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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43
9월5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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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죄인인 우리를 파트너로 택하시는 예수님>
죄와 죽음의 종살이에서 신음하는 이 땅에 새 하늘 새 땅, 새로운 도읍 예루살렘을 건설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 사업의 첫 번째 협조자로 어부였던 시몬, 야고보, 요한을 선택하셨다는 것, 참으로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으며 한없이 부족했던 어부들을 인류 구원 사업의 첫 번째 핵심 제자단으로 부르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특별한 선택을 묵상하며 왜 부적격자인 나를 봉헌생활로 불러주셨나, 하는 제 개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당시 인재의 산실이자 유다 전통의 본산인 예루살렘으로 갔을 것입니다. 거기서 율법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한 제대로 된 인재, 호감이 가면서도 다재다능하고 일 추진력도 갖춘 능력 있는 사람을 뽑으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철저하게도 변방에 해당되는 갈릴래아 지방, 그것도 호숫가에서 하루하루 그물을 치며 생계를 연명해가던 어부들을 첫 제자단에 가입시켰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불림 받기 직전까지 그들은 어부로서의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갈릴래아 호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그물을 던졌지만 그날따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일당도 못 건진 그들이었기에 의기소침한 얼굴로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하필 그 순간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의 어부로서의 생활이 어떠했을까요? 요즘 어부들의 삶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겠지요. 기계화되지 못한 수동식 쪽 배에다가 어군탐지기도 없었으니 조업 조건은 더 열악했겠지요.
날씨가 궂으면 해변 가에서 하루 종일 그물을 손질하며 바늘이며 미끼를 손질하면서 조업을 준비합니다. 날씨가 잔잔해지면 배를 타고 깊은 호수 안으로 들어갑니다. 운이 좋아 많은 고기를 잡으면 내다 팔고 한 끼 잘 먹습니다.
재수가 없어 허탕을 친다든지 악천후가 계속되면 며칠이고 우울한 얼굴로 낮술을 기울였겠지요. 그들의 하루하루 생활은 생업에 너무 바빠 새 하늘 새 땅, 새로운 도읍 예루살렘, 구원, 메시아, 이런 단어들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에도 팍팍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당신 첫 번째 사도단에 가입시키신 것입니다. 시몬은 자신의 부당함과 현재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의 초대에 거부의사를 표시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호하십니다. 굳이 그토록 부당한 시몬, 그 위에 당신 교회의 초석을 놓으십니다. 선인들이 아니라 죄인들의 도움을 받아 당신 구원 사업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예수님의 생각은 변함없으리라 확신합니다. 잘 나가는 사람들, 많이 배운 사람들,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죄인들,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 바로 우리들, 곧 내 위에 새 도읍 예루살렘을 건설하십니다. 죄인인 우리들의 손길을 통해 아버지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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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의 말이 심겨질 땅을 먼저 찾아라>
금실이 아주 좋은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몹시 가난했던 젊은 시절 그들의 식사는 늘 한조각의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사랑과 이해로 극복한 뒤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자 그들은 결혼 50주년에 금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부부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손님들이 돌아간 뒤 부부는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마주 앉았습니다. 하루 종일 손님을 맞이하느라 지쳐있었으므로 그들은 간단하게 구운 빵 한 조각에 잼을 발라 나누어 먹기로 했습니다.
“빵 한 조각을 앞에 두고 마주앉으니 가난했던 시절이 생각나는 구려.”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지난 50년 동안 늘 그래왔듯이 할머니에게 노릇노릇하고 고소한 빵의 껍질을 잘라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할머니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몹시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역시 당신은 오늘 같은 날에도 부드러운 빵 속은 당신이 먹고 내게는 딱딱한 빵 껍질을 주는군요. 50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난 날마다 당신이 내미는 빵 껍질을 먹어 왔어요. 그 동안 당신에게 늘 그것이 불만이었지만 섭섭한 마음을 애써 참아왔는데. 하지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에도 당신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당신은 내 기분이 어떨지 조금도 헤아릴 줄 모르는군요.”
할머니는 마침내 서러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할아버지는 몹시 놀란 듯 한동안 머뭇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할머니가 울음을 그친 뒤에야 할아버지는 더듬더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휴우! 난, 부인을 위한 마음밖에는 없었는데. 당신이 진작 이야기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난 몰랐소. 하지만 여보, 바삭바삭한 빵 껍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었소!”
할아버지는 50년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할머니에게 드렸고, 할머니도 가장 좋아하던 부분을 할아버지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서로 기분을 참아가면서.
내가 옳고 원하는 것이고 상대가 당연히 좋아할 것 같은 말이라고 해서 그 말이 상대에게 심겨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농부가 씨를 뿌릴 때 땅을 고르듯이 자신의 말이 떨어져 열매가 맺힐 수 있는 땅이 있는지 잘 찾아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을 참 잘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몰려드는 사람들과 조금 떨어지기 위해 방금 고기를 잡고 돌아온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에 앉아 가르치실 때에 그 배의 주인들은 예수님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조금 떨어지게 만들고 배의 주인들과는 하나가 되는 것을 택하신 것입니다.
아마 그물을 한 번 다시 쳐보라는 예수님의 말에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예수님께 받은 영광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말이 떨어질 공간을 스스로 만드신 것입니다.
자아는 쉽게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틈은 누군가로부터 영광을 받을 때 생깁니다. 예수님은 그 틈을 노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순종으로 많은 물고기가 잡히자 베드로는 깜짝 놀라고 두려운 마음까지 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완전히 낚아채신 것입니다. 그리고 발을 씻어주시며 또한 베드로의 마음을 넓히시고 결국 당신 말이라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점령하시는 방법은 처음엔 영광을 주고 그 다음엔 작은 순종을 통해 그 틈을 더 벌리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엄청난 것을 요구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 자아의 공간은 조금씩 점령당합니다.
