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의 증명력
김영준씨는 김문태씨에게서 집안의 족보와 가계에 대해서는 어려서부터 들어 알고 있으나, 족보의 연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김영준씨는 『조선시대 사상사연구2』* 부록 「한국의 성씨(姓氏)와 족보(族譜)를 읽는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성씨나 족보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혈연이 중시되는 강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이다. 성씨는 자기의 혈통을 밝히고자 붙인 것이요, 족보는 자기의 조상을 존중하고 친족간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만들어졌다.”
“본관에 따라 신분이 달라지고, 족보가 없으면 과거(科擧), 승음(承蔭, 공신이나 당상관의 자손이 과거를 보지 않고 관리로 임명되던 일), 상속, 사환(仕宦, 벼슬살이를 함)을 할 수 없었으며, 군역까지 부과되었다. 그러니 무리를 해서라도 명족(名族)에 끼려 하고 족보를 만들려 했다. 위보(僞譜)와 개관(改貫)이 횡행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전통시대의 성씨와 족보는 사회생활의 실상이요, 영욕(榮辱)이었다.”
“이제는 전통 양반 가문뿐만 아니라 양반 출신이 아닌 집안까지도 족보를 만드는데 열을 올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19세기부터 있어 왔다. 양반의 특권이 많기 때문에 신분제가 무너져 가는 틈을 타 전 국민이 양반화된 것이다. 족보란 본래 친족 사이의 친목을 도모하고자 만든 것이기에 원칙적으로 자손이면 누구나 들어갈 자격이 있으며 신분이 낮다고 입록을 거부당하지 않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양반체제에서 양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독점한 데 대한 불문이 노출된 것일 뿐이다.”
“신라의 내물왕계가 집권하자 그를 이은 왕들이 내물왕의 몇 세손이라고 내세웠다. 씨족(Clan)보다 가계(Lineage)가 우선하게 된 것이다. 씨족이 보다 넓은 범위의 혈연집단이었던 것과 달리 가계는 혈연관계가 확실한 근친을 의미한다. 따라서 씨족보다 가계가 결속이 강한 혈연집단이라 할 수 있다.”
“신라 하대에는 가계 사이의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씨족 중심의 기록이나 제사가 가계 중심으로 바뀌었다. 권력투쟁에서 성공한 가계는 물론 실패한 가계에서도 자기의 가계를 드러내고자 많은 비석을 세우고 전기(傳記)를 편찬했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시대로 이어진다. 고려시대에는 가첩(家牒), 세보(世譜), 가보(家譜), 가기(家記), 가전(家傳), 가장(家狀), 가승(家乘), 세계(世系), 보첩(譜牒) 등의 명칭이 보인다. 고려가 건국되고 태조가 호족들에게 토성을 분정하자 성씨별로 자기의 성씨를 드러내고자 일정한 가계 기록을 만들었을 것이다.”
“16세기 말까지는 족보를 가진 성씨가 안동 권씨, 문화 류씨, 순흥 안씨, 강릉 김씨, 동래 정씨, 능성 구씨 등 10여 개 밖에 되지 않았고, 가첩 등 초보 형태의 족보를 가진 성씨도 30여 성 밖에 되지 않았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명문가가 몰락하는 대신 상인 등 주로 중인 계급의 신흥세력이 대두해 족보를 경쟁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명문가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고자 족보를 보강했고, 신흥세력은 미천한 가계를 은폐하고 가격(家格)을 높이고자 족보를 위조하거나 본관을 아예 바꾸었다. 더구나 양반이 향리를 천시했고, 양반이 아니면 군역을 져야 했기 때문에 신흥세력은 결사적으로 족보를 위조해서라도 양반의 반열에 끼려고 했다.”
“신흥세력이나 명문이 아닌 사람들은 남의 가계에 절손이 된 뒤를 잇거나, 형제 수를 늘리거나, 한 대를 더 끼워 넣거나, 아예 별파(別派)로 편입하는 방법으로 명문가에 들어오려 했고, 명문가에서도 돈을 받고 이를 묵인해 주는 경우가 많았다. 이른바 수족(收族)이다.”
김영준씨는 김근중씨로부터 족보의 등재에 관한 대법원 판례를 들었다. 김근중 변호사는 말했다. 족보는 종중 또는 문중이 종원의 범위를 명백히 하기 위하여 일족의 시조를 기초로 하여 그 자손 전체의 혈통, 배우자, 관력(관력) 등을 기재하여 제작·반포하는 것으로서, 족보가 조작된 것이라고 인정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혈통에 관한 족보의 기재 내용은 이를 믿는 것이 경험칙에 맞으므로 족보의 증명력이 인정된다(대법원 2000. 7. 4. 자 2000스2 결정 참조).
그런데 종중의 대동보나 세보에 기재된 사항의 변경이나 삭제를 구하는 청구는 재산상이나 신분상의 어떤 권리관계의 주장에 관한 것이 되지 못하므로 제소할 법률상의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어 허용될 수 없으므로 종원 아닌 자가 족보에 기재되었더라도 그 기재 사항의 변경이나 삭제를 구할 수 없다(대법원 1998. 2. 24. 선고 97다48418 판결 참조).
다만 대동보나 세보에 기재된 내용으로 말미암아 법률상 사람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변경이나 삭제가 되더라도 당사자의 재산이나 신분상 권리관계에 어떠한 영향도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에 기한 청구가 법률상 보호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족보로 말미암아 조상 또는 후손들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에 대한 손해배상에 갈음하여 명예회복에 적당한 처분의 한 방법으로 족보의 폐기를 구할 수는 있으나(소의 이익은 인정),
족보에 기재된 조상에 대한 내용이 허위라고 하더라도 그 내용만으로 후손들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된다고 볼 수 없고, 그로 인하여 단순히 주관적으로 후손들의 명예감정이 침해되는 것은 별론으로 하고,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이를 전제로 족보의 폐기를 구하는 청구는 이유 없어서(본안 판결로 기각) 족보를 폐기할 수 없는 결론은 같다(서울북부지방법원 2011. 6. 23. 선고 2011가합942 판결 참조).
결국 일단 족보에 등재되면 그 내용이 잘못되었더라도 명예훼손으로 불법행위가 되지 않는 한 소송으로 바로 잡을 수 없고, 족보의 기재 내용은 증명력을 가지게 된다. 물론 증명력이 있다는 것이지 사실로 인정된다는 것은 아니다. 증거로 족보의 기재 내용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하여 증명력을 깨트릴 수는 있다. 족보에 등재된 경우 이를 부정하는 쪽에서 증명책임(입증책임)이 있다.
종중 관련 거의 모든 소송에서 원고가 종원이 아니라는 본안전 항변을 하게 되는데, 그 때 족보의 기재사항에 관하여 다툼이 일어난다. 피고는 원고가 족보에 등재되어 있지 않다거나 등재되어 있더라도 허위로 기재되어 종원이 아니어서 당사자 적격이 없으므로 부적법한 소송이라는 본안 전 항변을 한다.
이 때 족보에 등재된 사람이 종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어렵다. 족보의 편찬 과정, 편찬 방법, 편찬 시기 등의 특수성으로 족보에 누락되거나 잘못 기재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제적등본과 같은 공부(公簿)처럼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중 총회를 할 때 종원의 범위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차적으로 족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김영준씨는 족보의 연원과 효력을 배우고 들으면서 족보 편찬의 중요성과 함께 종원인지 여부에 관한 다툼의 어려움도 알게 되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인가?
『조선시대 사상사연구2』, 이성무, 지식산업사, 제5쪽, 제400쪽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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