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과 인제의 민란 발생으로 다시 지목
1889년 벽두에 정선에서 민요가 일어나자 해월은 보은 장내 육임소로의 왕래를 중지시켰다. 이어서 인제에서도 백성들이 들고 일어났다. 정선과 인제의 민요는 동학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이 지역에 동학도들이 많이 있어서 혹여 피해를 입지 않을까 염려해 해월은 특별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백성들의 민요에 동학이 관여되어 있지 않아도 관에서는 동학을 주목했다. 동학 세력의 성장이 민요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한 관에서는 동학에 대한 탄압에 다시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7월 들어 지목이 본격화되자 해월은 보은 장내리에 있는 육임소를 일시 폐쇄하고 괴산(槐山)의 신양동(新陽洞)으로 피신했다. <해월선생문집> 등의 나오는 괴산의 신양동을 찾기 위해 표영삼은 괴산 일대를 다니며 신양동을 찾았으나 그 이름의 마을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학 기록의 신양동을 괴산군 소수면(沼壽面) 수리(壽里)에 있는 신항(新項)마을로 추정하고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이 신항을 새항이라고 불렀는데 아마 새항을 새양으로 듣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신양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신항리(新項里)는 괴산군 괴산읍에 속해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더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다.
7월의 지목으로 강무경(姜武卿), 방병구(方炳九), 정영섭(丁永燮), 조상갑(趙尙甲) 등이 체포돼 피살당했다. 이들은 민란과는 상관이 없었지만 동학도라는 이유로 살해됐다. 10월에 문경에서 다시 민란이 일어나자 지도부 다수가 체포됐다. 이때 체포된 인물은 서인주(徐仁周), 강한형(姜漢馨), 신정엽(辛正燁), 정현섭(丁舷燮) 등이었는데 이들을 체포한 자들은 다름 아닌 경사(京師), 즉 서울의 포졸이었다. 동학의 기록에는 강한형과 정현섭은 서울에서 사형됐고 서인주와 신정엽은 절해고도로 정배됐다. 유배된 서인주와 신정엽을 석방시키려고 도인들이 돈을 모아 뇌물을 써서 6개월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강원도 간성의 왕곡마을로
10월 29일 해월은 지목을 피해 아들 덕기와 김연국을 대동하고 강원도 인제 갑둔리 김연호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갑둔리는 1880년 동경대전을 최초로 간행한 곳이었다. 해월은 위기에 처하면 자주 갑둔리로 피신해 숨어 지냈다. 그런 측면에서 갑둔리는 해월의 은신처였다. 또 보은의 대접주 임규호(任奎鎬)와 임신준(任臣準), 그리고 권병덕(權秉悳) 등 충청도의 지도부들도 지목을 피해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할 정도로 동학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해월은 갑둔리도 안심할 수 없어 태백산맥을 넘어 강원도 고성(高城)의 왕곡리(旺谷里)로 향했다. 왕곡리에는 김도하라는 도인이 살고 있었다. 김하도의 후원에 있는 방 하나를 얻어 삼순구식(三旬九食, 30일 동안 아홉 끼를 먹었다는 뜻으로 매우 곤궁했다는 의미)으로 겨울을 보냈다. 해월의 식구들도 이곳까지 피신할 정도로 당시 지목이 심했다. 왕곡마을에는 함씨와 최씨가 많았는데 용궁 김씨(龍宮 金氏)도 왕곡마을의 적동에 살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김하도는 용궁 김씨로 보인다. 이 마을의 입구에 동학사적지건립위원회에서 해월의 순도 100주년을 맞은 1997년 6월 2일 ‘동학의 빛 왕곡마을’이라는 표지석이 세워 해월의 발길이 닿았음을 밝혔다.
