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KDI 역할은 한국형 선진국 모델을 만드는 것”
2021년 신축년 새해가 밝았다.
KDI 개원 50주년이 되는 특별한 해인 만큼 ‘50주년 기념 만남’을 여는 주인공으로 최정표 원장을 모셨다. 인터뷰어엔 2019년 숙명여자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KDI OB 박윤수 교수가 초청됐다. 지난 12월 17일 KDI로 연결된 두 경제학자의 대화는 KDI의 현재 그리고 내일을 향한 고민과 희망으로 이어졌다.
* 이 대담은 방역수칙을 준수하며 진행됐습니다.
KDI 원장으로 취임하신 지 어느덧 2년 9개월이 돼 갑니다. 재직하면서 보람도 느끼셨겠지만 아쉬움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그간 소회를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KDI 펠로들과 직원들 모두가 학계의 후배이자 제자뻘이다 보니 함께 있는 것만으로 그들의 역동성에 나도 젊어지는 것 같고 배우는 것도 많습니다. 게다가 대학에 있을 때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한국 경제와 세계 경제를 그때그때 살펴볼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KDI는 정책현안의 흐름에 따라 역동적으로 연구하는 곳이라 ‘이런 곳에서도 경제학을 해 볼 필요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제가 부임했을 때부터 한국 경제가 다소 하향세를 띠고 있었다는 것이죠.
2018년, 2019년 하향 국면을 맞다가 2020년부터 상향 곡선을 그리려는데 코로나19가 확산돼 본래 생각했던 정책구상을 시행할 수 없게 됐습니다. 개혁 어젠다도 내놓고 싶었는데 그럴 여건이 안 돼 아쉽습니다. KDI에 처음 왔을 때는 내부 구조와 구성원들의 역할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 돌이켜 보니 KDI의 스타일이 달라질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연구의 지향성이 과거와 달라져야 하고 거버넌스에도 변화가 필요합니다. KDI의 신뢰도를 높이려면 연구기관으로서의 정체성과 독립성을 강화해야 하는데 이는 본연의 연구기능을 강화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연구진 운용에도 고민이 많습니다. 연구원의 생명은 우수한 학자입니다. 훌륭한 연구진을 유치하고 유지해야 하는데 이걸 해내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KDI는 연구자에게 매년 학문적으로 엄밀한 분석과 동시에 정책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연구를 발표하도록 요구합니다. 저도 해봤습니다만 사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학문적 엄밀성과 정책적 전문성 혹은 타당성을 갖추기 위해 어떤 노력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국책연구기관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연구를 해야 하는 곳이니 연구과제의 주제를 어떻게 선정하는지가 매우 중요합니다. 정책과 관련된 주제를 선정하고, 연구자가 엄밀성을 가지고 연구를 하면 양질의 좋은 연구가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학문적 엄밀성과 정책연구는 충돌하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신임 연구자 입장에서는 연구주제를 선정할 때 아무래도 학위 논문에서 다뤘던 부분을 연구하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분야, 하던 일을 하는 게 편하니까요. 그렇지만 시간을 갖고 정부의 수요, 사회적 관심이 높은 주제를 다루고 현실적인 감각을 갖도록 훈련해나가면 이미 학문적 엄밀성은 충분히 갖춘 분들이니까 정책적으로도 크게 기여하는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제 선정에 있어서 선배 연구자들의 가이드나 지도가 필요하다고 보시는 것인지요.
그렇습니다. 그게 참 중요한데 지금 KDI 내에 선배들이 많지 않아요. 주니어 연구진 층이 두텁고 시니어 층이 적다 보니 선배들과 협업하고 훈련 받는 시간을 갖지 못하고, 그사이 기회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분이 생기고 있습니다. KDI가 직면한 상당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KDI 내부에 선배 연구자들이 안 계셔도 KDI가 길러낸 OB층은 굉장히 두텁습니다. 이를 활용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좋은 말씀입니다. 저도 그걸 제도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습니다. 학계에 있는 교수들도 수요가 많은 교수와 그렇지 않은 교수로 양극화되어 있는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분은 수요가 많은 바쁜 분들이라 그들이 KDI와 협업하는 시간을 내도록 하려면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들이 KDI 펠로처럼 연구하면서 우리 연구진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박 교수님도 함께 해주시면 좋겠어요.(웃음)
이번엔 다른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2021년은 KDI가 개원한 지 50주년입니다. 원장이 아닌 경제학자로서 KDI의 공과를 평가해 주신다면요.
