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는 ‘붙어 있던 것을 나누어 떼어 놓다’는 뜻인데 오늘날 가장 흔히 쓰이는 경우는 쓰레기 분리수거의 경우일 것 같다. 분리수거가 상당히 어렵다고 들었다. 분류 기준이 미세하고 복잡하다고 한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삶이 부유하고 안락해질수록 점점 쓰레기가 많아지고 쓰레기들의 관계 맺음이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쓰레기는 재활용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 썩는 것과 썩지 않는 것, 불에 타는 것과 타지 않는 것, 유해물질과 그렇지 않은 것 등이 섞여 있고 붙어 있다. 한 가지 가장 간단한 예를 들면 생수 한 병은 한라산이나 백두산 기슭의 맑은 물과 아랍에미리트 땅속에서 퍼온 시커먼 원유에서 뽑아낸 플라스틱 병, 역시 플라스틱 물질에 모종의 화학물질 색소를 첨가하여 만든 라벨, 그걸 붙이기 위한 화학성분의 풀 등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상품이 된 것이다. 효용을 다하면 그 재료들 자체가 분리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플라스틱 병이 또 다른 쓰레기들로부터도 분리 배출되어야 한다.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다했으니 그 물질들 간의 애착 관계를 떼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쓰레기로 버려진 빈 생수병에 대해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장강박에 빠진 일부 사람들은 빈 생수병에 대해서도 지독한 애착을 갖는다. 따지고 보면 우리들도 대부분 자기가 아끼는 물건에 대해 애착을 형성하게 되고 그래서 잘 버리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옷장을 들여다보면 미련 때문에 버리지 못한, 그렇다고 다시 입지도 않을 옷들이 많다. 또한 여러 해 동안 몰았던 자동차를 폐차하려고 처분하고 돌아서 나올 때 상당히 서운한 감정이 얼마 동안 마음속에 머문다. 그 자동차와 나 사이에 애착관계가 생겨났기 때문에 그걸 분리하는 데 아픔이 따른다.
하물며 물건에 대해서도 그런 애착이 생기는데 오랜 시간 함께 지낸 동물—애완이든 반려든 가축이든—과는 더욱 짙은 애착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특히 개나 고양이처럼 주인과 어느 정도 정서적 교감을 형성하는 동물에 대해서는 그 관계가 심히 복잡 미묘하다. 게다가 개도 주인에 대해 애착을 갖게 되어 주인과 강제로 헤어지게 되면 분리 불안 장애에 빠져 심리적 문제를 일으킨다. 그걸 개와 주인 사이에 형성된 숭고한 애착 관계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주인인 인간이 괜한 마음고생을 사서하고 또 개에게도 같은 마음고생을 시키는 건 아닌지 판단이 쉽지 않다. 주인으로부터 분리된 개가 몇 달 후에 천리 길을 달려 주인집에 다시 찾아왔다는 충견 이야기가 전해지고, 어떤 마을에는 그 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애착 관계는 물건이나 동물에 대해 갖는 애착 관계보다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심대하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울먹이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서너 살짜리 자녀를 처음으로 어린이집에 맡기고 뒤돌아 나올 때, 타지나 타국에 유학 보내는 자녀를 대학 기숙사에 혹은 하숙집에 두고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간에서, 딸을 결혼시켜 내보내고 딸의 빈 방에 들어가 딸이 사용하던 책상을 바라볼 때 부모 가슴속에서 울컥하고 뜨거운 게 올라온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들을 가진 부모는 아들이 성인이 되어 군대에 보낼 때 마음 한쪽이 뜯겨 나간 듯 허전하고 쓰라리다고 한다.
라떼는 군복무 기간이 33개월이었다. 내가 입대하는 날 어머니께서는 광주 학동 나의 자취방에 오셨다. 어머니께서는 평소 말수가 적으신 분이라 그때도 별 말씀이 없으셨다. 나는 지어서 차려 주신 밥을 먹고 “갔다 올게요”라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목재로 된 대문짝 안에 난 별도의 조그만 문으로 고개와 허리를 숙이며 나가서, 순천행 기차를 타고 순천역에서 입영열차를 타고 논산 훈련소에 6월 13일에 입대했다. 훈련소 보충대에서 약 일주일 정도 대기병으로 지내는 동안 여기저기 사역에 끌려 다니며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군복을 지급받고 연대에 배속되어 정식으로 훈련병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기 전에, 입고 온 사복을 노란 비료포대 같은 종이에 싸고 노끈으로 묶어서 고향집에 소포로 보냈다. 아마 며칠 뒤에 밭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께서 그 소포를 받으셨을 것이다. 소포를 풀어 흙이 잔뜩 묻어 있고 내 땀 냄새가 밴 옷가지들을 집어 들면서 어머니께서 어떤 마음이셨을지 감히 잠작이 되지 않는다.
