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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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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당 조정육의 그림과 인생 스크랩 7.목 마른 자에게 물을
무진당 추천 0 조회 172 09.07.02 23:13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7. 목 마른 자에게 물을

-“정병과 관음신앙” (2009.6.23-10.11: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전경

                                  <정병과 관음신앙 포스터 사진>

 

-내게 한 모금의 물을-

앙코르와트에 갔을 때였다.

자정이 넘어 시엠립 공항에 도착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훅하고 끼쳐왔다.

공항에는 느티나무만큼 큰 야자수와 열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이국적인 풍경이 매력적이었지만 그것을 감상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어서 빨리 시원한 호텔에 들어가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여행에서 맛봐야하는 더위에 비하면 그 날 밤의 더위쯤은 엄살에 불과했다.

아침에 호텔에서 나와 저녁에 다시 호텔에 돌아올 때까지 하루 종일 물만 마셨다.

구경하고 사진 찍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오로지 물만 마셨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덥다는 4월에 갔으니 태어나서 처음으로 40도가 넘는 뜨거움 속에 던져진 것이다.

아무리 한국 날씨가 덥다한들 캄보디아에 비할까. 캄보디아를 가마솥에 넣고 누군가 끊임없이 불을 지피는 것 같았다.

 확탕지옥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그 때 알았다.

사람에게 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물이 밥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우리 몸의 70%가 물이라는 사실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땀을 많이 흘리다보면 행여 탈수현상이 일어날까 봐 몸 스스로가 알아서 물을 찾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한 장소를 보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한 일은 물을 사는 일이었다.

물이 채워진 스티로폴 아이스박스에 각종 음료수와 물을 담아놓고 파는 노점상에서 물을 살 때면 신발도 신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예닐곱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은 땀을 질질 흘리면서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별로 필요도 없는 조잡한 물건들이었지만 물을 마시지 못하는 아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물을 사는 것이 미안해 아이가 내미는 물건을 사주곤 했다. 다음 날부터는 아예 호텔에서 출발할 때 물을 가득 채운 패트병을 서너개 씩 배낭 속에 넣고 나왔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캄보디아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더니 그 곳 아이들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온갖 질병에 시달린다는 내용이 나왔다. 한국 구호 단체에서 캄보디아의 마을을 돌며 우물을 파 주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오물이 가득찬 물만 떠다 먹던 마을에 맑은 물이 콸콸 쏟아지는 장면을 볼 때 마치 내가 그 마을에 있는 것처럼 감동적이었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정병과 관음신앙》전이다.

정병(淨甁)은 원래 인도에서 수행자들이 마실 물을 담던 수행도구의 하나였다. 물병인 것이다.

물병은 물병이되 오염된 물이 아니라 깨끗한 물을 담은 병이다.

그 물은 단순히 목마른 자의 목만 축여주는 물이 아니라 사람의 몸의 병을 치료해주고 마음의 병까지 치료해주는 물이다.

 

5세기 초에 관음보살이 버드나무가지와 맑은 물을 중생에게 받은 후, 그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는 내용이 실린『청관세음경(請觀世音經)』이 중국에 알려지면서, 정병은 수행자의 수행도구에서 부처님 전에 깨끗한 물을 바치는 공양구로 그 의미와 기능이 확장되었다. 그러니까 정병은 관세음보살의 지물이자 상징인 셈이다. 지물(持物)은 부처, 보살, 신중상이 권능과 지혜를 드러내기 위해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이다.

 

이를테면 관음보살은 정병을, 지장보살은 석장과 여의주를, 문수보살은 경책을 지물로 들고 있다. 사천왕도 역시 지물을 들고 있는데 동방지국천왕은 칼을, 남방 증장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은 용과 보주를 들고 있고 북방 다문천왕은 탑을 들고 있다. 지물은 지물을 들고 있는 불보살의 서원과 깨달음을 상징한다. 다시 말하면 지물을 들고 있는 분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신분증임과 동시에 그 분의 역할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통도사에 전시되었던 <수월관음도>를 비롯한 수많은 관세음보살상이 정병과 버드나무가지를 든 모습으로 형상화된 것은, 중생 구제를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는 관세음보살의 원력과도 통한다. 우리나라에서 관음신앙은 지장신앙과 더불어 가장 널리 호응을 얻었던 신앙이다. 그 말은 관세음보살상 못지 않게 정병이 들어간 그림과 조형물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해서 각 대학 박물관이나 사설미술관 소장품 중에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작품이 정병이다.(지난 번에 다녀온 호림박물관과 이대박물관에도 역시 정병이 전시되어 있었다)

관세음보살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정병을 이번 기회에 살펴보도록 하자.

