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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뜻밖의 일 / 신 8:1-10, 마 25:31-46
올해 우리 교회 목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천국시민이 되자’이다. 그래서 오늘 천국 이야기부터 하겠다. 천국에 가면 세가지 놀랄 일이 있게 될 것이라고 어떤 이는 말한다. 그것은 곡 만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없는 일,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 그리고 의외로 자기 같은 사람이 천국에 와 있는데 대한 놀라움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펵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천국에 갔다 왔다는 사람의 간증집회를 자주 보게 되고,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잇는 책이 날개 돋친듯 잘 팔리는 현상도 볼 수 있다. 현신애 권사가 꿈에 천국에 갔다 온 이야기가 소문으로 나돌던 일이 있었다. 우리나라 교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조 목사와 김 목사를 찾았는데 그분들의 이름이 천국 생명록에 빠져 있더란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물렀더니 그런 목사를 전혀 알지 못하며, 그런 목사는 이곳에 올 자격이 없다고 냉정하게 말하더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큰 물의를 빚은 일이 있다. 이 이야기 때문에 조 목사의 교회가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천국과 관련된 온갖 이야기들은 신앙인들의 최고 관심사를 두고 꾸민 이야기가 많다.
오늘 본문에서는 주님께서 최후 심판을 하시는 장면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두그룹으로 전세계 인간을 갈라놓으신다는 것이다. 지옥에 갈 사람은 왼편에, 천국에 갈 사람은 오른편에 따로 세워 놓는다. 그리고 판결문을 읽어주시며 상급과 처벌을 명시한다. 그 법조문이란 별로 까다롭거나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곧 누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는 일,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는 일,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는 일, 헐벗었을 때 입을 옷을 주는 일, 병들거나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하는 일 등을 기준하여 판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양쪽으로 분리되어 갈라선 사람들이 똑같이 놀라는 표정들이다. 언제 그런 일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안난다는 것이 오른쪽 천국에 갈 사람들의 반문인데 비하여, 내가 언제 그런 일일 안했느냐가 왼쪽에 서서 지옥에 가야 할 사람들의 반문이었다. 이 두 그룹 사람들은 너무 큰 일을 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너무 열심히 봉사하느라고 옆에 굶주린 이웃들이 있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주님을 열심히 믿는다면서 작은 일은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천국 후보생들은 불쌍한 사람들에게 작은 일을 행하였다. 그러면 이제부터 두 종류의 사람들을 비교하고, 특히 오른편에 서있는 사람들의 생활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1. 지극히 작은 일에 관심이 있었다.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물 한그릇을 주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우리는 큰 일에만 너무 관심을 많이 두고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큰 교회, 많은 교인수에만 지나친 관심을 둔다. 그러나 오른쪽 사람들은 남들이 시시하다고 눈여겨 보지 않던 일을 행하였다. 너무 작기 때문에 기억조차 안되는 일이다. 슈바이쳐 박사는 여러 개의 박사 학위를 받고 일류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분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존경하는 교수직을 버리고 아프리카의 어두운 대륙 밀림 속의 무지한 흑인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것은 교수직에 비하여 너무나 작은 일이었다. 헨리 뉴엔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예일대학과 하버드대학의 교수직을 버려두고 페루의 한 작은 정신병원에서 단 10명을 위해 밥을 먹여주고 대소변을 치우는 지극히 작은 일을 하고 있다. 세상의 눈으로는 너무나 손해보는 일이다. 큰 자리에 있을 수도 있는 위치에서 나무 작은 자리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 지극히 작은 일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신다. 한국에서 큰 교회를 가진 목사가 미국에 와서 2-30명밖에 되지 않는 교회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울 참아가며 애쓰는 옛 친구 목사를 보고 ‘그것도 목회라고 하나?’ 하며 핀잔을 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만일 예수님을 만나 ‘나는 단 12명밖에 없었네’라는 말씀을 듣는다면 무엇이라 대답하게 될지 무척 궁금하다. 단 한명이라도 제대로 가르쳐 예수님의 형상을 닮게 한다면 수천명을 다 자기 같은 엉터리 교인으로 만드는 것보다 주님 보시기에 훨씬 귀한 일이 될 것이다.
