혼나겠지요?
선교사들이 삶이 참 힘겨워 보이는데 그분들은 그 안에서 기쁨을 찾겠죠.
"선교사는 사서 고생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그런데 외사촌이 파키스탄에 파송되어 있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답니다.
의외로 많더라고요.
탄자니야 요즘 티비 프로그램에서 처음 봤는데 가 보고 싶네요.
가끔 좋지 않은 일로 뉴스에 오르내리는 종교인들 때문에 색안경을 끼고 보게 되는데
이런 이타적인 사랑을 베푸는 일은 존경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음카타 선교사와 얽힌 이야기도 언젠가 주제와 맞아 떨어지면 해 보려고요.
느끼는 게 정말 많은 여행이었답니다.
그만큼 특별했어요.
저도 마음은 교회인데 집안이 천주교라 그냥 속으로만 기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뜻대로 잘 안 되더라고요.
교회 건 천주교 건 가까이 있는 사람한테 '선을 베풀고 사는 게' 종교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10여 년전에 남아프리카에 위치한 남아공, 보츠아나, 짐바브웨, 잠비아 등을 여행했습니다.
열대지방이어서 무척 더울 줄 알았는데 견디만 했습니다. 희망봉에서 바라본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곳의 거센파도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저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테이블마운틴을 언제나 가 보나 재고 있습니다.
아드님과의 특별한 여행기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저는 겁이 많아서 패키지 여행을 주로 합니다.
여행사는 물론이고, 여동생 패키지, 딸 패키지 이렇게요. 하하.
@이팝나무 아이구 테이블마은틴이었네요. 답글에 그곳의 장관을 쓰려는데 전혀 생각이 안났거던요.
테이블마은틴은 놀라운 장소였어요. 신비감이 들어 한참을 넋을 잃고 그냥 서있었어요.
강추합니다.
@곽주현
사진으로만 봐도 인상적이라서 기억해 두었답니다.
좋은 곳 다녀오셨네요.
선교사들 정말 고생이 많아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보통 사람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지요. 그런데 글이 여행 가고 싶게 만드네요.
하하, 같이 떠날까요?
좋은 경험, 글로 생생히 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래 전에 다녀와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답니다.
칭찬, 고맙습니다.
다녀오신 특별한 여행으로 마음의 믿음을 더 가지시겠어요.
음카타 선교사님과 얽힌 이야기도 기다려집니다.
네. 지금도 이어지는 인연이라서 언제 한번 풀어내 볼게요.
글 한편으로 충분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