 

 

                                                         (전시장 사진)

-정병과 관음신앙-

정병은 부처님께 바칠 물을 담는 병인데, 일반적인 병의 형태와는 달리 물을 담는 주구(注口)와 물을 따르는 첨대(尖臺)로 이루어진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고려시대 때 청자와 청동으로 만든 수많은 정병이 제작되어 불교 의식에 사용되었는데, 고려 시대 이전에도 관세음보살이 한 손에 정병을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금동관세음보살입상>, 20.7cm, 6-7세기, 국립중앙박물관, 국보127호 

                                         <십일면관세음보살>, 통일신라 751년, 석굴암, 높이244cm, 국보제24호 

                                        <금동관세음보살입상>. 18.1cm, 삼성미술관리움, 보물927호

고려불화에서는 관음보살 옆에 버드나무 가지를 꽂은 정병이 놓여 있는 <수월관음도>가 많이 그려졌다. 보타락가산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관음보살이 투명한 사라를 입고 금강보석위에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다. 관음보살 앞에는 법을 구하는 선재동자가 두 손을 합장한 채 서 있고, 주변에는 한 쌍의 푸른 청죽을 배경으로 온갖 보배로운 꽃과 산호초가 풍성하게 장식되어 있다. 관음보살을 직접 그린 <수월관음도>에서 정병은 관음을 상징하는 한 부분으로 그다지 크게 강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병의 형태를 알 수 있도록 버드나무를 꽂은 모습으로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왼쪽)<수월관음>, 견본채색, 227.9×125.8cm, 일본 대덕사 소장    (오른쪽) 대덕사수월관음 정병부분

                                <수월관음도 정병 부분>, 고려 1310년, 견본채색, 430cm×254cm 일본 가가미진자(鏡神社) 소장

 

정병은 특히 고려시대에 많이 제작되었는데 주구와 첨대를 다 갖춘 것과, 주구는 없고 대롱같은 첨대만으로 이루어진 두 가지 형식이 동시에 만들어졌다. 주구가 없을 경우 주구가 달려있어야 할 정병의 어깨 부분에는 빨대를 꽂을 정도의 크기로 구멍이 뚫려 있다.

                                 

 

<정병>, 고려, 높이 37.2cm,국립전주박물관            <청자연꽃새김무늬정병>, 국보19호, 높이 24.6cm,평양조선중앙력사박물관,

청동정병 중에서도 이번 전시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작품은 <청동물가풍경무늬정병>이다. 표면에 푸르스름한 청동 녹이 뒤덮여 있는 이 작품은 주구와 첨대가 완전하게 갖춰져 있는데 주구 뚜껑과 병목 윗부분을 덮은 은제 장식에는 금도금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정병의 몸체는 입사(入絲)기법을 이용해 앞뒤로 버드나무가 심어진 물가풍경을 대칭되게 배치하고 그곳에 배 탄 사람, ?시꾼, 오리, 날아가는 새를 갈대와 함께 묘사하였다. 고려인들은 이런 ‘포류수금문(蒲柳水禽文)’을 매우 좋아한 듯 청동 정병은 물론 청자 정병과 대접에도 시문하고 있다.

 

그러나 정병에 버드나무를 그려 넣었다는 것이 단지 고려인들이 포류수금문을 좋아했다는 취향만을 반영한 걸까? 혹시 관음보살의 지물로 정병에 버드나무를 꽂아두었던 의미를 문양으로 그려 넣은 것은 아니었을까? 

 

        <청동물가풍경무늬정병>의 앞면과 뒷면 ,고려12세기, 높이 37.5cm, 국보 92호, 국립중앙박물관       

                                                                <청동물가풍경무늬정병) 세부

 

  

                                          <청동물가풍경무늬정병>과 세부,고려12세기, 높이35.0cm, 국립중앙박물관   

 (왼쪽)<청자양각물가풍경무늬정병>, 높이 34.2cm, 12세기중엽,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청자상감물가풍경무늬정병>,높이37.0cm,12세기중엽, 간송미술관

 

     

 (왼쪽)<청자상감포류수금문 기사명대접>, 입지름19.1cm,13세기후반, 호암미술관

 (오른쪽)<청자상감포류수금문판>, 14.9-20.4cm,12세기중엽, 일본 개인

 

정병은 청동이든 청자든 재질에 상관없이 정병의 몸체에 문양을 전혀 넣지 않거나 혹은 포류수금문을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일본 야마토문화관에 소장된 <청자구룡정병>은 주구와 첨대를 포함한 몸체의 상체부분에 아홉 마리의 용머리를 장식했고 몸체 아랫 부분에는 파도 속에서 꿈틀거리는 용의 몸을 상형하고 있다.

 

불교에서 용은 천왕팔부중의 하나로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법당의 어칸(전면 중앙 칸) 기둥머리의 양쪽과 계단 소맷돌에 용을 장식해놓는 이유도, 법당 처마 밑 앞쪽에 용머리를 장식하고 뒤쪽에 용꼬리를 장식하는 이유도 법당을 사바세계에서 극락정토로 가는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보기 때문이다. 즉 법당은 고해의 바다인 이 곳 사바세계에서 ‘진리를 깨달은 지혜’인 ‘반야(般若)’ 세계로 가는 배인데 그 배가 바로 용이 이끄는 ‘반야용선’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용은 불교와 관련된 그림과 조각, 공예품에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청자구룡정병>이 용의 형상으로 제작되었다면 <청동은입사용무늬정병>은 몸 전체에 용을 시문한 예라 하겠다.  