사람의 변화를 지켜볼 때는 농사꾼과 같아야 합니다. 잘 자라지 않는다고 손으로 곡식을 당겨서는 안 됩니다. 자라는 것은 저절로 자라도록 내버려두어야 합니다. 다 자연의 순리가 있는 법입니다.
저는 일반대학 친구들에게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딸아이가 중학생인데도 미국 사립학교에 엄청난 돈을 들여가며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거의 부부가 버는 돈을 다 딸아이를 위해 투자해야 하는 형편입니다. 저라면 그러지 않겠다고 말했더니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씨를 뿌릴 땅이 없는데도 마구 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습니다. 일단 뿌려져서 잘 자랄 땅을 찾습니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맞는 말을 한다고 상대가 다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우선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상대가 지닐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합니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상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감해주고, 인정해주고, 받아주고, 높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뿌릴 말씀의 씨앗이 심길 공간이 마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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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5,1-11 :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예수님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회당에서 예수님을 쫓아내자 이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가르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복음 전파는 회당이라는 어느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어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 하신다.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절)하고 대답하였다. 즉 인간적인 경험, 지혜, 노력을 다 써 봤지만 기대하던 결과는 이 경우에는 헛수고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일생을 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 잡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오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그는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베드로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따랐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하였다. 고기 잡는 일에 그렇게 경력이 있고 능력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하였던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불결한 인간으로서 순결한 분을 감히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신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랜 경험 등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 커다란 체험을 하였듯이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더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항상 말씀이 강생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강생시키는 삶, 여기에서 근본적인 우리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안에 자녀로서의 기쁨과 구원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 안에 강생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위해 주님의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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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목숨을 구걸하려고 항소하지 말고 당당히 죽으라는 말을 아들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손수 만든 수의를 보내며 그것을 입고 마지막 길을 가라고 하였습니다.
천주교 신자에게 ‘복음’, 곧 ‘기쁜 소식’이란 무엇일까요? 사형을 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복음일까요? 아닙니다. 사형을 당해도 상관없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죽어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시니 돈 걱정, 병 걱정, 죽음 걱정 등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기만 하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에 시달리는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 주십니다. 멀쩡한 사위가 가정을 떠나 예수님만 따라다니니 장모 입장에서는 열병에 걸릴 만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인의 병을 고쳐 주시고 당신을 시중들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많은 병자들도 고쳐 주십니다. 당신은 모든 병을 치유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마귀들도 쫓아내십니다. 마귀들이 죄짓게 만들고 그 죄가 우리를 종살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또한 걱정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인간의 모든 죄는 용서받습니다. 그러니 과거의 죄와 상처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시려고 세상에 파견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살게 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보내셨다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가진 것을 다 잃어도, 생명까지 잃게 되어도 걱정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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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고기잡이 기적 -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루카 5,1-3)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이야기 앞에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와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그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이야기와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신 이야기가 있습니다.(루카 4,31-41)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장소는 시몬의 집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 여행을 떠나신 이야기가 있는데(루카 4,42-44), 전도 여행을 마치신 다음에는 다시 시몬의 집으로 가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부터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고,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그날에도 ‘시몬의 배’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시몬과 안드레아는 바로 옆에서 그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가르치셨을까?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라는 말씀을 주제로 설교를 하셨을 것입니다.) 어부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여러 번 들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예수님을 따를 준비를 했을 것이라고, 즉 그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이미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루카 5,4-5)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일을, 먹고사는 일의 고달픔을 상징하는 것으로, 또는 인생살이의 어려움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는 예수님 말씀은, 어부들을 부자로 만들어 주기 위한 말씀은 아니고, 인간의 인생에는 먹고사는 것 이상의 어떤 무엇이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7) 여기서 ‘깊은 데’는 물고기가 많은 곳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곳으로, 즉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는 인생보다 차원이 높은 새로운 인생으로 해석되고, 그래서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 말씀은, “지금보다 더 차원 높은 새로운 인생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됩니다. 시몬이 예수님 말씀에 순종한 것은, 이미 예수님의 설교를 여러 번 들었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6-11)
‘고기잡이 기적’을 통해서 어부들은 주님의 권능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라는 시몬의 말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떠나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도 아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이 말은 주님 앞에서 자기는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말이고, 동시에 먹고사는 일만 신경 쓰면서 살고 있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깨달았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 말에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주님을 따르고 싶다는 소망이 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스승님’에서 ‘주님’으로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고기잡이 기적’은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기 위한 특별한 시청각교육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만을 위한 비밀스러운 기적은 아닙니다. 호숫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군중이 그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큰데, 그들도 고기잡이 기적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가족들과 삯꾼들도 기적을 목격했습니다.(마르 1,20) 따라서 고기잡이 기적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가르침입니다.
“먹고 사는 것만 생각하다가 허무하게 끝나버릴 인생을 살 것인가? 더 ‘깊은 데’로 나아갈 것인가?”
