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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eing(소명)과 doing(삶)의 해석과 교훈
1.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1:8절과 다니엘 3장, 창세기 28장, 요한복음 3장, 로마서 8:28절의 말씀을 예시하여 우리가 실천을 말할 때 기독교적인 친절과 무작위성인 세상 친절을 가르치고 있는 교회가 아닌 하나님 안에서 건강한 자아를 찾아가는 반추를 통한 실행을 먼저 이해해야 to do(무엇을 실천)하기에 앞서 to be(무엇이 되느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소명과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ractice with reflection)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언제나 세상적 저급한 욕망인 출세나 능력이었다면 사도행전의 세상에서 발견하려던 욕망이 저급하고 더러운 헛된 것으로 고백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말과 같이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내려놓고 성령을 영접하고 두려움 없이 소명을 감당할 때 성공주의(doing)에 빠져 조급하고 권위적인 목회에 빠져 나올 수 있다.
목회자는 성도의 영혼을 살찌우는데 초점을 두고 예수님의 삶(being)을 따라 진정한 기독교적 프락시스가 완성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목회자가 성공주의로 인한 두려움은 테크닉과 세상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목회자를 양성할 수밖에 없다.
로마서 8장28절은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doing이겠지만 진정한 의미는 계획되고 되지 않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기도하는 것이 being적 신앙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일이다.
궁극적으로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어떤 방해가 있어도 우리가 원하는 방식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시는 것이 being적 신앙이고 우리는 원하는 것을 주시겠지라고 간구하는 것은 doing적 신앙이다.
성숙된 길로 궁극적으로 가길 원하시고 고통, 아픔, 굴곡, 시련 등이 있어야 인생의 허물을 보고 인생의 비정함과 추악함을 봐야 하나님을 바라보고 목표를 하나님 계획안에 살기 원하는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주의 성품에 온전하게 갈 때까지 인도하시는 것이 신앙의 바른 자세이지 두려움을 성령으로 물리치려는 시도는 오만이다.
교회의 4가지 과제는 하나님과 교제의 관계(위), 재생산과 교제와 제자 훈련의 장소로 교회(옆)가 필요하다는 인식과 공동체는 옆을 보는 것에 끝나지 않고 세상(밖)으로 나가 전도와 선교에 힘쓴다면 영성이 점검되고 참 예배와 교제와 선교가 이루어지게 되어 자발적인 커뮤니티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나갈 수 있고 믿는 것이 아니라 믿게 해주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은혜 안에 있게 되면 율법에 묶이지 않기 때문에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해 신비적(doing) 기도가 아닌 절대 버리시지 않으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며 함께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행1:8, 단3:17~18)
2. being로 바라본 성경의 안목들
세상적 가치는 차별성이 없으면 맛을 모르게 한다.
성숙시킬 수 있는 메시지가 being으로 사람을 은혜로 세울 수 있다면 성장시킬 수 있는 동력은 doing으로 일이 목표가 되는 율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도행전 1장8절의 주제는 사람인데 억압적인 형태로 전도를 강조하게 되면 doing이다.
다니엘3장은 하나님의 능력(being)으로 건지심과 가능성이 없는 것을 공식으로 하게 되면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하게 되는 신비적 믿음을 교훈하고 있다.
1%의 기적이라도 제게 주십시오. 라고 간구하되 아버지의 뜻이 아닌 내속(하나님의 임재)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간구가 필요하다.
은혜 속에 위로를 주는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신비의 공간 인정)
반대로 욥의 친구는 인과응보라는 신비를 인정하지 않는 거짓된 신앙으로 호도하는 무리들이었다.
주님의 뜻이라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되돌릴 수 있도록 간구하는 성도가 진정한 신앙이다.
신앙적 원망과 다르게 불 신앙적 원망은 인간의 삶과 환경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원망하는 것이다.
욥이 했던 원망은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건강한 탄식을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납득이 안 되면 안 된다고 하나님께 외쳐야 한다.
