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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바라는 자 새 힘을 얻으리 / 사 40:27-31, 계 3:14-22
아무리 성능 좋은 자동차일지라도 제때에 기름을 넣지 않으면 제대로 달릴 수가 없다. 또한 정기적으로 정비하고 점검하지 아니하면 제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약해지기 마련이다. 사람도 영육간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제대로 힘있게 살 수 잇고, 병들면 치료해야 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 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피곤하고 지칠 때가 있다. 고달플 때가 있다. 주저않을 수밖에 없는 그런 때가 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힘을 얻고 살 수 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오늘 본문 말씀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심령 속에 말씀해 주시고 새로운 은혜와 결단의 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인생살이에는 피곤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문 말씀 30절에 보면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라고 말씀한다. 여기 소년이란 말은 아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 청년을 의미한다. 장정이라는 말은 성인을 말한다. 아무리 성인이 되었다 할지라고 유혹에 넘어질 때가 있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로 인해서 쓰러질 때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현대인들이야말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피곤한 생활을 하고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와서 쉬어도 정신이 개운하지 않다.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받기 마련이다. 머리가 항상 띵하다. 이러한 상황을 가리켜 우리는 정신적 질환, 또는 스트레스 질환,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신적 압박감, 강박관념, 우울증이라고도 한다. 어떤 일이든 즐겁게 하는 일보다는,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압박감을 느끼면서 어거지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매사가 피곤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머리가 개운하지 않고 항상 멍하다. 그래서 가장 잘 팔리는 약이 신경안정제 계통의 약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아스피린, 아나신, 타이레놀, 에코틴, 게보린 이런 약들이다. 적어도 열 사람에 한 사람 정도는 신경안정제 계통의 약을 먹어야만이 겨우 잠들 수 있는 형편이다. 이 정도로 머리가 개운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이미 가정상비약이 되고 말았다. 현대생활 자체가 사람을 정신적으로 무척 피곤하게 만든다. 육체적 피곤은 하루 이틀 쉬면 해소된다. 그러나 정신적 피곤은 하루 이틀 쉰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쉽게 해소되지 않고 오래 간다. 더욱 괴롭고 고통스럽다.
이런 정신적 피곤증세를 일으키는 요소들이 무엇이겠나? 현대생활에 있어서 크게 3가지를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지나친 경쟁의식이다.
오늘날을 가리켜서 흔히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말한다. 경쟁없는 곳이 없다. 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취직하는 것도, 사업하는 것도, 국제관계도 경쟁없는 곳이 없다. 요즘은 직장에서 퇴직당하는 것까지 경쟁에서 밀리면 안되는 시대이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생존해 가는 사회가 현대의 모습이다. 경쟁,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 당하는 입장에서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일이다. 승자는 기뻐할지 모르지만 패자는 고통스로운 마음을 안고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많이 있다. 학교에서, 같은 학급에서 책상을 같이하고 같은 의자에 앉아서 공부하는 같은 짝일지라도 친구라는 개념보다는 경쟁상대자로서 적대감을 느낄 때가 많다. 요즘 학교교육이 그렇지 않나? 내신성적으로 등급을 매기고 있으니까 저 아이가 1등급을 하면 나는 2등급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실에서부터 서로 이기려고 바둥거리면서 생활하는 것이 학교 분위기이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같이 입사를 해서 몇 년 지나 승진할 즈음이 다가와서 ‘혹시 저 친구가 승진하고 나는 떨어지지 않을까? 위로 올라갈 자리는 하나밖에 없는데, 둘 중에 하나밖에 올라가지 못하는데 혹시나 내가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데서 오는 그 불안과 갈등은 말할 수가 없다. 요즘 감원태풍이 불고 있는데 내가 감원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말못할 정도로 심하다. 치열한 경쟁의 상태에서 생기는 피곤함은 정말 피를 말리게 하듯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런 경쟁을 우리가 매일매일 겪으면서 살아간다. 현대생활 자체가 이렇게 피곤한 것이다.
또 한가지는 갈등이다.
