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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에스겔 33장21~33절
제목 : 말씀과 욕심의 저울질
예루살렘 함락 소식이 전해지기 전날 밤, 닫혔던 에스겔의 입이 다시 열립니다.
하나님은 살아남은 이들의 교만과 패악을 심판하실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1. 예루살렘 함락(21~22절)
1) 성의 함락 소식을 듣는 에스겔(21절)
[21]우리가 사로잡힌 지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에 예루살렘에서부터 도망하여 온 자가 내게 나아와 말하기를 그 성이 함락되었다 하였는데 ”
본절은 선지자 예언의 새로운 전환부가 된다는 것을 연대기적 사실로 입증해주는 핵심 부분입니다.
본장 이전에까지 언급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이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함락 뒤에 선지자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한 24:25-27의 내용이 본절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24:27의 예언대로 이제 선지자는 그 입을 열어 심판 뒤의 상황, 곧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될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게 됩니다.
열두째 해 열째 달 다섯째 날 - 예루살렘의 함락은 시드기야 왕 제 11년(B.C. 586) 4월의 일이었습니다(렘 39:2).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연대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8개월이 경과한 시기로서, 이렇듯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에스겔 선지자가 그 멸망 소식을 접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학자들과 사본들은 맛소라 사본의 '12년'을 '11년'의 오기로 봅니다(LXX, 수리아역, Hitzig, Doederlein, Hengstenberg, Eichrodt).
또한 이러한 견해는 약 1세기가 지난 후 에스라가 동료들과 함께 똑같은 길을 4개월 만에 여행했다는 기록에 유추하여 볼 때(스 7:9) 에스겔에게 소식을 알린 도망자의 여정이 약 6개월 정도라는 사실과도 합치하는 바,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소식을 접한 시기를 에스겔이 잘못 기고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예언이(24:25-27) 성취된 사실에 대한 특별한 소식을 접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2) 에스겔의 입을 열어주시는 여호와(22절)
“[22]그 도망한 자가 내게 나아오기 전날 저녁에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내 입을 여시더니 다음 아침 그 사람이 내게 나아올 그 때에 내 입이 열리기로 내가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본절에서 에스겔 선지자의 새로운 예언이 시작된 것은 결코 도망자의 소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 때문임을 시사합니다.
곧 본절에 사용된 동사 '임하여'(하예타 엘라), '여시더니'(이프타흐)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인 동작의 상태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쓰인 점과 '열리기로'(이파타흐)가 '열리다'란 뜻을 강조하기 위한 강세 반복어란 점에서 선지자는 이미 도망한 자가 소식을 전하기 이전 저녁부터 새로운 구원과 회복의 예언을 선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Schroder, Delitzsch).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 본 구절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가리킵니다(Michaelis, Delitzsch, Schroder).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 곧 1-20절의 예언과 23절 이후의 예언을 구분지어 주는 말로 23절 이후의 예언은 도망온 자로부터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들은 후에 선포된 것임을 암시합니다.
2. 돌이키지 않는 남은 백성(23~24절)
1) 말씀의 계시(23절)
“[23]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접한 선지자에게 처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적인 구원과 위로의 선포 이전에 형식적인 선민사상에 젖어있던 자들에 대한 책망의 형식으로 전개됩니다.
곧 본절에서 29절까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그 당에 남아있는 유다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2) 가나안의 소유를 주장하는 자들(24절)
“[24]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 - 여기서 '황무한'(헤라보트)은 원어 상 성읍이나 집들의 파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본 구절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철저하게 약탈되고 폐허가 되었기에(렘 33:10-13) 오히려 피신한 유다인들이 거주하는 곳보다 더 핍절한 환경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Schroder).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 본 구절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이라는 사실에 집착해 여전히 죄악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향에 남은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줍니다(요 8:33, 39).
