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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을 명군주의 표상으로 그의 치세를 역사에서는 정관지치(貞觀之治)라 하여, 전한前漢의 문경지치(文景之治), 청의 강건성세(康乾盛世)와 함께 3대 성세盛世로 꼽힌다. 재위 23년에 걸쳐 여러 학자와 신하 및 측근 보필자들과 함께 국가 통치의 기본 방향과 제왕으로서 자질 배양을 위한 구체적 사항을 문답한 내용이『정관정요貞觀政要』로 정리되었다. 이는 제왕학의 교본으로 제왕뿐 아니라, 리더의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의 필독서이다.
그러나 당태종이 넘지 못한 산이 있었으니, 고구려의 연개소문(603년∼657년)이다. 바로 동방의 종주국 고구려였다. 문무를 겸비하고 지략이 뛰어났던 명장 당태종 이세민의 유일한 맞수라 할 수 있는 이가 바로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이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 임금을 시해한 무자비한 독재자이고, 고구려 멸망에 책임이 있다는 설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그를 악인으로 만들려는 중국의 사학자들과 국내 사대주의자들의 음모의 결과다.
『삼국사기』에서 사대주의자 김부식은 연개소문에 대하여 ‘임금을 시해하여 정권을 포탈한 잔악무도하고 포악한 역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거의 대부분의 사료는 중국 측 자료다. 즉 고구려 측 사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에 그를 다룬 기록은 연개소문에게 무척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이맥의『태백일사』「고구려본기」를 보면 연개소문은 본래 우리의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尙武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임을 알 수 있다.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李陌(1455~1528)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행촌 이암의 현손玄孫이다. 자는 정부井夫,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다. 1474년(성종 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식년시에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 장령에 이르렀는데, 장숙용張淑容(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믿고 분에 넘치게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리다가 50세(1504)에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
이때의 귀양살이에 대해 이맥은 '근신해야 할 처지였기에 아주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고 하였다. 이맥은 그 먼 곳으로 집안에서 간직하던 책 상자를 가지고 갔다. 그 상자에 담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역사책과 귀양살이 하기 이전에 노인들이 전한 역사 이야기를 기록한 문서를 살피며 2년의 세월을 보냈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사간원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이의를 제기한 대신들 때문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에 머물렀다. 성품이 강직한 탓에 조정에 적이 많았던 까닭이다. 1517년(중종 12)에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려 할 때에도 이맥은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66세 때인 1520년, 이맥은 실록을 기록하는 찬수관(撰修官)이 되었다. 찬수관이라는 직책은 이맥에게 일생의 과업을 완수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지난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여 궁궐 깊이 감춰두었던 상고 역사서를 마음껏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맥은 그 금서(禁書)들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 시절에 정리해 둔 글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고,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의 역사'라는 뜻으로『태백일사(太白逸史) 』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 위배되는 학설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 때문에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 하였다.(여기에서 태백은 큰 밝음이란 뜻, 태백의 역사란 '동방 한민족의 대광명의 역사'를 말한다.)
이맥은 9천 년 한민족사의 왜곡 날조된 국통맥을 확고히 바로 세운 불멸의 공덕을 세웠다. 그는 신교 문화의 원전인『천부경』과 『삼일신고』에 정통한 역사학자이다. 그의 호 일십당一十堂은『천부경』의 "일적십거一積十鉅(하나가 생장 운동을 하여 열까지 열린다)"에서 따 온 것으로, 그가 우주의 본체인 일(一太極)과 십(十無極)의 정신에 관통하였음을 나타낸다.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한민족의 신교 삼신 문화와 원형 역사관의 화신인 것이다.
이맥의『태백일사(太白逸史)』「고구려본기」를 보면 연개소문은 본래 우리의 고유한 신교 문화의 상무尙武 정신을 크게 떨친 희대의 대영걸임을 알 수 있다. 603년 영양제 홍무 14년 5월 10일에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조의선인(皁衣仙人)이 되었다.
모습이 거대하고 위엄이 있으며 의기가 호방하고 초일한 자세가 있었고, 몸에는 다섯 개의 큰 칼을 차고 있었다. 병사들과 함께 섶에 나란히 누워 자고,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셨다고 한다. 또한 당대 최고의 병법가이기도 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의 24장 중 제1 명장인 이정이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웠다고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이 영류제榮留帝를 시해한 패륜아라는 굴레를 씌운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되었다. 고구려 27세 영류제는 즉위 후 당과 친선 외교를 고수하였다. 물론 수나라와 대전을 겪은 뒤이기에 전략적으로 친선을 도모할 필요는 인정할 수 있지만, 당에게 고구려의 봉역도封域圖(강역도)를 바친 일(628년)이나, 당의 고구려 침입 때 당의 후방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세력인 돌궐 주력군이 당에 의해 격파되고, 힐리가칸이 사로잡혔을 때 수수방관한 부분은 굴욕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631년 대수對隋 전승기념탑인 경관京觀을 당의 요청에 의해 헐어 버렸기 때문에, 강력한 상무 정신을 가진 연개소문 같은 대당 강경파들의 격렬한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던 중 642년 정월 영류제는 막리지인 연개소문에게 장성長城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했다.