현대사회는 옛날처럼 단순하지 않다. 복잡하고 다양하고 또 혼돈스럽다. 무엇을 판단할 때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다. 이것저것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이렇게 하느냐, 저렇게 하느냐’라는 문제를 두고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유리하냐? 어떻게 하는 것이 불리하냐?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장래에 희망을 주느냐? 아니면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손해가 되느냐?’ 이런 문제를 많이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무엇을 판단할 때마다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많기 때문에 제대로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갈등을 겪으면서 고민을 한다. 갈등이 크면 클수록 정신과 마음을 헷갈리게 만들고 괴롭게 한다. 현대사회가 그렇다. 무엇 하나 명료하지 않다. 단순하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러니 피곤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한가지는 인간의 불완전성 이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에 100% 완전할 수가 없다. 어느 한 부분에 성공한 측면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 부분에는 실패할 측면이 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 어떤 분은 돈 버는데는 크게 성공했지만 건강을 잃는 경우가 있다. 어떤 분은 사회적으로는 큰 명성과 직위를 가졌지만 가정에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분은 학문으로는 크게 성취했지만 자녀교육에 실패한 분이 있다. 어떤 분은 건강하고 왕성한 체력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도덕적으로 실패하여 감옥에 가는 경우가 있다. 우리들 주변에 있는 분들을 바라볼 때 어떤 분은 참 존경스럽고, 흠모할 만하고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듯이 보이는 그런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 그 사람의 가정생활을 들여다보면 남에게 차마 말못할 어떤 부족한 점을 다 가지고 있다. 자랑스럽고 즐거운 문제보다, 어느 한 가지 부족한 측면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그 가정이 고민을 하고, 개인이 고민을 하고, 고통을 당하기 마련이다. 이런데서 지치고 피곤함이 오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을 피곤하게 만드는 경쟁의식, 적대감, 갈등에서 오는 고민, 그리고 부족한 점에서 오는, 불완전한 점에서 오는 괴로움, 이런 것을 어떻게 우리가 극복해 갈 수 있겠나? 유대인의 지혜서라 할 수 있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 젊은이가 등산을 하기 위하여 산 속에 들어갓다. 산 속에 들어가서 길을 잃고 한나절을 헤매게 되었다. 산을 향해 올라가다가 숲이 너무나 깊고, 또 산세가 험하고 복잡해서 길을 잃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숲이 우거져 있기 때문에 갈길이 더 막연해졌다. 그래서 이 젋은이는 ‘되돌아가야겠다. 길을 찾아야겠다’라고 생각하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래로 내려와도 갈 길이 막연해진다. 도저히 길을 찾을 수가 없고 마을을 찾을 수가 없다. 피곤에 지쳐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이 젊은이에게 충고를 한다. ‘산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서 아래로 내려가면 죽는 길이야. 반대로 위로 올라가야 돼.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아야 마을도 보이고 내려가는 길도 보이지. 그런 후에 방향을 정하고 갈 길을 찾아야 돼. 갈 길을 잃은 때일수록 위를 향하여 올라가야 돼.’ 이렇게 가르치고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이 노인의 가르침에서 우리가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우리가 일상생활하는데 있어서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 괴로운 일이 생겼을 때, 시험이 밀어닥쳤을 때, 너무 그 문제의 늪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되지 않는다.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 어려움에 너무 사로잡혀서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일수록 모든 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시고, 모든 위기를 극복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피곤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31절에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한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 말씀을 할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굉장히 피곤에 지쳐있을 때였다. 지금부터 2.6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서 나라가 망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머너먼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가서 처참한 생활을 한다. 한해 두해가 아니다.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 반세가가 흘렀다. 포로생활에서 해방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절망감 속에서 탄식하고 있을 때였다. 이럴 때 이사야 선지자는 27절 이하에서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한다. 무슨 뜻인가? 어려운 일을 당할수록, 피곤에 지쳐있을 때일수록, 문제가 생겼을 때일수록.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이 생겼을 때일수록 이 모든 것을 해결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이다. 앙망하라는 말씀은 위를 바라보라는 말씀이다. 의지하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으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면 새 힘을 얻는다고 말씀한다. 29절에 보면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31절에서는 ‘새 힘을 주신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볼 때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새 힘을 얼을 수 있겠나? 하나는 내 자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내 자신을 이길 수 있는 힘이다. 프랑스의 작가 빌톨 위고가 쓴 자서전 가운데 말하기를 ‘사람은 일생을 두고 세가지 싸움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첫번째 싸움은 자연과의 싸움이고, 두 번째 싸움은 인간과의 싸움이고, 세번째 싸움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했다. 위고는 지적하기를 인간은 자연과의 싸움에 승리하기 때문에 자연을 개발해서 물질문명을 성취해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그래도 이기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나’라는 인간이 생존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빅톨 위고는 말하기를 ‘싸우면 싸울수록 질 수밖에 없는 싸움, 그야말로 비참하게 지는 싸움이 있는데 그것은 곧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라고 말한다. 나 자신과의 싸움, 언뜻 생각해보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제대로 이기지 못한다.
