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사무엘상15장16~35절
제목 : 욕망의 소리에 하나님의 소리를 잊다
사울의 거듭된 실수에도, 다시 사울에게 사무엘을 보내셔서 그의 정체성(하나님이 세운 왕)을 일깨우고 그에게 아멜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사명을 주십니다(1~3절).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좋은 것 등을 전리품으로 가지고 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임하여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합니다.
사무엘은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만나려고 갔더니 사울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러 갔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 사울의 불순종을 지적하지만 사울은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사 시키고, 하나님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기었다고 변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의 지적에 변명으로 일관하던 사울은 마침내 잘못을 인정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두려움보다 왕위를 지키는 데 급급합니다.
1. 사무엘의 책망과 사울의 변명(16~23절)
1) 사무엘에게 간밤에 하나님께서 이른 말씀을 사울에게 말하겠다고합니다(16절)
“[1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가만히 계시옵소서 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을 왕에게 말하리이다 하니 그가 이르되 말씀하소서”
(1) 가만히 계시옵소서.
사무엘이 변명하고 있는 사울에게 변명을 중지시킵니다.
“가만히 계시옵소서”라는 말은 핑계와 변명, 책임 전가 등을 이제 그만두라는 의미로서, 사울의 구차한 변명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는 사무엘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하는 말입니다.
(2)간 밤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신 것.
이 계시는 사무엘이 철야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신 사울에 대한 말씀입니다(11절).
사울은 ① 사무엘의 제사권 침해 사건(13:9)에 이어,
②아말렉 진멸 사건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습니다(1절;13:8-14).
그러므로 하나님이 후회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은 근신하여
(1) 하나님께로부터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사죄받기 위하여,
(2) 그리고 무엇보다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진정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7:8, 9 ; 12:18)).
그러나 죄인이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있으니, 곧 당사자인 그 죄인의 회개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맙니다.
2) 하나님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17절)
“[17]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1)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것은 말할 나위 없이,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사를 보였을 때에 사울이 취했던 겸손한 행동을 가리킵니다(9:21).
*9:21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 권력이 생기자 사울은 점차 교만한 자가 되어,
결국은 비천한 자신을 들어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의 명령까지 무시하는
패역한 자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마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벧전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2)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 이것은
①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② 따라서 사울의 왕권은 이방의 그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실행할 의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3)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달된 여호와의 신성한 명령을 사울이 전적으로 이행치 아니했음을 지적합니다(18,19절)
“[18]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19]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하나님께서 사울 왕으로 하여금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라하였으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탈취하기에만 힘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사울의 주장(13, 15절)이 자기변명과 외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13,15 “[13]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른즉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하니[15]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길로 보내시며. - 여기서 '길'(데레크)은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주어 내보낸 원정의 길을 뜻합니다(Fay).
죄인 아말렉. -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아말렉' 족속들이 마땅히 진멸됐어야 할 합당한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말렉 족속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멸절시키려 했던 죄입니다(2절 ; 출 17:8-13).
*2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탈취물에게로 날아갔다'(flew on the spoil, KJV)란 뜻입니다.
이 말은 아말렉과의 전투시 사울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보고 그 마음에 탐심이 생겨, 그것을 간절하고도 열정적으로 원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남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4) 사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였다고하며 자기의 죄를 불인합니다(20절).
“[20]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아각을 끌어왔고. - 사울은 여기서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거역하고 '아각'을 살린 자신의 사악한 행위(8, 9절)를 전혀 죄로 인정치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명령을 좇아 아말렉과 전투를 수행했다는 그 실제적인 증거로서 아각을 사로잡아 왔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5) 자신의 범죄를 백성에게 전가 시키고 제사를 빙자합니다(21절)
“[21]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울은 15절에 이어 여기서도 아말렉의 짐승을 진멸치 않은 자신의 범죄를,
(1) 하나님의 제사를 빙자하고
(2) 또한 백성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정당화시키려 합니다(15절).
