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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기원. 感謝の起源。(2023년 10월 29일 추수감사주일예배)
본문: 고린도후서 9장 6절~15절
고후 9:6 ○요점은 이러합니다. 적게 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 7 각자 마음에 정한 대로 해야 하고, 아까워하면서 내거나, 마지못해서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온갖 은혜가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하므로 여러분은 모든 일에 언제나, 쓸 것을 넉넉하게 가지게 되어서, 온갖 선한 일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9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뿌려 주셨으니, 그의 의가 영원히 있다" 한 것과 같습니다. 10 심는 사람에게 심을 씨와 먹을 양식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씨를 마련하여 주시고, 그것을 여러 갑절로 늘려 주시고, 여러분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켜 주실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모든 일에 부요하게 하시므로, 여러분이 후하게 헌금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의 헌금을 전달하면,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12 여러분이 수행하는 이 봉사의 일은 성도들의 궁핍을 채워 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를 넘치게 드리게 할 것입니다. 13 여러분의 이 봉사의 결과로,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하고, 또 그들과 모든 다른 사람에게 너그럽게 도움을 보낸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14 그들은 또한 여러분에게 주신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 때문에 여러분을 그리워하면서, 여러분을 두고 기도할 것입니다. 15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6. つまり、こういうことです。惜しんでわずかしか種を蒔かない者は、刈り入れもわずかで、惜しまず豊かに蒔く人は、刈り入れも豊かなのです。7. 各自、不承不承ではなく、強制されてでもなく、こうしようと心に決めたとおりにしなさい。喜んで与える人を神は愛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8. 神は、あなたがたがいつもすべての点ですべてのものに十分で、あらゆる善い業に満ちあふれるように、あらゆる恵みをあなたがたに満ちあふれさせることがおできになります。9. 「彼は惜しみなく分け与え、貧しい人に施した。彼の慈しみは永遠に続く」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10. 種を蒔く人に種を与え、パンを糧としてお与えになる方は、あなたがたに種を与えて、それを増やし、あなたがたの慈しみが結ぶ実を成長させてくださいます。11. あなたがたはすべてのことに富む者とされて惜しまず施すようになり、その施しは、わたしたちを通じて神に対する感謝の念を引き出します。12. なぜなら、この奉仕の働きは、聖なる者たちの不足しているものを補うばかりでなく、神に対する多くの感謝を通してますます盛んになるからです。13. この奉仕の業が実際に行われた結果として、彼らは、あなたがたがキリストの福音を従順に公言していること、また、自分たちや他のすべての人々に惜しまず施しを分けてくれることで、神をほめたたえます。14. 更に、彼らはあなたがたに与えられた神のこの上なくすばらしい恵みを見て、あなたがたを慕い、あなたがたのために祈るのです。15. 言葉では言い尽くせない贈り物について神に感謝します。
오늘 우리 교회는 추수감사주일을 지킵니다. 추수감사주일은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매년 추수감사주일을 지켜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성탄절’,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하는 ‘부활절’, 그리고 성령님의 강림을 기념하는 ‘성령강림절’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교회력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수확을 감사하는 수장절(장막절)이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3대 절기 중에 하나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추석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요. 한 해의 농사를 통해 얻은 수확을 가지고 조상들에게 예를 갖추는 전통이지요.
