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위계와 영적인 사람들』
*감각적인 사람
인간은 단순한 감정의 동물도 아니요, 정신적인 존재인 것만도 아니다. 인간은 존재이다. 인간을 존재로 본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다양한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오직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층위에서 삶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 의미 있거나 가치 있는 것 혹은 실재라고 할 만한 것은 오직 건강한 육체와 넓은 아파트와 주식이나 통장의 잔고뿐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이러한 것들 보다 좀 더 가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힘 혹은 권력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외적이고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좋은 것들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을 감각적인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감각적인 것들이 이들의 삶의 전부이기에 이런 사람을 만나면 오직 자신이 가진 감각적인 좋음을 자랑하기에 바쁘다. 이들은 상대방의 감정조차도 안중에 없다. 윤리적으로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이러한 사람들은 상대방을 물질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이들 앞에서 우리들의 존재감은 매우 희박하고 작아짐을 느낄 수 있다. 한 마디로 이들과의 대화는 곧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을 의미한다.
*심미적인 혹은 미학적인 사람
감각적인 층위보다 좀 더 상위층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감성적인 사람들이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미학적 지평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순히 감각적인 좋음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것, 아름다운 것을 추구한다는 차원에서 매우 감성적인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비싼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을 추구하고, 단순히 큰 집이 아니라 자신만의 아기자기한 집을 가지고자 한다. 옷을 살적에도 다만 비싼 옷을 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세련되고 자신의 기준에서 아름다운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는 옷을 사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이들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기분을 매우 중시 여긴다. 이들은 매우 직감적으로 행동하면서 상대방을 배려하고자 한다. 그래서 감각적인 사람들보다는 이들과의 만남이 한층 매력적이다. 감성적으로 보호받는 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직 심미적인 지평에서 살고 있는 사람은 아직 정신적인 자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차원에서 여전히 인간적인 무엇이 부족하다. 가령 ‘참된 삶의 의미’나 윤리 도덕적으로 선하고 정의로운 것 등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자 하면, 이들은 바로 한 발짝 물러서고 마는 것이다.
*정신적인 사람
정신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우선 정신적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고 생각한다는 것은 ‘올바른 것’ ‘합당한 것’ ‘정의로운 것’ ‘선하고 악한 것’ 등에 대해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납득한 만한 것과 올바른 것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를 철학적으로 말하면 ‘논리적 사유’와 ‘도덕적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사람들이 결과만을 중시한다면, 정신적인 사람들은 과정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과정을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자신이나 타인의 행위에 대해서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라는 질문을 통해서 그 ‘결과’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적인 활동의 기본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판단할 때 하나의 정신적인 활동이 완성을 이룬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산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감각적인 사람이나 감성적인 사람들이 삶의 특정한 측면만을 고려하고 있다면 정신적인 사람들은 삶을 전체적으로 고려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정신적이 사람들 중에서도 다만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다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정신적인 사람은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삶을 전체적으로’ 고찰하는 사람들이다.
*영적인 사람
단순히 정신적인 사람보다 한 층위 높은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이들은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정신적으로 산다는 것이 삶을 총체적으로 고찰하는 사람이라는 차원에서 이들은 영적인 삶을 갈망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게 된다. 영적이라는 것은 사실 서구적인 용어로 보자면 정신적인 것과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존재의 위계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단순히 정신적으로 사는 사람과 영적으로 사는 사람은 완전히 구별된다고 볼 수 있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감각적, 감성적, 논리적, 윤리적 모든 지평들이 단 하나의 지평에서 수렴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다양한 삶의 지평들이 사실은 하나의 ‘존재’의 다양한 나타남이라고 한다면, 영적으로 산다는 것은 다양화된 지평들을 다시 하나의 존재의 지평에 수렴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철학자들이 인간이 존재와의 근접성 속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은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을 ‘존재’로 고려한다는 것의 의미는 도가들이라면 이 어떤 것을 道의 관점 혹은 도 안에서 보아야 한다고 할 것이며, 유신론자라면 이 어떤 것을 神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그가 무엇을 보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그를 일종의 절대적인 지평에서 바라보고 고찰한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길가의 야생화도 영적인 시선 앞에서는 매우 소중하고 가치 있는 무엇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매우 기분 좋고 매력적인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 그들 앞에서는 나의 모든 가치가, 내가 알지 못하는 나만의 가치가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영적인 시선 앞에서만 내가 가진 최고의 가치가 모습을 드러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외면한 것들, 나의 숨겨진 비밀들이, 나의 존재감이 영적인 사람들 앞에서 비로소 빛을 발하고 나는 최고로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영적인 삶과 가치의 전도
이렇게 인간은 다양한 존재의 위계 속에서 살고 있다. 존재의 층위가 달라진다는 것은 마치 세계가 달라지는 것과 같고, 그래서 사람들은 동일한 시간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대화를 할 때에도 서로 다른 세계에 거닐면서 대화를 하는 것이다. 만일 순수하게 감각적인 사람과 매우 영적인 사람이 대화를 한다면 이는 동물과 인간이 혹은 인간과 천사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의 존재감이 상승한다는 것은 존재의 위계에서 한 단계 오른다는 것을 말한다. 존재의 위계가 상승하는 것은 다만 이해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마치 붉은 띠를 가진 태권도 선수가 검은 띠를 가지기 위해서는 혹독한 수련의 과정을 거치듯이, 삶을 통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삶의 지향점을 가지고 그곳에 이르기 위해서 노력하여야 한다. 그 방법론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고 차이가 있겠지만 동일한 하나의 공통점은 나의 존재가 어떤 특정한 지평에서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항상 보다 더 큰 세계로 나의 실존이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진정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들, 존재의 의미를 획득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들이다. 영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일상의 삶’이란 곧 ‘수행의 삶’이 된다. 먹고 마시고, 산책을 하고 공부를 하고, 기도하고 사랑하는 모든 일들이 곧 수행의 장이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다만 한층 들어 올려 진 새로운 존재의 지평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삶으로의 관문에 불과하다. 이렇게 영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치의 개념은 역설적이다. 즉 보다 세속적인 것들에 대해 가치와 의미를 상실할수록 보다 상위적인 존재의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수련에서 내가 보다 상승하였다는 것은 내가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의 가치가 상승하였다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작은 새 한 마리, 나무 한 그루에서 무언가 감동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세상 저편의 사람들의 불행과 행복이 나의 마음에 아픔과 기쁨을 줄 수 있다면 나는 그 만큼 영적으로 사는 사람인 것이다. 요컨대 영적으로 사는 사람이란 사랑으로 사는 사람, 모든 것을 사랑하고자 하는 선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특성이 그 사람의 삶과 존재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것이 곧 저편세계의 삶의 분위기이며, 여기에 완전한 가치의 전도가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