KDI 역사는 성공스토리라고 봐야죠. 저는 대한민국에서 지난 50년간 우리가 직접 만든 기관 중 가장 성공한 기관이 KDI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은행같이 고유 기능을 가진 곳을 제외하고는 정부부처, 정당, 기업들도 이름이나 기능이 모두 바뀌었는데 KDI만이 50년 동안 정체성을 그대로 이어 왔습니다. 또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KDI가 한국 경제의 초기 고도성장과정에서 이론적 견인차 역할을 잘 해낸 것이지요. 제가 교수를 하던 시절에도 KDI는 독보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10년, 20년 흘러 국책연구기관들이 많이 생기며 박사들 수도 늘고, 민간연구소들도 등장하면서 KDI에 대한 정부 의존도가 낮아졌습니다. 이제 KDI가 빨리 변신을 해야 합니다. 개원 50주년을 기점으로 변신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죠. 그동안 KDI는 한국의 발전경험을 토대로 후진국들이 성장할 수 있는 경제적・정책적 조언을 해주는 데 기여해 왔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 앞으로 KDI의 새로운 역할은 한국형 선진국 모델을 만들어 제시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긴 시야에서 우리 사회의 방향이나 지향점을 모색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되는데요. 앞으로 KDI가 한국 사회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KDI가 넓은 시야에서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굵직한 연구결과를 내놓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할 수 있는 기관은 KDI밖에 없어요. 정부보다 적어도 한 발짝 정도 앞서가는 선제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해야 합니다. 정부가 지금 당장 요구하는 것을 제공하는 수준의 연구가 아닌, 우리가 창의적으로 한발 앞서 가는 연구를 해서 제시해야지요. 지금으로서는 그걸 수행할 인적자원이 부족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외부 학자들과 연계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국제화에도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특히 외국학자들과의 교류를 확대해야 합니다. KDI는 이미 한국을 넘어 글로벌 싱크탱크 순위 10위 안에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Korea’s Leading Think Tank’라는 슬로건을 ‘World’s Leading Think Tank’로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앞으로 세계 유수한 학자들과 우리 연구진이 더 많이 교류하고 공동연구를 통해 좋은 결과물을 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국제적인 연구기관이 됐으니 그걸 더 확실하게 다져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3년 동안에도 노력해 왔습니다만 2020년은 코로나19가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
Korea’s Leading Think Tank에서
World’s Leading Think Tank로!
앞으로 세계 유수한 학자들과 우리 연구진이
더 많이 교류하고 공동연구를 통해
좋은 결과물을 내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
학문적 엄밀성과 정책적
전문성을 갖춘 연구를 해야 하는 KDI,
긴 시야에서 우리 사회의 지향점을
모색해야 한다는 말씀에
큰 도전이 됩니다.
”
KDI가 말씀하신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문제 혹은 KDI 원장으로서 정부나 국민께 건의하고 싶은 사안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 말씀해 주셔도 좋겠습니다.
KDI의 거버넌스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브루킹스연구소처럼 자체 능력만으로 운영할 수 있다면 정부 예산을 받지 않고 자체적으로 싱크탱크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 현재 우리에게 그런 체력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미국은 워낙 시장이 넓으니까 브루킹스에 의존하는 연구용역이 국제적인 규모인데 우리는 그 정도 수준이 안 되다 보니 정부 예산에 의존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체제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봐요. 지금 체제의 국책연구기관으로 가는 것이 바람직한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하는지. KDI는 정부의 모든 정책 분야를 연구하면서, 부설 대학원도 있고, 정부의 여러 특수 업무를 수행하는 센터들도 가지고 있는 대형 종합연구소인 만큼 그 기능을 더욱 효율화시킬 수 있는 새로운 거버넌스를 고민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풀기 어려운 과제이고 국가 차원에서 논의돼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끝으로 새로운 50년을 준비하는 KDI 전・현직 모든 구성원들에게 격려와 당부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KDI가 오늘날 이런 위상과 평판을 갖도록 만들어 주신 선배님들께 감사합니다. 선임 원장들이 쌓은 업적에 누가 되지 않을까 늘 그런 걱정을 하면서 일해 왔습니다. 제가 원장을 맡고 있는 동안 기관에 보탬이 돼야 한다고 다짐도 했었지요. 특히 제 임기 중에 50주년이라는 크나큰 이벤트가 있기 때문에 이때를 기점으로 KDI가 달라질 수 있는 모멘텀을 가져야 되겠다는 바람에서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비전보고서를 만들며 새로운 50년의 KDI와 한국 사회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그 결과를 선보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저와 함께 고민하느라 애쓰고 있는 우리 연구진과 직원 여러분께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들의 노력과 결실이 쌓여 우리의 50주년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원래 개원 50주년 기념식은 KDI OB, YB 우리 모두의 축제이고 잔치인 만큼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는데 코로나19 상황이 워낙 엄중하고 예상하기 어려워 조심스럽습니다. 형식과 공간에 구애받지 말고 우리 모두가 지금의 자리에서 서로를 다독이고 응원하면서 앞으로 희망에 찬 새 시대를 열어 갔으면 합니다.
오늘 원장님께서 너무나 공감되는 말씀을 열정적으로 해주셔서 저 개인적으로도 도전이 됩니다. 뜻깊은 인터뷰에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