왕곡마을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봉리에 소재하고 있다. 이 마을은 19세기 전후에 건립된 북방식 전통 한옥과 초가집 군락이 원형을 유지한 채 잘 보존돼 있어 2000년 1월 국가민속문화재 제235호로 지정됐다. 동북 지역의 가옥구조가 잘 보존된 민속마을로서의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또 왕곡마을은 동해안인 대표적인 석호인 송지호와 약 200m거리에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왕곡마을은 동학혁명 때 동학군 집결지
해월은 왕곡마을에 있으면서도 제자들을 많이 양성했는데 이들은 훗날 동학혁명의 영동지방 기포에 가담했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9월에 해월이 총기포령을 내리자 양양과 거진의 동학도들도 함께 기포해 왕곡마을 함일순의 집에서 10여 일간 머물면서 전력을 가다듬었다. 이 지역의 동학도들은 홍천의 차기석(車基錫) 대접주와 연합해서 강릉관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회원 등 민보군의 습격을 받아 이곳으로 쫓겨 왔다.
동학도들은 관군과 민보군이 이곳까지 추격해오자 가지고 있던 돈 등을 함일순의 집 소 오줌통에 숨겨두고 뒷날 찾으러 오겠다고 하고 도망쳤다. 하지만 관의 추격으로 동학도들은 대부분 체포된 뒤 살해돼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동학혁명의 불꽃이 사그라진 후에도 동학도들이 찾아오지 않자 함씨 일가에서는 이 돈을 수습한 다음 요긴하게 활용해 큰 부자가 됐다고 한다. 함씨 집안에서는 동학도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1997년 ‘동학의 빛 왕곡마을’ 동학사적기념비를 건립할 때 마을 입구 150여 평의 부지를 제공했다.
1890년 1월이 되자 동학에 대한 지목이 조금 누그러졌다. 해월은 눈이 녹아 길이 트이자 왕곡마을 김하도의 집을 떠나 인제 갑둔리로 돌아왔다. 김연호의 집에 일시 기거하던 해월은 2월 보름 경에 갑둔리의 옆 마을인 성황거리에 있는 이명수(李明秀)의 집으로 갔다. 성황거리는 갑둔리에서 동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 왼쪽 길로 접어들면 있는 마을이다. 현재는 갑둔리와 마찬가지로 군의 사격장으로 변해서 가옥은 전부 헐려 집터만 남아있다.
저 새소리도 시천주(侍天主)의 소리
2월말에 해월은 손병희에게 기별을 넣어 성황거리에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자네가 사는 근처로 갈 수 있도록 거처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손병희와 동생 병흠은 해월의 명을 받고 충주 외서촌(外西村) 보뜰(음성군 금왕읍 도전리)에 집 하나를 마련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목이 계속돼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없자 3월 들어 가족을 먼저 보뜰로 이사시켰다. 가족을 이사시킨 후 해월은 강원도 양구읍 죽곡리 길윤성(吉允成)의 집으로 잠시 은신했다. 해월은 피신 중에도 강원도의 여러 곳을 다니며 교세 확장에 힘썼다.
해월은 5월 보름 경에 다시 갑둔리 김연호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7월에는 다시 성황거리 이명수의 집으로 옮겨 지냈다. 이때 유명한 “저 새소리도 시천주(侍天主) 소리”라는 설법을 했다. <해월선생문집>에는 이 대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선생이 장한주(張漢柱)와 김연국(金演局)에게 “저 새들의 울음은 무슨 소리인가?” 하고 물으니 두 사람은 알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였다. 선생은 “시천주(侍天主)의 소리이니라. 모든 사람과 생물(生物)이 숨을 쉬는 것도 모두 천지(天地).우주(宇宙)의 기운에 근원한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저 새소리도 시천주의 소리라는 해월의 가르침 속에는 사람만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가 아니라 천지만물 또한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며, 심지어 무생물인 물건조차 한울님을 모신 존재임을 밝힌 동학의 생명사상을 가장 간단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해월의 생명사상은 “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다”와 “인오동포(人吾同胞) 물오동포(物吾同胞)”로 확장됐다. 그리고 이 생명사상은 경천(敬天).경인(敬人).경물(敬物)의 삼경(三敬) 사상으로 정립됐다.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 반포
해월인 은거하고 있는 동안 윤상오(尹相五)는 보뜰의 가족들을 공주시 정안면(正安面) 운궁리(雲弓里) 활원(活院)으로 이사시켰다. 해월은 8월에 가서야 공주 활원으로 가서 가족을 만났다. 그러나 급작스레 준비한 이곳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라 안전하지 못했고 집도 비좁아 해월은 윤상오의 집에서 기거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러자 서택순이 주선해서 해월의 가족들은 9월에 진천군 초평면(草坪面) 용산리(龍山里) 금성동으로 이사를 갔다.