(신앙생활은 현세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새로운 인생과 새로운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어부들이 예수님 덕분에 많은 물고기를 잡은 일은, 앞으로 그들이 사도로서(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하게 될 일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여기서는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사도들은 물속에서(‘죽음’에서) 물 밖으로(‘생명’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즉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살던 인생에서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인생으로 그들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그렇게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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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 찬미예수님
한 번쯤 허리 디스크를 앓고 있는 분들을 만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디스크란, 허리의 척추뼈와 척추뼈 사이를 이어주는 연골 구조물이 돌출되어, 통증을 유발하는 질환입니다. 이 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의 뼈를 단층 엑스레이로 찍으면 뼈가 제 기능을 못해 검게 변해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의학에서는 이것을 몇 번 몇 번 디스크가 '죽었다' 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걷거나 뛸 때 완충 작용을 해줘야하는 뼈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의사들은 “디스크는 완치가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잘 관리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뼈가 완충 작용을 못한다면 그 주변의 근육을 키워 충격 흡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또한 이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잘못된 자세로 시간이 흐르면 뼈가 약해지거나 틀어지듯 우리의 마음도 그릇된 자세 혹은 여러 상처들로 인해 검게 변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와중에 이 마음의 디스크는 서서히 죽어가고 사실 돌이키기 어려운 검은 마음으로 변해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쉽사리 되돌릴 수 없습니다. 이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관리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완충할 수 있는 가르침을 따름으로써 통증을 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제 마음의 통증을 느낄 때 마다, 혹은 저의 부족함을 상기할 때마다, 여러 한계를 갖고 있던 제자들을 “관리”해 주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말씀은 바로 '관리' 즉 인간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이에 행해야 할 우리의 합당한 자세를 상기하게끔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에게 먼저 다가가 많은 물고기를 잡는 기적을 베푸십니다. 당시의 어부라는 직업은 물고기를 말리고 소금에 절여 저장해 판매까지 하는, 전문성이 요구되는 비교적 안정적인 직업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거나 교육을 시킬 수 있는,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직업은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베드로의 성격은 매우 급했고 충동적이었으며 다혈질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역시 “천둥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다급하고 과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들이 자신들의 타고난 성격과 한계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적을 바라본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야기 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따뜻한 음성으로 그를 거두어 들이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관리자”이신 예수님의 분명한 역할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 비록 인간적인 한계가 있을지라도 그를 잘 관리받음으로써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앞으로 베드로는 잘못된 판단으로 예수님을 배반하기도 하고 실수도 저지르겠지만 주님의 사랑을 온 몸으로 흡수함으로써 구원의 소식을 전파하는 탄탄한 뼈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달래고 어루만지시며 이끄시는 분, 즉 탄탄한 뼈대가 되도록 관리를 해 주시는 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얼마나 좋은 뼈대가 될 수 있는지 모르고 인간의 한계에만 머물곤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예수님의 이끄심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우리 자신을 꾸준히 관리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각자의 소임을 맡기고 계시는 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 1독서의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예수님께 의지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를 선언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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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경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하느님의 지혜를 전하는 사도 바오로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달리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다른 동물보다 힘(완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동물은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그러한 동물까지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식과 지혜를 갖고, 추리와 판단, 분별을 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한다.
이처럼 이성의 힘이 크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보다도 지혜와 지식을 지닌 이들을 존경하고 부러워한다. 또한 보다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고자 무엇보다도 교육을 중시하고, 보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가르치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이 그처럼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지만 지혜와 지식을 통하여 행복에 이르지는 못한다. 지혜와 지식이 삶에 편안함과 안락함을 제공하긴 하지만, 사람 안에 있는 근본적인 공허함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떤 것으로도 공허함을 채울 수 없고, 행복을 얻을 수는 없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는 위대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사람의 지혜는 하느님 앞에서 지극히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지혜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지혜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심지어 하느님까지도 자신의 지혜로서 알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랑하며, 지혜에 얽매인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어리석은 자이다.
하느님 앞에서 세상의 지혜는 어리석고 헛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세상의 지혜로는 인간 자신을 알지도 못하고 더더욱 하느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을 제 꾀에 빠지게 하신다.
사도 바오로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하고 말한다. 이 말씀은 하느님 앞에서 인간은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보, 그래서 주면 주는 대로 받는 바보, 자신을 내세울 것도 없고, 내세우지도 못하는 바보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은총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바보가 오히려 지혜롭다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이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마태 18,3-4) 하고 말씀하셨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 바보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야만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지혜를 받으며,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오늘, 세상의 지혜에 목매달지 말고 세상의 지혜를 부러워하지 말자. 오히려 하느님 앞에서 어리석은 바보가 되자. 하느님께서 주시면 주시는 대로 받는 어린아이가 되자. 그리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받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자.
그때 모든 것이 다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며, 하느님의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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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트로성바오로수녀회 서울관구 전의이 수녀님]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서울대교구 조성풍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살아가면서 누군가 앞에서 말을 통해 무엇인가를 전해야 할 때마다 어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특히나 강론을 준비할 땐 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최선을 다해 강론을 하지만 혹시 무성의하게 보여지면 어쩌나, 또 강론의 내용에 상처받는 분이 계시면 어쩌나 등등의 고민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어려움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을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똑같이 강론을 듣고서도 각자에게 전해지는 부분은 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면,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알맞은 형태로 요리해주시리라’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강론을 멋지고 맛있는 요리라고 생각했던, 더 나아가 그런 요리를 내 힘만으로 장만하겠다는 욕심이 부담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론은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요리 재료일 뿐이고, 그 재료를 신앙인 각자에게 적합한 영양식으로 만들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소금 항아리’를 통해서도 말씀을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제자들을 부르시는 하느님께 제자들은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라고 아룁니다.
저도, 여러분도 이번 순교자 성월 동안은 ‘사람 낚는 행복한 어부’가 되도록 청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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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신앙여정>
루카복음 5장부터는 예수님의 공적인 가르침과 활동이 제한된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넓은 지평으로 펼쳐진다.