낸시 코니스라는 여자가 어린 시절을 회고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허리가 굽은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하루도 빠짐없이 마을의 행길을 천천히 걸어다니곤 했다. 그런데 백발이 성성한 이 노인은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보면 언제나 자기 호주머니에서 예수님의 사진을 거내 그 아이의 작은 손에 꼭 쥐어주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언뜻 보기에 이 노인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지극히 작은 친절이 낸시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사진을 받고 4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낸시 여사는 그 사진을 소중이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흐르는 시냇물가에서 예수님이 양을 치는 사진이다. 그 뒷면에는 그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쓴 시 23편이 적혀 있었다. 어릴 때 낸시는 이 노인이 하는 일을 시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노인은 하나님의 지극히 작은 믿음의 씨를 길거리의 어린아이들에게 심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극히 작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오른쪽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2. 작은 일이지만 예수님이 이름으로 행하였다.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말을 우리는 성경에서 많이 본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을 의미한다. 곧 일을 할 때 예수님의 정신인 온유와 겸손으로 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이름이라는 문구가 너무나 남용되고 있는 것을 본다. 퍽 거칠고 사납고 교만한 사람들에게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마음과 정신인 온유와 겸손을 보기 힘든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름이란 예수님을 대신한다는 뜻이 있다. 군대에서 보면 ‘사단장 아무개의 명에 따라 부관 아무개’라는 공문을 흔히 본다. 사단장이나 상관을 대신해서 그의 지시를 받아 무슨 공문을 발송할 때 쓰는 구절로 지휘관을 대신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 노릇을 해야 한다. 누가 보아도 우리에게서 예수님의 티가 나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이란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영광을 가리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히려 현대 기독교 사회에서는 우리 자신을 PR하느라고 예수님의 빛이 여지없이 가리어지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바울의 책망처럼 우리의 행위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모독을 당하는 서글픈 현실이다. 주님께서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들은 얼마나 더 큰 보상을 받게 되겠나? 우리가 누구의 이름으로 사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예수님의 이름이란 예수님의 정신을 말하며, 예수님의 분신으로서 행하는 것을 말하며,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브라더 로렌스라는 수도승은 땅의 검불 하나를 주워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으로 했다고 한다. 부엌에서 그릇을 닦을 때나, 남의 신발을 수선하거나 집안 청소를 할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마음으로 했기 때문에 그만큼 정성을 다하여 기쁘고 헌신적인 마음으로 해냈던 것이다. 그런 일생을 살았던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겸손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 우리들이 갖는 당연한 태도는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는 겸손일 수밖에 없다. 하버드대학의 창시자 토마스 쉐퍼드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큰 교훈이 된다. 그는 44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가 죽기 몇 달 전에 당시의 유명했던 신문인 ‘뉴잉글랜드 가제트’를 손에 움켜쥐고 자기 사무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을 어떤 사람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화를 내며 분노와 울분 속에서 뒹글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신문에 자기의 설교가 실렸는데 바로 오른편에 더욱 웅변적이고 내용이 휼륭한 다른 목사의 설교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설교를 읽고는 질투심 때문에 몸부림을 치게 되었고, 결국 신문을 움켜 쥐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예수님의 이름보다 자기의 이름이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그가 죽은 후 일기장에서 그때 당시이 심정을 기록해 놓은 것을 읽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그 질투와 교만의 쓰라린 체험을 한 뒤 자기의 명예 대신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해달라고 금식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 교만과 자만심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3. 