곧 그들은 아브라함이 혼자의 몸으로도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 기업으로 얻은 바 되었으며 그 기업이 후손에게까지 약속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 죄악에 빠진 자신들의 상태를 망각하고 여전히 가나안 땅이 자신들에게 회복될 것이며 심지어는 그 회복의 조건이 아브라함 때와 비교해 숫적으로 많은 자신들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실로 그들은 외적 조건에만 매달려 문제의 본질, 곧 자신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남은 백성을 위한 심판 선언(25~29절)
1) 윤리적-제의적 타락(25~26절)
“[25]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고기를 피째 먹으며 너희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26]너희가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각기 이웃의 아내를 더럽히니 그 땅이 너희의 기업이 될까보냐 하고”
본절부터 29절까지 그들의 구체적인 죄목이 종교적, 도덕적 측면에 걸쳐 포괄적으로 나열됩니다.
고기를 피째 먹으며 -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 피는 곧 생명의 상징이었기에 일찍부터 이 피의 식용이 금지된 바 있습니다(창 9:4-6;레 17:12;19:26).
따라서 본 구절은 그들이 피를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은 채 고기를 먹음으로써 율법을 경시하고 어긴 사실을 가리키는 듯합니다(Delitzsch, Havernick).
또한 이는 하반절의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우상에게 바친 피 있는 제물의 식용을 언급한 것으로도 보여집니다(18:6, 11, 15;22:3).
이와 달리 혹자는 피가 곧 생명의 상징이란 점을 비유해 그들의 살인 행위를 책망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Hengstenberg).
그러나 '먹으며'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먹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며 살인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에 다시 언급되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 영역 성경 중 리빙 바이블(LB)은 본 구절을 '너희가 우상을 숭배하고 살인하니'(you worship idols, and murder)로 의역했습니다.
이 해석은 본 구절에 매우 적절합니다.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 여기서 '칼'은 일반적인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제한적인 '폭력'의 의미를 '가증한 일'은 우상 숭배를(18:12) 각각 가리킵니다(Delitzsch).
특별히 슈로더(Schroder)는 '가증한 일'(아시텐 토에바)이 여성형이란 점을 들어 이를 우상 숭배와 관련된 종교적 매음 행위로 보았습니다.
2) 심판선언(27~29절)
(1) 칼과 들짐승과 전염병에 넘겨져 죽게 될 것이다(27절)
“[27]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황무지에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뜨리고 들에 있는 자는 들짐승에게 넘겨 먹히게 하고 산성과 굴에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게 하리라 ”
26절에 언급된 범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을 시사합니다.
산성과 굴 - 여기서 '산성'(메차도트)은 험한 산 위에 있어서 공략하기 어려운 천연 요새를, '굴'(메아라)은 이스라엘 산지에 산재해 있어 은신하기에 알맞은 천연의 석회 동굴을 각각 가리킵니다(삼상 13:6).
하나님은 이런 곳에 피신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심판의 징벌이 임하게 하실 정도로 그 징벌을 철저하게 행하십니다.
(2) 이스라엘 땅은 아무도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28~29절)
“[28]내가 그 땅이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고 그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산들이 황폐하여 지나갈 사람이 없으리라 [29]내가 그들이 행한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그 땅을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면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하라”
황무지와 공포의 대상이 되게 하고 - '황무지와 놀라움'(쉐마마 우메솨마)이란 말은 둘 다 '황폐하게 되다', '폐허가 되다', '경악하게 하다'란 뜻의 어근 '솨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 본들은 본 구절을 '황폐시켜 폐허가 되게 하고'(NIV, RSV), '가장 황폐하게 만들고'(KJV)로 번역했습니다.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 여기서 '권능의 교만'(게온 우즈)은 곧 세속적인 힘에서 유래한 교만을 가리키는 바, 본 구절은 그러한 교만의 근거가 되는 그들의 모든 세상적 존립 기반을 없어지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7:24 주석 참조).
그 때에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 여기서 '알리라'(야다)는 단순한 지식적 앎이 아니라 전인격을 통한 체험적 깨달음으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그 맥을 같이합니다(골 1:10).
*골1:10 “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따라서 본 구절은 위에 언급된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길에서 떠나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합니다(11절).
