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굴사
경주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깊은 사찰을 손꼽으라면 경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거의 골굴사를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불국사와 석굴암 보다도 더 앞서 건축된 것은 물론 이웃해 있는 기림사보다도 앞서 세워진 사찰다.
골굴사는 1천500여년 이전에 세워졌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인도의 라마승들이 삼국시대에 신라 땅 골굴사 절벽에 굴을 파고 암자를 지은 혈사(穴寺)에서 수도에 정진하며 불교의 씨앗을 심었다는 것이다.
신라의 고승 원효가 혈사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지만 아직 그 혈사의 위치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보고서는 없다. 그러나 원효가 분황사에서 고선사를 거쳐 골굴사와 기림사로 왔다는 기록들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의 발자취가 기림사까지 이어졌고 혈사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은 분명하다. 기림사 주변에서 혈사를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여기 골굴사가 유일하다.
현재 골굴사 주지 설적운 스님은 자신이 골굴사에 12개의 혈사 흔적이 있고 지금도 6개소의 혈사가 옛모습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한다. 스님은 또 자신이 원효의 후손으로 그의 뜻을 세계에 유포하고 있다며 골굴암은 1천 500년 전에 세워진 유서깊은 사찰로 원효성사가 입적한 곳이라 소개한다.
골굴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골굴사원으로 원효가 입적했다는 석굴(혈사)과 보물 마애여래좌상, 승려들의 전통무예 선무도가 대표적으로 소개된다. 절벽으로 깎아지른 벼랑에 대규모 석불을 새겨 불교의 신비함을 자아내고, 곳곳에 혈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선무도의 사찰 골굴사를 통해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본다.
◆우리나라 최초 석굴사원
함월산으로도 불리는 토함산 동남자락 기림사 입구에 자리잡은 골굴사는 1천500여년 전에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이곳에 이르러 12개의 석굴에서 불법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석굴사원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기림사 사적기로 전하고 있다. 기림사 또한 골굴사에 거쳐하던 인도의 승려들이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림사보다 골굴사의 역사가 깊다는 말이다.
기림사 사적기는
‘산 북쪽에 천생석굴이 있으니 옛적에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돌빛이 결백하여 혹은 설산이라 하며 혹은 단특산이라고도 한다. 매우 기구하고 험준하여 발붙일 곳이 없다 한다. 돌을 갈아 발 디딜 자리를 만들고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속에 돌이 펀펀하여 방처럼 생긴 곳이 있어 돌을 베개하고 누우면 차지도 않고 훈훈하며 병자가 거주하면 병이 낫기도 한다’ 등의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기록처럼 지금도 12개의 석굴 흔적이 남아 있고, 6개의 석굴이 불공을 드리는 암자로 활용되고 있다. 그 중 관음전은 굴이 깊고 넓으며 전실이 기와집으로 마련돼 옛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석굴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골굴사 주지 적운 스님은 12처의 석굴 복원을 위해 세미나를 개최하는 등으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어 머지않아 석굴사원 본래의 모습을 보게 될 것 같다.
또 골굴사는 석굴암과 불국사는 물론 기림사보다도 앞서 지어진 불교유적으로 원효대사가 입적한 혈사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기림사는 643년 선덕여왕 때 천축국 승려 광유가 창건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초 임정사로 불리다가 원효가 확장 중수하면서 기림사로 개칭했다는 기록으로 원효가 기림사에 머물렀다는 것은 입증된다. 원효가 분황사에서 150여권의 불교서적을 집필하고 고선사를 거쳐 기림사에 이르른 발자취도 각종 역사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또한 원효가 617년 출생해 686년 혈사에서 입적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혈사의 위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행적이 기림사에 기거하다 혈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마무리되고, 당시 기림사 인근에 혈사가 있었던 곳은 골굴사가 유일하므로 골굴사에서 원효가 입적했을 것이라는 학계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골굴사는 보물 581호 마애여래좌상의 신비한 미소가 있는 문화유적이다. 인도의 광유성인 일행이 1천500여년 전에 석굴사원을 창건한 이래 화재 등으로 예전의 모습을 잃고 있었다. 1933년 박석조 스님이 인법당을 신축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했다. 1972년 태고종 사찰로 등록돼 1989년까지 박석조 스님의 후손들이 지켜오다 현재 설적운 스님에 의해 조계종으로 변경등록, 새로운 부흥기를 맞아 세계적인 사찰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 석굴사원 혈사 본래의 모습으로 문화재적 가치를 회복해 불교 전래역사의 뿌리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역사기행에 나서는 이들의 열망이 곧 꽃을 피울 것으로 기대된다.