지극히 평범한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오른편의 사람들은 주님의 일을 한답시고 굉장히 큰 사업을 설계하거나 추진한 사람들이 아니다. 바로 옆에 있는 가난한 사람의 음식과 의복을 걱정한 일이나 병원이나 감옥을 드나들며 고통을 덜어준 일 등 어떻데 보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극히 작은 일들을 했을 뿐이다. 그들이 한 일은 강이나 바다를 건너가서 하는 선교사업도 아니었고, 멀리 세상을 벗어나 산속에서 기도만을 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내 손이 닿는 곳의 사람들을 그저 말없이 돕고 사랑을 베풀었을 뿐이다. 우리의 가정이나 마을, 일터는 복음 실행의 장이 될 수 있다. 교회에 나가서만 크리스천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였던 것이다. 미국 보스턴에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비쳐 목사에게 교회 부흥의 비결을 물었을 때 그는 ‘나는 주일에만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 성도들은 6일동안 매일매일 생활로 설교를 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체 교인들이 자기가 꼭 해야 할 주변의 평범한 일들을 정성껏 할 때 교회는 자연히 부흥이 되는 것이다. 현대 크리스천은 주일에만, 그리고 교회 안에서만 성도 노릇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일단 교회를 떠나면 교인인지 아니지를 분간 못할만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없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다. 그 뜻은 좀 ‘다른 점이 있는 무리들’이라는 뜻이다. 크리스천은 무엇인가 달라야 한다.
펜실베니아주의 베들레헴이라는 도시에서 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로이드 오걸비 목사는 ‘우리 교회는 목사가 나 혼자가 아니다. 모든 교인이 다 목사들이다’라고 교회 규칙을 정했다고 한다. 신약에서 말하는 목사란 ‘주님의 종’ 또는 ‘노예’를 뜻한다. 그래서 오걸비 목사는 ‘나는 목사 구실을 하는 전체 일반 교인들을 훈련하고 지도하는 책임을 가졌다. 나는 단지 그들 성도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기쁨을 자기들의 일터와 이웃들 사이에, 그리고 일반 사회생활 속에서 그대로 구현하도록 권장하는 것뿐이다’라고 강조했다. 한번은 어느 성도가 오걸비 목사에게 전화로 제가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으니 할 일이 있으면 말씀해 달라고 했디. 그래서 목사는 어려움 중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가정을 소개했는데 그는 그 가정의 어려운 문제가 다 해결될 때까지 열심히 도왔다는 것이다. 이처럼 할 일을 자청하는 교인을 만나는 것처럼 목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일도 없다고 생각한다. 오른편에 서있는 무리들은 바로 자기 생활 주변을 돌아보고 할 일을 찾아서 했다. 오른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선한 생활이 몸에 아주 배어서 본능화되고, 습관화되고, 일상화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자기가 행하고도 기억조차 못할만큼, 그것들이 선행이라고 의식조차 못할만큼 몸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가 식사때 수저가 오르내림을 의식하지 않듯이 이런 일들을 아주 쉽고 자연스럽게 하는 사람들이다.
유대교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신학교 교수인 랍비가 기숙사 창문을 통해 기숙사 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마침 안식일 아침이었는데 3명의 학생이 담배를 피우다가 들켰다. 랍비는 당장 그들을 불러러다 혹독하게 책망하였다. 그런데 첫 번째 학생은 ‘선생님, 면목이 없습니다. 오늘이 안식일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엇습니다’라고 변명했다. 두 번째 학생은 ‘용서하십시오. 안식일에는 금연이라는 것을 그만 감빡 잊었습니다’라고 사과했으며, 세 번재 학생은 ‘선생님, 죄송합니다. 창문 커튼을 내리는 것을 깜박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율법주의에 매여 사는 위선적인 신자들을 책망하는 풍저적인 이야기이다. 주님의 계명이나 말씀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은 누가 보든말든, 그날이 안식일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습관화된 사람들은 항상 말씀대로 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은 무슨 의무감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보상을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선행을 기억조차 못한다.