고구려의 막리지莫離支는 군사와 정치를 총리總理하는 비상시국 최고 관직이다. 이런 위치에 있는 이를 한직으로 보냄으로써 대당 강경 세력을 무력화하려 했다. 이에 때를 보던 연개소문 일파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는 당에 대한 굴욕적인 외교로 일관한 영류제와 그 세력에 대한 연개소문과 대당 강경파의 혁명이었다.
즉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닌 정치 세력이었다면, 영류제는 당 제국에 복속됨으로써 생존을 도모하는 정치 세력이었다. 또한 연개소문은 정변 당시 임금을 시해하지 않았다. 변고를 전해 들은 영류제는 몰래 달아나 송양松壤에서 군사를 모으려고 했다. 송양은 현재 평안도 강동군 대박산으로 구을단군의 능이 있는 곳이며 고주몽 성제가 다물도多勿都로 삼은 곳이다. 하지만 영류제는 자신의 의도에 응하는 이가 없자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정변 후 연개소문은 보장제寶臧帝를 제위에 모셨다. 그는 모든 법을 공정무사한 대도로 집행함으로써, 자신을 성취하고 완성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되고(성기자유成己自由), 만물의 이치를 깨쳐 차별이 없는(개물평등開物平等) 나라를 만들었으며, 조의선인들에게 계율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무조건적인 강경책을 펴지는 않았다. 당의 국교인 도교 수입을 자청하여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하면서도 전술의 유연성을 택하는 정치가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대막리지 연개소문은 보장제 개화 4년에 벌어진 국운을 건 당태종과의 전쟁을 총지휘하였고, 안시성 혈투를 지원하였으며, 조의들을 지휘하면 신출귀몰하게 전략을 구사하여 마침내 승리를 이끌어 냈다. 세계 최강대국 당이 전 국력을 기울여 쳐들어온 전쟁을 당당하게 승리로 이끌어 고구려를 구해 낸 용장이자 영웅인 것이다.
太白逸史(태백일사) 高句麗國本紀(고구려국본기)
莫離支가 率數百騎하고 巡駐灤坡하야
詳問情形이오 遣命摠攻四擊할새
延壽等은 與靺鞨로 夾攻하고 楊萬春은 登城督戰하니
士氣益奮하야 無不一當百矣라
世民이 憤不自勝하야 敢出决戰이나
楊萬春이 乃呼聲張弓하야
世民이 出陣이라가 矢浮半空하니 遂爲所中하야 左目沒焉이라
世民이 窮無所措하야 從間逃遁할새
命世勣道宗하야 將步騎數萬하야
爲殿하니 遼澤泥淖하야 軍馬難行이라
命無忌하야 將萬人하야 剪草塡道하고 水深處는 以車爲梁하고
世民이 自繫薪於馬鞘하야 以助役하니라
冬十月에 至蒲吾渠하야 駐馬하고 督塡道하며
諸軍이 渡渤錯水할새 暴風雪이 占濕하야 士卒이 多死者어늘 使燃火於道하야 以待之라.
막리지(연개소문)가 기마병 수백을 거느리고 순시하다가
난하灤河 언덕에서 멈추고 전황을 자세히 물은 뒤에, 사방에서 총공격하라고 명하였다.
연수 등이 말갈 군사와 함께 양쪽에서 협공하고, 양만춘이 성에 올라 싸움을 독려하니
사기가 더욱 높아져서, 하나가 백을 당하는 용맹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당태종 이세민이 스스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감히 나서서 결판을 내려 하였다.
이때 양만춘이 소리를 지르며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이세민이 진을 나서다가, 공중을 가르며 날아온 화살에 적중되어 왼쪽 눈이 빠져 버렸다.
이세민이 어찌 할 바를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 달아나며,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기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으로 따르게 하였다.
요택에 이르자 진창 때문에 군마의 행군이 어려워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서 길을 메우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당태종 이세민 자신도 스스로 말채찍으로 땔나무를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포오거(蒲吾渠)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널 때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쳐 군사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았다.
이에 길에 불을 피우게 하고 기다렸다.