 (왼쪽) <청자구룡정병>, 고려 12세기 전반, 높이33.5cm,, 일본대화문화관

 (오른쪽) <청동은입사용무늬정병>, 고려 13세기, 40.7cm, 경상남도 문화재102호, 통도사성보박물관

 

이밖에도 이번 전시회에서 눈여겨볼만한 작품은 호신용으로 지니고 다닌 보살상과 경상이다.

<몸에 지니는 작은 보살>은 그야말로 품안에 지니고 다닐만큼 앙증맞다. 경상(鏡像)은 거울 앞면에 선각으로 불교적인 여러 상을 그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작은 구멍을 뚫어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특정한 장소에 걸어두고 예배용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두 작품 모두 윤왕좌(輪王坐: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오른팔을 세운 다리 위에 두며, 왼쪽다리는 결가부좌 상태로 두고 왼 손을 그 뒤로 짚는 것)를 한 수월보살을 주로 새겼다는데 관음신앙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경상의 전통은 지금도 절에서 나눠주는 카드 크기만한 호신용 경상으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왼쪽) <몸에 지니는 작은 보살>, 고려, 높이2.7cm, 국립중앙박물관

(중앙) <관음보살무늬경상>, 길이40cm, 고려,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 보림사에서 최근에 제작한 호신용 관음보살판

 

<정병과 관음신앙>전을 보고 불교미술실을 들른 다음 마지막으로 <파라오와 미라>전을 감상했다.

방학을 겨냥해서 기획한 듯한 <파라오와 미라>전은 서울 시내 곳곳에 포스터가 걸려 홍보된 것처럼 당당하게 특별전시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정병과 관음신앙>전은 겨우 3층 백자실 한 칸을 치우고 꾸며놓은 데다 포스터도 작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전시회가 열리는 지 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각 박물관마다 빠지지 않고 놓여있는 것이 정병이고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인데 전시회를 하면서 도록조차 발간되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면 정병쯤은 당연히 알아야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파라오와 미라>전을 준비하면서 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파라오와 미라>전 포스터와 <정병과 관음신앙>전의 포스터 

 

작은 팜프렛에 적힌 것처럼 이번 전시회는 ‘고려시대 금속기와 도자기 정병을 한자리에서 보여주는 첫 번째 전시라는 점에서’ 결코 가볍지 않은 전시회다. 그래서 ‘공예적인 특징과 종교적인 성격을 규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전시회였다.

 

우울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 와 글을 준비하면서 정병에 관련된 책을 이 책 저 책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마침 지금의 나의 우울한 심정을 정확하게 반영한 듯한 작품을 발견했다. 조선 후기에 그린 <흥국사 대웅전 백의관음벽화>였다. 흰색 사라를 입고 반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관세음보살은 도상학적으로 보면 고려시대의 <수월관음도>의 전통 위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흥국사 대웅전 백의관음벽화>와 세부, 조선후기, 지본채색, 397-277.5cm,

 

그런데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와 비교해서 그 느낌이 어찌 이리 다를 수 있을까. 도를 구하러 온 선재동자(아니 선재아가씨)의 존재를 아는 지 모르는 지 관음보살은 먼 산 바라보듯 하고 앉아 있다. 아무리 합장을 하고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초조해진 선재아가씨가 절박한 심정으로 관세음보살을 향해 팔을 뻗고 있다. 그 모습이 곧 떨어질 듯이 위태로워 보인다.

 

오랫동안 도를 구하러 온 사람이 없어서 관세음보살님이 지친 것일까.

아니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으로 통하기 때문에 선재아가씨의 호소를 듣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

관세음보살님은 결코 지치는 분이 아니다.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수많은 중생들의 고통과 괴로움을 들어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이다. 같은 관세음보살을 그려도 고려시대에는 보살과 동자와 꽃과 새가 한 몸인 듯 완벽한 조화를 이룬 작품을 완성했다. 그것도 한 두 작품이 아니라 전체 고려불화의 평균 수준이 그러하다.

 

그런데 불교가 쇠퇴하고 핍박받은 조선시대에는 아무리 중생이 다급하게 소리쳐도 관세음보살님조차도 어쩌지 못하고 넋놓고 앉아 있는 모습의 작품이 제작되었다. 물론 조선시대의 모든 불화가 전부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정확하게 그 시대를 반영한다. 예술가는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신의 작품 속에 그 시대를 담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에는 어떤 관세음보살도가 그려질까.

정병 속의 물 한 모금으로 육신의 병을 치료하고 마음의 병까지 치유해주는 관세음보살은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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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03 17:52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_()_

  • 09.07.03 20:08

    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 09.07.04 07:29

    관세음보살()

  • 09.07.06 17:50

    관음보살대의왕 감로병중법수향 쇄탁마운생서기 소제열뇌획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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