지금까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교적 회당에서 행해졌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겐네사렛(갈릴래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행하신 가르침과, 현직 어부들인 시몬과 그의 동료들로 하여금 엄청난 고기를 잡게 하신 자연이적(自然異蹟)을 통하여 첫 제자들을 얻으신 제자 소명 사화를 보도하고 있다.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회당에 국한되지 않고 이를 초월하는 이유는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예수께서 언제 어디에 계시던 그분이 계신 바로 그 시각과 그 장소가 구원성취의 시간이요 장소이기 때문이다.(루카 4,21)
예수께서 시몬과 그의 동료(안드레아, 야고보, 요한)들을 첫 제자로 삼으신 소명사화는 4복음서 모두에 보도되고 있다.(마태 4,18-22; 마르 1,16-20; 루가 5,1-11; 요한 1,35-42)
마르코의 소명사화가 이들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마태오가 이를 그대로 베꼈고, 루카는 마르코의 원전(原典)에 자연이적사화를 곁들였다.
요한은 제자소명사화의 구조와 내용을 전혀 다르게 편집하였고, 오늘 복음의 자연이적사화를 부활하신 예수의 발현사화와 연결시키고 있는 반면(요한 21,1-14), 루카는 이것을 제자소명사화에 연결시켰다. 루카의 이러한 의도는 일방적으로 예수님에 의해 불림을 받는 마르코에서와는 달리 시몬(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군중을 향한 가르침을 마치시고 갑자기 시몬을 향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다.(4절) 시몬이 예수께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응답하였다.(5절) 예수께서는 물풀만 걸려든 빈 그물을 씻고 있는 그들을 보시고 밤새 허탕을 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와 시몬은 서로 아는 사이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 회당을 나오셔서 곧바로 시몬의 집에 들러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일(4,38-39)로 두 사람은 아는 사이가 되었고, 시몬은 예수님의 능력에 이미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마르코는 그 순서를 다르게 보도하고 있는 바, 소명사화(1,16-20)가 먼저고 장모치유(1,29-31)는 그 다음이다. 이 점이 바로 마르코에 없는 자연이적 사화를 루카가 곁들인 이유이다.
천직(天職)이 어부였던 시몬이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 앞에 놀라움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시몬이 예수께 떠나달라면서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한다.(8절)
예수께서는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를 제자로 불러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신 것이다. 예수와의 직접적인 대면에서 베드로는 예수께 대한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경험한다. 이는 신비를 경험한 인간의 통상적인 태도이다.
매혹이 강하면 예수를 따를 것이고, 공포가 강하면 예수를 버릴 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고자 예수를 따라 나섰지만,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압박은 늘 베드로를 따라다닐 것이다. 신앙이란 아마 매혹과 공포의 양면적 여정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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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뭍에서 호수로, 호수에서 뭍으로>
루카 5,1-11 (고기잡이 기적-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고, 군중은 그분께 몰려들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놓은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거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그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 시몬의 동업자인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러하였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호수에서 뭍으로>
그날 새벽 뭍에다 배를 대고
빈 그물을 씻고 있었지
초췌한 모습 허탈한 마음으로
밤새 나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은
쌀쌀맞기 그지없던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러나 이내 곧
다시 맞닥뜨려야만 하는
삶의 터전이요
고통의 현장인
호수를 등지고서 말이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지만
무언가 해야만 했기에
그저 내 손가락들을
작은 물고기 삼아
그물코에 넣었다 뺐다
뜻 없는 짓을 반복하던
그날 새벽녘
낯선 그분이 다가와
배에 오르시어 말씀하셨지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줄 수 있겠소
뭍에서 호수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어
평소 같았으면 그랬겠지
나에게 모든 것과 같았던
너무나도 익숙한 호수였으니까
그러나 그날은 그렇지 않았어
나에게 아무 것도 아닌
너무나도 낯선 호수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그분의 까닭 모를 부탁을
흔쾌히는 아니지만
난 들어 주었어
뭍에서 호수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던 길
먹고 살기 위해서
좋으나 싫으나
어쩔 수 없이 가야했던 길
그때 내키지는 않았지만
낯선 그분과의 첫 만남을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멀리도 아니고 그저 조금만
청하는 낯선 그분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는 해주는 것이
사람으로서 예의였으니까
뭍에서 조금 떨어진
그곳에서 잠시 머물러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마치신
조금은 익숙해진 그분은
또 다른 부탁을 하셨지
깊은 데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시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뭍으로 돌아갈까
깊은 데로 나아갈까
이분이 뜻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왜 처음부터 깊은 데로
나가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뭍에서 호수로
이번에는 얕은 데서 깊은 곳으로
다음에 또 무엇이 있는 것일까
그러면 다음에는 그 무엇일까
뭍으로 돌아가는 것도
깊은 데로 나아가는 것도
이제 나에게 달려 있는데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짧은 순간 스치는
수많은 물음들을 가슴에 담고
난 한 걸음 더 나가고 있었던 거야
조금씩 그분에게 끌렸는지도 모르지
이미 시작했으니 되돌리기 싫었는지도 모르지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라 그저 가는지도 모르지
아무튼 깊은 데로 나아갔고
아무튼 그물을 내렸어
그분이 하라는 대로
그리고
지난 밤 처절한 패배의 현장에서
난 다시 일어났어
아니 난 다시 일으켜졌어
일어났기에 기뻤지만
일으켜졌기에 두려웠어
이제 낯설진 않지만 아직은 잘 모를
나를 일으키신 그분 앞에서
이제 그만 여기까지만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해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강박 속에
내가 떠날 용기가 나질 않아
나에게서 떠나시라고 읊조리던
참담한 패배를 딛고
두려운 승리를 품었던
그날 새벽녘
첫 만남의 낯섦을 녹이고
서서히 어느덧 날 사로잡은 그분은
마지막으로 청하셨어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제부터 사람을 낚으시오
그래 그랬던 거야
그분이 내게 원했던 것은 단 하나
물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명을 맡기시려고
조금씩 당신을 내어주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가지셨던 거야
조금씩 나를 드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사람을 낚으시오