그래야 기도가 깊어지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한나의 기도)
한나의 신앙은 고통을 기도의 자리로 가져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되고 고통 때문에 도망가면 하나님과 멀어진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한나가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지만 주님을 만나 확신으로 살았기 때문에 신실한 사무엘을 세워 이스라엘의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
그 동기는 고통과 원망이었고 하나님은 그것을 쓰셨다.
3. 인과율과 율법의 원칙
도전하지 않는 자는 형상 유지에 급급하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없다.
실패와 성공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 은혜이다.
모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잃을 게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sound(소리)가 아닌 voice(음성)을 들을 수 있다.
내가 살아가면서 이루고 싶은 일에 앞서 내 존재를 알게 해주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스스로 정체성과 성실성을 찾아 공동체 안에서 일치와 연합이라는 사명을 감당 할 수 있게 된다.
받을 만한 짖을 안 해도 주시는 선물인 은혜는 인과율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창세기 28장10~22절은 은혜는 인과율이 아니라 은혜의 하나님(being)을 알리고 율법의 틀(doing)을 깨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가 은총이라고 교훈을 주고 있다.
믿어서라는 율법에 메인 행위의 자랑보다 믿게 하셔서 구원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성도가 얼마나 될까 ?
축복(뒤)이 은혜지만 축복은 우리의 노력도 필요하기 때문에 믿음(앞)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인과율의 법칙을 깰 수 있는 안전장치로 주어진 것이다.
야곱의 사다리에서 오르락 내리락이라는 표현은 창세전부터 야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지만 인본주의적인 내리락 오르락이라는 표현은 은혜와 관계없이 처음 야곱에 임하시는 단편적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오르락 내리락하시며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늘 끝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은혜에 감사하는 야곱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것이 being으로 성경을 볼수 있는 지혜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로 단순하게 표현할 수 없는 은총이다.
예수님을 믿고도 세상에서 찌질 하게 사는 것만 본다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열심이신 하나님을 믿고 은혜에 승복하는 자세를 놓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응을 원하시다.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의 크기가 나의 그릇의 크기인 것이 인과율과 율법의 원칙을 깨고 나오는 진정한 being이다.
4. 결론
하나님은 특별한 장소에 계신 것이 아니다.
어떤 마음으로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원론적 사역을 버려야 모든 곳이 거룩한 하나님이 부르신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원론적 사고와 우선순위가 없으면 하나님의 거룩함이 깨진다는 두려움은 주님과 동행 할 수 있는 마음안의 열기를 식게 만드는 요소이다.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을 가둬두는 장소가 아니다.
특별한 목회자와 사역자에게 소명이 한정되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성도, 양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것이다. (출3:7)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소명이다.
사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다.
하나님의 가치는 하나님과 거룩한 삶에 동참할 때 오는 것이고 소유를 중심적 과제로 삼고 사는 저급한 세상의 욕망에서 벗어나 항복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했으면 침묵으로 음성(voice)을 듣기를 간구하고 순종의 길을 가는 것이 개혁주의생명신학이라는 결론이다.
<2> 소명
현대인들은 만족감이 다른 기현상속에 살고 있다.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즐겁지 않은 이유로 인해 종교적인 것에 심취하게 되고 초월적인 세계에 빠지게 되면 이단에 빠지는 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다.
신앙이나 초자연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섬김이 없는 성도와 헌신이 없는 교회는 찰나적이고 순간적인 욕망에 만족하려하기 때문에 전도가 되지 않고 있다.
혼자 있는 즐거움보다 단순하게 살고 내면의 시간을 다지며 십자가의 사건과 경험을 도구로 하여 다채로운 목회를 할 수 있게 된다.
신기루 같은 세상에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없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인생을 다들이고 후회 없는 소명을 감당하기를 간구해야 한다.
1. 나의 나 된 것
나의 나 된 것은 가지고 주님께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열정이며 은혜이다.
가슴을 열고 그릇을 넓혀 하나님 은혜의 소낙비를 담는 그릇으로 반응할 수 있다.