4. 선지자를 대하는 태도(30~33절)
1) 에스겔을 찾아오는 자들(30절)
“[30]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
본절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루살렘 심판 예언이 성취됨으로써 고조될 선지자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이 진실한 회개와 구원의 소망 때문이 아닌 자신들의 이기적 정욕 충족을 위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 '담 곁에서'는 은밀하고 비밀한 것을, '집 문에서'는 공공연하게 공개되는 것을 각각 의미하는 말이며(Delitzsch, Schroder), '너에'(베카)은 '너에게 관해서'란 문자적 의미로,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과 그의 예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임을 가리킵니다(Schroder).
그리고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 예언의 성취 후 선지자의 존재가 백성들 간에 음으로 양으로 급속하게 부각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과 그에 대한 순종의 자세라기보다는 단지 새로운 소식에 대한 호기심의 총족을 위한 행동입니다(31절 주석 참조).
2)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자들(31~32절)
“[31]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32]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니. - 본 구절은 실천적 순종이 결여된 그들의 내적 자세를 암시하고 있는 바, 그들의 행동이 극히 위선되고 가증된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 여기서 '사랑'(아가빔)은 그들의 이기적 안목에서 자신들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것을 가리킵니다(Delitzsch, Schroder).
따라서 본 구절은 후반절과 관련하여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모든 좋은 말들이 기실은 자신들의 이기적 욕구 충족에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그들의 내적, 외적 상태의 양면성을 암시합니다(Gesenius, Havernick).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 구약 선지자들이 종종 그들의 예언을 노래로 읊어 전달한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삼상10:5;왕하 3:15).
'사랑의 노래를 하며'(케쉬르 아가빔)는 세속적 의미에서 노래로 즐거움을 주는 가수와 같다는 뜻입니다(Delitzsch, Hitzig).
이는 백성들이 에스겔의 예언을 회복과 구원의 전제로서 진지하게 경청한 것이 아니라 단지 좋은 음악을 듣듯이 피상적으로 들은 사실을 시사합니다.
즉 회개를 전제로 선포한 심판의 구원의 메시지 중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맞는 구원의 메시지만을 아무런 결단이나 돌이킴 없이 듣기 좋은 말로만 수용했습니다.
3) 심판을 초래하는 행함이 없는 들음(33절)
“[33]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그 말이 응하리니. - 백성들에게 선포한 심판이 성취될 것임을 말합니다.
곧 그들은 아직도 회개에 이르기 위한 내적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구원의 약속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묵상 Point
1) 가나안 이스라엘 백성의 착각
아브라함 한 사람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았다면, 이렇게 많은 남은 자들이 있으니 당연히 이 가나안 땅은 자신들의 기업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들이 유일하게 기댈 것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적인 후손이라는 점뿐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지 않았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소속이 아니다.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을 향하는 우리의 사랑 말고 그분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수 없는 자
가나안에 남겨진 이스라엘의 행태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아무 상관없음을 드러냈다.
율법을 어겼고, 이웃을 죽였고, 간음을 하였다.
해서는 안 될 짓만 골라했다.
하나님을 내놓고 업신여겼다.
그러고도 기업을 기대했다.
주께서는 기업이 아니라 심판을 준비하신다.
칼과 들짐승이 그들을 기다린다.
전염병이 덮칠 것이다.
산들이 황폐할 것이다.
그 땅이 황무지가 될 것이다.
여호와를 모르는 이들을 일깨우는 길은 이것밖에 없었다.
3)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온갖 죄악을 자행하면서도 그들은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였다.
열심히 듣고 배웠다.
하지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
말로는 사람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의만 좇았다.
그 입에는 찬양이 있었지만 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행하지 않았다.
심판을 당하고서야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예언자가 있었고, 그 말은 절대 무시에서는 안 되는 말씀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 가이드
말씀의 성찰이 없으면 나 중심으로 상황을 해석하게 된다.
예언이 실현되었다.
예고대로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하지만 실현된 예언 앞에서 예루살렘에 남은 백성이나 유배민들 모두 멸망의 이유와 의미를 깨닫지 못 한다.