옆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던지시오
뭍에서 조금 저어 호수로 나가시오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시간 동안
그분이 내게 건넨 애틋한 청을
마지막에서 처음으로
곰곰이 되새기면서
어슴푸레 밝아오는 동녘을 바라보며
그날 새벽 나는 다시 뭍에 올랐어
여느 때처럼 호수로 나갈 채비를 하려
잠시 오른 것이 아니야
다시는 호수에 나가지 않으리라
이제 뭍에 뼈를 묻으리라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해서
아직은 설은 다짐으로
아직은 뿌연 바람으로
그날 그렇게 뭍에 올랐어
그리고 난 지금도 뭍에 있어
그래서 난 지금도 뭍에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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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나에게만 주시는 통장….>
어제에 이어 두 번째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성경에 보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당신의 백성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은총이고,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눈을 몸 위쪽에 두셨습니다. “멀리 보고 높게 보라.”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세상에서 살면 허무하므로 영원을 바라보고 갈망하라.’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선택된 자유로운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고운님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선택된 영혼이기에 하느님의 은총도 요구할 자격도 있음을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고운님들에게 이 세상에서 욕심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입니다.”이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축복을 주시게 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시몬에게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 달라고 부탁하신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탁하신 다음…….” 왜요?
시몬이 밤새도록 수고했지만, 고기를 잡지 못해 몸과 마음이 피곤했을 것입니다(반대로 고기를 잡았다면 피곤하지 않았겠지요).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배를 빌리려고 하니, 미안한 생각이 드셨을 것입니다.그래서 “부탁한다.”라는 말을 쓰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몸과 마음이 피곤한 시몬이 “부탁한다.”라는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시험해본 것입니다. 즉 “부탁한다.”라는 말은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기도한다.”라는 말로 묵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믿음을 시험하는 단계라 은총(은사)이 없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부탁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말씀의 명령”입니다. 그리고 시몬이 말씀의 명령에 순명했을 때에 엄청난 일이 있었습니다. 153마리나 되는 고기를 잡게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은혜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예수님의 말씀으로 내려진 명령에 시몬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속삭이십니다. “바로 너에게만 말하는 것이다. 지금 나와 함께 가장 가깝게 있는 사람은 바로 너다. 잘 들어라! 이 말씀이 너에게 큰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제 고운님들도 주님께 내 삶의 첫 자리를 드렸으면 합니다. 고운님들이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주님은 고운님들의 수고와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기고 나의 희생과 고통을 주님께 맡기면 나만 아는 통장에 후한 이자를 쳐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통장은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아무리 써도 영(제로)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쓸수록 보내지는 신비의 통장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만 주시는 통장입니다. 주님과 나만 아는 통장입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내 생각이 아니라 주님의 생각이기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그래서 고운님들도 주님께서 주시는 나만의 통장을 간직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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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45)
♧♧ 시편 47편 4-5절….
"민족들을 우리 밑에, 겨레들을 우리 발아래 굴복 시키셨네. 우리에게 골라 주셨네. 우리 상속의 땅을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야곱의 자랑을. 셀라"
* 민족들을 우리 밑에, 겨레들을 우리 발아래 굴복 시키셨네...
‘민족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과는 대립되는 이방 민족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발아래 굴복시키셨다.’라는 것은 고대에 전쟁에서 승리한 이가 패배자의 목을 바로 밟던 관행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는 직접적으로 다윗에 의해 주변 민족들이 점령된 것을 가리키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됨으로 인해 메시아의 나라가 온 세상에 펼쳐지게 됨을 예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우리에게 골라 주셨네. 우리 상속의 땅을...
여기서 ‘땅...’은 일차적으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기로 약속했던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창세기 12장 1-7절. 참조)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장차 이 세상 마지막 날에 주님께 충실한 이들이 땅으로 상속받을 ‘하느님 나라’를 가리킵니다.(히브리서 11장 8-11절, 16절. 참조)
* 야곱의 자랑...
여기서 ‘야곱’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고 이 ‘야곱’은 구약의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지파 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주님께 충실한 이들(교회)을 가리킵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에게 주신 모든 땅은 당신께 충실한 이들의 영광과 은총인 것입니다.
♧♧ 시편 47편 6절….
"하느님께서 환호소리와 함께 오르신다. 주님께 나팔 소리와 함께 오르신다."
이 구절은...야훼 하느님께서 임금 중의 임금으로서 다스리시기 위해 그 왕좌에 올라가 앉으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느님의 계약 궤가 다윗 성에 위한 천막 안으로 들여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 불며 환호하며 큰 소리로 찬양했던 장면(사무엘 하권 6장 12-19절. 참조)을 배경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이...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강생하셨다가 이제 구원 사업을 마치시고 부활하셔서 다시 하늘로 올라 성부 하느님 우편에 앉으심을 예언한 말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 시편 47편 7절….
"노래하여라. 하느님께 노래하여라. 노래하여라. 우리 임금님께 노래하여라."