그런데 오늘날의 시대는 계절에 상관없이 농사를 짓고, 각종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 있습니다. 게다가 저장하는 기술도 발전하여 작년에 수확한 농산물을 올해에도 먹을 수 있습니다. 또한 국가 간 무역의 발달로 모든 농업 생산물이 세계적으로 공유되고 있지요. 따라서 농작물 추수의 시기나 수량이 우리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특정한 계절이나 시기에 추수를 하는 것과 추수에 대한 결과에 대해서 예전만큼 큰 관심을 갖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관심사가 그러하다보니 자연스레 추수된 수확물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조금은 희석되거나 곡해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보다 성경적이고 영적인 근거와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배우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9장 1절부터 시작되는 구제를 위한 헌금에 관한 내용에 포함된 구절들입니다. 교회의 헌금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세속적이거나, 경제적인 이유가 아닌 영적인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주목해야 할 첫 번째 구절은 6절에 “적게 심은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사람은 많이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지요. 적은 것을 심으면 적을 것을 거두고, 많은 것을 심으면 많은 것을 거둔다는 말씀이 매우 지당하게 들리는 데요. 투자한 만큼 수확이 많아진다고 들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야 뭔가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 정도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더 많이 수고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얻는 것은 은혜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의 말씀을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는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얻어서 포도원 일을 맡기는 비유로 천국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포도원 주인은 하루 종일 고생하며 일한 일꾼과 거의 일하지 않고 뒷정리만 했던 일꾼에게 똑같이 하루의 일당인 한 데나리온의 품값을 줍니다. 아침에 포도원에 온 일꾼이 주인과의 약속보다는, 자신이 더 장시간 일한 만큼 더 받을 것을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천국을 누리게 되는 은혜의 가치는 하루종일 일한 일꾼에게도 약속된 한 데나리온의 품값이, 한 시간 정도만 일한 일꾼에게도 약속된 한 데나리온의 품값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6절 말씀과 상충하는 내용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많이 거둔다’는 표현에서 ‘많다’는 말은 본래 숫자적으로 많은 분량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많은 것’이라고 번역된 ‘유로기아’라는 단어는 오히려 ‘아름다운 말’, ‘칭찬’, ‘찬미’, ‘축복’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유로기아’라는 단어의 직역이 아니라, 의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어 성경이 좀 더 본문의 흐름에 가까운 번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豊かに’라는 말은 꼭 숫자를 의미하지 않을 때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한글 성경 중에는 ‘많이’라는 구절에 각주가 달려있는 부분에 보시면, ‘복으로’라는 기록이 있는 성경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유로기아는 ‘유로고’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요. ‘유로고’라는 단어는 ‘감사하다’ 혹은 ‘축복하다’라는 뜻과 ‘찬송하다’라는 뜻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6절의 의미를 좀 더 영적인 감수성으로 보면 우리가 헌금을 하든, 헌신을 하든, 봉사를 하든지 간에 신앙생활에 대한 우리 마음의 태도와 자세가 감사와 축복에 인색하거나 충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단지 숫자적인 분량을 얼마나 많이 뿌렸느냐 혹은 적게 뿌렸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에 합당하고 바른 태도와 자세를 심었는가, 또한 감사와 찬양의 마음을 심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마치 투자하듯이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적게 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가치로 이미 채워 주시는 은혜를 생각하며 찬양과 축복과 감사로 심는 것이 많이 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투자하듯이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그런 취급을 받을 것이고, 축복과 감사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나님께 그런 대우를 받게 된다는 뜻이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2)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봉헌하는 것은 투자가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헌금과 헌신, 그리고 봉사는 내가 주님께서 구원해 주신 은혜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열매이며, 여러 가지로 믿음을 표현하는 방법 중에 소중한 하나가 될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떤 헌신과 봉사를 기뻐하시고 흐뭇해 하시는 지 본문의 7절이 고백하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내는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쁘다는 말은 ‘힐라로스’인데요. 이 말은 ‘흔쾌히’, ‘상쾌한’이란 뉘앙스를 가진 ‘기쁘다’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어원은 ‘힐레오스’인데요. 이는 자비롭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풀 때의 거리낌이 없는 기쁨의 상태가 바로 7절의 ‘힐라로스’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로 고백하고 찬양과 찬사를 드릴 때 마음에 거리낄 것이 없는 기쁨으로 드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이나 존재로부터 경솔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따라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그 어떤 헌신과 봉사와 열심도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수 없고,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께 아무런 받을 것을 구하지 않고 헌신할 수 있을까요? 어떤 보람도 구하지 않고 봉사할 수 있지요? 그 비밀 아닌 비밀이 바로 ‘감사하는 습관으로 사는 생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오직 감사할 것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어쩌면 각자 자기 삶의 일상에서 감사할 것을 찾아내고 고백하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첫날을 구별하여 예배를 드리는데요. 지난 한 주간의 일들을 돌이켜 감사할 것을 발견하여 기록해서 갖고 있다가, 주일에 교회에 와서 주님 앞에 그 모든 것을 쏟아 놓는 것이 예배의 찬양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시작하며 찬양과 경배를 노래로 부릅니다. 이 노래는 세속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자기 기분에 내키는 대로만 부르지 않습니다. 잘 불러도, 그렇지 못해도 자신의 목소리를 주님을 향해 드리는 마음으로 노래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시간도 엄연한 예배의 시간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의 감사하는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는 엄연한 예배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찬양과 경배로 노래하는 시간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길 축복합니다.