지금도 어머니들은 아들 군대 보내고 아들이 보낸 사복을 소포로 받는다. 그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질 것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또 앞으로도 그 소포를 받고 가슴속에 회오리바람이 일지 않는 어머니는 안 계실 것이다. 개그우먼 김지선씨가 군대 간 자기 아들이 훈련소 기초 훈련 마치고 졸업하는 날 면회를 갔는데 면회 시간이 지나자 방송에서 “자, 이제 병사들을 면회 오신 가족분들과 분리합니다”라는 명령이 스피커에서 나오자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 올라오는 느낌과 함께 “느그들이 뭔데 나와 내 아들을 분리해!”라는 묵음된 소리가 솟아올랐다고 말했다.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애착 혹은 정이라는 그처럼 질기고 끈끈한 심리적 접착제가 대체 뭘까? 그건 왜 생기는 걸까? 애착은 ‘몹시 사랑하거나 끌리어서 떨어지지 아니하는 마음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몹시 사랑은 왜하게 되며 마음은 왜 끌리게 되는 걸까? 짐작컨대 욕구 때문인 것 같은데, 욕구는 곧 마음의 결핍 상태를 채우려는 지향이다. 어떤 사물이나 동물이나 사람이 나의 욕구를 오랜 기간 채워주는 동안에 나는 그 대상을 자아의 확장된 영역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나는 그 대상과 경험을 공유하게 되고, 그것과의 관계가 익숙해지고 편안해지게 되며, 따라서 그 대상에 대해 고마움이나 동정심 혹은 애증 등 여러 가지 감정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처럼 끌리는 마음이 그 대상과 나를 붙여주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걸로 보인다. 그래서 나의 일부처럼 나에게 단단히 붙어 있던 대상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는 심리적 저항감이 있게 마련이고 나의 내면의 일부분이 뜯겨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
내가 국민 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삼촌이 꼴 베러 들에 나갔다가 보리밭에서 새끼 노루 한 마리를 생포해 왔다. 그게 너무 어려서 잡아먹을 수는 없었는지 삼촌이 곳간 옆에 대나무와 철망으로 우리를 지어 그 안에서 키우려고 시도했다. 그날부터 며칠간 밤중에 우리집 울타리 부근에 어미 노루가 와서 서성이는 것을 어른들이 목격했었다고 들었다. 그 새끼 노루는 먹이를 먹지도 않았고 자꾸 철망을 들이받으며 우리를 탈출하려고 시도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이 잔인한 짓을 했던 것 같다. 그렇긴 하지만 동물들은 대체로 쿨하게 서로 분리된다. 어미 노루도 새끼 노루에 대한 기억을 금세 잊고 다시 제 갈길 가고 풀은 뜯으며 살아갔을 것이다. 어미 새와 새끼 새도 새끼 새가 다 자라 둥지를 떠나 이소(離巢)하면 금방 서로 잊는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착 관계는 끈끈하고 질기고 오래간다. 그것이 슬픔이 되기고 하고 아픔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절의 큰스님들은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이끌려 매달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어디 그게 말대로, 뜻대로 되는가?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게 오죽이나 어려우면 덕이 높은 스님들이 그런 경지를 이상적인 상태로 가정하고 우리에게 권고하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자유로워진 존재가 있다면, 아무리 큰 스님이라 할지라도 그분은 인간이 아니라 나무나 돌 따위와 같은 무정물(無情物)일 것이다. 큰스님도 회자정리의 진리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참고 견디며, 기를 쓰고 내색하지 않을 뿐일 것이다. 아마도 그걸 수행이라고 하나보다. 정이라는 것이 벨크로(velcro, 찍찍이)처럼 편리하게 붙였다 뗐다 하면 얼마나 편리하겠는가. 하지만 편리하게 탈착이 가능한 벨크로도 붙었다가 떨어질 때는 저항력이 작용하며 찌직하고 비명을 지른다.
첫댓글 만사에 쿨하기로야 인간을 넘어설 존재가 있으랴 싶은디요.
저장강박으로 빈 생수병에 지독한 애착을 가지는 사람들의 사례가 궁금하네요? ^^
호미 님 글을 읽으면서 ‘내가 애착을 갖는 건 뭘까’를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