이처럼 4번 연속으로 반복된 노래(찬양)에로 가르치고 이끄심은, 마침내 하느님은 아무리 많은 찬양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위대하신 분임을 나타냄과 동시에 야훼 하느님을 자기 임금으로 삼은 이의 기쁨과 감사가 충만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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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며칠 전, 미사 후에 어떤 분이 제게 다가오셔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1년 동안 냉담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어제 어떤 분이 보내 주신 신부님의 묵상 글을 우연히 읽게 된 것입니다. 가슴을 꽝 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더는 냉담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제 글을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족한 글을 통해서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셨다는 말씀에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게 됩니다.
제게 특별한 글재주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주님께서 저의 묵상 글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분들 마음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정말로 대단하시고 위대하신 주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것을 통해서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부족하고 나약한 것은 그리 대단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하는 일에 주님을 초대할 수 있도록 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주님의 힘을 통해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결실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 다른 학년과 축구 시합을 하면 꼭 우리 반이 이겼습니다. 그래서 총장 배 축구 시합을 하면 늘 우승컵을 차지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반의 축구 대표들이 모두 축구 선수처럼 완벽하게 잘했기 때문이었을까요?
축구를 잘하지 못하는 친구도 있었지만, 정말로 축구를 잘하는 몇 명이 있었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습니다. 잘하지 못하는 친구 역시 우승의 기쁨을 맞이합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잡는 전문 어부가 밤새도록 허탕만 친 것입니다. 짜증이 나도 한참 났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셔서 군중들을 가르치시지요.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과 동료들은 전능하신 주님의 명에 따라 그물을 내렸고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어서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만 따르면 차고 넘칠 정도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전능하신 주님과 함께한다면 나 자신이 아무리 부족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승리의 기쁨을 맞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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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표를 바꿔야 할 때}
열등감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열등감을 없애기가 과연 쉬울까요? 사람들은 이 열등감을 무조건 없어져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심리학자 아델러는 열등감을 에너지라고 부릅니다.
즉, 열등감도 내게 좋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열등감을 지혜롭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목표’를 바꿔야 합니다. 열등감의 대상과 힘겨루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꿈의 날개 펼치기’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조준점이 바뀌면 힘을 다르게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부족하고 나약함 그 자체인 제자들이 완전히 변화되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던 목표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목표로 바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 목표가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 목표를 바꿔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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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큰 병이 생겨서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침묵 중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제 남편의 아내입니다. 아내로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누군가의 아내가 아닌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아이들을 잘 키웠습니다. 두 아이의 엄마가 아닌 당신은 누구입니까? 저는 학교 선생으로 30년간 아이들을 가르쳐왔습니다. 학생들 가르치는 선생이 아닌 당신은 누구입니까? 침묵 속에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나는 무엇인 ‘명사’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변화는 ‘동사’였습니다.”
한때 높은 직책에 있었던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에 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면 서운하게 생각합니다. 깊은 상처로 열등감에 젖어있는 사람은 지금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쁘게 살지 못합니다. 시인은 시를 쓸 때는 시인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누군가의 아빠이고, 마트의 손님입니다. 사제는 성사를 집전하고, 사제의 직무를 수행할 때는 사제이지만 누군가의 친구이고, 하느님 앞에 용서를 구하는 신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명사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병 환자는 깨끗해졌습니다. 소경은 보게 되었습니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되었습니다. 잡혀 온 여인은 돌을 맞지 않고 자유를 얻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은 치유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그 사람의 처지와 상황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영적인 능력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직업을 보지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깊은 내면을 보셨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마음에 있는 열정과 능력을 보았습니다. 비록 나약해서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지라도 한 번의 설교로 3,000명에게 세례를 줄 수 있는 영적인 힘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를 변화된 삶으로 초대합니다. ‘당신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입니다.
한때의 업적과 능력, 직책과 지위가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상처, 원망과 분노가 자신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변화된 나를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하고, 본당에서 사목했던 모습이 저였다면 신문을 만들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낯선 땅에서 적응하는 모습도 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쉬기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변화의 두 가지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 합당하게 살면서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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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영적 성장과 성숙-
얼마전 피정팀중 25여년전에 왔던 자매로부터 그때 저에게 들었다는 재미있는 예화가 지금도 생생하다며 아주 반가워했습니다. 저역시 잊지 못하는 ‘팬티와 팬티끈’의 예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나누며 함께 웃었습니다.
“팬티는 속에 입어서 보이지 않는다. 옛날에는 팬티에 고무줄을 넣어 입었다. 팬티천이 아무리 좋고 새것이라도 팬티끈이 헐거워지거나 끊어지면 못입는다. 반면 팬티천이 낡고 떨어저도 팬티끈만 튼튼하면 팬티는 끝까지 입을 수 있다. 바로 영혼이 팬티끈이라면 육신은 팬티천이다. 육신에 앞서 우선 영혼이 튼튼해야 한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 그리고 실천이다.”
여전히 지금도 공감하는 예화입니다. 수도원 가난한 뜨락의 달맞이꽃이 막바지에 도달한 듯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히 꽃피어내는 모습이 감동이라 시에 담았습니다.