그릇을 넓히는 훈련을 감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안에서 가능하다.
나를 싫어하는 자리에 갈 수 있는 것은 나의 나됨을 알고 하나님과 동행함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품고 사는 성도로 살아가야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충실하신 것 같이 하나님 앞에 충실하다면 나의 약점이 치욕이 아니라 훈련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2. 터널의 끝에서
불 신앙적 원망은 터널 끝의 밝은 빛을 볼 수 없다.
주님의 뜻이라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되돌릴 수 있도록 간구한 욥과 같이 하나님께 순종하며 건강한 탄식을 하는 신앙적 원망을 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다.
고통을 기도자리고 가져가면 깊은 기도가 되고 공통 때문에 망가진 나를 발견하여 하나님이 들어 쓰신다.
부르심의 내용과 부르심의 본질이 같아야 한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기뻐해야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는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하며 실천 신학의 끝자리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빛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를 소원한다.
<3> 미션 처치
1. 초대 교회로의 초대
전통은 칼빈의 정신으로 이미 죽어있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메시지이고 전통주의는 살아있는 자들이 말하고 있는 죽은 이야기이며 낡은 사상으로 포장된 죽어있는 이야기이다.
새 시대는 전통주의를 깨고 전통으로 가는 정(전통), 반(진보), 합(제3의 길)이 요구되고 있다.
미션처치는 보냄을 받은 교회와 사도적 교회, 선교적 교회와 셀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독교 국교회나 기독교 제국은 17,18c의 타락한 교회의 형태로 지금 망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예표가 되고 있다.
being의 문제와 변화는 예배, 교제, 선교 공동체를 원하고 있다.
앞으로의 교회가 실천해야 하는 과제는 소명과 패러다임을 공동체에 안에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를 궁리해야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살아남는 다는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예배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존재이며 목적이 되어야 한다.
말씀과 설교를 통한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봉사와 참여를 통해 함께 경험하는 예배를 위한 깊은 영성적인 설교가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는 교제 공동체이다. (수평적)
설교를 줄이고 성경 나눔을 하며 사는 것(being)을 나눌 수 있는 교제를 하는 곳이다.
QT 중심의 정직한 설교와 함께 떡을 나누며 삶에서 건강하게 사는 것에 초점을 두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이다.
2. 현대 교회의 문제점
지금의 교회는 인간 중심의 즐거움을 위한 마케팅과 대중적 쇼맨십에 시로 잡혀 있다.
교제 중심의 수평적인 교회가 아닌 설교의 횟수와 예전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정직한 설교를 하지 못하고 있다.
새로운 교회, 넥스쳐 처치, 미래 목회 대 예언 등의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정, 반, 합을 통해 비판적 회의의 시선에서 정-반-합으로 변화 돼야 진정한 교회로 나갈 수 있다.
기독교 제국 교회의 틀을 벗어나 변혁을 추구하고 반으로 넘어갈 때 다시 돌아와 합과 정을 이루는 지혜로 내 교회가 아닌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선교적 모티브를 추구하는 것이 미션처치이며 세상을 향해 가는 거룩함이다.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세속 성을 향해 성육신적인 세속 성을 나타내는 거룩한 교회가 필요하다. (이중적 정책성 : 존 스타트)
내 교회가 아닌 지역 교회를 섬기며 주일의 개념이 아닌 진정한 예배 중심적 교회로 나가 주일이 아니면 찾을 수 없는 성도를 찾아가는 목회 철학으로 주님이 주신 양들을 양육해야 진정한 종이 될 수 있다.
이제 주일날 예배드리지 못하는 성도를 교인 취급하지 않는 교회는 돌 위에 돌 하나 없이 무너질 것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교회는 초대 교회의 사도 적이고 선 교적이며 성육신적으로 하나님이 늘 동행하시고 믿는 것(doing)이 아니라 믿게 하셔서(being) 값없는 은총을 받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소명에 합당한 신학생다움으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하기를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