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고백
마가복음 8장 27-29절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말하더라는 것으로 대답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후에 사흘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갑자기 반기를 든 것이다. 즉 죽으시면 안된다는 말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 마태복음 16장 22-23절에서는 좀더 상세한 항변 내용이 나온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베드로가 한 순간 하나님의 일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하므로, 사탄(검사)이 베드로를 기소하려고 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보호하려고 사탄을 물리치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꾸짖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므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는 닭이 세번 울 때까지 예수를 세번 부인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세번 부인한 베드로는 마태복음 26장 75절에서『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그러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찾아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임무를 맡기셨다.
요한복음 13장 36-38절『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대화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하셨다. 『깊은데 그물을 던져라』말씀하셔서 밤새도록 물고기 한마리 잡지 못했던 베드로에게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게 하셨으며, 장모의 열병이 즉시 떠나가게 하셨다. 성경에서 베드로처럼 많은 기적을 경험한 자도 없었다. 베드로는『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고, 풍랑치는 바다 위를 걸었던 베드로였다.『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고백한 것도 인간적으로 보면 상당한 결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붙잡혀서 십자가에 섰을 때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시체가 되어버렸다. 이 세상에 버림 당한 예수가 된 것이다. 모든 인간들이 세상으로 부터 버림당한 예수를 따를 수 있겠는가? 예수믿는 것 때문에 핍박과 환란이 오고 불이익이 온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처절한 것이었다. 백성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왕으로 세울 것을 생각했다.
회개하지 않은 자도 말씀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회개하지 않은 자가 기적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회개한 자는 기적 자체를 추구하지 않는다. 사도바울은『내가 못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다. 회개하는 자는 이 세상의 것을 원하지 않으며, 이세상에서 축복도 바라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다면 어떻게 세상에서 축복을 바랄 수가 있겠는가?
베드로는 믿는다고 하는 자들의 대표성을 나타낸다.『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세례는 구원인데,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한다. 전에 마음대로 살다가 그런 생활을 개선하면 거듭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베드로의 결심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생명, 이게 은혜와 새 언약이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증거다.『기도해야 하는데, 새벽기도 가야만 하는데, 전도해야 하는데』이렇게 사로 잡혀있는 것이 율법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에 사로 잡혀있는 것이 종교행위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루터의 당시 기독교와 많이 달라졌다.『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 말할 때는 루터 당시는 목숨을 건 기독교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많은 교회가 세상과 연합되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회개하는 자는 세상의 성공과 실패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이 오직 예수만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런 상한 심령이 되지 않으면 회개한 자가 아닐 것이다.『그냥 예수를 믿어볼까? 예수를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지?』 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그것은 육신적 자아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세번 부인한 베드로의 이야기다.
아무리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도 육에 있는 자는 바뀌지 않는다. 베드로는 단 하나, 예수님이 죽는다는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대신 죽으러 왔다』는 말이 이해되지 못했다. 제자들은 예수를 왕 같은 분으로 생각하는데, 희생양으로 죽게된다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삼년 동안 부활에 대해서 질문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이게 육신이다.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에 들여보내도 열정탐꾼은 들어가면 죽는다고 말했고, 모든 백성들은 다 그 말을 믿고 통곡했다. 예수님이 죽고 삼일만에 부활한다는 말을 제사장들도 다 듣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은 기억조차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육신 아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기 전에는 모두가 육신인 것이다.
회개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지은 죄를 기억하고 모두 열거하여 아뢰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나 때문에 죽은 것을 깨닫게 되는 것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의 죽으신 고통이 내 죄만큼의 고통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죽으심과 연합되는 길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 만이 회개다. 세상을 덜 사랑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우리 또한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이 회개의 시작이다.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은 애굽을 나온 것이다. 홍해바다는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광야는 내가 세상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거듭나게 하신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지 않은 회개는 가짜 회개다. 회개없이 믿는다고 하는 믿음도 다 가짜라고 할 수 있다. 회개없는 변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회개없으면 부모로부터 받은 생명, 가문의 기질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잠깐만 조정될 뿐이다. 십자가에 반응하는 자는 없다. 육신은 십자가에 반응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결국 육신은 회개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육신은 내 생활, 내 습관을 바꾸지 않는다.