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재수사>
장강명의 <재수사>에 나오는 민소림 캐릭터를 보면서 나는 강석경의 <숲속의 방>에서 소양이와 또 다른 소설의 한 인물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 소설의 제목과 인물을 알 수 없었다. 물론 작가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설에 대해 어디에 메모를 했던 것은 기억해냈고, 1988년의 내 일기장을 뒤졌다. 김신의 <대학 별곡>이라는 소설이었다. 그 소설에서 박찬기라는 캐릭터가 자살한 모양이다. 친구들에게 이런 유서 혹은 유언을 남기고. (35년 전에 읽은 소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지금쯤 좀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긴 한데 유언보다는 유서 쪽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너희들이 알았듯이 나는 너무도 오만해. 내가 생각해도 내가 그토록 오만할 수가 없어. 그리고 너희들이 모를지라도 나는 또한 너무 순결했어, 내가 나를 가리켜 말할 수 있어. 이 시대에 적어도 나만큼 순수를 지키려 하는 자기 있는지를 나는 몰라. 그 값이야. 그러나 꺾일지언정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을 수는 없었어. 차라리 죽음일지언정 더럽혀지고 싶지는 않았어. 그게 내 운명이었지.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살기에 나는 전혀 알맞지 않아.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서로 받아 가질 수가 없는 거야. 그러므로 돌아가는 일, 잘못 태어난 이 목숨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 이 실수의 땅으로부터 돌아가는 일, 그게 이후로 나에게 남겨진 일이지.
내가 살해당한 여대생 캐릭터를 보면서 왜 소양이와 찬기처럼 자살한 대학생 캐릭터를 떠올렸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들이 생각났다. 어쩌면 세 캐릭터에 공통되는 단어, ‘오만함’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소양이와 찬기처럼 민소림 역시 그 나름대로 ‘청춘의 방황’ 같은 것을 한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만약 살해당하지 않았으면 민소림도 결국 자살했을까? 그 오만함으로 말이다.
장강명의 <재수사>는 총 100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터 홀수로 나아가는 장은 살인자의 독백(살인자의 기록)이고, 짝수 번호는 민소림 살해 사건을 재수사하는 형사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홀수 번호의 장들과 짝수 번호의 장들은 전혀 다른 전개 방식을 보인다. 형사들의 이야기는 전형적인 수사물의 형식이다. 살인자의 장은 살인자의 세계와 인간에 관한 생각들로 구성되어 있다. <재수사>는 1, 2권으로 되어 있고 총 793쪽에 이르는 소설이다. 1권을 읽을 때까지는 살인자의 장과 수사의 장이 확연히 구분되는 느낌이었는데, 어느 틈에 살인자의 요설 혹은 장광설이 수사를 진행하는 중심인물 연지혜 형사의 이야기와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작가가 의도했을 수도 있다.)
수사물과 살인자의 독백에는 작가가 모두 투영되어 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수사물을 만들어가는 장강명과 살인자의 기록(요설 혹은 장광설 혹은 새로운 논리)을 엮어가는 장강명, 이렇게 두 명의 장강명이 있었다. 전혀 다른 전개와 구성 방식인데 둘 다에서 각기 다른 장강명, 결국은 한 사람인 장강명이 있었다.
수사물은 그런대로 속도감 있게 읽힌다. 독자에게 누가 범인인지 궁금하게 만들고 추리하게 한다. 소설의 중간 즈음 범인이 처음으로 나올 때 나는 ‘혹시 이 사람이 범인인가?’라고 의심했는데, 내 생각이 맞아서 마지막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범인이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한 독자는 ‘기막힌 반전’이라고 감탄했을 수도 있겠다. 요즘은 범인을 쫓는 형사가 범인인 경우도 많고, 그 형사들의 상사가 범인인 경우도 많고, 범인에 대한 그릇된 정보를 처음부터 확정하고 봤다가 아닌 경우도 많기에 나처럼 <재수사>의 범인을 잘 알아맞힌 사람도 많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살인자의 독백(기록) 부분은 처음에는 꽤 흥미롭게 읽었다. 나중에는 약간 지루해져서(노안 때문일 수도 있다. 노안 때문에 갈수록 글자가 잘 안 보였다.) 처음처럼 그렇게 꼼꼼하게 읽지 않게 되었다. 신계몽주의라는 사상을 집대성하려고 했던 계획이 민소림을 죽이기 전부터 있었던 것인지, 민소림을 죽인 다음부터 생긴 것인지 불확실하기도 했고(내가 집중력이 떨어져서 오독한 것일까?), 저자인 장강명의 생각과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한 자료들이 합쳐져서 밀도가 떨어진 덕분이었다.
<재수사>를 읽으며 문미순의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을 생각했다. 장강명이나 문미순 모두 레고를 짜 맞추는 상급 기술자들처럼 느껴졌다. 소설을 쓰겠다고 자료를 늘어놓고(레고 조각을 늘어놓고) 범인들은 흉내 내기 힘들게 거대한 레고 작품을 완성한 작가들이라는 게 나의 소견이다. 이 소견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장강명이나 문미순, 혹은 정유정과 같은 작가들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전혀 없다. 추호도 없다. 그런데 뭔가 내 안에서 그들은 다른 방을 만들어 구분되어 들어간다. 다른 방에는 내가 감탄한 소설가들이 있다. 제발트 혹은 메르시어.
소설에서 제일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민소림의 사촌 동생 한은수 부분이었다. 그의 독특한 말버릇은 그의 캐릭터 구축에 큰 역할을 했는데, 그가 연지혜와 헤어지면서 하는 마지막 대사는 나에게 웃음을 주었다. “밥은 처음부터 거를 각오를 하고 나왔습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열량 높은 음료를 시킨 거겠죠?” 캐러멜 마키아토를 마시는 비대한 남자, 용의자 중 한 명을 위한 서사 쌓기에 장강명이 들인 수고를 조금은 칭찬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 대목이었다.
반대로 주믿음의 공방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톱밥 묻은 걸레는 내 기준으로는 핍진성이 부족했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견해다. 만약 나였다면 톱밥 묻은 걸레 같은 것은 술상을 차리기 전에 치웠을 것이므로 말이다. 뭐, 그래서 세 여자가 사무실에서부터 이미 취한 상태로 나왔고,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또 전자담배를 피우는 연지혜의 호주머니에서 라이터가 나오는 설정 같은 것은 굉장히 공들인 것이므로 인정한다.
피곤해서 여기까지만 쓰고 싶다, 하하하. 이게 매력이다. 내가 문학 평론가였다면 여기까지만 쓰면 안 된다. 그런데 나는 그래도 된다. 나는 그냥 독자이므로 말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꼭 평론가여야 하는가? 그냥 독자로 살면 안 되나? 그냥 독자로 사는 삶에서 내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 것이 점점 강도가 거세지는 노화 현상에 얼른 두손 두발 다 들고 싶은 나의 본심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주승현처럼 살든지. 진짜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