6)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났습니다(22절).
“[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번제와 다른 제사. - '번제'는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입니다(레 1:3-17).
그리고 '다른 제사'(제바힘)는 문자적으로 '희생'(sacrifices)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복수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번제 이외의 다른 희생 제사 모두를 가리킴이 분명합니다<레위기 서론, 7.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아말렉 족속에 대한 여호와의 진멸 명령(3절)을 무시한 채, '여호와께 제사드릴 목적으로'(15, 21절) 그 족속의 가장 좋고 기름진 짐승들을 끌고 왔노라고 극구 주장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명쾌히 선포한 이 말은,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외적 의식(儀式) 행위 보다는 내적 마음의 순종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금언적(金言的)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무엘 이후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여호와께 대한 합당한 예배의 기본 자세로 거듭 강조되었습니다.
즉 시편 기자(시 50:8-15 ; 51:16, 17), 이사야(사 1:11-17), 예레미야(렘 6:20), 호세아(호 6:6), 미가(6:6-8), 그리고 마침내 참 선지자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사실이 다시금 확증되고 강조되었습니다(마 9:13 ; 12:7).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을 다시 요약하면,
(1) 예배의 형식 보다는 예배자의 마음 자세가 더욱 중요하며
*전5:1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미6:8“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2) 영(靈)이신 하나님께서는 수양의 피나 기름보다 인간의 전인격적 마음을 원하시며(시 51:17 ; 요 4:24),
*시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3)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모든 신앙생활의 척도가 된다(딤후 3:16, 17)는 사실입니다.
*딤후3:16,17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이런 의미에서, 사실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사 행위는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제단 위에서 태우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인간이 그 행위 속에 담긴 참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즉 '제사(祭祀)'는 그림자요, '순종(順從)'은 실체인 것입니다.
벧렌베르겔 성경(Berlenberger Bible)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제사(sacrifices)로는 인간이 단지 비이성적인 짐승의 고기만을 드릴 뿐이지만, 순종(obedience)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뜻을 바친다.
그러므로 순종이야말로 이성적이고 영적인 제사인것이다".
한편, 그러나 사무엘의 이 말은 '제사(祭祀)'를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사무엘이 여기서 강조한 근본 사상은 제사 행위 속에는
반드시 순종의 자세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요,
제사로 말미암아 순종이 거부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말은, 후대의 예언자들이 합당한 예배에 앞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를 언급하면서 많이 사용하였습니다(사 1:10, 11, 13 ; 렘 7:21-26 ; 호 6:6 ; 암 5:21-24 ; 미 6:6-8 ; 막 12:28-34).
수양의 기름 - 여기서 '기름'(헬레브 ; fat)은 희생 제사에서 하나님께 태워지던 부분으로서, 주로 가축의 내장 및 꼬리 주위의 '기름진 부분'을 가리킵니다(레 3:16, 17 ; 7:23-25).
7)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23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1) 하나님이 사울왕을 버린 이유
①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습니다.
②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 숭배와 같습니다.
사신(邪神) 우상. - '사신'(아웬)은 '악함', '무가치함', '허탄한 것' 등의 의미로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우상'으로 번역되었습니다(사 66:3).
그리고 '우상'(테라핌)은 중근동 사람들이 가신(家神)으로 섬기던 우상의 한 종류인데(창 31:34, 35 ; 삿 17:5 ; 18:14),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점(占)을 치는 수단으로써 언급되기도 합니다(겔 21:21 ; 호 3:4). 창 31:19 주석.
(2) 하나님께서 왕을 벼렸다는 뜻은 사울의 왕권이 머지않아 끊어질
것을 시사해 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그 말씀을 제대로 좇았다면, 그의 왕권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세습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13:13).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한편 여기의 '버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척했던 그 행위를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단어입니다<8:7>.