時에 莫離支淵蓋蘇文이 乘勝長驅하야 追之甚急하니
鄒定國은 自赤峰으로 至河間縣하고
楊萬春은 直向新城하야 軍勢大振하니
唐奴多棄甲兵而走하야 方渡易水라
時에 莫離支가 命延壽하야 改築桶道城하니 今高麗鎭也라
又分遣諸軍하야 一軍은 守遼東城하니 今昌黎也오
一軍은 跟隨世民하고
一軍은 守上谷하니 今大同府也라.
於是에 世民이 窮無所措하야 乃遣人乞降하니
莫離支가 率定國萬春等數萬騎하야 盛陳儀仗하고 鼓吹前導하야 入城長安하야
與世民으로 約하니 山西·河北·山東·江左가 悉屬於我라.
이때 막리지 연개소문이 싸움에 이긴 김에 계속 휘몰아쳐서 급히 이들을 뒤쫓았다.
추정국(鄒定國)은 적봉赤峰에서 하간현河間縣에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新城을 향하며 군세를 크게 떨쳤다.
많은 당나라 군사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 바야흐로 역수易水를 건너려 하였다.
이때 막리지가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桶道城)을 개축하게 하였는데, 용도성은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전군을 나누어 보내되, 일군은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그곳은 지금의 창려昌黎이고,
일군은 이세민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은 상곡上谷을 지키게 하니 상곡은 지금의 대동부大同府이다.
이에 당태종 이세민이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받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막리지가 정국, 만춘 등의 기병 수만을 거느리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어 북 치고 나팔 부는 군악대를 앞세우고 장안에 입성하였다.
당태종 이세민과 더불어 약정約定하여, 산서성·하북성·산동성·강좌江左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명나라 장편 희곡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는 연개소문은 당태종을 ‘소진왕’으로 낮춰 부른 뒤 “너의 강산이 아무리 넓다 해도 400개 주에 불과하다. 내가 단지 일개부대로도 너의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 내 앞에 투항한다면 내 친히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 네가 응답하지 않는다면 당나라를 방목장으로 만들어버리겠다.” 라고 호령한다.
연개소문이 당태종을 쫓는 장면은 이 희곡의 절정을 이루는 백미인데, 당태종이 진흙구덩이에 빠져 곤궁에 처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조상님이여, 나 이세민을 가엽게 봐주소서. 내가 조정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말을 타고 진흙구덩이에 빠지니 만민을 통치하는 조정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말을 아무리 때려도 진흙구덩이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내 황제인 것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흙을 잡아 향으로 삼아 기도드리니 용의 신이여 내 말을 들으소서. 내 너무나 상심하여 두 눈에 눈물이 흐르니 나 당나라 왕 이세민을 구해주소서! 누가 나를 구해준다면, 내 당의 강산 절반을 주겠다. 만약 나를 믿지 못한다면 너를 황제를 시켜주고 내가 신하가 되겠노라.”
여기에 나타난 당태종은 ‘천자’의 이미지는 간데없고 무능하고 겁에 질린 황제의 모습이다.
북경 민족대학 황유복 교수는 북경 동북쪽의 황량대에서 ‘고려포보(高麗鋪堡)라 새긴 비석을 발견하였다. 이는 연개소문의 중원지역 공략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발견한 황량대를 연결하면 고구려군이 활동하던 것은 북경 일대로 추정된다. 당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본다면 연개소문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국 깊숙이 지금의 북경까지 쳐들어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강소성 염성시 건호현에는 몽롱탑(蒙朧塔)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당태종 사후 고구려와 당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당은 수시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고구려가 항시적인 전시 상태를 유지하게 하면서 국력을 서서히 소진시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고구려의 국운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건만, 연개소문은 657년 10월 7일 형제간의 우애를 강조하며 세상을 떠났다. 묘는 운산의 구봉산에 있었다. 이후 660년 7월 백제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으로 구성된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정세는 급변하였다.
서쪽과 남쪽에서 동시에서 공격을 받게 된 고구려는 662년 정월 평양 인근의 사수蛇水 유역에서 당의 장수 방효태龐孝泰와 그 아들 열세 명을 포함한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기도 하였다. 백제가 망하고 고립된 상황에서도 당의 대군을 맞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워 이겨 냈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공백은 국력 통합의 구심점이 공백을 맞이했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그의 아들과 동생의 권력 투쟁으로 변했다.
큰아들 남생은 동생들과 분쟁을 벌이다가 적국인 당에 항복했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는 신라에 항복하였다. 당과 신라의 연합군은 668년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내분으로 인해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이러한 역사 과정의 결과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은 그를 저주하고 두려워한 당唐의 기록만 남게 되었고, 우리는 지금까지도 당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나라가 망하느냐, 아니면 살아남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고구려를 지켜낸 지도자였다. 이런 그를 단재 신채호는 우리 4천 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다.

첫댓글
좋은글 즐감했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십시요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