우리는 매일 사는 일상 생활에서 주님이 일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 론 델베네는 인생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젊은 시절의 경험을 ‘마음으로부터’라는 책에서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LA에 가면 대단히 지혜로운 영적 지도자를 만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기가 갖고 있는 영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 현자를 만날 약속을 해놓고 손수 운전하며 머나먼 길을 떠났다. 오랜 시간 후에 약속한 장소에 갔으나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크게 실망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뒤에야 그 사람이 나타났다. 론은 그 사람을 보는 순간 자기의 본노와 실망 중 어느 것이 더 큰지를 모르게 되었다. 그처럼 키가 작고 볼품이 없는 왜소한 사람이 어떻게 자기를 도울 수 있을까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그에게는 현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염도 없었다. 그 현자는 왜 자기를 보러왔느냐고 대뜸 물어보았다. 그는 먼 길을 이왕 왔으니 한번 얘기나 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한시간이 넘도록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회의와 번민들, 그리고 공포와 불안과 꿈에 대하여 길게 늘어 놓았다. 그랬더니 현자는 ‘오, 그래요? 그럼 내 말에 귀를 기울이시오. 내가 해결책을 말하겠소’라며 말을 꺼냈다. 론은 그 순간 아마 현자가 자기 머리 위에 손을 얹거나 황홀경으로 끌어들이는 이상한 경문을 읽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그런 일은 일체 하지 않은채 혼이 꼭 실행해야 할 세가지를 간단하게 지시했다. 그리고는 론이 다시 반문할 기회도 주지 않고 달아나듯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론은 몹시 큰 실망을 했고 환멸을 느끼기까지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론이 축처진 어깨를 하고 집에 들어섰을 때 아내는 다그치듯 물었다. 무슨 묘안이라도 듣고 왔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론이 말하는 것을 자세히 듣기 시작했다. 론은 피곤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글세, 그 노인이 말하기를, 세가지를 잘 지키면 모든 인생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하지 않겠소. 첫째로 쉬지말고 기도하고, 둘째는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사랑하고, 셋째는 꼭 해야할 일들을 제 때 하라는 것이었소. 나는 너무나 평범하고 시시해서 크게 실망하고 돌아왔소. 공연한 시간만 허비한 셈이오’라고 론이 말하자 아내는 손뼉을 치며 ‘하나님, 감사합니다. 결국 누군가가 쓸만한 말을 해주었군요’라고 응답하는 것이었다. 론은 그때 그 현자의 지시가 옳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현자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지혜로운 분이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깨달았습니다.’ 론은 별것 아닌 지극히 평범한 일에서 가장 위대한 것을 발견한 셈이다. 론은 지금 훌륭한 목사가 되어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무슨 굉장한 일을 해야만 하는 줄 안다. 금식을 하고 집을 팔아 전도사업을 하고, 신학교를 꼭 가서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어야 하며, 큰 교회당을 짓고 많은 헌금을 내야 하고 또는 안수를 통해 영적 은사를 많이 받아 병자를 고치고, 성령의 세례를 받아 방언을 하거나 환상을 보거나 입신을 하는 등 남들이 체험하지 못한 신비로운 체험을 해야 믿음이 좋은 줄 알고 있다. 그래야만 천국에 들어가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지극히 작은 일은 우리 주변에 가정에 일터에 이웃에 널려져 있는 우리의 할 일들을 성실히 행하는 일이요, 가정을 잘 보살피고 아내나 남편과 자녀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일이요, 지극히 가난한 이웃이나 소자들에게 예수님의 따스한 마음으로 냉수 한그릇이라도 떠서 대접하는 일이다. 오른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일을 행한 사람들이다. 우리도 이런 일을 부지런히 행함으로써 언젠가 맞게 될 그날에 주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말을 들어야겠다. 비록 큰 업적은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주님께서 예비하신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7-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