2. 사울의 시인과 사무엘의 경고(24~31절)
1) 사울이 사무엘에게 범죄하였다고 시인합니다(24절)
“[24]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은 사무엘의 날카로은 심문과 경고에 의하여, 변명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꿔 이제 자신의 죄를 시인했지만, 그 시인한 죄조차도 불가피한 상황 하에서 백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 사울의 이 고백은 진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범죄하였는지를 깨닫고 뉘우치는 참된 회개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1) 계속 자신의 죄를 시인치 않고 변명과 책임 전가로만 일관하다가, 사무엘의 무서운 심판적 선언(22, 23절)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시인했기 때문이며,
(2) 또한 죄의 고백 후에, 다시금 백성들의 탓으로 그 죄의 원인을 책임 전가하는 말(24b)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나아가 고백 후에도 계속 왕위 보존과 왕권의 명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30절).
결국 라피데(C.V. Lapide)가 정의한 것처럼,
"사울의 이 고백은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통회의 회개가 아니라,
단지 왕국의 상실과 명예의 실추를 두려워한데서 비롯된
'입술의 회개'(repentance of the lips)였다".고 합니다.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 사울의 이 변명은 어느 정도 진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당시 사울의 왕권은 웬만큼 백성들로부터 인정은 되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실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30절).
바로 이 사실이 사울 왕권(王權)의 한계요,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고, 당신께로부터 비롯된 마음에 합당한 한 인물(다윗)을 따로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13:14 ; 행 13:22).
2) 사울이 사무엘에게 내 죄를 사하고 함께 돌아가서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청합니다(25절)
“[25]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 사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기서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 용서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사울이 아직까지도 그가 지은 죄의 근본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했음을 시사해 줍니다.
즉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인간에 대한 범죄 정도로 가볍게 인식했던 것입니다.
나와 함께 돌아가서. - 이때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길갈 제단이었을 것입니다(21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 사울의 이 '경배' 허락 요구는, 사울이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갖고자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울은 그때 사무엘이 집전하는 제사의 현장에 사무엘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이 왕으로서 건재함을 만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사무엘에게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요청했던 것입니다<30절>.
3) 사무엘이 함께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26절).
“[26]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울의 심중(心中)을 간파한 사무엘은 여기서 사울의 폐위된 왕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단호히 선포합니다.
여기에 왕권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참 선지자로서의 절개가 돋보입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왕직 박탈은 단순히 사무엘의 제사직 침해 사건(13:9)과
아말렉 왕과 짐승을 살려둔 사건(15:9)의 두 가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 두 가지 불복종 사건은 사울이 저지른 유일한 불복종 사건이 아니라, 많은 반역적이고 불순종적인 사건들 중 대표적인 경우라는 점입니다.
4)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졌습니다(27절).
“[27]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 사무엘의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 사울에게 그의 폐위가 확정적임을 행동으로 선언한 것입니다.
(2) 사울의 반복되는 간청 때문에 인정에 얽매여 혹시 범할지 모르는 인간적 실수를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겉옷 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 여기의 '겉옷'(메일)은 몸에 꽉 붙는 옷을 가리킵니다(R. Payne Smith).
따라서 사울이 붙잡았다는 것은 그가 사무엘에게 극렬히 매달렸음을 뜻합니다.
한편 사무엘의 옷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임이 분명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옷이 찢어지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사울의 왕권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sign)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찢어진지라'는 말이 28절의 '떼어서'(카라)란 말과 동일한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5) 사무엘이 사울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을 주셨다고 합니다(28절)
“[28]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 여기서 '이웃'(레아)은 비한정적인 용법으로 사용된 말로, 곧 '누구든 간에 어떤 다른 사람'(an other)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여기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곧 다윗을 가리킨다(13:14 ;행 13:22).
주셨나이다(네타나흐). - 여기서 이 단어는 13:14에서처럼, 다윗이 이미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과거 완료형의 의미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었습니다(16:3, 6-13).