그럼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며 무엇을 감사해야 하겠습니까? 해답은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살전 5장 16-18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이 앞에 장식되어 있는 과일과 채소는 물론 저와 여러분이 직접 키우고 재배한 것은 아닙니다. 전문적인 농업인이 정성과 재능을 들여서 키운 작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저 돈을 내고 마트와 상점에서 이 작물들을 구입했습니다. 물론 이 봉헌물을 구입하기 위한 수고와 재물을 벌기 위한 수고를 하였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런 세속의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이 수확물들을 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햇살과 비와 바람과 기온을 적당하게 조절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먹을 것을 주신 주님께 찬양하라는 시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추수감사주일에 과일과 채소 등 농산물을 봉헌하는 것, 예배 후에 함께 나눠 먹는 것, 나눠 갖는 것은 단순히 맛있는 것을 우리끼리 나눠 먹기 위한 행동을 초월하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행실입니다. 이렇게 봉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직접적으로 통치하고 계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특별헌금을 십시일반 모아서 봉헌한 이 봉헌물들을 나누고 먹는 것도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의 삶과 존재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삶에 직접, 간접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봉헌하는 일에 사소하게라도 동참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 봉헌물을 나누어 가져가고, 나누어 먹는 일에도 사양하지 말고 동참해야 하는 것이지요. 봉헌한 구좌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그것이 곧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심는 것입니다. 찬양의 고백을 심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많이, 즉 즐겁고 흔쾌하게 자원하는 심령으로 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의 자리에서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실력을 통해 그 삶의 자리들을 지켜 나갑니다. 그 모든 시간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맡겨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럼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범사에 감사를 하지요?
그 비결은 자원하여 적극적인 마음으로 감사의 고백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단지 수동적인 입장에서 좋은 일에만, 성공적이고 형통한 일에만 감사할 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것도 감사할 수 있게 되는데요. 감사의 기원을 우리 주님께 두면 되는 것이지요. 또한 모든 삶의 상황들을 주님께 감사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데요. 저와 같은 경우는 이렇습니다.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어서 주님께 감사합니다. 양치를 할 수 있어서 주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분노를 참지 못했지만, 제가 아직도 주님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하루에 하루만큼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지만, 나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가르쳐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태양이 뜨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또 하루를 창조하신 것을 가르쳐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비가 와서 나의 삶은 불편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니 주님께 감사합니다. 세상에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 많지만, 그 때문에 주님의 복음이 더욱 절실함을 가르쳐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물론 사람에게 대해서, 형편과 환경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기원과 근원이 곧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그 분의 살아 계심,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믿는다면 주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는 부조리하고, 불의한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면 감사하다고 감히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상식을 뛰어넘는 감사를 3차원의 감사라고 누군가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1차원의 감사는 좋은 조건 아래에서의 감사, 2차원의 감사는 역경을 이길 소망과 희망을 미리 말하는 감사, 3차원의 감사는 고난과 부조리한 상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에 감사하는 감사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3차원 감사의 주인공은 상식을 뛰어넘는 고백으로 주님께 감사했던 욥의 찬송입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욥 1:21)
약 30여 년을 우울증과 자기중심적인 생활방식으로 일상에 늘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던 저희 육신의 어머니가 2012년 어간에 주님을 진솔하게 만나시고 나서 변화된 것을 저는 압니다. 그렇게 불평과 불만, 그리고 불안으로 상황과 여건에 끌려다니시던 어머니가 주님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찾기 시작하며 변화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저와 통화를 하시며 이렇게 고백을 하셨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감사하다고 계속 고백을 했더니 감사할 일이 계속 생기더라.”
요즘에도 종종 통화를 하면 이런 저런 감사할 일이 많다고, 심지어 코로나 때문에 오히려 감사할 일이 생겼다고도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불평과 불안의 인생을 감사와 기쁨의 일상으로 바꿔 주시는 것을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추수감사주일을 지키는 것은 단지 내가 경제적으로 넉넉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뭔가 인생에서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믿음이 좋아서 자랑할 일이나 간증할 말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혹은 주님께 투자함으로 얻을 것이 많기 때문도 아닙니다. 또 교회의 존재감을 느끼기 위한 여러 행사들 중에 하나도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형편과 직업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자라나고 열매를 맺은 수확물들을 보며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권능을 생각하는 주일이 바로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이 과일들을 함께 나누어 먹으면서 나를 생존하게 하시고, 생활을 보장하시고, 생명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의 아름다운 축복의 맛을 나누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추수감사주일을 지킴으로 범사에 모든 일을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기적의 삶을 회복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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