여러분, 생각해 보라. 누구인들 선하게 살고 싶은 마음이 없겠나? 그러나 선을 추구하기보다는 내 마음과 생활에 여러가지 악이 도사리고 있다. 누구든지 사랑하며 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는 시기와 다툼과 적대감이 퍙배해 있다. 누구든지 다 진실하게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어느새 거짓이 튀어나온다. 누구든지 올바른 일을 하고 살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올바른 일보다는 이기적인 욕망이 앞설 때가 많다. 왜 그런가? 누구든지 열심히 성실하게 무엇을 성취하며 살기를 원하고 있지만 실제는 내 생활에 있어서 게으름과 나태와 여러가지 이기적인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자아, 자신과의 싸움에 이길 듯 하지만 실제는 이기지 못하고 비참하게 지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인류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하면서부터 마귀가 내 자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인간보다 더 권세가 강하다. 인간을 마음껏 넘어뜨릴 수가 있고, 악하게 만들 수가 있고, 유혹에 빠뜨릴 수 있고 실패하게 할 수 있다. 이런 능력을 가진 마귀가 내 자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정성을 다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내 자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내 자아를 장악하고 있는 마귀를 어떤 방법으로 이길 수 있겠나? 내 힘으로는 안된다. 나로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임재하실 때, 내 속에 계신 그 하나님의 영이 마귀의 권세를 이기게 해 주신다. 하나님의 영이 무엇인가? 성령이다. 우리가 어려울 때일수록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우리의 자아를 장악하고 있는 마귀의 권세를 이기게 해 주신다. 이때 선하게 살 수가 있고, 이때 사랑할 수 있고, 이때 의롭게 살 수가 있다. 이때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성령의 새 힘이 있다. 또 한가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있다. 독수리가 땅바닥에 쭈그리고 있다가 새로운 힘을 얻게 되면 하늘로 치솟아 올라간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되면 새로운 출발이 있고 새로운 생활이 있고 거듭남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5장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계시면 내 인격과 생활에 변화가 있고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라. 예수님께서 체포되고 십자가에 처형당할 때 이들은 예수 믿는 것을 숨긴채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어떤 제자는 갈릴리로, 어떤 제자는 엠마오로, 어떤 제자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들어가 숨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다음에는, 생명을 걸고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변화시켰는가? 하나님의 영이 그들 속에 임재했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새힘을 얻었기 때문에 변화된 것이다.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약점이 있다면 무엇이겠나? 모두들 다 성령받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힘을 얻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힘에 의해서 새로워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 약점이다. 성령받은 자는 새로워진다. 새 출발이 있다. 베드로를 보라. 성령받기 전에는 비겁했다. 자기가 살기 위해서 예수를 숨겼다. 그러나 성령받은 다음에는 예수를 자랑하기 위해서 자기가 죽어간 것이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갈보리교회 성도이기 때문에, 한시간 주님의 전에 나와서 예배하면서 여호와를 앙망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힘을 얻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 6.25때 연세대를 다니다가 입대하여 육군 소위로 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가 3년 전엔가 4년전에 탈출한 조창호 씨를 기억하는가? 43년 동안 북한에서 수용소생활, 감옥생활, 강제노동의 고통 속에서도 참고 견디고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생겼는가? 이분이 신앙간증할 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는 뜻에서 찬송가 93장을 부른다.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 되시니... 위로하고 힘주실 이 주 예수’ 예수가 그로 하여금 그 처참한 생활에서 이기게 해주시고 북한 땅을 탈출하게 한 것이다. 예수의힘으로 승리한 것이다. 여러분,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어떤 문제에 부딪힐지라도, 아무리 삶에 지치고 피곤하다 할지라도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삶을 주장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이 있고, 그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신앙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저 가만히 우리를 바라만 보고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그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의 피곤함을, 우리의 지친 것을 이기게 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해 주시고, 새로운 보람과 가치있는 삶을 살도록 해주신다. 새 힘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