-“시간 지나/꺾이고 잘리고 휘어져/볼품 없어도
마지막 순간까지/청초한/샛노란 하늘 사랑/꽃피어 내는
달맞이꽃!/감동이다/사랑은 저렇게 하는 거다
육신은/노쇠해가도/영혼은 여전히 빛난다”-
결코 허무한 무의미한 삶이 아닙니다. 살아있는한 육신의 성장은 멈추고 퇴화해도 영혼은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성장, 성숙해야 합니다. 이를 일컬어 영적성장, 영적성숙 또는 내적성장, 내적성숙이라 합니다. 꽃대는 노쇠해가도 여전히 청초한 하늘 사랑 꽃피어내는 달맞이꽃처럼, 영혼 역시 청초한 주님 사랑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꽃피어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이 참 신비합니다. 우연인 것 같지만 주님 섭리의 은총입니다. 먼저 은혜롭게도 시몬을 찾아 오신, 그 바쁜 와중에도 첫눈에 베드로의 됨됨이를 알아채신 주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예수님 친히 주도권을 쥐시고 베드로에게 접근하십니다. 군중에 대한 가르침이 끝나자 즉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주님과 베드로의 주고 받는 대화와 만남이 극적이요 감동적입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삶의 허무를 몸서리치도록 체험한 시몬의 즉각적인 순종이요, 그렇게 하자 시몬과 그 일행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이어지는 시몬의 고백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많은 사람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이런 것입니다. 거룩한 주님의 거울에 환히 드러나는 부끄러운 죄인으로서의 내 얼굴입니다. 아브라함(창세18,27)이 그랬고, 욥(욥42,6)이 그랬으며, 이사야(이사6,5)가 그러했습니다. 거룩한 주님을 만날 때 죄인으로 드러나는 나의 모습이요 저절로 회개입니다. 주님뿐 아니라 말없이도 죄인을 부끄럽게 하여 회개를 불러 일으키는 주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버림, 떠남, 따름의 예닮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대로 우리 삶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평생 주님을 따르는 여정이요 내적성장과 성숙의 여정입니다.
죽을 때까지 멈출수 없는 영적성장과 성숙의 여정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만나 자기를 버리고 떠나 따르는 예닮의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이자 의미이기도 합니다. 날로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는 즉 예수님을 닮아가는 영적성장과 성숙과 더불어 무지로부터의 해방이요 참나의 실현입니다.
저절로 콜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는 우리의 기도가 됩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아름답고 깊은 기도문인지요.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영적성장과 성숙의 지침서로 삼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기도문입니다. 영적성장과 성숙의 정점에 도달한 바오로 사도의 고백기도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매주 수요일 저녁기도중 오늘 기도문중 일부(콜로1,12-13)를 노래하기도 합니다. 평생 묵상하고 목표삼아야 할 기도문 전부를 인용합니다. 다음 청원기도와 감사로 이뤄진 기도문을 전부 외워서 내 기도문으로 바친다면 정말 은혜로울 것입니다.
-“저희가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또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기쁜 마음으로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저희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콜로1,9ㄴ-14)
얼마나 아름답고 깊고 은혜로운 고백기도인지요. 얼마나 존엄한 품위의 영적 인간인 우리들인지요. 우리의 평생공부, 평생과제가 무엇인지 단박 드러납니다. 위 기도문을 깊이 깨달아 그대로 믿고 기쁘게 감사하며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기도대로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데 결정적 도움이 되는 기도문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이미 아버지의 은총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음으로, 무지의 어둠, 어둠의 권세에서 벗어나, 빛의 나라, 아드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로 위 기도문을 깊이 깨달아 살게 하시며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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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버리고 떠나기>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면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 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을 때 떠나야 합니다. 영광까지 누리려한다면 욕심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을 하셨을까?
교황으로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짐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관저를 내 놓으셨다하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말씀대로 했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인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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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첫 제자들의 만남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선의 움직임을 바라봅니다.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셨다."(루카 5,3)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루카 5,4)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먼저 예수님은 군중을 대상으로 가르치십니다. 아마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포괄적이고 보편적으로 선포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모여든 이들의 다양한 연령대와 다채로운 신분, 저마다의 심연이 알아듣고 소화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군중을 대상으로 하시던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그물을 씻고 있던 어부들에게 눈길을 돌리십니다. 시선이 보편적 대상에서, 목적과 과정을 공유하는 보다 작은 그룹으로 옮아간 것입니다. 피곤에 젖은 그들은 어깨마저 쳐져 있습니다. 밤샘과 고된 노동에 시달린 채 아무 소득이 없이 새날을 맞은 빈손입니다. 묵묵히 그물을 손질하고는 있지만 저마다 염려와 불안, 실패와 좌절감으로 마음이 시끄러울 법하지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예수님이 권고는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그들에게 다소 어리둥절한 해법이었지만 어부들은 자기들의 현재를 이해하고 내미는 관심의 손길에 순종합니다. 함께 따라서 "그렇게 하자" 함께 기적을 체험하지요.