◆보물 마애여래좌상
골굴사를 세계적인 석굴사원으로 알려지게 한 것은 선무도와 함께 12개의 혈사, 그리고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상이다. 함월산 골굴사 암벽에 새겨진 ‘골굴암 마애여래좌상’은 보물 제581호로 지정등록 관리되고 있다. 경주 전역의 불적들이 대부분 화강암 단단한 재질로 조성된 것과 다르게 골굴사 유적들은 대부분 사암과 이암, 석회암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쉽게 마모 훼손된다. 이를 우려해 경주시는 마애불상에 유리감실을 설치 보호하고 있다.
마애여래좌상은 머리부분이 툭 튀어나와 입체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 있지만 어깨선을 타고 내려와 하반신은 바위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육계가 분명하고 광배에는 구름문양이 선명해 인도불상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 간다라미술이 접목된 것이라는 미술계의 분석이 있어 골굴사가 인도 승려들이 창건했다는 설을 뒷받침 한다. 마애석불의 상반신은 분명하게 조각되어 있지만 하반신을 나타내지 않아 바위에서 밖으로 나오는 듯, 하늘에서 하강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상반신만 해도 높이 4m 크기에 폭이 2m 규모로 절벽에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자세로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어 아래에서 쳐다보는 이들의 마음을 압도한다. 이색적인 미소가 중생들의 불안을 말없이 가라앉혀 평안을 준단다.
◆골굴사 선무도
골굴사는 원효성사 열반성지 혈사로, 세계선무도총연맹 총재가 기거하는 선무도의 총본산이다. 매일 오후 3시면 선무도 공연이 벌어져 이를 보기 위한 방문객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국내 여행업계에서도 선무도 공연체험프로그램을 여행일정에 포함시키고 있다. 특히 외국인들의 경주여행일정에 최근 선무도 체험일정은 약방의 감초처럼 자리를 차지한다.
선무도는 승려들의 무예를 전승 발전시킨 무도다. 승려들이 체력을 단련하고 정신수양의 근본으로 삼기 위해 수련했던 무도가 발전해 체계화된 것이다. 골굴사 주지 설적운 스님이 선무도 대금강문 문주로 선무도 계승 발전에 적극 나서고 있다. 60을 넘긴 나이지만 설적운 문주는 해외에서도 선무도 시범에 직접 나서는 열정을 보이고 있다. 선무도는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 프랑스, 미국 등 20여개국에 체육관을 개설하고 무예를 통한 불법을 전파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적운 스님은 1985년 선무도 대금강문을 설립, 초대 문주로 앉아 1990년 골굴사에 선무도대금강문총본원을 세웠다. 이어 2001년 골굴사에 선무도대학을 설립하고 사단법인 세계선무도협회를 설치했다. 2009년 골굴사에서 선무도 설립 25주년기념 전통무예대회와 산사예술제를 개최하고 매년 무예대회를 주관하면서 선무도 발전을 꾀하고 있다.
2011년 선무도 화랑사관학교를 개설해 청소년들에게 선무도를 전수하고, 사천왕공연단을 만들어 정기적인 선무도 상설공연을 펼치고 있다. 골굴사는 선무도의 세계총본산으로 무예를 바탕으로 불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첨병역할을 하고 있는 건강한 불교사원으로 거듭나고 있다.
(2016. 07. 11)
첫댓글 사진이 선명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ㅠㅠ
골굴사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져온 역사를 바꿀만한 일이 있네요
인도의 선승들이 골굴사로 들어와 혈사에서 불교를 퍼뜨리는 씨앗이 되었다는 말들........
원효, 설총의 아버지는
과연 골굴사 어디 석실, 혈사에서 입적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