금성동에서 자리 잡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해월은 10월에 영남 지방으로 순회를 나섰다. 앞서 해월은 김연국에게 상주, 선산, 김산, 지례 등지를 돌아다니며 민심과 도인들의 상황을 살펴보게 했다. 이 지역에 특별한 지목이 없자 해월은 직접 영남 순례에 나섰다. 11월에 해월은 김산군 구성면(현 김천시 구성면) 복호동(伏虎洞) 김창준(金昌駿)의 집으로 가서 여러 날을 묵으면서 많은 도인들을 접촉했다. 김산과 인근 지례(현 김천시 지례면)에는 수운의 포덕으로 오래된 도인이 제법 있었다. 해월도 이들과 친분이 있어서 김창준의 집에 머물면서 이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도담(道談)을 나누었다.
이때 해월은 내수도(內修道, 동학에서 부인을 일컫는 말)를 위한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만들어 반포했다. 먼저 포태(胞胎)에 관한 글인 내칙(內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포태(胞胎)하거든 육종(肉種)을 먹지 말며, 해어(海魚)도 먹지 말며, 논의 우렁도 먹지 말며, 거렁의 가재도 먹지 말며, 고기냄새도 맡지 말며, 무론 아무 고기라도 먹으면 그 고기 기운을 따라 사람이 나면 모질고 탁(濁)하니, 일삭(一朔)이 되거든 기운 자리에 앉지 말며, 잘 때에 반듯이 자고, 모로 눕지 말며, 침채(沈菜, 김치)와 채소와 떡이라도 기울게 썰어 먹지 말며, 울새(울타리) 터논 데로 다니지 말며, 남의 말 하지 말며, 담 무너진 데로 다니지 말며, 지름길로 다니지 말며, 성내지 말며, 무거운 것 들지 말며, 무거운 것 이지 말며, 가벼운 것이라도 무거운 듯이 들며, 방아 찧을 때에 너무 되게도 찧지 말며, 급하게도 먹지 말며, 너무 찬 음식도 먹지 말며, 너무 뜨거운 음식도 먹지 말며, 기대앉지 말며, 비켜 서지 말며, 남의 눈을 속이지 말라.
이같이 아니 말면 사람이 나서 요사(妖死)도 하고, 횡사(橫死)도 하고, 조사(早死)도 하고, 병신(病身)도 되나니, 이 여러 가지 경계하신 말씀을 잊지 말고 이같이 십삭(十朔)을 공경(恭敬)하고 믿어하고 조심하오면 사람이 나서 체도(體度)도 바르고 총명(聰明)도 하고 지국(智局)과 재기(才技)가 옳게 날 것이니, 부디 그리 알고 각별 조심하옵소서.
이대로만 시행하시면 문왕(文王) 같은 성인과 공자(孔子) 같은 성인(聖人)을 낳을 것이니, 그리 알고 수도를 지성으로 하옵소서.
이 내칙과 내수도하는 법문을 첨상가에 던져두지 말고, 조용하고 한가한 때를 타서 수도하시는 부인에게 외워 드려, 뼈에 새기고 마음에 지니게 하옵소서.
천지조화(天地造化)가 다 이 내칙과 내수도 두 편에 들었으니, 부디 범연히 보지 말고 이대로만 밟아 봉행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