참혹한 심판을 겪고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가려진 웅변. - 예루살렘 함락 소식에 3년 만에 입을 연다.
온갖 소음과 잡음이 말씀의 원음을 대신하고 있을 때 침묵이 말보다 더 큰 웅변일 때가 있다.
실현된 예언 앞에서 ‘애가와 재앙’(2:10)을 전하던 그의 입은 이제 권위를 입고 회복과 희망을 외치기 시작한다.
가증한 궤변. - 바벨론의 침공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폐허가 된 이유를 묻기보다는 수적 우위, 우월적 선민 지위를 내세우며 땅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그치지 않고 파렴치한 짓을 멈추지 않는 오만한 그들을 기다리는 건 장밋빛이 아닌 잿빛 미래다.
가장된 달변. - 유배민들은 ‘실현된 예언’앞에서 예언서를 찾는다.
에스겔을 유명인사로 치켜세우며 그의 말을 듣지만 듣고 싶은 말씀만 들으려 했다.
호감만 보일뿐 삶을 바꾸진 않았다.
입에 발린 말로 경건한 성도인 듯 가장하지도, 잘 듣는 척, 잘 믿는 척, 잘 사는척 포장하지도 말자.
어디에 있는지 보다 어디에 마음을 두는지가 중요하다.
남은 자들은 땅에만 관심을 두고 유배민들은 열매 없는 경건을 자랑한다.
하지만 실현된 예언 앞에서 요청되는 건 시대 통찰, 자기 성찰, 공감과 통감의 언어이지 가증한 말이나 미끈한 말이 아니다.
말씀의 실현 앞에서 말씀의 실천으로 응답하자.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21,22,33절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 침묵하시고, 오로지 말씀을 응하게 하심으로 답하십니다.
패역한 백성이 에스겔의 말을 듣지 않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의 입을 닫으시고(3:26),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을 함락하신 후에야 다시 입을 열어주십니다.
지금 우리도 선지자를 결박했던 패역한 이스라엘처럼 말씀을 감금시키고 제 목소리만 높인다면, 하나님은 경고의 말씀을 이루심으로 자신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보이실 것입니다.
지금 가정, 공동체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자기주장을 멈추고 함께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헤아려봅시다.
23-29절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의 교만과 패역을 심판하십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후에도, 그곳에 생존한 이들의 악행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우상 숭배와 제사법 위반(25절)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의를 저버리고, 칼(힘, 폭력)을 신봉하면서 무죄한 피를 흘리고 이웃의 아내를 욕보이는 가증한 일을 행한 것입니다(26절).
그러면서도 이 땅이 그들의 기업이 될 거라 여겼습니다(24절).
혹독한 심판의 자리에서조차 그들은 여전히 교만하고 패역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최종 심판을 선언하십니다(27,28절).
이스라엘의 패망사를 지켜보는 우리도 그들처럼 불의한 길을 걷고 있진 않은지, 그러면서도 천국이 보장된 것처럼 안이한 생각을 고수하고 있지 않은지 겸손하게 성찰해봅시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30-33절 이스라엘 백성은 들어야 할 말씀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을 구했습니다. ‘
한번 들어나 보자’는 절박하지 않은 마음으로, 또 욕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에스겔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를 무대의 배우처럼 여기고 그가 부를 사랑의 노래를 기대했습니다.
말씀 앞에서 그들은 구경꾼일 뿐이었습니다.
한마디 말씀도 놓치지 않고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제 이익을 저울질하면서 제 마음에 맞는 말씀을 고른 것입니다.
겸손히 듣지 않고, 그대로 행할 마음도 없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경고의 말씀을 이루심으로 그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대하는 우리 태도는 어떠합니까?
입술로는 ‘오직 말씀’이라고 외치면서 정작 마음에는 다른 동기로 말씀을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
공동체-주님의 말씀 앞에서 관객이 아니라 듣고 실천하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열방-도시화의 여파로 최근 중국의 대도시에 노숙자가 늘어나고 있다.
중국의 교회와 기독교 단체의 사역을 통해 노숙자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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