6) 하나님은 결코 변개하지 않으십니다(29절)
“[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사무엘은 인간의 가변적(可變的) 속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불변적(不變的) 속성을 소개함으로써, 사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불가능함을 명확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 여기서 '변개(變改)하다'(나함)란 말은 11, 35절의 '후회하다'란 말과 같은 어근(語根)의 말입니다.
그렇지만 본절의 '변개함이 없다'란 말과 11, 35절의 '후회하셨다'라는 말은 상호 모순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1, 35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후회(변개)는 사람의 후회나 변개처럼 그 마음의 변덕이나 어떤 계획의 차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타락에 대해 가지는 신적 긍휼과 슬픔을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안드로포파도스)으로 묘사한 것 뿐이고(창 6:6, 7), 본절에 묘사된 바 '변개(후회)함이 없다'란 표현은 신적 섭리와 경륜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순수하게 신성론적(神性論的, 데오프레포스)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스스로 계시는 영원자 하나님께서는 과거.헌재.미래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출 3:14).
다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맞물려 역사가 진행될 때,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영고성쇠(榮枯盛衰)가 마치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 질 뿐이고, 또한 11, 35절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묘사했을 뿐입니다(R. Payne Smith). 민 23:19 주석 참조.
7) 사울이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화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합니다(30절)
“[30]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여기서 사울은, 하나님의 작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줄 것을 사무엘에게 다시금 요청합니다(25절).
이로써 사울은 죄의 고백(24절)이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실로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 6:5)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끌 왕의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내 백성의 장로들. - 여기서 '내 백성'이라는 말은 사울이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앞에서 갖는 언약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8)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합니다(31절)
“[31] 이에 사무엘이 돌이켜 사울을 따라가매 사울이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하나님의 최종적인 폐위(廢位) 선언으로 말미암아(23, 26절),
사울은 이후 왕위에는 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닌 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무엘은 함께 제단으로 가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자는 사울의 간절한 요청(25, 30절)을 들어주었습니다.
이처럼 사무엘이 사울의 요청을 허락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1)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차기 이스라엘 왕이 등극 할 때까지 그래도 사울을 통하여 외적인 정치 질서를 유지시켜 나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사울과 함께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죽임으로써, 사울이 완수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마저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3. 아각의 공개 처형과 사무엘의 슬픔(32~35절)
1) 사무엘이 아말렉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합니다(32절)
“[32] 사무엘이 이르되 너희는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내게로 끌어 오라 하였더니 아각이 즐거이 오며 이르되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하니라”
아각이 즐거이 오며.- 여기서 '즐거이'(마아단노트)는 '부드럽다', '느슨하다'의 의미를 갖는 아랍어 어근 '아단'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기쁘게', '기꺼이' 등의 뜻입니다.
아마도 아각은 자신이 왕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됨을 알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이 부지될 줄로 확신했던 것 같습니다.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 벌겟역(the Vulgate)과 수리아역(the Syriac)은 아각의 이 말을, 그가 자신의 죽을 운명을 예견하고 불안과 체념으로 한 말이라고 보고 "실로 죽음은 괴롭도다"란 의미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혹자는 아각의 이 말을, 죽음을 앞둔 전사로서의 영웅적 용기로 치켜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 아각의 이같은 언급은 자신이 사무엘에게 넘겨짐을 알고, 여호와의 선지자 특히 노년의 선지자는 적어도 왕이나 군대 보다는 긍휼이 풍성할 것이라는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공동번역)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습니다(Lange).
2) 사무엘이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33절)
“[33] 사무엘이 이르되 네 칼이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 여인 중 네 어미에게 자식이 없으리라 하고 그가 길갈에서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사무엘은 '동해 복수법'(Lex Talionis , 출 21:24, 25 ; 신 19:21)에 근거하여 아각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한편 사무엘의 말을 통해 우리는 아말렉 왕 아각(Agag)이 수많은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여인들에게 자식이 없게 한 것 같이'란 말은 아각이 여인들을 애기 못낳는 불임 여성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여인들의 자식을 죽여 없앴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 찍어 쪼개니라. -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제단 앞을 가리킵니다.
