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세요?” 혜자 선생님의 첫 질문에 스스로 정리했던 ‘주체’의 의미를 떠올렸습니다. 자기 삶을 선택하며 사는 것. 하지만 내가 선택한 삶이라고 해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불안하고, 부담되고, 때론 후회되는 선택도 많았습니다. 괜한 자존심에 포기하지 못하고 ‘내가 선택한 일이야! 난 할 수 있어!’라며 자기합리화할 때조차도,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비윤리적인 실험과 근현대 역사를 되짚어보며 주체에 대해 다시 생각했습니다. ‘선택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게 아니라, 그 선택에 ‘내 주관’이 들어가야 하는구나 깨달았습니다. 특정 역할, 사회적 틀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인간 송지우의 생각대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이 날의 배움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자신의 주관대로 살아갈 수 있게 돕고 싶습니다. 혹여나 남들에게 반항하는 아이, 자기 고집이 센 아이로 비칠까 걱정되지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과 그냥 행동하는 것은 다르기에. 설상 현실에 부딪히더라도 사유하고 성찰하며,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23.6.12/ 44회 차 수련학교사회복지 송지우 일지 중]
좋은 배움입니다. 지우 선생님 배움에 함께 공부하듯 적었습니다. 주체성을 갖는다는 건 자신의 선택에 묵묵히 책임을 질 수 있는 책임성을 갖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은 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길이 두 개 밖에 없을 때, 여러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내 이익의 순위를 따져 묻기도 하고, 그냥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합니다. 이익이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보탬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 개인을 위한 이익이라도 사실 무언가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이 두렵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해지는 과정이겠지요. 나와 당사자 그리고 관련 있는 사람들이 최대한 서로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최선을 찾아 나가는 겁니다. 이익의 순위를 나만의 위해 이기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 최선에 모두가 다 행복하고 평화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계를 미리 설정하고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결정했다면 그 선택의 결과를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잘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조건 긍정이 아닙니다. 과도한 긍정은 때로 비현실적인 이상을 만들어 나의 몸과 마음을 지키게 하기도 합니다. 잘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때 드는 감정을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채는 겁니다.
'아! 내가 잘못 선택했구나. 속상하다.' '어! 내가 그래도 좋은 판단을 했구나. 나 좀 멋진데.'
1차적으로 내가 느낌 감정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처음은 나의 감정을 알아채는 것도 느리고 회복하는 것도 느립니다. 그것도 반복하면 조금 그 감정 속 원인이 발견됩니다. 그래야 이후 무엇을 어떻게 수정해 나갈지 그려집니다.
사람에게는 다양한 감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많은 상황을 그냥 괜찮은 척 받아들인다면 다시 선택하는 과정에서 주춤하거나 스스로를 깎아내릴지 모릅니다. 내 회복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결과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신중하고 진진하되 자기 비난 연민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지우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돕고 싶은 방법이 주관(主觀)인지 주관(主管)인지에 따라 생각과 방법의 차이가 크게 달라집니다.
주관(主觀)이라면 자신의 견해나 관점을 잘 전달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혹여나 남들에게 반하는 하는 아이, 자기 고집이 센 아이로 비칠까 걱정되지만" 이런 걱정이 된다면 지우 선생님이 생각하는 주관이란 어디서든 자신의 의견을 필력 할 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 자신 스스로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그런 사람인가요? 어디서든 자신의 의견을 잘 전달하는 사람인가요? 예를 들어 지금 당장 내가 1년 차 학교사회복지사가 되었다면 10년 넘는 학교사회복지사들 앞에서 내 의견을 잘 필력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어려워하는 선생님 앞이라면? 무서운 부모님 앞이라면? 내 의견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현재 만나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인데 여러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말한다면 어떨까요? 지우 선생님이 아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점차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요. 아이들이 어디서든 당당하고 씩씩하게 지냈으면 마음 그래서 이런 마음이 드는 거겠지요. 그러니 더욱 여러 생각해 봅시다.
주관(主觀)이 아닌 주관(主管)하게 돕는 것이 주체성이지 않나 싶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아이도 자신이 한 일에 스스로 책임지도록 자신의 삶을 관장하고 관리하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렇게 작은 것부터 주관하다 보면 점점 그 영역이 넓어질 겁니다. 그게 바로 '좋은 경험과 좋은 어른과의 만남'이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화를 내고 고집을 부려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던 아이를 웃으며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저는 어디서든 자신을 드러내는 아이보다 어디서든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삶 속에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책임져 나갈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부족하고 약해 보이더라도 자기 삶 속 주체성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며 그렇게 도와가고 싶습니다.
제 생각이 다 맞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배움에 따라 보태고 수정하며 나아갑니다. 그게 성찰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찰이 과정이 있기에 그래도 조금은 앞을 향하며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뜻과 생각을 자신이 펼치고 싶은 사회사업 인생에 바르게 적용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항상 저에게 질문을 보내주는 지우 선생님께 감사하며 언제나 응원합니다.
첫댓글 선생님, 고맙습니다.
당시 글을 쓰면서도 고민되었던 부분이 ’사회성‘이었는데요.
선생님의 글을 통해 주관(主觀)과 주관(主管)의 차이를 이해했습니다.
글을 조금 더 곱씹어 봐야겠어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