놀람과 두려움에 휩싸인 어부들 중 시몬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께 다가가 그분 "무릎 앞에" 몸을 던집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어부들에게로 옮아갔던 예수님의 시선이 이제는 한 개인에게 꽃힙니다. 큰 무대에서 전체를 비추던 조명이 한 그룹으로 모여지다가 한 사람을 클로즈업 하는 듯한 흐름이 보입니다. 이제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 말씀대로 깊은 데로 나아가 고기를 잡는 사이, 본인 자신의 깊은 데를 보아 버린 것 같습니다. 두서없이 죄인이라 고백하는 그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외침은 진솔한 자기 인식과 경외심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사실 원죄에 물든 우리 인간은 자기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갈수록 어둠과 죄악의 상처를 맞닥뜨릴 수밖에 없습니다. 적당히 세상과 손 잡고 눈 맞춰 살아가느라 아래로 아래로 밀어낸 자기의 또 다른 진실이 거기서 또아리를 틀고 빛을 기다리며 살아 꿈틀댑니다. 이를 발견한 시몬 베드로가 소스라쳐 주님을 밀쳐내려 하지만 이미 모든 걸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각자를 주의 깊게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우리에게 자기 어둠과 죄악을 파고들어 더 깊이 상처내고 헤집어 버리라고 종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심연에서 은총을 길어올려 고유한 소명을 찾아 주십니다. 그래서 죄인을 운운하고 뒷걸음질치면서 예수님을 밀쳐내려는 시몬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제자의 사명을 부여하시고 당신을 따르도록 하시지요.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1)
분명히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에는 직업과 가족, 재산은 물론 저마다 심저에 간직한 어둠과 죄악과 약함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는 예수님은 개의치 않으시는 그 깊은 곳의 실체들은 제대로 내버리지 않고 주섬주섬 챙겨들어 돌덩이처럼 가슴에 감추고는 버거워합니다. 자책하고 절망하며 자격을 운운해 자신과 부르신 분을 들볶기 일쑤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의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간청합니다. "영적 지혜, 깨달음, 하느님을 아는 지식, 선행, 힘, 강인함, 인내, 상속의 몫, 자격..." 등 그들을 위한 바오로의 기원은 온갖 영적 선익으로 충만하지요. 그리고 이 모든 축복의 근원은 마지막 구절에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콜로 1,13-14)
하느님 사랑을 배반한 첫 원조에게서 시작된 죄의 상처는 우리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로 자신을 몰아넣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위축되고 겁에 질려 시몬 베드로처럼 제가 떠나든지 당신이 떠나 달라고 맘에도 없는 푸념을 내뱉기도 하지만, 실은 우리에게 이처럼 죄의 용서와 속량이 진작에 주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화답송)
이 물러낼 수 없는 구원의 약속 덕분에 아무 공로 없이 하느님의 자녀, 주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릴 때 제대로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저마다의 "깊은 데"에서 어둠과 죄악의 상처에 매몰되어 주저앉지 말고,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콜로 1,12)해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5,10)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다정한 권고입니다. 이 말씀에 이어 각자에게 덧붙여 주시는 소명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며 주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이제부터 너는 ( )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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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를 받을 것이다.” (마태 5,5)
참 행복은 인간이 고통을 겪는 슬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에 잠긴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남기신 위로에 있다. 다시 한 번 부서지기 쉬운 조건, 가난하다는 조건, 곤경에 처한 조건, 자석처럼 하느님의 개입을 이끄는 무력함이라는 조건이 강조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오로지 인간을 위로하기 위해 개입하신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프랑스 철학자, 1906-1995)는 말한다. “눈물은 자신의 인간성이 무너지는 것을 마침내 받아들이는 존재가 마지막을 그것에 동의하는 표현이다.”
♣운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우리를 보호하던 또는 자신의 이미지와 오만을 방어하던 무기를 내려놓는 진실한 행동이다.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인정하는 데서 솟아나오는 눈물은 우리의 역사 안에 개입하시려는 하느님께 동의하는 것과 같다.
-「불완전한 나에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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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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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영산성당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5,11)
오늘 복음(루카5,1-11)은 고기잡이 기적과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평범한 사람들인 어부들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그들 삶에 깊숙이 개입하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5,4)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따르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기적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죄 많은 자신을 떠나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 곧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믿음이 있어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음이 있어야 예수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먼저 나의 믿음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의 믿음은?
나는 누구를 믿고 있고,
또 무엇을 믿고 있고,
왜 믿고 있는지?
그리고 진짜 믿는지?
단순한 질문이지만 이 질문에 답을 찾는 자만이 기적을 체험할 수 있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는 주님 말씀에 순종하고, 나의 온 지체가 주님을 따라나서는 복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지역에서 사제직과 봉헌 생활에 대한 성소가 부족합니다. 이는 흔히 공동체 안에 강렬한 사도적 열성이 없어서 의욕과 매력이 식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활기가 넘치는 곳은 어디서나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는 열정과 갈망, 곧 참다운 성소가 솟아날 것입니다."('복음의 기쁨', 107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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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잔말 말고>
"말씀대로ᆢ 버리고 따랐다."
고기낚던 사람을 사람낚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
우리 주님은 부르시고
그 본분대로 살게 하십니다.
부름받은 사람들이 티격태격하고
서로 다름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본분을 살 힘이 빠집니다.
참고 견디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대로
사람낚는 영혼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따르는 것은 순명입니다.
순명은 별것아닌 나를 별것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담고 있습니다.
투덜대던 어느날 예수님의 목소리
'잔말 말고 따라와 ~'
그 소리에 입닫고 따랐더니
글쎄 ~ 평화가 찾아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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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루카 4,39)
<의사들의 우두머리이신 예수님>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집에 들어오시어, 당신의 명령으로 우리 죄의 열병을 고쳐주시게 합시다. 우리는 누구나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성을 낼 때마다 열이 나지요. 죄악과 불륜이 다양한 만큼 열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사도들에게, 예수님을 우리에게 모시고 와서 우리 손을 잡으시게 해 달라고 간청합시다. 그분께서 그렇게 해 주시면 우리의 열이 곧바로 가십니다. 그분은 뛰어난 의사시오, 진정 의사들의 우두머리이십니다. 모세도 의사고 이사야도 의사고 모든 성인도 의사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의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히에로니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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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루카 5, 11)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내 것이 아닌
이 모든 것을
이제 내려놓습니다.
집착하고 있던
이 모든 것을 이제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모든 것을
버릴 때
깊은 데로 나갈
용기가 생깁니다.
이 모든 것을 버릴 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
치유가 일어나고
잃었던 자존감을
회복하게 됩니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준비하신 전혀
다른 세상을 우리가
만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사람들을 도와주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위해
사람이 되시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오신
예수님을 우리 일상으로
받아들입시다.
변화의 주체는
예수님이고
변화의 힘은
예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5, 10)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이제부터 주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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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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