본서 저자가 여기서 특별히 이같은 언급을 한 까닭은, 사무엘의 아각 처형이 단순히 정치 보복적 차원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3절)에 근거하여 영적.공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선지자의 이같은 직접적인 형 집행은, 왕이 합당한 형 집행을 게을리하는 경우에 대신 이뤄졌었습니다(왕상 18:40).
찍어 쪼개니라 - '토막토막 끊다'(hew in pieces)란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아각의 비참한 죽음을 연상시켜 주는데, 우리는 이를 단순히 잔인하다고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포악한 아말렉 족속의 아각 왕에 의해 더욱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수많은 자들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그 백성을 파멸시키고자 끝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말렉 족속의 극한 죄악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이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 왕국의 우두머리에 대한 신적(神的) 공의의 정당한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3)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갑니다(34절).
“[34] 이에 사무엘은 라마로 가고 사울은 사울 기브아 자기의 집으로 올라가니라”
길갈에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아각의 처형을 마친 후,
사무엘과 사울은 각자의 거처로 각각 돌아갔습니다.
이 사실은 단순히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의미 외에,
이후 두 사람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한편 사무엘의 고향 '라마'(Ramah)에 대해서는 1:1주석을, 그리고 사울의 고향 '기브아'(Gibeah)에 대해서는 10:26 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4)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습니다(35절)
“[35]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 이 말은 사무엘과 사울이 죽기까지 서로 상면조차 아니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19:24),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 선지자로서의 권고를 더 이상 하지 않았음을 가리킵니다.
결국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신정(神政) 왕국의 왕으로 더 이상 인정치 아니했음을 뜻합니다.
즉 신정 왕국의 특성은 왕에 대한 선지자의 신의(神意)의 전달 및 권고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선지자가 왕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왕의 폐위'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었을 때는 그를 진정 위하는 마음으로, 사울의 왕직(王職) 수행을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계속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하자,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왕직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23, 26절).
따라서 이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폐위시켜버린 왕을 위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다만 사울을 위해 슬퍼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무엘이 사울의 회개를 위해 개인적으로는 계속 기도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 11절 및 29절 주석 참조.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제사보다 순종을 더 기뻐하십니다(22,23절).
사울은 거창한 제의로 자기 탐욕을 감추고 불의를 만회하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일 뿐입니다.
자기 편의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사울을 하나님도 버리십니다.
작은 순종으로 더 큰 불순종을 가리면서도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하지 마십시오.
2) 정의를 실현하십니다(32,33절).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통과할 때, 아말렉은 뒤에 처진 연약한 여인들과 아이들을 공격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의 악랄한 악행을 되갚아주십니다.
크든 작든 악행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버젓이 악을 행하고도 무탈한 인생은 없습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사울이 자신을 작은 자로 여길 때는 하나님께 청종했고, 하나님도 그런 그를 왕으로 삼으셨습니다(17절).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무능보다 교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2) 왕의 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인데 사울은 오히려 백성의 소리를 두려워합니다(18,19절).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보다 ‘제사를 위해 살려두자’(15절)는 백성의 소리,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는 분명한 명령 대신, 은밀한 욕망의 소리에 귀 기울입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왕의 사명에 실패하고 맙니다.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가장 크게 듣고 있습니까?
3) 사울의 불순종이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사무엘이 폭로하는데도 사울은 시인하지 않고 장황한 변명만 늘어놓습니다(20,21절).
한마디의 자백으로 충분한 일에 우리도 너무 현란하고 장황하게 변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4) 사울은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명예’가 실추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24~30절).
오히려 백성들 앞에서 구겨질 자신의 ‘체면’만 걱정합니다.
그래서 끝까지 사무엘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제사를 요청합니다.
사울은 아직도 그의 바람이 산산조각 난 것도, 그의 욕심이 추악하게 드러난 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